종교는 문명에 공헌하였는가?

저는 신입니다. 왠줄 아십니까?

제 일기장에 제가 신이라고 적혀있기 때문입니다. 제 말은 진리입니다. 왠줄 아십니까? 제 일기장에 제 말은 진리라고 적어놨기 때문입니다. -엑스

종교는 문명에 공헌하였는가?

오브르 1 3,940 2004.10.02 22:35
 

글쓴이 : 버트런드 러셀

옮긴이 : 송은경

펴낸이 : 윤철호

펴낸곳 : (주)사회평론

제목 : Why I am not a christian




종교는 문명에 공헌하였는가?




나는 종교에 대해 루크레티우스(Lucretius)와 견해를 같이 한다. 나는 그것을 두려움에서 생겨난 질병, 인류에게 말할 수 없는 불행을 가져다 준 근원이라고 본다. 하지만 종교가 문명에 다소 공헌해왔다는 점은 부인하지 않는다. 종교는 일찍이 역법(歷法)의 정착에 기여했고, 종교적 목적에서 일식과 월식 현상을 정성껏 기록하던 이집트 사제들이 마침내 그 날짜를 미리 점칠 수 있게 된 배경이 되기도 했다. 나는 이 두 가지의 공헌에 대해서는 기꺼이 인정하지만 그밖의 다른 공로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한다.

오늘 날에는 ‘종교’라는 말이 대단히 느슨한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극단적인 신교의 영향하에 있는 일부 사람들은, 도덕이나 우주의 본질에 대한 개인의 어떤 진지한 확신을 의미하는 말로 이 단어를 쓰고 있다. 종교를 그런 뜻으로 사용하는 것은 대단히 반 역사적인 행위이다. 종교는 일차적으로 사회 현상의 하나다. 교회가 처음 생겨난 데는 개인적으로 굳은 확신을 지닌 스승들의 힘이 컸을지 모르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구축한 교회에 대해서는 그다지 큰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반면에 교회는 집단들 속에서 번성하면서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 서구 문명에 속한 사람들에게 최고 관심사가 되고 있는 예를 사나 들어보자.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가르침은 기독교인들의 윤리와 엄청나게 큰 거리를 유지해 왔다. 사회적 역사적 관점에서 볼 때 기독교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가 아니라 교회이기 때문에 만일 여러분들이 사회적 세력으로서의 기독교를 판단하려 한다면 복음서들을 재료로 삼아서는 안 될 것이다. 예수는 가난한 자들에게 재산을 나눠줄 것이며, 싸우지 말 것이며, 교회에 가지 말 것이며, 간음을 벌하지 말 것을 가르쳤다. 그러나 구교도, 신교도들은 이런 점들에서 예수의 가르침을 실천하려는 강한 의욕을 보여준 일이 없다. 일부 프란체스코파 수사들이 ‘사도(使徒)다운 빈곤’의 교리를 가르쳐보려 시도한 적은 있지만 교황은 이를 비난하면서 그들의 교리를 이단으로 선언했다. 또 하나, ‘심판받지 않으려거든 심판하지 말라.’ 와 같은 구절을 생각해보라. 그리고 이런 구절이 종교 재판과 공포의 KKK단에 어떠한 영향을 주었던가 자문해보라

이런 현상은 기독교 뿐 아니라 불교에도 적용된다. 석가는 온화한 성품에 다 깨인 사람이었다. 죽음을 맞이한 그는 자신이 영원불멸할 거라고 생각하는 제자들을 보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불교 승단은 - 예컨대 오늘날 티벳에 남아있는 승려 계급이 그렇듯 - 대단히 몽매하고 전제적이며 잔인하다.

이처럼 교회와 그 창시자의 이견이 생기는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어떤 사람의 말 속에 절대적인 진리가 담겨 있다고 생각되는 순간 그의 말을 해석하는 전문가 집단이 생겨나고 이 전문가들은 어김없이 권력을 차지한다. 진리의 열쇠를 그들이 쥐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특권층과 마찬가지로 그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권력을 행사한다. 그러나 그들은 한가지 점에 있어 다른 특권층보다 더 질이 나쁘다. 과거에 단 한번 완벽하게 만인 앞에 계시됐던 불변의 진리를 해석하는 것이 그들의 업이기 때문에 그들은 필연적으로 지적, 도덕적 진보의 반대자로 변해버리는 것이다. 교회는 갈릴레오와 다윈을 반대하였고 바로 우리 시대에 있어서는 프로이트에 반대하고 있다. 한때 그 권력이 정점에 달했던 시절에는 한술 더 떠서 지적인 생활까지도 반대했다. 그레고리 대교황은 어느 주교에게 보낸 편지의 서두에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귀하가 몇몇 친구들에게 문법을 해설해주고 있다는, 얼굴을 붉히지 않고는 입에 담기 힘든 보고가 들어왔소.’ 주교는 교황 당국으로부터 이 사악한 일에서 손을 떼도록 강요당했으며 결국 르네상스기가 될 때까지 라틴어 사용은 허용되지 않았다. 지적인 면에서 뿐 아니라 도덕적인 면에서도 종교는 해롭다. 내 얘긴, 종교가 인간의 행복에 도움이 되지 않는 윤리 규약을 가르친다는 뜻이다. 몇 년 전 독일에서 폐위된 왕가에게 사유재산을 허용할 것인가의 문제를 두고 국민 투표를 실시했을 때 독일 교회들은 그들의 사유 재산을 박탈하는 것은 기독교 가르침에 어긋난다고 하는 입장을 공식적으로 밝혔다. 누구나 다 알고 있듯, 교회들은 노예제의 폐지에 반대하는 입장을 버틸 수 있을 때까지 고수했으며, 오늘날에도 널리 선전된 몇몇 경우를 제외하고는 경제 정의를 위한 모든 움직임에 반대하고 있다. 교황은 사회주의를 공식적으로 비난한 바도 있다.




