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의 폐단, 그 사회적 문제의 근본 원인

저는 신입니다. 왠줄 아십니까?

제 일기장에 제가 신이라고 적혀있기 때문입니다. 제 말은 진리입니다. 왠줄 아십니까? 제 일기장에 제 말은 진리라고 적어놨기 때문입니다. -엑스

종교의 폐단, 그 사회적 문제의 근본 원인

Black Jack 0 3,059 2003.08.11 20:38

토속종교, 무당, 등은 미신이라는 이름으로 사회에서 정통성을 잃었지만, 공공성을 갖는 기독교, 불교, 천주교, 유교 등은 샤머니즘이 갖는 미신성을 체계 내부로 흡수함으로서 종교의 본질인 ‘우상’성을 유지하는데는 전혀 흔들림이 없는 듯 하다. 덕분에 불안감을 볼모로한 종교 비지니스는 날로 번창하고 있다. 그들이 시장을 키워가는 마케팅전략으로는 이적에 대한 기대감을 부여하는 것과 그에 대한 적당한 모호성을 유지하는 것 그리고 신비성이라는 포장으로 아름답게 마무리 하는 것이다.

여러 종교와 사상적 신념체계가 공존하는 곳이 사회라는 틀이라고 보았을 때, 특정한 종교가 그 교리를 절대화 하고, 실력화하는 것은 이익집단의 실력행사와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종교가 대중의 불안한 심리를 안정시킨다는 점에서 기여하고 있는 측면은 어느정도 인정해야 할 것이나 국민의 정서적인 가치관 뿐 아니라 정치경제적으로도 실질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측면에서 정당, 사회단체, 기업처럼 사회적 비판의 예외로서 존재할 수만은 없을 것이다.

종교가 신이라는 이름으로 삶과 죽음에 대한 불안에서 벗어날 수 있는 신념체계를 제시하는 장이라면 각각의 종교가 외계인을 맞이하듯 반목을 일으킬 이유는 전연 없는 것이다. 핵심은 ‘신’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존재의 근원에 도달하는 것이고 결과적으로 불안에서 내적 확신에 도달하는 것이므로 타종교와 사상을 배제하고 자신의 ‘신’을 ‘유일’로 내세우는 행위는 산의 정상을 오르는 길이 오직 하나 뿐이라며 진실을 호도하는 어리석은 열등감이며 스스로 ‘사이비’임을 자인하는 퀵서비스에 지나지 않는다.

선진국을 부르짖는 한국은 2만달러라는 수치적 환상에 매달리거나 몇몇 정치인을 성토하는 것이 사태 해결의 원인인냥 목청을 높일 것이 아니라 '선진'의 근본 의미에 해당하는 질적 맥락에 대한 논의를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런 차원에서 '삶과 죽음'의 핵심에 서있는 종교의 본질을 담론화하는 작업이 불가결 할 것 같다.

  

신의 다양성과 그 의미

세대, 교육수준, 지역, 종교 등의 차이에 따라 모두 ‘신’에 대한 다른 생각 지니고 있다면 그것은 미지의 X를 논하는 것과 큰 차이가 없는 것이다. 믿음을 갖는 개인의 시각과 수준을 통해 개개인이 파악하고 의지하고 싶은만큼의 모습으로 ‘신’이 다양하게 존재한다면 그것을 논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주어와 술어는 동일한 맥락을 지니는 것이고 신에 대한 이해는 ‘믿는다’는 한가지로서 단위적 완성을 이루고 있으므로 종교의 종류와 믿음의 수준을 떠나 술어를 추적하면 ‘신’의 공통성을 파악하고 그것에 올바르게 다가설 수 있을 것이다

종교는 신을 추구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신’이라는 상징을 통해서 삶과 그 이후의 막연함에 방향을 찾고자 하는 인간이라는 생류 특유의 본능적인 행위이다. 인간 이하의 생물은 삶과 죽음에 대한 느낌이 ‘생존 본능’에 일정한 패턴으로 주어져 있어 ‘행복’과 ‘불안’을 느끼기는 하지만 의식적으로 파악되지는 않는다. ‘삶의 즐거움’이나 ‘죽음의 공포’는 의식 이전의 본능속에서 분화되기 이전의 상태로 존재하기 때문에, 본능이 허락하는 감각능력과 시간감지능력 아래의 미시적인 순간 순간이 최선의 의미가 된다.

