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신입니다. 왠줄 아십니까? 제 일기장에 제가 신이라고 적혀있기 때문입니다. 제 말은 진리입니다. 왠줄 아십니까? 제 일기장에 제 말은 진리라고 적어놨기 때문입니다. -엑스 |
조세희의 소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실려 있다.
문제: 두 사람의 굴뚝 청소부가 청소를 마치고 내려왔다. 한 사람은 얼굴이 더러웠고, 한 사람은 얼굴이 깨끗했다. 이 중 과연 누가 세수를 하게 될까?
답: 얼굴이 깨끗한 사람이다. 상대방의 얼굴을 보고서, 자기도 더러우리라고 생각할 것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인식하는 주체와 인식되는 대상으로 양분되면 인식된 게 사실과 일치하는지 여부를 확인할 길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진리란 불가능하단 말인가? 그는 이 난국을 빠져나가기 위해 여러 가지 탈출구를 찾아낸다. 근대철학의 다양한 흐름과 사상이 이런 식으로도 이해될 수 있다. 즉 근대철학의 딜레마 해결에 관한 문제로 볼 수도 있다.
주체와 진리라는 두 개념으로 요약했던 데카르트의 문제설정은 신학과 교회의 지배 아래 있던 철학을, 그 중심을 ‘나’ 라는 주체로 전환함으로써 중세 전체와 구별되는 하나의 전기를 마련했다. 그것은 하나의 새로운 철학적 ‘시대’를 여는 새로운 사고방식의 출발을 뜻하는 것이었다. 이로써 ‘철학적’ 근대가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철학적 근대를 특징짓는 근대적 문제설정은, 주체의 통일성과 중심성을 가정하며 그것을 개념적 연역의 출발점으로 삼고 있었다는 점에서 ‘주체철학’이란 특징, 모든 지식을 오직 ‘참된 지식’ ‘과학’ 이란 기준으로 판단하거나 정당화하는 점에서 ‘과학주의’ 란 특징을 갖고 있다. 더불어 ‘이성의 빛’으로 만물을 비추어야 하며, 인간의 몽매한 삶과 실천 역시 이 이성의 빛에 의해 ‘계몽’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는 점에서 ‘계몽주의’라는 특징도 갖고 있었다.
이것이 중세철학과 단절하면서 근대철학이 힘차게 그었던 새로운 경계선이었다. 그런데 이 새로운 문제설정은 주체와 대상 간의 일치를 보증할 수 없다는 난관에 봉착하게 된다. 이는 주체철학과 과학주의, 나아가 계몽주의라는 근대철학의 입장을 정당화할 수 없다는 근본적 난점을 의미했다.
{근대철학은 주체라는 범주를 신으로부터, 그리고 동시에 대상으로부터 분리시킴으로써 성립했다. 그리고 그러한 분리와 동시에 발생하는 문제가 있었다. (인식)주체와 (인식)대상의 일치, 혹은 정신과 육체의 일치라는 문제가 그것이다. 이처럼 대상에 일치하는 인식을 ‘진리’ 라고 했으며, 이 ‘진리’가 바로 근대철학이 도달해야 할 목표였다.
이것이 근대철학의 문제설정이다. 그런데 이것은 만들어지지마자 곧 딜레마(벗어날 수 없는 곤란)에 빠지게 된다. 즉 주체가 인식한 것이 대상과 일치하는지 아닌지, 다시 말해 진리인지 아닌지를 어떻게 보증하느냐 하는 문제가 발생한다.
