朴景利님의글 윤리와정서 그리고 孝

저는 신입니다. 왠줄 아십니까?

제 일기장에 제가 신이라고 적혀있기 때문입니다. 제 말은 진리입니다. 왠줄 아십니까? 제 일기장에 제 말은 진리라고 적어놨기 때문입니다. -엑스

朴景利님의글 윤리와정서 그리고 孝

한주 방 1 3,663 2004.08.29 00:45
▼윤리와 정서
朴景利(作家)
    ♣ 민족문화연구소는 지난 1996년 11월 7일 본교 대외협력처와 공동으로 <제5회 바른 교육·큰사람 만들기 포럼>을 개최하였다. 「土地」의 작가이신 박경리 선생을 모시고 "윤리와 정서"라는 주제로 열린 이날 포럼은, 500명이 넘는 청중이 참가하는 성황을 이루었다. 지정질의는 본교 사회학과 김문조 교수와 연극평론가 이영미씨가 맡았는데, 여기에 이날 포럼의 발표문을 전재한다     윤리도덕이 땅에 떨어졌다. 흔히 듣는 말이지만 요즈막에 와서는 거의 그 말에 대한 반응이 없는 것 같습니다. 윤리도덕에 한해서만 그런 현상이 나타나는 것은 물론 아닙니다. 전반적으로 사람들 의식이 지엽에만 매달려 있고 근본에 대한 지각은 이미 상실된 것이 아닐까 의심이 들 지경입니다. 현실은 요란하고 분주하며 유동은 눈부셔서 사회가 활기에 넘쳐 있는 듯 보여집니다. 영상매체는 말할 것도 없고 홍수같이 쏟아져나오는 간행물이며 신문·잡지 등, 그 속에는 각기의 목소리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세상이 침묵 속에 가라앉은 것 같은 착각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마치 무성영화처럼 그런가 하면, 정지된 화면같이 온 세상이 순환을 멈춘 것이 아닌가, 그렇게 느껴질 때도 있겠습니다. 이것은 일종의 환상인지 모릅니다. 미래에 대한 예감같은 것이라고 할 수도 있겠고 끔찍한 망상일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시대의 흐름 속에는 이성이나 인간 본성으로는 제어할 수 없는 거대한 물질의 힘, 그것이 자행하는 갖가지 폐단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물질로 인하여 인간이 주체성을 잃어 가고 있는 것은 부정 못합니다. 흔히 돈의 노예, 물질의 노예라고들 하는데 그간의 사정을 단적으로 표현한 말입니다. 이같은 현실 속에서는 누군가가 있어서 진실을 말하고 옳은 말을 하여도 듣는 이가 없을 것이며, 설사 듣는 이가 있다 할지라도 자신이 처한 자리에서 판단하려 한다면 이 또한 듣는 이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말의 성찬, 제각기의 목소리, 어느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토해 내는 목소리들이 충만해 있음에도 침묵으로 느끼는 것은 듣는 이가 없다는 바로 그같은 사회적 현상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심각한 것은 말하는 이들이 결국에는 도태되고 만다는 일입니다. 군사정권시대처럼 권력이 그러는 것도 아니며 허공과 같은 대세에 의해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왜 그것이 심각한 일인가, 말하자면 종자가 없어지기 때문이지요. 생명들은 그 연속을 위해 모두 씨앗을 남깁니다. 해서 생명들은 수만년을 존속해 왔고, 이와 마찬가지로 진리나 진실을 향해 탐구해 온 말, 삶의 규범을 정립해 온 말들도 씨앗인 것입니다. 인간의 역사와 더불어 말들은 씨앗으로 존속해 왔습니다. 이 밖에도, 이것은 아주 집요한 유혹이지만 말하는 이의 동요하는 신념입니다. 동요는 무반응에 대한 공포이며 고립감이기도 합니다. 과연 나는 진실을 말하였는가, 옳게 생각했는가, 회의에 시달리다가 종내는 다수에 휩싸여 흔적을 지워 버리게 됩니다. 좌절하고 체념하며 자포하거나 침묵하게 됩니다. 이것은 사회적으로 일반화된 현상이기도 하지만 특히 오늘날 지식인들의 풍토를 휩쓸고 있다 하여도 결코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피동적인 삶으로 후퇴하여 꿈도 이상도 잃고 다만 지식이란 일종의 매물로서 생활의 수단이라는 인식, 문학 역시 생산해 내는 상품으로서 작가도 돈버는 사람이라는 생각, 아무리 자본주의의 원리가 시장에 있다 하더라도 교육이나 예술까지 상품가치로 치부한다면 교육은 이미 부재일 것이며 예술은 창조행위로 볼 수 없을 것입니다. 물질주의의 독재라고나 할까요. 그동안 많은 생명들이 멸종했습니다. 수천년 경험의 축적인 문화의 중요한 부분들도 소실되었습니다. 