기독교와 성(性)

그러나 기독교의 특징 가운데 최악의 것은 뭐니뭐니해도 성(性)에 대한 태도다. 이것은 너무도 병적이고 부자연스런 태도여서 로마 제국이 몰락해가던 당시 문명 세계가 앓았던 질병과 연결해 생각해야만 비로소 이해될 수 있다. 우리는 가끔 기독교가 여성의 지위를 향상시켰다는 취지의 얘기를 듣게 된다. 그러나 이것은 역사상에 있을 수 있는 가장 엄청난 착오중 하나다. 여자는 엄격한 도덕 규범의 테두리를 벗어나선 안 된다는 점을 가장 중시하는 사회에서 여성들이 상당한 지위를 누린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수도승은 늘 여자를 요사스런 존재로 생각해왔다. 과거에나 현재나 교회는 순결을 최고로 가르친다. 그러나 순결을 지키는 것이 불가능한 자는 결혼해도 좋다고 한다. 성 바울은 ‘격정으로 타오르는 것보다 결혼함이 나으리라’고 무자비하게 말한다. 교회는 결혼을 파기 불가능한 것으로 만들고 ‘사랑의 기교’에 대한 지식을 모조리 배격함으로써, 아주 적은 쾌락과 아주 많은 고통을 수반하는 형태의 성만이 허용되어지는 교리를 지키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산아 제한에 반대하는 것도 알고 보면 같은 동기에서 나왔다. 즉, 여성이 지쳐 쓰러질 때까지 해마다 아이를 낳게 되면 결혼 생활에서 많은 쾌락을 얻어내지 못할 거라고 보는 것이다. 따라서 교회로선 산아 제한을 장려할 이유가 없다.

기독교 윤리와 밀접한 관계에 있는 죄악의 개념은 사람들에게 자학의 배출구를 허용한다는 점에서 막대한 해를 미친다. 결국 사람들은 그러한 배출구를 적법하다고, 심지어 숭고하다고까지 믿게 되기 때문이다. 매독 예방의 문제를 예로 들어보자. 이 병은 미리 예방만 하면 걸릴 위험이 그다지 크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이러한 사실이 알려지는 것에 반대하는데 그 이유는 죄인들은 벌을 받아 마땅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런 시각을 견지하는데 그치지 않고, 심지어 죄인의 처자식들까지도 벌받게 만들려고 한다. 세상에는 지금 이 순간에도 수천 명의 어린이들이 선천성 매독으로 고통당하고 있다. 죄인들이 벌받는 꼴을 보고 싶어하는 기독교인들의 욕구만 없었어도 세상에 나오지 않았을 아이들이다. 이러한 악마적 잔인성으로 이어지는 교리가 어떻게 해서 도덕에 좋은 영향을 미친다고 여겨질 수 있는지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

성 행위와 관련해서 뿐 아니라 성적 주제의 지식과 관련해서도 기독교인의 태도는 문명 인류의 복지를 위협한다. 이 문제를 편파적이지 않는 분위기에서 연구해 보려고 노력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사실이 있다. 정통 기독교인들이 인위적으로 아이들을 성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게 만들려고 하는 것은 그들의 정신적, 육체적 건강에도 위험스러울 뿐 아니라, 대부분의 아이들이 그렇지만 ‘그릇된’ 방법으로 그 지식을 주워듣게 되는 경우 성 자체를 점잖치 못하고 멸시되는 것으로 여기는 태도를 형성시키게 된다는 점이다. 나는 지식이 때로는 바람직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견해에 변호의 여지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또한 지식을 습득함에 있어 어떤 연령의 누구만이 자격이 있다는 식으로 선을 그을 생각도 없다. 그러나 성 지식이라는 특수한 경우, 다른 지식들의 경우에 비해 그런 쪽으로 기우는 주장들이 훨씬 우세하다. 사람은 누구나 그 상황에 대해 모르기에 미리 알고 있는 때보다 현명하게 행동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중요한 문제에 대해 자연스런 호기심을 보인다는 이유로 아이들에게 죄의식을 심어주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소년들은 누구나 기차에 흥미를 느낀다. 그런데 만일, 기차에 흥미를 가지는 것은 사악한 일이라고 소년에게 말했다고 해보자. 기차에 타거나 역에 나갈 때마다 아이의 눈을 붕대로 감아버렸다고 하자. 아이 앞에서는 ‘기차’란 말을 일절 입에 담지 못하게 하고. 아이가 장소를 옮길 때 이용하는 그 교통편에 대해 알 수 없는 신비감에 싸이게 내버려두었다고 하자. 그 결과 아이기 기차에 대해 관심을 잃게 되느냐 하면 그렇지 않다. 오히려 그 반대로 전보다 더 흥미를 느끼는 한편 죄의식에 시달리게 될 것이다. 기차에 흥미를 가지는 것은 그릇된 것이라고 들어왔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적극적인 지성을 가진 소년이라면 누구나 크고 작은 정도의 신경 쇠약증에 걸리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성 문제에서 일어나는 현상이 바로 이런 것이다. 그러나 성은 기차보다 더 흥미로운 것이기에 나쁜 결과가 나온다. 어릴 때 성 지식을 금기시한 결과 기독교 집단에 속한 성인들의 거의 대부분이 약간의 신경질환에 걸려있다. 그리고 이와 같이 인위적으로 주입된 최의식이야말로 훗날의 잔인함, 소심함, 우둔함을 야기시키는 한 요인이 되는 것이다. 성에 관해서든 다른 무엇에 관해서든, 아이가 알고 싶어하는 데도 계속해서 그것을 모르고 지내게 만들어야 할 어떤 류의 합리적 근거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실이 초기 교육을 통해 인식되어질 때까진 우리는 결코 건전한 인구를 생산할 수 없을 것이고 교회가 교육 정책을 좌우하는 한 그러한 교육은 불가능한다.

이처럼 비교적 세부적인 반론은 차치하더라고, 기독교의 근본 교리들이 받아들여지기까지 엄청난 윤리적 곡해가 수반된다는 점은 확실하다. 이 세상은 선하고 전능한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다고 한다. 세상을 창조하기 전 하나님은 세상이 안게 될 온갖 고통과 불행을 내다보셨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그 모든 것에 책임이 있다. 이 세상의 고통은 죄에서 기인하는 거라고 주장해봤자 아무 소용없다. 무엇보다도 그 주장 자체가 진실이 아니다. 강물이 범람하거나 화산이 폭발하는 것은 죄 때문이 아니다. 설혹 그것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만약 내가 아이를 낳으려 하는데 그 아이가 장차 살인광이 될 것임을 알면서도 낳는다면 그의 죄에 대한 책임은 내가 져야 할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이 장차 저지르게 될 죄악을 미리 아셨다면 인간을 창조하기로 결심했을 때 이미 하나님은 그 죄악의 모든 결과에 분명한 책임이 있다. 기독교인들은 세상의 고통은 죄를 씻기 위한 것이며 따라서 좋은 것이라고 흔히 말한다. 이러한 주장은 물론 자학의 합리화에 지나지 않지만 어쨌거나 대단히 빈약한 변론임에 틀림없다. 나는 언제 한번 누구든 기독교인을 병원의 아동 병동으로 데려가볼 생각이다. 거기서 고통을 견디고 있는 아이들을 똑똑히 보게 한 다음, 이 아이들은 도덕적으로 버려졌으니 고통받아 마땅하다는 예의 그 주장을 계속 해보라고 하고 싶다. 사람이라면 자기 마음 속에서 자비와 동정의 감정을 모조리 몰아내지 않는 한 그렇게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자신이 믿고 있는 하나님만큼이나 잔인해지지 않고선 말이다. 고통받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최선을 위한 것이라고 믿는 사람은 자신의 윤리적 가치에 손상을 입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항시 고통과 불행에 대한 변명거리를 찾아내야 하기 때문이다.