에를 들어 사람은 자신의 얼굴을 직접 볼 수는 없다. 사람은 거울이나 수면에 비친 모습을 통해 자신의 얼굴을 본다. 그러나 사람이 거울에서 본 게 자기 얼굴인지 어떻게 아는가? 그게 자기 얼굴이라고 판단하려면, 이미 자기 얼굴에 대해 알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런데 누구도 자기 얼굴을 직접 보는 사람은 없다. 즉 자기 얼굴이 어떤지 미리 알고 있지 못한다. 만약 거울을 처음 본 사람이 있다면 그는 그 거울에 대고 말을 걸었을 지도 모른다. 그게 자기라고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여기서 ‘나’ 자신은 거울에 비치는 대상이다. 거울은 그 대상을 비추는 ‘주체’ 이다. 거울에 비치는 대상(나)과 그걸 비추는 거울(주체)이 일치하는지 아닌지는 나와 거울만 가지고는 알 수 없다. 혹시라도 누군가가 옆에서 보고는, “거울에 비친 모습하고 네 얼굴하고 똑같다” 고 말이라도 해준다면 모를까?( 이 말이 ‘거짓말’이 아니라는 증거도 없지만···)
결국 인식하는 주체와 인식하는 대상이란 두 개의 항(項)만으로는 인식한 게 대상과 일치하는지 아닌지, 진리인지 아닌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즉 진리는 주체가 확인하고 보증할 수 있는 게 아니며, 그렇다고 대상이 확인하고 보증해 줄 수 있는 건 더욱 아니다!
앞에서 이야기한 조세희의 소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에는 이와 같은 문제를 보여주는 대목이 있다. 굴뚝 청소부가 두 명 있었다. 그 두 명이 각각 굴뚝 청소를 하고 내려왔다. 그런데 굴뚝 하나는 깨끗했고 다른 하나는 더러웠기 때문인지, 한 명의 얼굴은 까맣고 다른 한 명의 얼굴은 하얗다. 자 이 상황에서 누가 얼굴을 씻으러 가겠는가? 다 알다시피, 더럽고 검은 얼굴의 굴뚝 청소부가 아니라 깨긋하고 흰 얼굴의 굴뚝 청소부가 얼굴을 씻으러 갈 것이다. 왜냐하면 더러운 상대편의 얼굴을 보고 자신의 얼굴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두 사람(인식주체/대상)만으로는 내 얼굴이 어떻다는 판단과 실제 내 얼굴의 상태가 일치하는지 아닌지 확인할 수 없다는 것이다. 얼굴이 더럽다는 판단을 한 게 사실과 정반대일 수도 있는 것이다!
위의 두 가지 이야기는 똑같은 딜레마를 보여주고 있다. 이 딜레마는 인식주체와 인식대상을 나누고, 양자가 일치하는 게 진리라고 한다면, 어떤 지식이나 인식이 진리인지 아닌지는 결코 확인할 수도 없고 보증할 수도 없다는 난점을 가리킨다. 그게 일치하는지 아닌지 확인해 주는 제3자(예를 들면 ‘신’)가 없다면 근대철학으로선 이 딜레마를 벗어나는 게 불가능하다. 주체가 신에게서 벗어남으로써 발생한 근대철학의 ‘원죄’ 인 셈이다.
이 딜레마는 근대철학에 고유하게 나타난다. 중세에서는 그러한 문제가 제기되지 않는다. 세계가 어떻게 존재하는가, 나라는 존재가 무엇인가? 이것은 ‘창조론’이 설명해 준다. 또 무엇이 진리인가? 어떤 게 진리인가? 그것은 ‘계시론’이 보증해 준다. 또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이것은 성서 혹은 계시진리를 따라 살아가면 되는 것이었고, 이를 전하는 교회와 성직자의 따르면 충분했다. 이것이 곧 진리를 실천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데카르트의 ‘주체’ 는 신으로부터 독립한 것이다. 그렇다면 독립된 ‘나’ 라는 존재가 어떤한 존재인지 새로이 대답해야 했다. 이것이 ‘존재론’ 이라는 철학의 분과를 만들어냈다. 또한 예전에는 신의 계시에 의해 보증되었던 주체와 객체의 일치가, 신으로부터 독립함과 동시에 불확실하고 알 수 없는 게 되었다. 이제 철학은 주체가 진리를 인식할 수 있는지, 인간의 인식 능력이 어디까지인지를 대답해야 했다. 그래서 ‘인식론’ 이라는 분과가 성립하게 된다. 그리고 삶의 유일한 잣대였던 신의 계시 대신에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인지를 재는 잣대가 필요하게 된다. 이것이 ‘가치론’ 혹은 ‘윤리학’ (‘도덕론’)이다.