물질을 존재의 근원으로 보는 입장에서는 '추상적인 것은 허약하고 비생산적이며 별반 가치가 없다'고 합니다. 이는 일상에서도 종종 부딪치게 되는 견해입니다. 물질문명에 적극적인 사람들의 합리적 사고방식이지요   20세기는 자본주의든 사회주의든, 이 두 이념의 갈등이 제 아무리 격렬했다 하더라도 한 뿌리에서 발아했으며, 다 같이 물질에 의한 과학으로서 형성된 시대였습니다. 그 한 세기 동안 우리 민족의 궤적을 살펴볼 것 같으면 바로 수난사 그 자체라 할 수 있는데, 5백년 조선조가 종언을 고했고 일제의 모진 사슬에 묶여 있다가 8·15 해방을 맞이했지만 민족이 좌우로 분열되어 6·25 동란이라는 처참한 동족상쟁을 겪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이러한 격랑 속에서 뒤늦게, 그나마 분단상태와 군사독재의 암울함 속에서도 민족 특유의 순발력과 창의적 원동력으로 여하튼 자본주의는 뿌리를 박게 되었으며 그것에 수반되는 온갖 문제와 모순, 갈등을 내포하면서도 오늘에 이르러 비록 한시적인 것이지만 소위 문명의 이기를 활용하여 물질의 풍요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들 정신의 영역은 좁아졌고 빈곤해졌으며 사회질서의 붕괴 위험의 요인으로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해서 명분의 허구성이 도처에서 노정 되고 있습니다. 그 사례의 하나로서, 지금 활발하게 세계화의 문제가 논의되고 있지만, 그것은 기술적인 측면과 경제적 진출의 목적이 저변에 깔려 있는 것으로 진정한 인류적 차원에서는 비켜난 것입니다   세계화, 세계주의란 오랜 옛적부터 인류가 소망했던 이상으로서 국가나 민족간의 평등을 구현함으로써 전쟁이 없는 세계의 정부, 지구를 다스리는 하나의 정부, 인류의 정부를 수립하는 것이었습니다. 1차 세계대전 후의 국제연맹이나 2차 세계대전 후의 국제연합도 강대국에 의해 설립되고 결국에는 세계의 정치무대가 되고 말았지만, 본래의 이상은 세계가 통합되어 전쟁이 없는 올바른 질서를 찾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이상은 깡그리 사라지고 참으로 모호한 모습으로 다시 등장한 셈인데 신무기를 개발하여 세계 도처에서 판매되는 그런 세계화도 있을 수 있겠고, 경제적 판도를 넓히기 위한 세계진출의 세계화도 있을 수 있겠고, 무한경쟁의 대상으로서의 세계, 그런 선상에서의 세계화라면 호도에 불과한 것으로 본래의 이상과는 부합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명분이 약해집니다. 세계진출을 굳이 반대하여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용어가 적합하지 않다는 것이며 비유가 적절하지는 않습니다만 과거 동양의 평화를 내세우면서 침략전을 감행했던 일본의 경우도 있는 만큼, 명분은 확실해야 하며, 안팎이 같아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하기는 자본주의 체제의 한계일 것이며 상품광고에는 성역이 없는 오늘을 생각할 때, 그러나 그 같은 가치전도의 현실에 제동을 걸기 위해서라도 또 국가의 자존심을 위해서도 명분은 선명해야 할 줄 압니다   어쨌거나 세계를 향해 문호는 개방되었고 넓은 공간을 향유할 수 있었음에도 사람의 시각이 좁아져 가는 이율배반, 그것은 물질에 치우친 데서 오는 의식의 축소일 것입니다.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공간은 무한대입니다. 확실한 것보다 불확실한 것 역시 무한대입니다. 우리가 보지 못하고 확실할 수 없다 하여 그것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보이는 것, 확실한 것에다 말뚝을 박아 놓은 물질주의, 과학만능은 새로운 구속일 수도, 억압일 수도 있습니다. 즉 선택이 한정되어 있다는 점을 들 수 있습니다. 현실을 무시할 수 없다는, 흔히 쓰이는 말인데 오늘날 이 말같이 설득력이 강한 것은 달리 없을 성싶습니다. 막히게 되면 언제나 꺼내는 전가의 보도 같은 것이며 근본적으로 봉쇄해 버리는 위협적인 말이기도 합니다. 도대체 오늘의 현실은 어떤 현실일까요. 방향전환이 불가능하며 방법이 없다는 것인지, 최상의 상태로서 다른 대안이 필요 없다는 것인지   물론 물질문명이 우리 인류에게 가져다 준 것은 막대한 것이었습니다. 격세지감이란 오늘을 두고 할 수 있는 표현입니다. 