종교에 대한 반론

종교에 대한 반론에는 지적 반론과 도덕적 반론의 두 부류가 있다. 지적 반론은 종교란 것을 진리로 볼 근거가 없다고 주장한다. 도덕적 반론에서는 종교적 지침은 인간이 지금보다 잔인했던 시절에 나왔으므로 그것만 아니었어도 당대의 도덕적 양심에 의해 사라졌을 비인간성을 영속화하는 경향이 있다고 주장한다.

먼저 지적 반론을 살펴보자.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실용의 시대에는 종교적 가르침이 진리냐 아니냐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고 보는 경향이 일부 있다. 중요한 건 그것이 유용한가 아닌가의 문제라는 것이다. 그러나 어느 한 문제를 제대로 판단하려면 다른 문제를 함께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만일 우리가 기독교를 믿고 있다면 어떤 것이 좋으냐에 대한 우리의 견해는 기독교를 믿지 않았을 때 우리의 견해와 다를 것이다. 따라서 기독교인들에게는 기독교의 영향이 좋게 보일 것이고 비신자에게는 나쁘게 보일 것이다. 게다가 지지할 만한 증거가 있느냐 여부는 제쳐둔 채 이러저러한 진술은 반드시 믿어야한다고 하는 것은 증거에 대한 적대감을 낳고, 우리의 편견에 들어맞지 않는 모든 사실들에 대해 마음을 닫아버리게 만드는 태도이다.

어떤 류의 과학적 정직성은 대단히 중요한 특성으로서, 의무적으로 믿어야 할 것들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서는 보기 힘든 자질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종교의 진리성 여부를 따져보지 않고는 종교가 유익한 가 아닌가를 제대로 판단할 수 없다. 기독교인, 회교인, 유대교인에게 있어 종교의 진리성과 관련된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신의 존재이다. 종교가 여전히 득세했던 시절에는 ‘신’이란 말이 완벽하게 한정적인 의미였지만 합리주의자들이 맹공격한 결과 그게 무슨 뜻으로 한 말인지 이해하기 힘들게 되었다. 논의를 위해 매슈 아놀드(Mattthew Arnold)의 신에 대한 정의를 들어보자. ‘정의에 이바지 하는, 우리 자신들이 아닌 힘’ 어쩌면 우리는 이 정의를 더욱 모호하게 만들면서 자문할 지도 모른다. 이 지구상에서 살아가는 존재들의 의지 외에 우주에도 의지가 있다는 증거가 과연 있는가라고 말이다.

이 문제에 대한 종교인들의 통상적인 주장은 대충 다음과 같다. ‘나와 내 친구들은 놀랄만한 지능과 덕의 소유자들이다. 그처럼 대단한 지능과 덕이 우연에 의해 생겨났다고는 상상하기 어렵다. 따라서 최소한 우리만큼 지적이고 덕스러운 누군가가 존재하는 게 분명하며, 바로 그가 우리를 생산하지 위해 우주란 기계를 가동한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나로선 이 얘기가 그것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감명받는만큼 그렇게 감명스럽지가 못하다. 우주는 광대하다. 그러나, 우리가 에딩턴(Arthur Stanley Eddington)의 말을 믿는다고 한다면 인간만큼 지적인 존재들은 아마 우주 다른 어떤 곳에도 어떤 곳에도 없을 것이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물질의 총량을 생각해보고 지적 존재들의 육신을 형성하고 이TSms 물질의 양을 비교해보라. 전자에 비하면 후자는 무한소에 가깝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따라서, 지능을 발휘할 수 있는 유기체가 우발적인 원자 결합으로 인해 우연의 법칙에서 생겼났을 가능성은 거의 업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실제 알고 있는 것과 같은 유기체들이 우주에 극소수 존재할 가능성은 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 자신을 그러한 광대한 과정의 절정으로 본다면 우리가 정말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존재들인 것 같지도 않다. 물론 여러 성직자들이 나보다 훨씬 더 훌륭하다는 것, 그리고 나의 가치를 너무도 압도적으로 초월하는 가치들을 내가 온전히 평가할 수 없다는 건 나도 잘 안다. 그러나 그 점을 충분히 참작한 후에도 나는 영겁을 통해서 작용하는 전능한 신이라면 좀 더 나은 작품을 만들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또 하나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이러한 아쉬운 결과마저도 일시적 성공에 불과하는 점이다.지구는 영원히 거주할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인류는 사라지게 될 것이며, 만일 우주적 과정이 차후에 스스로를 정당화하고자 한다면 우리의 행성뿐 아니라 다른 곳에서도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일이 일어난다 해도 조만간 멈출 것이 분명하다. 열역학 제2법칙에 따른다면, 우주는 점차 침몰해가고 있으며 마침내는 어디에도 관심을 끌만한 것이라곤 존재하지 않게 될 것임이 분명하다. 물론 때가 되면 신이 우주 기계의 태엽을 다시 감을 거라고 말할 수 있는 여지는 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려면 주장의 근거를 신앙에다 둘 수 있을 뿐 과학적 증거에 기초할 가능성은 털끝만치도 없다. 과학적 근거만을 가지고 말한다면 우주는 지금까지 이 지구의 다소 비참한 결과를 향해 서서히 가고 있으며 그보다 훨씬 더 비참한 단계인 우주적 몰락의 단계를 향해도 가고 있다. 만일 이것을 목적의 증거라고 한다면 나로서는 그러한 목적은 내게 아무 호소력도 갖지 못한다고 말할 수 밖에 없다. 그러므로 나는 하나님이란 것을 믿어야 할 이유를, 제 아무리 모호하고 힘 빠진 이유조차도 알 지 못한다. 낡은 형이상학론에 대해선 덮어두려 한다. 종교 옹호론자들 자신부터 이미 팽개쳐버린 이론들이기 때문이다.