이리하여 데카르트 이래 존재론, 인식론, 가치론이라는 세 가지의 근대철학의 분과가 성립하게 된다. 여기서 가장 핵심적인 문제는 인식론의 문제이고 진리의 문제였다. 왜냐하면 신으로부터 독립해도 좋은 것인지, 그러한 능력이 인간에게 있는 것인지를 입증해야 했기 때문이다. 즉 인간이, 주체가 신에게서 독립하려면, 그럴 수 있는 최소한의 능력, 즉 진리를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만약 그게 없다면 신에게서 독립하는 것은 너무도 무모한 짓이 될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근대철학에서 중심적인 문제는 대개 인식론적인 형태로 제기되며, 인식론이 가장 발전하게 된다.
신에게서 독립하려는 이 근대철학자들에겐 등대불 같은 하나의 희망이 있었다. 그것은 갈릴레이에 의해 본격적으로 급진전되고 있었던 ‘과학혁명’ 이었다. 과학자들의 얘기를 통해 ‘세상은 이렇다’ 는 성경의 말씀은 사실과 다르다는 게 드러났다. 오히려 신의 말씀이 아니라, 실제의 세계를 과학적으로 연구하는 게 진리에 이르는 길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신학 없는 철학, 신에게서 벗어난 주체(인간)에게 가장 필요했던 것은 바로 이 과학이었다. 이 때문에 근대철학의 가장 뚜렷한 특징이 ‘과학주의’ 가 되었다는 것은 차라리 자연스러운 것인지도 모른다. 철학자들은 모두 스스로 과학자가 되려고 했으며, 모든 지식은 과학이 되어야만 했다. 즉 근대철학은 과학이란 위성을 가지고 주체/진리란 범주의 주위를 빙글빙글 돌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분명한 것은 주체와 대상 사이에, 진리를 판단해 줄 어떤 절대적 존재로서 제3자가 없다면 양자의 일치(진리)를 보증할 수 없다는 것이다. 물론 이 제3자 역시 진리의 보증자가 되려면 진리를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절대적 재판관이 되어야 한다. 이런 난점 때문에 버클리나 헤겔도 다시 일종의 ‘신’을 끌어들인다.그런데 이것은 어떻게 보면 근대철학이라고 하는 문제설정, 즉 주체와 대상을 나누고 양자의 일치를 목표로 하는 철학에서는 해결할 수 없는, 해결해야 하지만 그 안에서는 결코 해결할 수 없는 문제였으며, 그러한 의미에서 ‘근대철학의 딜레마’ 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다.
더불어 근대철학이 부닥칠 또 하나의 딜레마가 있다. 그것은 한마디로 ‘유아론의 딜레마’ 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지금 이 자리에는 100명 정도의 사람이 있는데, 여기 있는 사람들은 모두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라고 말할 수 있는 ‘주체’ 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만약 이러한 다수의 주체들이 모여서 동일한 것에 대해 상이한 판단을 했을 때, 과연 누구의 말이 맞는가, 그리고 그것을 누가 보증하느냐 하는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이것은 첫 번째 딜레마와 관련되어 있는 것이다. 이러한 견해는 극단적으로 유아론 즉 ‘내가 알고 있는 것만이 진리이고 진리는 주관적이다’ 라는 견해로 나가기도 하는데, 이렇게 되면데카르트가 주체를 신에게서 떼어내었을 때와의 생각과 달라지는 것이다. 이는 사실 대상과 일치하는 진리를 하나로 확정하지 못한다는 딜레마에 기인하는 것이며, 그 딜레마의 이면인 셈이다.
