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지성인들이 바라본 기독교

저는 신입니다. 왠줄 아십니까?

제 일기장에 제가 신이라고 적혀있기 때문입니다. 제 말은 진리입니다. 왠줄 아십니까? 제 일기장에 제 말은 진리라고 적어놨기 때문입니다. -엑스

세계의 지성인들이 바라본 기독교

꽹과리 0 2,915 2003.09.28 11:59
▷ 토인비 : "나는 신의 본질에 대해서 유태의 개념(구약의 하나님)을 믿지 않을뿐더러 그다지 존경하지도 않고 있습니다."[ 토인비 저, 최혁순 역 <미래를 산다> p63 ]

"신의 전능함을 그럴듯하게 꾸미기 위해 악마도 신이 만든 것이라고 보고 있어, 그러면서도 신은 자기가 만든 악마의 행위에는 책임이 없다는 거야" [ 같은 책, p149 ]

"동물은 신이 인간으로 하여금 이용케 하기 위해서 만든 것이라고 하는 이 교의를, 나는 좋아하지 않습니다. 나는 이것을 진실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 같은 책, p150 ]

"우주와 그 배후에 더 높은 존재가 있다고 믿습니다. ‥‥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은, 높은 존재에 대한 동부 아시아나 인도적인 견해입니다." [ G.G.어반 저 <미래에의 좌표> P152 ]

▷ 간디 : "나는 예수를 사랑한다. 그러나 크리스천은 싫어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를 닮지 않았기 때문이다."

" 왜 당신들이 믿는 신은 이웃사랑을 가르치는데 당신들은 다른 나라를 식민지로 삼아 그 나라 백성을 괴롭히는가?"

▷ 아인쉬타인 : "나는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들의 많은 부분이 사실일 수 없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열정적인 자유 사상가가 되었고, 국가는 고의로 젊은이들을 기만하고 있다는 인상을 갖게 되었다. ‥‥‥ 이 태도는 근본적으로 내 일생을 통해 지속되었다." [ 제리미 번스틴著, 장회익 편역 <아인슈타인> p18 ]

" 나는 그의 창조물인 인간을 상벌한다는 신을 상상할 수가 없다."[ B.러셀 外 著, 한영순 譯 <나는 이렇게 믿는다> p48 ]

▷ 김용옥 : "성령의 광기 속에 은총의 강림을 외치며 연보돈과 십일조를 강요하고, 장대한 성전이나 지으려 하고, 목사의 직위마저 세습시키려고 하는 오늘의 우리 나라 교계의 작태는 바로 공자가 목격한 소인유(小人儒)의 세계였던 것이다." [ 김용옥 <도올논어> p120 ]

"오늘 우리 20세기를 회고해볼 때, 우리 20세기의 최대의 죄악은 바로 악마와 천사라고 하는 얄팍한 기독교적 사유 속에서 세상을 보았던 윤리적 이원성(二元性)이다. 나는 깨끗하고 너는 더럽다. 그래서 죄는 너의 것이다. 이 사회의 죄악은 모두 너로 인하여 생긴 것이다. 나는 그 죄악의 피해자일 뿐이다! 그래서 나는 너를 저주하노라! 그 저주를 받지 않으려면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 과연 우리 민족은 구원을 얻었는가? 20세기 기독교선교사의 결론은 무엇인가? 거대한 교회건물, 기도원에까지 수천만원짜리 코트를 입고 가서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하는 어리석은 여인들! 그것이 우리 20세기 기독교선교사, 순교사의 총결론이었던가?" [ 김용옥 <노자와 21세기(중)> p185 ]

"기독교는 교리에 문제가 있다. 그 교리가 저급하게 유치하고 모순투성이며 독선적이며 배타적이다. 그러나 기독교는 이런 유치성과 모순성, 배타성 때문에, 그러한 허약함을 극복하려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는다."[ 김용옥 <나는 불교를 이렇게 본다> p223~224 ]

"신·구약(新·舊約) 만 근이 『대장경(大藏經)』한 근에 미칠 수 없고, 『대장경』만 근이 『중용(中庸)』한 근에 미칠 수 없다." [ 김용옥 <의산문답(醫山問答)> p83 ]

