컴퓨터를 다루는 기술을 예로 들면, 아무리 좋은 스승과 강좌를 지니고 있어도 여러번의 시행착오를 거쳐 스스로 얻지 못하면 죽어도 그 기술은 습득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과연 행복한가?란 질문에 '그렇다'라고 대답할 수 있는 이가 몇이나 될까요? 또는 '행복의 조건'이 무엇인가?란 질문에 정확히 대답할 수 있는 이가 몇이나 될까요? 인간의 '절대만족'은 가능한가?란 질문에 확신을 갖고 가능하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요?
로마시대 시저도 절대만족했을까요?, 아니 '행복'하다고 느꼈을까요? 시저가 만족하지 못할진데, 그 하부계급들이 만족을 느꼈을까요? 기독인들이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완전한 존재는 무엇이냐?란 질문에 대답할 수 있을까요?
분명, '세상은 살맛난다. 상당히 긍정적이다'라고 말하는 사람에게도 평생 즐겁기만 하지는 않을겁니다. 누구에게나 제각각 유형의 시련이 있을 것입니다.
행복, 자유, 낙원 등이 종교를 통하여 삶의 궁극적 목표를 실현하려는 사람들에겐 상당히 중요한 문제여야 합니다. 그런 종교인(특히, 기독교)들이 행복이 무엇이냐?란 물음에 대답할 수 있을까요?
기독교의 궁극적 목적인 '행복'이 무엇인지 모르면서 무엇인지 모를 '구원'에 매달리는게 좋은 선택이라고 생각되지 않습니다. '구원'을 통하여 구체적으로 그들이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다차원의 천국이 많은 사람들에게 절대만족이나 영원한 행복을 가져다 줄 수 있으려면 그 천국에 가는 사람들이 '행복조건'을 정확히 간파하고 있어야 합니다. 모르면 느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행복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알지못하는데 천국에 간들 그곳이 천국인지 알 수가 없지요.
삶의 궁극적 목적이 행복과 자유 등의 이상추구에 있다면 그 이상이 구체적으로 명시되고 '행복한 곳이 천국이다'란 명제를 충분시킬 수 있는 다차원, 다각적 조건들을 먼저 찾는 것이 순서일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선 스스로 찾기위한 자세가 필요합니다. 神에게 依支하여 얻으려면, 이미 그 신앙의 대상인 神은 그런 조건들을 인간이 알 수 있도록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야웨의 행복조건은 유대인이나 공감할만한 협소하고 상당히 제한적인 민족우월주의에 불과합니다.
단순히 믿는다하여 인간을 구체적행복의 길로 인도할 길이 없습니다. 스스로 깨우치지 못하면 영원히 느끼지 못합니다.
스스로 깨달음을 얻는 길은 많은 성인과 석학들이 제시한 바 있으니 무엇인가 선택을 하든지, 아니면 혼자 구도하든지 얻어보려해야 함이 맞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