이후 근대철학은 이 문제(일치의 문제)를 풀기 위한 다양한 방법들을 보여준다. 성공 여부와는 무관하게, 바로 이 딜레마로 인해 매우 다양한 인간의 사고영역이 개척된다. 근대철학은 이 딜레마의 궤도를 따라 운행되는 기차와 다를 바 없었다.}
‘주체와 대상 간의 일치’ 문제, 이것은 근대철학의 근본적 딜레마로, 이로 인해 이후 근대철학에서는 다양한 흐름과 입장들이 나타나게 된다.
한편 로크는 영국의 유명론적인 전통에 입각해 데카르트 철학을 새로이 변형시킨다. 즉 본유관념과 실체를 유명론의 입장에서 비판함으로써 흔히 ‘경험주의’ 라고 부르는 독자적인 흐름을 이루어냈다. 이것은 분명 근대철학의 경계 안에 있는 것이긴 하지만, 데카르트적 흐름과는 매우 다른 독자적이고 새로운 흐름이라 할 수 있다. 한마디로 말해 경험론을 통해 유명론은 ‘근대화’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유명론과 근대철학은 해소하기 힘든 긴장을 갖고 있었고, 이 긴장은 흄에 이르러 극한에 다다른다. 즉 그것은 근대철학의 딜레마를 극한까지 밀고 나가 근대철학의 출발점과 목표 전체를 해체시켜 버린다. 이로 인해 ‘근대철학의 위기’가 나타난다.
칸트는 위기에 처한 근대철학에 ‘선험적 주체’라는 새로운 기초를 마련함으로써 그것을 재건한다. 그것은 모든 주체들에게 공통된 보편적 사고구조를 찾아냄으로써 그들이 보편적 판단에 이를 수 있음을 밝히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여기서 그가 사용한 방법은 진리를 주체 내부로 이전시킴으로써 주체를 객관화하는 것이었다. 즉 객관적 진리를 사고 주체의 속성으로 전환시킴으로써 주체에게는 객관성을 주는 방법인데, 한마디로 말하면 주체와 객체를 동일한 것으로 결합시키는 방법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처럼 ‘주-객 동일성’ 의 이념은 이후 독일철학 전반을 특징짓는 매우 중요한 특징이 된다. 이런 의미에서 칸트는 데카르트나 로크와 다른 또 하나의 새로운 철학적 흐름을 만들어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선험적 주체’ 혹은 ‘절대적 주체’ (그걸 피히테처럼 ‘자아’ 하고 하든, 헤겔처럼 ‘절대정신’ 이라고 하든)로 하여금 자기 스스로를 기초짓도록 함으로써 딜레마의 해소를 겨냥하지만, 그 결과는 딜레마의 이전과 자신의 입론에 대한 절대적 정당화였다. 즉 다른 입론이나 목소리를, 자기 안에 포섭될 수 있는 것은 자기와 동일시하고, 다른 것은 배제하는 메커니즘을 작동시킴으로써, 사고할 수 있는 영역을 ‘지금 사고하고 있는 것’ 으로 제한하고 봉쇄하는 효과를 가진다. 이것은 후에 근대철학의 근본적 결함으로 비난받는 요인이 된다.
결국 헤겔(지식과 진리의 변증법이라는 헤겔의 명제는 사실 두 가지 선택지를 포함하고 있었다. 하나는 종결된 지식, 완전한 진리란 없고 지속적인 정정을 거쳐야 한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절대정신 실현의 목적론적 과정을 통해 절대적 진리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중 전자가 갖는 비판적인 효과가 긍정적인 만큼 후자가 갖는 독단적인 효과는 부정적이다) 에서 절정에 이른 근대철학은 이제 새로이 근대적 경계 자체를 뛰어넘으려는 다양한 시도들에 부닥친다. 실천(Praxis)이란 개념으로 그 경계선을 허물고 한계를 넘어서려 했던 맑스나, 무의식이라는 개념으로 근대철학의 지반을 해체시킨 프로이트. 그리고 가치와 권력의지 개념으로 근대철학을 공격함으로써 새로운 문제설정을 정립하려 했던 니체가 지금 중요해지는 것은 바로 이런 맥락 때문이다.