비록 한시적인 것이기는 해도 풍요로움을 우리에게 안겨 주었고 다양한 생활양식을 선물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에 못지 않게 우리는 많은 것을 잃었습니다. 지구가 망가지고 자원이 고갈될 것이라는 전망, 이러한 가시적인 피해에 대해서 일일이 매거(每擧)할 수는 없고 보이지 않는 부분, 정신영역에 속하는 부분의 황폐도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비생산적이며 별반 가치가 없는 분야, 그러나 명심할 일은 존재의 원리가 균형이라는 점입니다. 육체와 정신은 분리된 것이 아니며 그것은 하나입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하나만을 선택할 수는 없습니다. 그릇이 있어야 물이 형태를 잡듯, 생명이 지닌 능동적인 것에 의해 피동적인 물질은 변화하는 것입니다. 어찌 보이지 않는다 하여 우주의 공간을 부정할 수 있겠습니까. 엄연히 그것이 물질은 아니지만 존재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이룩해 놓은 그 모든 추상적인 것은 능동적인 능력에 의해 능동적 내용이 담겨져 있는 것이기 때문에 매우 소중한 것이며 중심에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한시적인 풍요를 위하여 우리는 많은 것을 버렸고 또 잃었습니다. 민족의 정서를 포옹한 우리 고유의 말들의 많은 부분이 사어가 되었고 추상적인 그 많은 가치관은 물질주의에 의해 압사되거나 빈사상태입니다. 그러나 잃은 그런 것들에 대하여 지금 슬픈 만가를 부르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지구가 망가지는 등 인류에게 닥쳐올 가시적인 문제는 가시적인 물질로 해결이 안 된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으며 능동적인 생명의 힘에 의해서, 본질을 추구하는 사고에서만이 해답이 나올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자 한 것입니다   '윤리와 정서'라는 제목을 내걸어 놓고 너무 길게 변죽만 친 것 같습니다. 어디에서부터 진입을 해야 할지, 그만큼 현실의 여건이 윤리나 정서를 논하기에 어렵게 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반윤리적 행위가 다반사로 되어 있고 살부와 살모, 천륜을 저버린 친족살해 같은 사건도 그리 드문 일이 아닌 것을 보면 물질이 넉넉해짐으로써 인성도 넉넉해지리라는 기대를 뒤엎고 오히려 욕망의 분출이 보다 확대되어 가는 그 이치, 알 듯도 합니다. 물론 그 같은 범죄행위는 법이 다스릴 것이지만 법의 범위를 벗어난 비윤리적인 행동이나 사고방식은 비일비재, 사회의 뚜렷한 현상입니다. 옛날에는 윤리도덕에 불문율이 따랐고 예방하기 위하여 학습을 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과연 그 불문율이 존재하는가. 학습은 하고 있는가의 문제를 생각해 볼 수 있고 근본적으로 사회가 그러한 불문율을 보장하고 있는지, 학습을 권장하고 있는지가 문제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 부정적인 것으로 보여집니다   첫째, 불문율은 자유와 개인의 권리에 의해 저지되고 있으며 옛날과 같은 작은 단위의 공동체가 무너져 버린 현재로서는 사실상 불문율이 효력을 나타낼 장소가 없는 것입니다. 두 번째, 학습의 경우, 이것은 어릴 적부터 가르쳐야 하는 것이지만 앞에서도 말했듯이 가치관의 변화는 진작부터 있어 왔기 때문에 옛날과 같은 부모의 소임은 이미 맥이 끊어진 상태라 할 수 있고 학교 교육 역시 입시교육, 기술교육이 화급하고 실리에 치우쳐 그럴 겨를이 없습니다. 사회적으로도 실리교육과 인성교육에 대한 인식의 격차가 너무나 커서 윤리는 철저하게 현실감을 잃고 말았습니다. 인간은 교육에 의해 다른 차원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격이나 인성의 도야로 정신적인 다른 차원의 삶을 얻는 것보다 가시적인 물질과 출세를 통하여 다른 차원의 삶을 누리겠다는 오늘의 저 무성한 욕망은 과연 그 어느 쪽을 택하겠습니까.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기술의 습득, 입시를 위한 학습, 그것은 선택이 아니라 필연이니까요. 하여 대학을 나왔어도 교양이 없고 윤리의식이 희박하며 언어구사가 서툴고 예절을 모르는 젊은이들을 더러 보게 되는 것입니다   불경 중에《목련경》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목련존자가 석가에게 간청하여 지옥에 떨어져서 도현의 고초를 겪는 악모를 구원하는 과정을 서술한 경문입니다. 