"예수의 경우는 不同한 기자들이 예수에 대한 不同한 기록을 남겨 놓았지만, 라오쯔(老子)의 경우는 동일한 기자가 不同한 기록을 같이 남겨 놓았다." [ 김용옥<老子철학 이것이다> p138 ]

▷ 슈바이처 : "예수는 머지않아 초자연적인 하나님 나라가 곧 출현하리라고 전했지만, 이 나라는 실현되지 않았기 때문에 역사적 사실로서의 예수는 오류를 범했다고 할 수 있다."[注1]

"그리스 스토아 철학과 노자의 도덕경 사상을 본질적으로 같은 것으로 보고, 이들을 진리라고 생각한다.

오늘날 종교단체(기독교)는 개인이 자신의 사색을 통해 신념을 얻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단체들이 미리 준비해둔 신념을 자기 것으로 만들도록 하고 있다.

기독교의 진리는 역사적 진리를 긍정하기는 커녕, 역사의 진리와 어긋날 때마다 여러 가지 모양으로, 의식적 또는 무의식적으로 회피하거나 은폐하면서 그것을 얼버무리고 있다.

현대 기독교는 그 정신적 또는 윤리적 본질상 일할 능력을 상실하고 말았다." [ 같은 책, p223~240 ]

▷ 볼테르 : "양식 있는 사람이라면 기독교를 공포의 눈으로 바라볼 것이다." [ B.베리 著, 양병우 譯 <사상과 자유의 역사> p127 ]

"기독교는 틀림없이 신성하다. 악행과 넌센스로 가득 차 있음에도 불구하고 1,700년 동안이나 지속되었기 때문이다."[윌 듀란트 著, 황문수 譯 <철학 이야기> p188~200 ]

▷ 톨스토이 : "기독교인들은 야만적인 최면술과 기만 속에 있으면서, 자기들이야말로 진실한 종교의 파악자라고 자만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교회의 기만적인 최면술에 사로잡힌 결과, 자기들에게 주입된 사이비종교를 진실하고 유일한 종교로 생각하고, 그밖에는 어떤 종교도 없으며 또 있을 수도 없다고 생각하는 무지몽매한 대다수의 민중"

"대다수를 점하는 일반 대중은 자기들에게 작용하는 이 최면술적 암시와 싸울 힘도, 가능성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자기들이 현재 생활하고 있듯이 인간의 지고지순한 행복 - 인생의 진지한 종교적 각성 -을 결여한 채 헛되게 살다 헛되게 죽는다." [ 톨스토이 著, 김학수 譯 <종교론> p 50~92 ]

▷ 루소 : "구원받기 위해서 신을 믿어야 한다. 이 그릇된 교리는 잔인한 불관용의 원리이다."

"만약 지상에 단 하나의 종교가 있어서, 그것을 믿지 않는 자에게는 영원한 고통만 있다면, 그런 종교의 신은 가장 부정(不正)한, 또 가장 잔인한 폭군일 것이네."

"나는 스위스에서 아들에게 종교(기독교)를 가르치지 않는 어머니를 보았다. 그 까닭은 이 조잡한 가르침에 만족해 버리고 이성에 깃들 나이에 이르렀을 때 보다 나은 가르침을 경멸하게 될까봐 두려웠기 때문이다."

"소르본느에서 메시아의 예언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결부되어 있음은 대낮에 해를 보듯이 명백하네. 그러나 암스테르담의 유대교 율법교사들 사이에서는 같은 예언이 예수 그리스도와는 조금도 관계가 없다는 것 또한 명백하네." [ 루소著, 정봉구 역 <에밀> p348~411 ]

▷ 존 스튜어트 밀 : "지옥을 만들어 내는 존재를 생각해 보라. 인류의 대다수가 끔찍스러운 영겁의 형벌을 받도록 되어 있다는 것을 미리 분명히 알면서, 따라서 그렇게 할 의도를 가지고서 인류를 창조한 존재를 생각해 보라 ‥‥ 도덕적 선악을 조금이라도 느낄 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런 생각을 내 아버지만큼 분하게 여기면서 바라보게 될 시대가 가까워 오고 있다고 나는 믿는다."[ J.S.밀 저 <자유에의 증언> P56 ]