다른 한편 언어학을 경유해 근대철학의 한계를 넘으려는 태도 역시 오늘날 매우 중요한 또 하나의 흐름이다. 그것은 예전에는 주체의 작용으로 이해되던 의미나 판단이 사실은 주체 외부에 있는 언어구조에 속하는 것이란 명제에 기인한다. 여기서 결정적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이 소쉬르이다. 그러나 그보다 1세기 전에 훔볼트는 칸트주의의 입장에서 그와 유사한 입론을 발전시키려고 했다. 이는 언어학적 구조주의가 사실은 칸트주의라는 근대적 틀 속에 포섭될 수도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이는 야콥슨이나 레비-스트로스의, 말 그대로의 ‘구조주의’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비트켄슈타인에 의하면 ‘실천’이란 어떤 것이든 특정한 규칙에 따라 행동하는 것을 말한다. 그 규칙이 관습적인 것이든, 도덕적인 것이든, 아니면 단지 언어적인 것이든 간에 말이다. 예컨대 슈퍼마켓에서 물건을 사고파는 것 역시 이런 규칙에 따른 것이다. 물건을 사는 데 사용되는 언어사용 규칙이 있을 것이고, 그런 행동을 훔치는 행동과 구별해 주는 행동 규칙이 있을 것이다. 이 규칙은 모두 사회적인 성격을 가질 것이다. 이 규칙은 미국이면 미국, 한국이면 한국마다 고유한 ‘생활방식’ (비트켄슈타인의 개념을 빌면 ‘생활형태’)을 보여준다. 어떤 규칙도 이런 생활방식 속에서 만들어지고 변화되는 것이며, 또한 반대로 바로 이 규칙들이 모여 특정한 생활방식을 구성하기도 한다. 이러한 생활방식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형태, 즉 행동이나 실천의 형태인데, 이는 대개 언어적 실천과 결부되어 있다.
여기서 비트겐슈타인은 언어게임(Sprachspiel)이란 개념을 제시한다. 특정한 규칙에 따르는 언어적 실천과 비언어적 실천이 서로 교차하는 영역이 바로 언어게임이라 한다. 즉 언어게임이란 언어와 행동의 결합체요, 언어적 활동과 비언어적 활동이 교차되는 지점이다. 언어게임은 언어적 활동이나 비언어적 활동 모두가 따라야 할 규칙들의 집합이며, 또한 그 규칙에 따른 행동의 집합이기도 하다. 여기서 유독 ‘언어게임’ 이란 개념을 사용하는 것은 말을 하는 행위가 더 큰 행위의 일부분임을 표시하기 위해, 즉 생활형태의 일부분임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이러한 문제설정 방식 속에서 이제 진리의 개념은 역시 언어게임과 생활형태란 개념 속에서 다시 파악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실천이란 ‘특정한 규칙을 따르는 것’ 이기에, 어떠한 실천도 규칙을 제공하는 특정한 언어게임에 의해 행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언어게임이 생활형태의 일부라는 것을 상기한다면, 실천이란 특정한 생활형태 속에서 행해지는 것임을 이해하기는 쉬울 것이다.
예를 들어 비트켄슈타인에 따르면 무얼 ‘안다’ 는 것은 ‘안다는 믿음’ 이고, 진리란 ‘확실하다는 믿음’ 이라고 합니다. 심지어 데카르트처럼 끝없이 의심하는 것도 믿음에서 출발한다고 한다.
