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신입니다. 왠줄 아십니까?
제 일기장에 제가 신이라고 적혀있기 때문입니다. 제 말은 진리입니다.
왠줄 아십니까? 제 일기장에 제 말은 진리라고 적어놨기 때문입니다. -엑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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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종교의 이름으로... by 6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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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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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0.23 12:27
날짜 2002/06/14 17:34:17
작성자 666
종교라는 것...
그 자체가 가지는 신비함과 여러가지 유익들을 맛보고 거기에서 세력을 얻은 자들은 지금도 그 은덕을 기리며 종교인이라는 딱지를 붙이며 살고 있다.
그리고 그 가운데 살았던 내 자신을 회상해 보면, 무신론자가 될 소지는 전혀 없었다고 생각한다.
모든 친척들은 순복음파의 세뇌자들이었고, 내가 신앙이랍시고 했던 생활들을 봐도 여러모로 좋은 것들이 들어오는 자리에만 있었으니 그다지 종교에 대해 반감을 가질 상황은 없었다고 생각하면서도 동시에 그 윤택함과 은총이라는 것이 신이 아니라 사람들에게서 오는 것임을 알 때에 과연 나는 이렇게 살 가치가 있는가 하는 반문을 언제부터인가 끊임없이 자신에게 던지게 되었다.
종교는 그런 것이 아니라고 본다.
입으로는 무엇이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일본 애니메이션인 바람의 검심 추억편에 보면 켄신의 사부가 세상을 구하려는 켄신을 향해 이런 말을 한다.
[검술은 엄연히 살인술, 검은 흉기...]
이 말이 내 뇌리에 스쳐왔다.
한 동안 어리석게도 나는 종교라는 이름아래 공공연히 자행되는 종교에 세뇌당한 불쌍한 인생들의 고혈을 기반으로 한 종교라는 일개 세력에 의탁해 살아온 것이다.
그것이 자의에 의한 것이든 타의에 의한 것이든, 노동의 대가가 아니라 입 잘 놀리고 그저 종교인들의 고혈로 모인 헌금으로 대형 교회와 사찰을 짓고, 거기에 기생해 사는 기생충들인 것이다.
차라리 종교가 정치와 같다면 나라를 운영한다는 대의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종교가 공통적으로 거는 가치는 최근 유행했던 [누가 내 치즈를 옮겼는가?]란 책에 나온 대로 한낱 치즈에 불과한 것이다.
그것은 끊임없이 구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차라리 그 마약같은 것을 맛보지 않았더라면, 사람들은 종교가 뭐지도 몰랐을 것이다.
구원, 영적 평화, 축복과 소위 강령 의식 등등...
뭔가 있을 법한 사기성 농후한 종교적 행위들에 의해 유린당한 사람들의 정신 속엔 무언가 나를 지켜주지 않으면 불안해 하는 이른 바 의지적인 인간상을 낳았다.
그리고 어느 종교나 인간을 불완전하다고 못 박아 버린다.
미지의 존재는 신으로 돌린다.
이러한 것을 종교성이라 이름붙였다. 두려움이라는 실체를 언급하기 싫기 때문에...
그리고 종교성을 가진 일부의 무리들은 자신들을 신과의 매개체 내지는 지상적 구현으로 보고 월등하게 생각하는 경향을 가지고 살아 왔다.
가장 대표적인 종교가 기독교이다. 물론 샤머니즘을 대표한느 무당이라든가, 여러 족속들이 이에 해당되지만, 불완전하면서도 교회에서는 절대 무적의 존재인 목사.
하지만 그도 최근에는 입 하나 잘못 놀리면 목이 달아나는 신세로 전락했다. 즉, 인간은 두려움을 극복하는 정신적인 지주가 더 이상 신이 될 수 없음을 알기 때문이다.
신으로 더 이상 자연적, 초자연적 두려움이나 정신적 공포를 이긴다는 것이 불가능함을 깨달았기 때문에 이제 다른 것을 찾게 된 것이다.
즉, 종교라는 이름을 굳이 빌리지 않아도 인간은 공포의 속박을 벗아날 수 없기에 차라리 신이라는 존재가 이젠 거추장스러워 진 것이다.
종교라는 것은 이 지상의 테두리를 벗지 못한다.