영혼과 영생

개인의 영혼을 강조하는 기독교의 태도는 기독교 사회의 윤리에 지대한 영향을 미쳐왔다. 이 교리는 정치적으로 더 이상 희망을 품을 수 없는 집단들 속에서 나왔다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스토아 학파의 학설과 동종이다. 건전한 성격에 활력있는 사람이라면 선을 행하고자 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충동이다. 그러나 사회적으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정치적 권력과 기회를 모두 박탈당하게 되면 그는 자연스런 행로에서 이탈하여, 우선 스스로가 착해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게 된다. 초기 기독교인들에게 일어난 일이 바로 인건 것이었고 그것은 결국 선행과는 상당히 거리가 ‘개인의 신성함’이란 개념으로 이어졌다. 신성함은 행동력에 있어 무능한 자들에 의해 달성될 수 있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회적 미덕은 기독교 윤리에서 배제되게 되었다. 오늘날까지도 고루한 기독교인들은 뇌물을 받는 정치가보다 간음한 자를 더 사악하게 여긴다. 후자보다 전자가 몇천 배 더 큰 해를 주는데도 말이다. 중세의 미덕 관념은 당시의 그림들에서 볼 수 있듯 어딘가 시시하고 나약하며 감상적이었다. 가장 덕있다고 여겨진 사람은 세상에서 물러난 사람이었다. 행동인이 성자로 추대되는 유일한 경우는 성 루이처럼, 터키 민족과 싸우느라 국민의 생명과 자산을 낭비한 사람들이었다. 교회는 어느 누가 국가 재정이나 형법이나 사법제도를 개혁했다고 해서 그 사람을 성자로 보긴 않았다. 그와 같은 단순한 인류 복지에의 공헌은 전혀 중요하지 않게 생각되었다. 기독교 역사를 통틀어 공익에 기여했다는 이유로 성인 대접을 받은 사람이 단 한명이라도 있는지 의심스럽다. 이처럼 사회적 인간과 도덕적 인간을 분리하게 되자 영(靈)과 육 (肉)의 분리 경향도 점차 증대하게 되었고 이러한 영육의 분리는 지금도 기독교의 형이상학과 데카르트에서 나온 체계들 속에 잔존해 있다. 넓은 의미로 보자면 육체는 인간의 사회적, 공적 측면을 대변하며 영혼은 사적인 면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영혼을 강조하면서, 기독교 윤리는 스스로를 철저하게 개인주의화 시켰다. 수많은 세월 기독교가 군림해오면서 생격난 실질적인 결과는 사람들이 자연이 준 본성이상으로 이기적으로 되고, 자기 속에 갇혀 살게 된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인간을 각자의 에고(Ego)라는 울타리 밖으로 자연스럽게 나오게 만드는 자극제는 바로 성, 친자간의 애정, 애국심, 혹은 집단 본능과 관련된 충동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회는 안간힘을 다해 성을 비난하고 경시했다. 가족간의 애정은 예수 자신과 그의 추종자 무리에 의해 비난받았다. 애국심은 로마 제국의 속민 내무 어디에서도 제자리를 찾을 수 없었다. 복음서에는 가정에 대한 반론이 분명히 보이지만 그러나 이 문제는 그동안 응분의 관심을 받지 못했다. 예수의 어머니에 대해 교회는 존경의 태도를 보이지만 예수 자신은 그런 태도를 거의 보이지 않았다. '여자여, 내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요한복음 2장 4절) 예수가 자기 어머니께 말하는 방식이 이렇다. 또한 예수는 ‘내가 온 것은 아들이 그 아비와, 딸이 그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다.’(마태복음 10장 35-37절)고 말한다. 이 모든 것은 교리를 위해 생물학적 관계를 끊으라는 의미이다. 이는 기독교의 확산과 함께 세상에 생겨나게 된 불관용과 지대한 관계를 지닌 태도이다.

이러한 개인주의는 개인 영혼의 불멸이란 교리에서 절정에 달했는데 이 교리에서는 개인의 영혼이 사정에 따라 내세에서 영원한 축복을 누리게 되든가 영원한 재앙을 받게 된다고 본다. 그런데 그러한 중차대한 갈림길을 결정하는 그 사정이란 것이 어딘가 좀 기묘하다. 이를테면, 만일 여러분이 목사가 무어라고 중얼거리며 물을 뿌려준 직후에 사망하면 여러분에겐 축복이 내려진다. 그러나 오랜 세원 덕스런 삶을 살아온 여러분이 어느 날 구두 끈이 끊어져 상스런 말을 내뱉고 있는 순간 우연히 번갯불에 맞았다면 여러분에겐 영원한 고통이 주어진 것이다. 현대의 신교도가 이러한 것을 믿을 거란 얘기는 아니다. 아니, 신학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현대의 구교도조차도 아마 믿지 않을 것이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것이 바로 정통 교리이며 최근까지도 굳게 믿어졌다는 것이다. 과거 멕시코와 페루에 건너간 스페인 사람들은 갓난 인디언 아이들에게 세례해주고 난 즉시 머리를 박살내버렸다. 그렇게 해야 천국으로 간다고 믿었던 것이다. 정통 기독교인이라면 그 누구도 그들의 이런 행위를 비난할 만한 논리적 근거를 대지 못한다. 비록 오늘날에는 누구나 다 댈 수 있지만 말이다. 기독교식 개인 불멸의 교리는 무수한 방식으로 도덕에 끔찍한 영향을 죽었으며, 영육의 형이상학적 분리는 철학에 대해 그같은 영향을 미쳤다.