반면 성경의 선악과가 말하는 상징처럼 선악, 미추, 생사 등의 희로애락을 구별할 수 있는 인식능력을 분화된 본능으로 갖고 태어난 인간은 시간적으로 스스로의 삶의 유한성을 자각하고 공간적으로 감각능력을 초월한 우주에까지 시야를 확장할 수 있게 됨으로서, ‘지금’을 넘어선 막연한 미래의 죽음에 대한 의식적 공포와 거대한 공간에서의 좌표 상실로, ‘불안’을 삶의 커다란 축으로 구성하게 된다. ‘인식적 본능’으로 말미암아, 화려한 문화를 꽃피우는 장점을 갖게 된 반면 인식의 예측능력을 통해, 생명 감각의 한계성과 시간과 공간의 무한성 사이에서 심각한 혼동과 불안, 방향상실에 처하게 된 것이다.



신이 우상이 될 수 밖에 없는 이유

인간은 생각하는 능력을 기반으로 삶을 영위하는 영장류로서, 삶과 죽음의 방향부재에 대한 무의식적 불안을 또하나의 본능으로 삼고 ‘인식’이전의 동물적 본능으로 돌아갈 수는 없는 까닭에, 그 불안을 피하는 일환으로 탄생시킨 ‘신’은 기본적으로 ‘우상’의 모습을 갖지 않을 수가 없다. ‘신’은 삶의 한계와 방향상실로 인한 두려움이 ‘철인들의 존재에 대한 통찰’을 소망의 형태로 인격화한, 개개인의 사고수준만큼의 자의적 심리가 숨쉬는 안식처라 할 것이다. 믿음은 불안과 부족한 정보 수준에 따른 정서적 강도를 갖으며, 그 수준이 만들어낸 이미지가 개개인의 머릿속에 구성되어 각기 상이한 신의 모습을 그리게 된다.

삶과 죽음의 방향부재로 인한 불안을 덤덤하게 초탈할만큼 존재에 대한 통찰력을 갖게 된다면 ‘신’은 불필요해지게 된다. 왜냐하면 ‘신’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신을 통한 내면적 불안의 거세가 그 진정한 목적이기 때문이다. ‘믿는다’는 것은 ‘신’이라는 상징을 통해 불안감을 거세해가는 과도기적인 의미이지 그 자체가 ‘완성’의 의미는 아닌 것이다. ‘믿는다’는 것은 믿을 대상을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 스스로 존재의 방향을 아직 잡지 못한다는 것이고, 방향부재는 통찰부재를 의미하기 때문에 모호성이 상존하게 되고 그것은 다시 불안을 유발하여 안식처를 찾게 된다. 그 안식처에 대한 집착이 ‘믿음’의 형태로 드러나고‘믿음’의 수준이 만들어낸 상징으로서 각기 상이한 ‘신’을 영접하므로서 불안을 달래게 되므로 종교인들의 행태에는 기본적으로 ‘맹목성’과 대립이 드러날 수 밖에 없다.

신이 있다고 한다면, 존재의 총체인 우주에 대한 이해가 신이며, 믿음이 있다고 한다면 스스로의 불안과 모호함을 거세할 수 있는 방향을 찾는 행위가 믿음이라 할 것이다.  



암기와 믿음의 상관관계

종교는 근본적으로 믿음체계가 아니라 수신과 각성체계이다. 종교를 믿음체계화 하는 것은 이해과목을 암기과목화 하는 것처럼 맥락을 모르고 문장을 외우는 격이다. 종교에 귀의하는 이유는 삶의 방향을 제대로 잡고 올바르게 살고자 하는 것에 다름 아닐 것이다. 성경이나 각종 교리는 맥락을 파악하고 각자의 삶에 융통성 있게 적용하라고 있는 것이지, 삶에 적용하지도 못할 구절들을 장/절을 구분하여 암기력을 테스트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외운다는 것은 맥락을 파악할 능력이 없거나, 실천보다는 알고 있다는 것을 과시하기 위해 어리석은 자들이 사용하는 단순한 폐쇄회로 조립작업에 불과한 것이다.

그렇다면 종교가 믿음체계로 전락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정권이 자기의 말을 듣지 않으면 체제 전복자 등으로 매도하는것과, 학생이 외우라는 것을 외우지 않고 이해에 대한 의문을 갖는 것을 교권에 대한 도전으로 생각하는 것, 군대에서 상급자에게 이의를 제기하는 것을 하극상이라고 생각하는 것 등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것으로 경직된 흑백논리에서 연유한다. 흑백논리는 복잡한 세상을 다각적으로 파악하고 조율하는 것을 포기하는 대신 양극으로 나뉘어진 세계를 축으로 서로를 비난함으로서 뭔가 보호받는 듯한 느낌을 얻고 자신의 정체성과 안정감을 얻는 기제로서 기본적으로 스스로 세상에 맞설 능력이 없는 '불안감'을 기반으로 하는 것이다.