그리고 이 일이 연유가 되어 7월 백중을 정하여 망자의 극락왕생을 비는 행사가 있고 오늘까지 유래되어 법사를 지속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목련존자의 행위는 물론 효행입니다. 정서적인 것이냐, 윤리적인 것이냐, 한번 생각해 볼 수도 있는 일 아닐까요. 목련존자의 효행은 윤리적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악행을 거듭하여 지옥에 떨어졌던 모친은 정서를 함양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었고 그리움을 자아내게 할 만한 공동의 추억도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악행을 저지르지 않으면 안 되었던 모친에 대한 연민은 있었겠지만요   다음은 목련경과 백중날의 행사인데 그것에는 분명하게 효행을 권장하는 의도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고려장이라는 그 시대의 어두운 흔적을 상기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일본에서도《나라야마부시고》라는 소설에 고려장이 재현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일본의 경우는 '마비끼', 즉 솎아낸다는 뜻인데 아이들을 죽였던 것입니다. 노인이든 아이든 그것은 윤리 이전의, 생존을 위하여 처참하게 벌어진 인간의 비극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다음, 유교를 정치이념으로 내걸며 역사 표면에 나타난 조선조는 유교의 중심사상인 효제와 충서를 권장이 아닌 필수적 실천의 덕목으로 하고 그 가치관을 확고히 했습니다. 그리하여 조상숭배는 우리 민족의 정신 속에 뿌리를 내렸고 효사상은 말단 기층계급에까지 관념으로 굳어졌던 것입니다. 강압에서 오는 폐단도 물론 있었습니다.《심청전》의 내용에서도 그렇고, 가난한 사람들은 장사, 제사 등을 치르면서 과용으로 빚을 지고 허리 펼 날이 없었다는 것도 그렇고, 양반계급에서는 형식을 중히 여기며 형식에 흐른 폐단도 들 수 있을 것입니다   여하튼 이러한 가치관이 깨어지기로는 한일합방 후 계몽파와 기독교문화, 일본의 민족문화 말살이라는 세 개의 흐름에서 시작되었고, 주로 동경유학생들이 주류를 이룬 계몽파는 성급하게 우리 문화를 부정하고 파괴의 일익을 담당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한 세기 동안 서양문명을 받아들이기 위하여 꾸준히 우리 것을 부정하고 지속적으로 파괴하여 왔다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당시로서는 그것도 하나의 명분이었겠으나 자강해야 한다는 방법에는 오류의 삯이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내 것을 부정하는 것은 나를 모멸한다는 것이며 내 민족에 대한 모멸감, 즉 엽전사상이라는 비하의식이 식자층을 잠식하여 오늘 현재에도 일부 식자층에 그 잔재가 청산되지 못한 채 새로운 친일파가 등장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사상이 빈약하여 알맹이가 비어 있는 일본의 신도에다 불교를 접합하여 신불습합이니, 유교를 끌어들여 신유습합이니 하고 갈팡질팡 방법을 모색했던 일본에 윤리도덕의 관념이 희박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해방 후, 재기한 일본을 경이와 선망으로 바라보는 일부 무지각한 사람들이 일본을 본으로 삼으려 했던 것이 우리 고유의 가치관이 무너져 내리는 요인 중의 하나였으며 가속의 역할을 했다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어쨌거나 시대를 지배하는 하나의 이념은 적든 많든 강압성을 띄게 마련인데 자유를 막으며 구속하는 것으로, 또는 곰팡내 나는 구시대의 것으로 치부하는 윤리도덕, 그것에 속해 있고 권장의 대상인 효도를 다른 해석 방법으로 현실에 접근하게 할 수는 없겠는지, 목련존자의 효행에 관해 잠시 언급을 했습니다만 그것은 윤리로서의 효행으로 보았습니다. 그와는 다르게 정서로서 길을 트게 할 수는 없겠는지. 학습하고 권장하는 것이 아닌 내부에서 우러나는 것 말입니다. 