불관용의 근원

기독교의 출현과 더불어 세상에 퍼진 불관용은 기독교의 가장 기이한 특징의 하나인데 내가 볼 때 그것은 유대인의 정의관과, 유대신만 존재한다는 그들의 배타적 믿음에서 기인한다. 유대인들이 왜 이렇듯 유별난 특성을 갖게 되었는지, 나로선 알지 못한다. 아마도 그들이 예속되어 있던 시절 유대인을 이방민들에 흡수시키려는 시도에 대한 반발로 생겨난 듯하다. 이유야 어쨌건, 개인적 정의를 강조하고, 한 종교 외에 다른 종교를 관용하는 것은사악한 짓이라는 관념을 강조하는 풍토의 조성자는 유대인, 특히 유대인 사도들이었다. 이 두가지 관념은 서양 역사에 엄청나게 끔찍한 영향을 미쳐왔다. 교회는 콘스탄누스 대제 이전에 로마 정부가 기독교인을 박해한 사실을 크게 중시해왔다. 그러나 그것은 미미하고 간헐적이며 전적으로 정치적인 성격의 박해였다. 콘스탄티누스 시대부터 17세기 말까지 쉼없이 이어진 기독교인에 의한 기독교인의 박해는 과거 로마 황제들의 박해보다 훨씬 더 혹독했다. 이렇듯 박해하는 태도는 기독교의 발흥 이전에는 유대인들 사이에서나 볼 수 있었을 뿐 고대 세계에선 알려진 바 없었다. 예를 들어 헤로도투스의 역사책을 보면, 자신이 방문해 본 나라들의 관습에 대해 온화하고 포용력있게 설명해 놓았다. 물론, 특별히 야만적인 관습에 경악하는 대목도 이따금 보이지만 대체적으로 그는 낯선 신과 낯선 관습들에 관대하다. 그는 제우스를 다른 이름으로 부르는 자는 영원한 파멸을 겪을 것이며 따라서 그들의 형벌이 가능한한 빨리 시작되도록 사형에 처해야 한다는 점을 입증하려 안달하지 않았다. 그러한 적대적 태도는 기독교인의 몫으로 남겨둔 셈이다. 현대의 기독교인들은 보다 덜 사나운 것이 사실이지만 자신들의 기독교 덕택에 그렇게 된 것은 전혀 아니다. 그것은 르네상스 시대에서 시작해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전통적 신앙의 많은 부분들에 대해 부끄러움을 느끼게 만들어온 수세대에 걸친 자유사상가들 덕분이다. 현대의 기독교인들이, 기독교 속의 온유함과 합리주의는 모두 과거 정통 기독교인들로부터 박해받았던 사람들의 가르침에서 기인한다는 사실을 무시한 채, 기독교는 참으로 온유하고 합리적이라고 말하는 걸 들으면 우습기까지 하다. 오늘날 이 세계가 기원전 4004년에 창조되었다고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그다지 오래지 않은 시절만 해도 이 점에 회의를 품는 것은 엄청난 죄악으로 여겨졌다. 내 고조분의 경우, 에트나 화산의 용암층 두께를 직접 보닛고 난 후 세상은 정통파가 추정하는 것보다 오래 되었다는 결론에 도달하고는 이런한 견해를 책자로 출판하셨다. 이 일로 그는 주정부에서 쫓겨났고 사회에서 배척당했다. 만일 그가 좀더 비천한 계층이었다면 틀림없이 훨씬 더 가혹한 처벌이 내려졌으리가. 150년전에는 믿었던 온갖 불합리한 것들을 지금은 믿지 않는다는 건 정통파 자신들에겐 전혀 자랑거리가 못된다. 격렬하기 그지없는 저항에도 불구하고 기독교 교리는 서서히 약화되어 왔으며 그것은 순전히 자유 사상가들의 맹공에 의해 이루어진 결과이다.




자유의지론

자연 법칙이라는 주제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태도는 이상하리만치 유동적이고 불확실하다. 한편으로는, 대다수의 기독교인들이 믿고 있는 자유 의지라는 교리가 있어, 인간의 행위는 적어도 자연법칙에 지배되어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특히 18세기와 19세기에 유행한 것으로, 하나님은 법칙 부여자이며 자연 법칙은 창조주의 존재를 입증하는 주요 증거의 하나라는 믿음이 존재했다. 최근에는 자유 의지를 옹호하면서 법칙의 지배에 반대하는 쪽이, 자연 법칙은 법칙 부여자를 증거한다는 믿음보다 강해지는 분위기이다. 유물론자들은, 인간 육체의 움직임은 기계적으로 결정된다고 본다. 따라서 우리가 말하는 것이나 사물의 위치 바꿈 같은 우리가 일으키는 모든 작용들은 자유 의지라는 것의 영역 바깥에서 일어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아니 입증해보려고 물리 법칙을 이용하였다. 만일 사실이 그렇다고 한다면 뭐든 우리의 구속받지 않는 의지를 위해 남겨진 게 있다하더라고 그것은 별 가치가 없게 된다. 어떤 사람이 시를 쓰거나 살인을 한다고 할 때 그의 행위에 관련된 육체적 움직임은 순전히 물리적 원인들에서 나온 결과라고 한다면, 전자에겐 동상을 내려주고 후자에겐 교수형을 내리는 것은 불합리한 처사일 것이다. 형이상학적 체계들 속에는 의지가 자유로운 순수 사고의 영역이 남아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극서도 육체적 움직임이라는 수단에 의해서만 타인들에게 전달될 수 있으므로 자유라는 영역은 결코 전달할 수 있는 것이 될 수 없으며 따라서 아무런 사회적 의미도 가질 수 없는 것이 되고 만다.

여기에 뒤이어 이번에는 진화론이 나와, 그것을 받아들인 기독교인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이 기독교인들은, 인간에 대해 다른 생명체에 대한 설명과는 완전히 다르게(원문 : 틀리게, 개인적 의견으로는 ‘다르게’가 맞다고 여김) 설명하는 것이 아무 효과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따라서 그들은 인간 속의 자유 의지를 끝까지 지키지 위해, 생명 물질의 행동을 물리나 화학 법칙 용어로 성명하려는 모든 시도에 반대해 봤다. 모든 하등 동물은 일종의 자동 기계장치라고 보는 데카르트의 입장은 더 이상 자유 신학자들의 지지를 얻지 못한다. 연속성의 교리는 그들로 하여금 한 발 더 나아가, 소위 죽은 물질의 행태조차도 불변의 법칙에 엄격하게 지배받진 않는다고 주장하고 싶게 만든다. 아마도 그들은, 법칙의 지배를 폐기하게 되면 기적이라는 하나님의 행위는 일반 현상을 지배하는 법칙을 위반하는 행위니까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창조물 그 자체가 기적이므로 특별히 신의 개입을 입증하려고 특정 사건에 매달릴 필요는 없다고, 깊이 깨달은 듯한 태도로 주장하는 현대 자유 신학자들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자연 법칙에 반대하는 이러한 태도의 영향으로, 일부 기독교 호교론자들은 가장 최근의 원자론 - 지금까지 믿어온 물리 법칙을 다수의 원자들에 적용해 보면 근사치나 평균치의 진실만을 보여주는 데 반해, 개개의 전자들은 상당히 제멋대로 움직인다는 것을 보여주는 경향 - 까지 이용하게 되었다. 내 생각으로는 이러한 경향은 일시적 국면이며, 미세 현상을 지배하는 법칙도 조만간 물리학자들에 의해 발견되어질 것으로 본다. 물론 그 법칙은 종래의 물리학에서 주장해온 것들과는 아주 많이 다르겠지만 말이다. 그것은 어찌됐건, 미세 현상을 다루는 오늘날의 이론들이 실제로 중요한 것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점에 주목해 볼 만한 가치가 있다. 눈에 보이는 움직임, 아니 누가 보든 달라보이는 움직임들은 모두 다수의 원자들과 관련된 것이기 때문에 결국 종래의 법칙들로도 충분히 감당할 수 있다.(앞서 든 예로 돌아가서) 시를 쓰거나 살인을 하려면 상당량의 잉크나 납을 이동시키지 않을 수 없다. 그 잉크를 구성하고 있는 전자들은 자기들만의 작은 무도장에서 자유로이 춤추며 돌아가는지 모르지만 그 무도장 자체는 전체로 보아 종래의 물리 법칙들에 따라 움직이고 있으며 그것만이 시인이나 출판인의 관심사인 것이다. 그러므로 현재의 이론들은 신학자들이 관심을 가지는 인간적 이해가 걸린 문제들과는 크게 관련이 없다.