이 명제는 바로 이러한 단면을 봐도 알 수 있는 것이다.
천주교는 기독교를 이단시했다. 기독교는 토테미즘 이하 샤머니즘 등을 타파하라고 했다. 앞의 민속 신앙은, 특히 동양의 토속 신앙은 기독교를 서양 귀신이라 했다. 오히려 토착화의 관점에서 천주교는 토속 종교적 양식을 흡수했다. 기독교는 영성의 문제에 있어서 천주교의 영성 운동을 수용했다.
이것은 서로를 배타하면서도 서로의 굴레를 벗을 수 없는 거시적 범주안에서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인데, 그것이 바로 이 세상이다.
그런데 이 세상엔 공포가 존재한다.
그것이 이 세상을 초월하고자 하는 욕구를 만들어 낸다.
그것을 어느 누가 먼저 취했는가 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단지 공통적으로 종교들은 모두 이러한 성질을 취하기 때문이다. 기독교에서 이러한 분야를 취급하는 학문이 바로 비교종교학이다.
그러나 이 비교종교학은 기독교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불교에도, 천주교에도 존재한다.
다른 예를 들어 보자.
종말론...
정말 민감한 사안이라고 생각된다. 하지만, 이 종말 신앙은 기독서에 국한되지 않는다.
종말의 미륵신앙, 노스트라다무스의 종말 예언, 그 외의 여러 아프리카와 미주의 인디언들의 전설 등에서도 지구의 종말은 끊임없이 예언되어 왔다. 그 예언과 성취의 방식은 그 민족의 가치관 형성과 무관하지 않다.
그래서 민족 종교를 중요시 하는 것이다.
만일 신이 중심이 되어 이 세상이 돌아간다면 여기저기에서 지금도 초자연적 현상들이 끊임없이 생길 것이며, 이것은 단순히 종교적 입장이 아니라, 모든 분야에서 연구될 것이 자명하다.
그러나 이러한 입장의 괴리는 창조론과 진화론의 대결로 이어지고, 또한 과거의 무지한 시대에 더욱 격렬하게 대립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기독교만이 가진 독특한 성질? 그런 것은 없는 것이다.
다른 종교와 다르다? 당연히 다른 것이다. 민족적인 가치관과 지형적 영향이 다르고, 그들의 정신적 발전사가 다르기 때문이다.
그것을 굳이 진리라고 말한다면 해당 민족은 수긍하겠지만 다른 민족은 입장이 난처해 질 부분도 있다.
그래서 종교적 아집은 분쟁을 낳는 것이다.
특정 종교를 탄압하는 측에서는 나름대로의 정당성이 있고, 종교의 측면에서는 그 나름대로의 논리가 그들을 지배한다.
이것은 단순한 갭이 아니라, 인류가 공존함에 있어서의 기본 원칙이 배제된 종교만의 독단적 교리에 의한 차이이지, 그것을 진리로 보긴 어렵다.
그리고 여기 가끔 들어오는 대순 진리회, 안상홍 어쩌구 하는 무리들도 마찬가지...
이젠 인류 공존을 위해 비인간적 교리를 벗을 때가 된 것이다.
즉, 종교 자체가 이젠 필요성이 거의 없어져간다는 것이다.
그것은 세계화에서 비롯된 것이다.
민족과 나라의 구분이 점차 모호해져가는 이 시대에 그런 구닥다리 고물을 가지고 인류를 유익하게 하기엔 어려운 시대가 된 것이다.
앞으로 교회도 지성소로 불리던 목사의 강단을 세상에 내 주어야 할 시대가 도래할 것이다.
그리고 최근의 교회 중엔 그런 교회들이 있다.
월드컵에 때를 맞추어 신성한 예배당을 내어주는 교회들이 어디 하나 둘인가?
이제 지고지순하며 절대적인 신의 존재는 사람의 자리로 내려오는 것이다. 이것은 당연한 귀결이며, 신국을 운운하는 자들의 설 땅은 점차 좁아질 것이다.
그래도 남길 원한다면 적어도 세상에 융통성을 가지고 적응해 보길...
종교적 배타성을 고집한다면 그것은 사회 부적응자로 가게 되는 상당히 빠른 지름길이 될 터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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