종교가 자기의 해석을 따르지 않으면 이단취급을 하고 죄책감을 씌우면서 사랑과 자비의 원칙과 정반대의 길을 걸으면서도 굳건히 세력을 유지하는 이유는 내적 불안감을 떨구고 스스로 세상의 조율적 주체로 나설수 있는 구도의 자세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불안감을 고스란히 두면서도 뭔가 안정된 느낌을 주는 '믿음'체계로서 교묘한 형질변경을 이뤄버렸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나치의 광기처럼 자신의 불안한 열등감을 ‘우월감’으로 파악하는 착각을 쉽게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우상에의 집착은 점점 커질 뿐이다. 이것은 종교당국이나 신도 어느 일방의 문제라기 보다는 존재의 모습을 올바로 찾지 못한 양자가 불안감의 무게에 서로 부둥켜 안고 신이라는 이름의 우상의 노예로 자발적 진입을 이룬 탓이다.  

 

인간이 신을 위한 것인가, 그 逆인가.

신은 진리의 상징이며, 삶에 방향을 주는 개념체계이지 집착의 대상이 아니라는 점에서 신은 인간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다. 신이라고 하더라도 사람에 따라 다양한 모습으로 그려진다면, 진리성을 증명할 수 없는만큼 잘못된 방향을 주게 되므로 신은 ‘우상’의 별칭에 지나지 않게 된다. 또한 신이 진정한 신이기 위해서는 특정한 누군가를 위해서 존재하는 기복신앙의 대상이 아니라 모든 이를 위해서 존재하는 가치 초월적인 모습을 견지해야 해야 할 것이므로 인간의 상상과 다르게 신비감이나 초능력 또는 초월성을 갖을 이유가 없으며, 신을 그런 모습으로 그린다는 것 자체가 표적수사를 하는 것처럼, 존재하는 신을 찾는 것이 아니라 내적 소망이 그리는 신을 영접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의 시야를 흐리는 가치판단을 벗어나면 신은 그곳에 언제나 존재하고 있는 것이며 일상속에서 그 느낌을 감지 할 수 있다면 신의 논의는 더이상 무의미한 것이다.

해가 뜨고 달이 뜨는 것은 특정한 누구를 위한 것이 아니며, 그렇다고 누군가를 무시하는 것도 아니다. 각각의 존재는 그 자체로서 또다른 존재들을 위하는 것이고, 신이 절대의 상징이라면 그것은 존재의 총체로서, 인간을 포함한 우주 아래 각각의 수준에 해당하는 존재들이 에너지를 조율하는 거대한 흐름을 말하는 ‘자체 완성기제’이지, 누구를 위하고 무시하는 피조물의 편협적인 감정 체계는 아닌 것이다. 그럼에도 신이 인격화된 우상으로서 믿음의 대상으로 전락되는 이유는, 어린 아이가 ‘사랑’을 물었을 때 그 수준에 맞는 적당한 답을 찾을 수가 없어, 행복한 모습의 결혼 사진을 들어 보이며 ‘이런게 사랑이야’라고 말할 수 밖에 없는 상황과 비슷한 맥락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종교는 몸의 뼈대를 세우듯 끊임없는 구도적 자세와 시행착오를 통해 행동의 원리와 강령으로서 일상에서 내면화하는 것이지, 일부 신자들의 맹목적인 포교활동처럼 종교에 삶을 던지고 ‘신을 영접’하는 행위로 천국이 약속되는 서비스 매매행위가 아닌 것이다. 맹신자들의 모습은 극단적 일부 종파의 문제라기 보다는 현재의 종교수준이 갖는 ‘믿음체계’의 근본적 문제와 맞닿아 있는 것이므로 자성차원에서라도 종교는 개혁의 자세를 견지해야 할 것이다.

종교가 신을 목적으로 삼지 않고 신을 통해 자기완성을 목적으로 삼을 때, 사랑과 자비의 본질을 되찾고 세상을 풍요로 인도하는 본당으로 자리매김 할 수 있을 것이다. 시야가 넓어지고 삶과 존재에 대한 이해도가 깊어지는만큼 내면의 불안감은 사라져 가고 궁극적인 자기완성에 이르게 된다는 점에서 종교는 ‘믿음’의 패러다임을 종식시키고 ‘구도’의 패러다임으로 다시 서지 않으면 안된다. 종교는 존재에 대한 시야를 넓히고 시행착오를 통해 서로를 이해해 가는 주체적 커뮤니케이션 과정에 다름 아닌 것이다.

종교가 그 이름을 무엇으로 삼건 사랑과 자비로서 만민을 포용하고 서로를 이해하는 것을 근본 토대로 삼는다면, 비종교인이나 기타종교인이 특정 종교인의 폐쇄성과 맹목성을 오히려 ‘이해’해야 하는 아이러니는 이제 맺음을 지을 때가 아닌가 싶다. 이제 종교는 자신만의 성역에서 벗어나 자기만이 옳다는 식의 폐쇄성을 깨고 참된 구도의 자세로 열린 모습을 견지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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