따라서 자유 의지의 문제는 그대로 남을 뿐이다. 결국 형이상학적 문제로서의 자유 의지를 어떻게 생각하든 간에 분명한 것은, 실제에 있어서는 아무도 그것을 믿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성격은 훈련이 가능한 것이라고 사람들은 늘 믿어왔다. 알콜이나 아편이 행동에 영향을 준다고 모두들 알고 있다. 의지력만 있으면 술에 취하지 않을 수 있다고 자유 의지를 믿는 사람은 주장한다. 그러나 술취한 사람이 ‘영국 헌법’을 정신이 말짱할 때처럼 똑똑하게 말할 수 있을 때, 그는 그렇게 주장하지 못한다. 아이를 착하게 하는데는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설교보다도 적절한 음식이 더 효과가 있다는 것을 아이들을 다루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안다. 자유 의지론이 실천적으로 효력을 발휘하는 한 가지 경우는, 사람들이 이러한 상식적 지식을 끝까지 쫓아가 합리적인 결론에 도달하는 것을 방해할 때이다. 어떤 사람이 우리를 괴롭히는 행동을 할 때 우리는 그를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만, 그의 성가신 행동은 선행된 원인들에서 나온 결과라는 사실과 직면하기를 거부한다. 그러나 실제로 그러한 원인들을 파고 들어가 보면 그가 태어난 시점 이전까지 올라가게 되며 따라서 아무리 상상력을 펼쳐보아도 그에게 책임이 있다고 할 수 없는 사건들에까지 이르게 될 것이다.

자동차를 다루면서 다른 사람들을 대할 때처럼 어리석게 구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자동차가 움직이지 않는다고 해서 그 괘씸한 행동을 죄의 탓으로 돌리진 않는다. ‘이 나쁜 자동차야, 움직일 때까진 휘발유를 주지 않겠다.’고 하는 사람은 없다. 어디가 잘못됐는지 찾아내서 고쳐보려 한다. 그러나 사람을 대할 때 이처럼 한다고 하면 그것은 우리의 신성한 종교에서 말하는 진리에 어긋난다고 여겨진다. 그리고 이런 시작은 어린 아이들을 다루는 데도 적용되고 있다. 아이들에겐 대부분 나쁜 습관이 있기 마련이다. 모른 척 내버려두면 저절로 없어질 수도 있는 이런 습관들에 대해 벌을 가하면 오히려 더 굳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극소수 예외를 제외한 대부분의 보모들은 벌은 주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다간 자칫 아이를 정신 이상으로 몰고가는 수가 있는 데도 말이다. 정신 이상이 되면 법정에서는 이를 그 습관이 해로운 증거로 인용될 뿐, 체벌이 해롭다고는 하지 않는다.(실제로 최근 뉴욕주에서 외설 행위로 기소된 사건을 두고 하는 얘기다.)

교육 분야의 개혁은 정신 이상아와 정신 박약아 연구를 통해 이루어진 경우가 꽤 많은데, 그러한 연구에서는 이런 아이들이 도덕적으로 자신의 실패에 대한 책임이 없다는 가정하에 정상아들보다 과학적으로 다루었기 때문이다. 아이가 공부를 못 할땐 매질이나 채찍질이 약이라는 얘기가 아주 최근까지도 공공연히 나돌았다. 요즘의 아이들 다루는 법에선 이러한 시각이 거의 사라졌지만 형법에는 아직 잔존해 있다. 범죄 성향이 있는 자를 저지하는 것은 마땅한 일이지만 공수병에 걸려서 사람을 물려고 하는 사람까지도 저지되어야 한다고 여겨진다. 비록 이 사람에게 죄가 있다고 생각할 사람은 아무도 없겠지만 말이다. 전염병을 앓는 사람을 나쁜 사람이라고 할 순 없어도 그런 사람은 치료될 때까지 격리해야 하며 위조범 근성이 있는 사람도 그렇게 해야 한다고 한다. 그러나 전자의 경우는 결코 후자보다 최가 크다고 볼 수 없다. 이것은 상식에 지나지 않는 얘기지만 기독교 윤리와 형이상학에서는 이런 형태의 상식까지도 반대한다.

어떤 단체가 공동체에 미치는 도덕적 영향을 판단하려면 그 단체에서 구현되는 충동의 종류와, 그 단체가 그 공동체에서 충동의 효능을 증대시키는 정도를 고찰해 보아야 한다. 이 충동은 때로는 아주 뚜렷하게 드러나고 때로는 보이지 않게 숨어 있다. 예를 들어 등산회의 경우는 모험에 대한 충동을 뚜렷하게 구현하며 식자 사회에서는 지식을 향한 충동을 구현한다. 단체로서의 가정은 시기심과 어버이 감정을 구현하며 축구회나 정당은 경쟁 플레이를 향한 충동을 구현한다. 그러나 두 개의 커다란 사회적 단체 - 즉, 교회와 국가-는 그 심리적 동기에 있어 좀 더 복잡하다. 국가의 제일 큰 목적이 국내의 범죄와 외적에 대한 안전보장아란 건 분명하다. 이것은 어린 아이들이 겁을 집어먹었을 때 서로 끌어모으며 안심시켜 줄 어른을 찾는 것과 같은 심리에 근거해 있다. 교회는 좀 더 복잡한 기원을 가지고 있다. 종교의 가장 중요한 근원이 두려움이란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것은 오늘 날에도 볼 수 있는데, 사람이 어떤 것에 놀라게 되면 생각이 신에게로 쏠리기 쉽기 때문이다. 전쟁, 질병, 실패 등은 모두 사람들을 종교적으로 만들기 쉽다. 그러나 종교가 호소력을 발휘하는 대상은 공포감 외에도 몇 가지가 더 있다. 종교는 특히 우리 인간의 자존심에 대고 호소한다. 만일 기독교가 진리라면 인류는 보기보다 그렇게 가엾은 벌레들은 아닌 셈이다. 인류는 우주 창조주의 관심 대상으로서, 행동을 잘하면 창조주가 수고스럽게도 기뻐해주시고 잘못하면 불쾌해 하시니까 이것은 대단한 우애이다. 우리 같았으면, 개미들 중 어떤 놈이 자기 의무를 다 하는가 가려내려고 개미집을 연구해 볼 생각은 하지도 못할 것이다. 그 중에 나태한 개미들을 가려내어 모닥불에 던져 버릴 생각도 물론 못할 것이다. 만약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이렇게 해주시는 거라면 우리를 매우 중요하게 여긴다는 뜻이며 더욱이 우리들 중 착한 자에게 천국에서의 영원한 행복을 상으로 하사한다는 것은 훨씬 더한 우대이다. 다음으로, 우주의 모든 전개는 소위 선이라는 결과, 다시 말해 우리에게 기쁨을 주는 결과를 가져오기 위해 계획된 것이라고 하는 비교적 현대적인 관념이 있다. 이 관념 역시도 우즈는 우리와 취미와 편견을 같이 하는 존재에 의해 조종되고 있다고보는 자위적 가정이다.