심지어 데카르트처럼 끝없이 의심하는 것도 믿음에서 출발한다고 한다. 의심 끝에 뭔가 확실한 것에 이를 것이라는 믿음, 아무리 의심해도 의심할 수 없는 게 있을 거라는 믿음 말이다. 비트겐슈타인은 확실성이라는 것은 실천적 목적을 위한 결단, 즉 믿음에서 출발하는 것인데, 그 믿음은 어떤 식으로든 ‘정당화’ 되기 마련이라고 한다. ‘정당화’ 란 자신이 옳다는 근거를 세우려는 노력인데, 그 방식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옳다고 생각되는 다른 지식이나 명제와 연루시킴으로써 정당화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실재와 일치한다고 가정함으로써 정당화하는 것이다. 그런데 비트켄슈타인은 이러한 정당화가 무한히 계속될 수는 없다고 한다. 즉 정당화에는 ‘끝’이 있다는 것이다. 그 끝이란 행동(activity)이요 실천이다. 요컨대 실천적 목적을 위한 결단에서 믿음은 출발하며, 이 믿음에서 모든 지식은 출발한다는 것이다.
결국 진리란 특정한 생활형태 속에서, 같은 말이지만 특정한 언어게임 속에서 정의되는 실천을 위한 믿음에서 출발한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특정한 생활형태에 의해 만들어지고 특정한 언어게임에 의해 정당화되는 믿음이 진리의 출발점이란 것이다. 그렇다면 진리에 대해 다시 이렇게 정의할 수도 있을 것이다. 진리란 특정한 언어게임 내부에서 진리효과에 의해 정당화되는 지식이다!
이제 진리는 이렇게 정의된 언어 및 언어게임의 개념을 통해 형성되는 믿음의 문제로 파악된다. 그 믿음은 물론 실천과 생활형태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지만 말이다. 지식을 이런 관점에서 파악함으로써 대상과 개념의 일치, 혹은 대상과 주관의 일치라는 근대적 진리 개념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난다.
이러한 관점을 좀더 밀고 나간다면 방금 위에서 언급했듯이 진리를 ‘특정한 언어게임 내부에서 진리효과에 의해 정당화되는 지식’ 으로 다시 정의할 수도 있을 것이다. 즉 옳은 지식으로서 갖는 효과(진리효과)에 의해서, 특정한 언어게임 내부에서 진리라는 믿음을 지속할 수 있는 지식이 바로 진리일 거라는 생각이다. 그게 공학에 의한 것이든, 다른 이론적 명제에 의한 것이든, 아니면 집단적이거나 개인적인 실천에 의한 것이든 간에 말이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실천은 실증주의자의 생각처럼 진리를 ‘검증’해 주는 기능을 하는 게 아니라, 진리효과에 의해 어떤 지식을 정당화하거나 부정하는 기능을 한다고 할 수 있다. 비트겐슈타인이 말하는 ‘믿음’ 이란, 단순히 주관적인 신앙이라기보다는 이처럼 실천에 의해 유지되거나 파괴되는 것이고, 따라서 진리란 ‘믿음의 함수’ 이자 ‘실천의 함수’인 셈이다.
그리고 ‘주체’ 란 언어게임을 통해 활동하는 개개인을 가리킨다고 하면, 그것은 결국 생활형태와 언어게임 속에서, 그리고 그 언어게임을 통해 형성되는 믿음에 의거해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언어게임과 ‘주체’ 간의 교호적 작동은 실천(언어적/비언어적)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다}
그런데 근대적 문제설정을 벗어나려는 흐름들을 전반적으로 특징짓고 있는 ‘가족 유사성’이 있다면, 다음 두 가지를 들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하나는 근대철학에서는 ‘주체’ 라는 범주가 선험적인 출발점이었는데. 탈근대적 문제설정들에서 주체는 여러 가지 요인들에 의해 결과물로서 구성되는 것으로 간주된다는 것이다.