정서교육이라는 말이 있기는 있으나 그것은 정서가 우러나게 환경을 마련해 주는 것으로, 강압하고 권장하는 성질의 것은 아닙니다. 언젠가 들은 얘깁니다만 내가 아는 어떤 부인이 전해 준 것입니다. 그 부인이 외출에서 돌아왔을 때 주방에서 그의 남편이 무 하나를 깎아서 어적어적 씹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남편은 말하기를 지나오는 길에 리아카에 실려 있는 무를 보니 할머니 생각이 나서 사왔노라. 그러고는 어릴 적에 학교에서 돌아오는 고갯길에 이르면 멀리 기다리고 서 있는 할머니를 볼 수 있었고 할머니는 얼른 밭에서 무를 뽑아 깎아주면서 "배고프제. 이거 먹어라." 그런 내력을 말하면서 할머니 손에 자란 그의 남편이 울더라는 대강의 얘기였습니다.   그리워하는 마음, 그리움 그것이 효도 아닐까요? 우러나는 마음, 형식이 아닌 마음, 물론 그 정서를 형성하는 데는 부모가 정서적이어야 할 것입니다. 정서적 환경도 필요할 것입니다. 정서적인 공동의 추억도 있어야겠지요. 배금사상에 찌들고 출세라는 목표를 향해 자식을 내모는 그런 부모와 자식의 관계라면 서로간에 차디찬 계산 밖에 남는 것이 없을 것입니다. 출세한 자식, 돈에 길들여진 자식, 형식적 효도는 가능할지 모르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깊은 고뇌 없이 부모를 배반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현실적으로도 많이 목격하는 일이지만 도시보다 시골에 그 정서적인 효심이 많이 남아 있는 듯 하고 출세하고 많이 배운 층보다 육체노동을 하는 서민층이 육친에 대한 유대감이 강한 것 같았습니다.   얼마 전에 TV에서 동물의 세계를 보고 깊이 생각해 본 일이 있었습니다. 한 집단의 고릴라가 이동하는 장면이 있었는데 노쇠한 고릴라 한 마리가 낙오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자식으로 이미 다 자란 두 마리의 고릴라가 아비를 돌보기 위해 함께 낙오되었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늙고 병든 고릴라는 죽고 마는데 두 마리의 자식이 가슴을 뚜드리며 야단이 난 것입니다. 슬픔의 격렬한 표시였습니다. 그러나 아비가 죽은 뒤에도 그 곁을 떠나지 않고 서성대며 부패하기 시작한 아비의 시체 곁에 앉아서는 털을 고르는 광경을 볼 수 있었습니다. 또 기억나는 것은 사자떼들에게 습격을 받은 물소를 구출하기 위해 모여든 물소들이 상처받은 물소를 안전지대인 물 속으로 몰고 가는 장면도 TV에서 본 적이 있습니다. 흔히 말하기를 동물들의 행동을 본능이라고들 합니다. 그러나 그와 꼭 같은 행동을 하는 인간들에게는 본능이 아닌 윤리도덕의 기준으로 말합니다. 왜 그럴까요? 동물에게는 윤리도덕이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물론 고릴라나 물소의 행동이 윤리도덕에서 나온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은 본능이 아닌 정서라고 생각합니다. 공동의 추억을 가진 것들이 느끼는 그리움, 정이지요. 누가 가르친 것도, 시킨 것도 아닌 저절로 우러나는 마음일 것입니다. 우리가 진실로 되찾아야 하는 것은 가르치는 이치에 앞서 우러나는 순수한 그것일 것입니다. 그리고 사회와 개인이 상호적으로 작용해야 하며 사회에 대한 인식이 자연을 연상하게 하는 것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사물에 대한 애정도 자연에서 비롯되는 것이며 생명에서 싹트는 것입니다. 차디찬 물질문명은 인성도 물질화하는 어쩔 수 없는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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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한주 방 2004.08.29 00:53
부모와 처자와 형제를 이간질 시키고 죽이는 개독환자들아  위의글을 자세히 읽어봐라 .
한낱 미물도 그럴진대 하물며 인간의 탈을쓰고 허접쓰레기 같은 바이블을 옆에끼고 다니느냐?
부끄러움을 알아야한다 .
살인과 방화그리고 남의문화를 깡그리 망치는 못된신 야훼에게 세뇌된자들아....
마음속깊은곳에서 솟아나는 눈물로
그대들의 가슴을 적셔보아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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