정의에 대한 관념

종교를 통해 구현되는 심리적 충동 가운데 세 번째의 것은 정의의 관념으로 발전되어졌다. 많은 자유 사상가들이 이 관념을 대단한 존경심으로 대하면서 독단적인 종교는 몰락하더라도 이 관념은 보존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나로선 동의할 수 없는 대목이다. 정의의 관념을 심리적으로 분석해보면 바람직하지 못한 열정에 그 뿌리를 두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성의 승인(imprimatur)을 통해 강화시켜서는 안 될 관념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정의와 불의는 함께 생각해야 한다. 그 중 하나를 강조하려면 반드시 나머지 하나도 강조하게 된다. 그렇다면, 실제에 있어 ‘불의’란 과연 무엇일까? 그것은 사실, 군중이 싫어하는 류의 행동이다. 그것을 불의라고 지칭함으로써, 그리고 그 관념 주변에 정교한 체계를 설치함으로써, 군중은 자신이 싫어하는 대상들에 벌을 가하는 자신을 정당화하는 한편, 군중들 자신은 본래 정의롭다는 이유로 잔인함에 대한 충동을 풀어놓는 바로 그 순간에 스스로의 자존심을 고양시킨다. 이것은 린치의 심리, 시타 범죄자를 처벌하는 여러 방식에 깔린 심리이다. 따라서 정의 관념의 본질은 잔인함에 정의의 옷을 입혀 사디즘(Sadism)의 출구를 허용해주는 것이다.

그러나 정의에 대한 이러한 설명을, 이 관념의 창안자라 할 수 있는 히브리 예언자들에게까지 전적으로 적용하긴 어렵지 않겠느냐고 말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 말에는 일리가 있다. 히브리 예언자들이 말하는 정의는 그들과 야훼에 의해 승인된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사도들은 다음과 같은 말로 시작하는 선언물이 담긴 사도 행전에서도 같은 태도를 발견할 수 있다. ‘성령과 우리는 이렇가 함이 가(可)한 줄 알았노니’(사도행전 15장 28절). 그러나 하나님의 기호화 견해에 대한 이런 류의 개인적 확신이 어떤 단체의 기초가 되긴 어렵다. 이런 어려움은 신교가 늘 겪어야 했던 난관이었다. 신교에서는 새로운 예언자가 나와 자기가 받은 계시가 선배 예언자들의 계시보다 더 믿을 만하다고 주장할 수 있었고, 신교의 일반적인 관점에는 이런 주장이 부당하는 것을 입증할 만한 것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신교는 무수한 종파로 갈라지면서 서로를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던 것이다. 이런 상황이고 보니 앞으로도 백년은 구교가 기독교 신앙의 유일하고도 실질적인 대표 자리를 지킨다고 가정해 볼 만도 하다. 가톨릭 교회에서도 예언자가 받는 이러한 영감을 인정하기는 하지만 정말로 신적 영감처럼 보이는 형상도 어쩌면 마귀에게서 받은 것일 수고 있다고 시인한다. 따라서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진품과 위작을 가려내는 것이 미술 감정가의 직무이듯, 이러한 영감들을 제대로 판별하는 것이 교회의 임무로 되어있다. 이런 시으로 계시를 받는 동시에 제도화되어진다. 교회가 승인하는 것이 정의이며 승인받지 못하면 불의이다. 결국 정의 관념의 실질적 내용은 대중의 반감을 정당화하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종교에서 구현되는 인간의 세가지 충동은 공포와 자존심과 증오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격정들이 제대로 된 통로로 흐르는 한 종교의 목적은 그런 것들에 존경의 분위기를 부여하는 것으로 말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종교를 악의 세력이라고 하는 까닭은 이러한 격정들이 대체로 인간을 불행하게 만드는 쪽으로 나아가기 때문이다. 종교가 승인해주지만 않아도 인간들이 최소한 어느 정도는 자제할 수 있을 텐데 이러한 격정에 실컷 빠지도록 허용해 준 것이다.

이 시점에서 반대 의견이 하나쯤 나올 거라고 생각한다. 정통 신자들이 제기할 것 같진 않지만 어쨌거나 검토해 볼 가치는 있다. 반대자는 말할 것이다. 증오나 두려움은 인간의 본질적인 특징으로서 인류는 언제나 그런 것들을 느껴왔고 앞으로도 영원히 그럴 것이다. 따라서 여기에 대처하는 최선책은 그런 것들이 엉뚱한 길로 나아가 큰 해를 주지 않도록, 다시 말해 그것들의 해를 줄일 수 있는 어떤 방향으로 안내하는 것이라고 아마도 말할 것이다. 교회가 이런 열정들을 다루는 방식은 성 충동을 다루는 방식과 비슷할 수 있다고 기독교 신학자는 말할 것이다. 물론 교회는 성 충동을 개탄하는 입장이다. 이 충동을 결혼이라는 테두리 안에 가둠으로써 육욕을 무독성으로 바꾸려고 애쓴다. 그러므로, 인간이 미움을 느끼는 것이 불가피한 일이라면 그 증오를 정말고 해를 끼치는 사람들 쪽으로 돌려버리는 게 더 낫다고 하는 것이 바로 교회가 그 정의 관념을 도구삼아 하는 일이다.

이러한 항변에 대해선 두가지 답변이 있는데 하나는 비교적 피상적이고 다른 하나는 문제의 근본에 닿아있는 답변이다. 피상적인 답변이란, 정의에 대한 교회의 관념은 가능한 최상의 것이 못된다는 것이다. 근본적인 답변이란, 오늘날 우리의 심리학적 지식과 산업기술을 이용하면 인간의 생활에서 증오와 두려움을 모조리 몰아낼 수 있다는 것이다.