예컨대 그 요인이 사회적 생산관계(맑스)든, ‘타자’ 로서 무의식(프로이트/라캉)이든, 권력의지(니체)나 생체권력(푸코)이든, 혹은 이데올로기(알튀세르)든 공통적으로 주체가 여러 가지 요인들에 의해 결과물로서 구성되는 것으로 간주된다. 물론 이들이 이처럼 구성되는 주체에게 부여하는 기능이나 작용, 이론상의 위치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음을 잊어선 안 된다는 단서를 달아야 한다.
다른 하나는 지식을 파악하는 방식이다. 근대철학에서 그것은 인간의 인식이 도달해야 할 목표지점이었고, 따라서 ‘참된 지식’ 으로서만 다루어졌다. 그러나 탈근대적 문제설정들에서 지식은 주체를 구성하는 데 영향을 미치는 ‘담론’으로 정의되며, 지식은 그게 참이든 거짓이든, 그게 야기하는 효과가 무엇인가를 통해 사고된다.
따라서 어찌보면 주체와 지식의 관계가 근대의 그것과는 반대로 뒤바뀌었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지식이 효과를 야기하는 자리를 차지하게 된 것이고, 주체는 그 결과 구성된 것으로 간주되게 된 것이다. 이 두 가지 요소가 근대철학의 문제설정과 그것을 넘어서는 문제설정 사이에 경계를 그어주는 특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덧붙이자면, 근대철학은 단순히 시간적인 자리를 가리키는 게 아니란 것이다. 근대라는 말 자체가 시기적인 구분이 포함된 것이어서, 그 말과 동시에 ‘전근대-근대-탈근대’ 의 계열을 연상하는 것은 어찌보면 자연스런 일이다. 그러나 그것이 “철학에서 지배적인 문제설정이 역사적으로 나타났던 순서”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면 타당한 이해라고 할 수 없다. 이를 테면 그런 변화의 계열을 필연성을 갖는 ‘발전’ 으로 간주해선 타당한 이해라고 할 수 없다.
아도르노(T. Adorno)의 말을 빌리면, 근대는 시간적인 범주가 아니라 어떤 질적인 상태를 지칭하는 것이다라고 한다. ‘근대철학’이란 말보다는 ‘근대적 문제설정’ 이란 말이 좀더 잘 보여주듯이, 근대철학이란 문제를 설정하고, 그것에 대답하기 위해 나름의 개념적 지반을 마련하여 문제를 풀어나가는 다양한 시도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어떤 질적인 특징이다. 그것 역시 일종의 ‘가족 유사성’ 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근대에는 전근대적인 철학이 사라질 것이며, 탈근대의 시기에는 근대적인 철학을 찾아보기 힘들 거라는 생각처럼 소박한 것은 없다. 마치 자본주의가 되면 봉건적인 것이 모두 사라지고, 또 사회주의가 되면 자본주의적 요소들이 자연히 소멸할 거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러한 살핌의 끝에서 우리는 새로운 살핌의 방향을 찾아낼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의 경계선을 넘는 것은 새로운 사고의 영역을 여는 것이기 때문이며, 그 새로운 영역은 새로운 개념과 이론, 새로운 역사를 내부에 싸안고 있기 때문이다.
경계를 넘어서는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지식을 비롯한 여러 가지 조건 속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각 사회에 ‘필요한’ 주체로 되어가는지, 또는 특정한 사회 속에서 살아갈 수 있는 주체로 만들어지는가? 에 관한 것이다. 맑스의 말을 흉내내서 표현하자면 사회적 생산양식과의 관계 속에서 주체 생산방식에 대한 개념적이고 역사적인 연구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물론 이는 이미 근대를 넘어서려는 사람들에 의해 그 기초가 마련된 것이어서 특별히 새로운 것도 아니다)
그런데 이러한 연구는 이미 철학 자체의 한계를 뛰어넘는 일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어떠한 역사적 조건 속에서, 어떤 요인들에 의해 사람들이 주체로 생산되는지를 연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역사적 연구가 진행되지 않는 한 근대성을 넘어서는 새로운 대안을 기대하기는 어려울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