첫 번째 답변을 먼저 살펴보자. 교회의 정의 관념은 사회적으로 여러가지 면에서 바람직하지 못한데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은 지성과 과학을 경시하는 태도이다. 교회의 이같은 결함은 복음서글에서 물려받은 것이다 예수는 우리에게 어린 아이들처럼 되라고 말하지만, 아이들은 미분이니 통화원칙이니 현대적 질병퇴치법이니 하는 것을 이해할 수 가 없다. 교회에 따르면 우리의 임무는 이런 지식을 얻는 것이 아니다. 요즘은 교회도 지식 자체를 죄악시하진 않지만 과거 전성 시대에는 그러했다. 그러나 지식의 획들을 죄악시하진 않아도 위험스러운 것으로 보는 건 여전하다. 지식을 갖게 되면 지성의 교만으로 이어지고 따라서 기독교 교리에 의문을 품을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두 사람이 있다고 가정해보자. 한 사람은 열대 지방을 두루 다니면서 열병 퇴치에 애쓰는 사람인데 그렇게 고생하는 동안 어쩌다가 몇 명의 여자들과 관계를 맺었느나 결혼하지 않았다. 또 한사람은 게으르고 무능한데도 아내가 지쳐 죽을 때까지 해마다 아이를 낳았으며 아이들을 통 돌보지 않아 그 가운데 절반을, 예방만 했으면 무사했을 사고로 죽게 만들긴 했지만 부정한 관계를 맺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착한 기독교인이라면 마땅히 이들 가운데 두 번째 사람이 첫 번째 사람보다 더 도덕적이라고 할 것이다. 이러한 태도는 말할 것도 없이 미신적이고 전적으로 이성에 반하는 태도이다 그러나 죄를 피하는 것이 명백한 장점보다 중요시되고, 유익한 생활이 되도록 도와주는 지식의 중요성이 인정받지 못하는 한, 이러한 태도는 불가피한 것이다.

교회가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두려움과 증오를 이용하는 데 반대하는 두 번째 답변은 보다 근본적인 태도를 취한다. 즉, 이러한 정서는 교육, 경제, 정치 분야의 개혁을 통해 인간의 본성에서 거의 대부분 제거될 수 있다고 본다. 특히 교육 개혁이 그 기초가 되어야 한다. 증오와 두려움을 느끼는 사람들은 그러한 감정을 찬양하면서 영속화하고자 하는 경향도 함께 지니기 때문이다. 물론 평범한 기독교인에게서 볼 수 있듯 자신도 모르는 새 무의식중에 그러는 것이겠지만 말이다. 아이를 다정하게 대하고, 아이가 불행한 결과가 나오지 않을까 걱정할 필요없이 창의력을 발휘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해주고, 어둠이나 쥐나 사회 혁명 등등에 대해 공연히 비합리적인 공포를 심어주는 성인과 교류하지 않도록 막아주기만 하면 된다. 또한 어린이는 가혹한 처벌이나 위협, 과중한 견책의 대상이 되어서도 안된다. 어린이를 증오심에서 구해내는 데는 좀더 세심한 작업이 요구된다. 다른 아이들과의 관계 속에 시기심이 일어나는 상황이 발생하지 않도록 세심하고도 정확한 정의관을 보여주려 노력해야 한다. 어린이로 하여금 자신과 관계 맺은 어른들 중에는 적어도 몇몇은 자신을 따뜻한 애정의 대상으로 본다는 느낌이 들게 할 것이며, 생명이나 건강에 위협이 없는 한 아이의 자연스런 행동이나 호기심을 막아서는 안된다. 특히 성에 대한 지식이나, 보수적인 사람들이 부당하게 여기는 문제들에 대해, 아이들이 얘기하는 것을 금기시해선 절대 안된다. 이런 간단한 원칙들을 처음부터 잘 지켜나간다면 아이는 두려움 없고 다정스런 성품으로 자랄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교육받은 젊은이들도 성인의 문턱에 들어서게 되면 자신이 불의와 잔인함과, 막을 수도 있었던 불행으로 온통 가득 찬 세상에 던져 졌다고 느끼기 쉽다. 현대 사회에 존재하는 불의와 잔인함과 불행함은 과거로부터 물려받은 것으로서 궁극적 원인은 경제에 있다. 예전에는 생계 수단을 사이에 두고 생사를 건 싸움을 벌이는 것이 불가피했기 때문이다. 우리 시대에서는 이런 싸움이 불가피하지 않다. 오늘날의 산업 기술이 있는 한 우리는 마음만 먹으면 만인에게 넉넉한 물질을 제공할 수 있다. 세계의 인구 문제 역시도, 피임을 택하느기 전쟁과 질병과 굶주림 쪽을 택하는 교회의 정치적 영향력만 막을 수 있다면 인구를 안정시킬 수 있을 것이다. 지식은 그것이 어떠한 보편적 행복을 보장해 주느냐에 따라 존재한다. 종교적 가르침은 그러한 목적으로 지식을 활용하는 게 걸림돌이 되는 주요 방해물이다. 죵교는 우리의 아이들이 합리적인 교육을 받는 것을 방해한다. 우리가 전쟁의 근본 원인을 제거하려는 것을 방해한다. 죄와 벌이라는 낡고 험악한 교리 대신에 과학이 뒷받침된 윤리를 가르치는 것을 방해한다. 인류는 이제 황금 시대의 문턱에 서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한다면 먼저 이 문들 막고 있는 괴물부터 처리해야 하는데 그 괴물이 바로 종교인 것이다. (1930년에 처음 발행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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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한주 방 2004.10.03 00:37
하도 길어서 다읽어보지는 못했는데 전체적인내용은 종교를 표방하고,주로 교회의 문제를 언급했는데 교회는 즉 기독교를 파헤친것같으면서도 나아갈 방향을 제시해주는 모순을 담고있고, 그기에 티벳불교를 한구절인용했는데 티벳불교가 어째서몽매하면서 잔인한지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없다.이런글을 읽는 사람들이 자칫 오해하기 쉬운구절아닌가?기독교는 문제를 하나하나짚고있으면서도 티벳불교의 문제는 악마적인문구를 갖다붙여놓고는 슬며시 빠져버린듯한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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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2 미신박멸을 위한 대책 ... by 적그리스도 댓글+6 ※※※ 2004.09.30 3756
571 퇴행(REGRESSION) 댓글+1 오브르 2004.09.30 3885
570 성서나 기독교보다 파스칼부터 박살을 내야 합니다 댓글+4 루라 2004.09.29 3990
569 또 다른 명언 오브르 2004.09.28 3517
568 안티방을 이용하는 안티여러분들께 by 김햏 오브르 2004.09.28 2919
567 환상의 치료 댓글+1 오브르 2004.09.28 3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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