▷ 니체 : 기독교는 피정복자와 피압박자의 본능이 전면에 나타난다, 기독교에서 구원을 얻으려는 무리들은 최하층의 저급계층의 사람들이다. 기독교에서는 하나님이라 불리는 권력자에 대한 감동이 늘 생생하게 살아난다. 여기서는 육신이 경멸되고 위생은 육신을 위하는 것이라 하여 경멸되며 거부당한다. 교회는 청결을 거부하는 것이다. 무어인들을 추방한 후 기독교인들이 취한 최초의 조치는 코르도바에만 270 개소나 있었던 공중 목욕탕을 폐쇄한 일이다. 자신과 타인에 대한 금욕주의의 탈을 쓴 잔인성 이것이 기독교적인 것이다. 자기와 다른 생각을 가진 자에 대한 증오심, 복수심 , 암울하고 선동적인 생각들도 마찬가지다. ......... 기독교 내에서의 갈등 그 또한 기독교적인 것이다. 정신 , 긍지 , 용기 , 자유에 대한 증오 , 정신적인 사상가에 대한 증오가 기독교적인 것이다. 관능에 대한 증오, 육체에 대한 경멸 , 즐거움과 관능 일반에 대한 증오가 기독교적인 것이다. 기독교는 야만적인 개념과 가치로 중무장하고 필요하다면 주위의 민족을 야만인이라 단정하고 정복하는 것을 하나님의 계시라고 선동한다. 첫 자식을 재물로 바치는 것 , 성찬식에서 피를 마시는 것, 이성과 지
煊?대한 경멸 , 육체적 , 비육체적인 것을 막론하고 온갖 종류의 고문 등등 이러한 것들이 기독교적인 것이다. 아직 유럽은 불교를 받아들일 만큼 성숙하지 못했다 , 불교는 문명의 종말과 피곤함 때문에 생긴 종교이지만 , 기독교는 문명의 맹아도 아직 보지 못했다. 기독교는 필요하다면 인류를 파멸시킬 것이다. [반그리스도 중에서]

" 나는 기독교의 똑바른 역사를 말하겠다. 기독교란 말부터가 하나의 오해다. 근본적으로 기독교인은 한 사람 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 그리고 복음도 십자가 위에서 죽었다. 그 순간 이래로 복음(福音)이라고 불려지고 있는 것은 벌써 그가 몸소 생활한 바의 것과는 정반대였다. 그것이야말로 나쁜 소식, 즉 화음(禍音,Dysangelium)이었다."

예수의 이런 복음을 화음으로 바꾼 장본인은 바울이다. 니체에 의하면, 바울은 증오의 화신이요 환각의 천재다. 예수는 신과 인간?간격을 제거하고 신인 합일의 내면적 생을 자신의 복음으로서 최후까지 실천하였는데, 바울은 십자가 위의 희생이란 관념을 삽입함으로써 신과 인간의 간격을 넓히고 그 중간에다가 원죄, 심판, 부활 그리고 신앙에 의한 구원 등등의 여러 가지 환상을 개입시켰다. 이리하여 바울은 생의 의미를 사후로, 피안으로, 배후세계로 옮겨 놓았다. 예수에게서 보는 바와 같은 현실의 내면적 생의 긍정 대신에, 피안을 신앙하는 자학의 체계가 등장한다. 생의 중심이 생 안에 있는 것이 아니고 피안의 무(無) 속에 놓이게 된다. 바로 그 때문에 니체에 의하면 바울은 "최초의 기독교도", 혹은 "기독교의 발명자"가 된 것이다.

▷ 쇼펜하우어 : 인도의 「우파니샤드」를 읽고 나서 한 말

"아 이렇게 내 마음에 붙어 있던 유대인의 미신을 깨끗이 씻어 줄 수 있는가!"[ 라다 크리슈난 <석가와 예수의 대화> P173 ]

▷ 라즈니쉬 : "이제 기독교 신학자들조차도, 기독교 복음서가 사도들이 아닌 다른 사람들에 의해 쓰여졌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복음서에 서술된 산들은 실제 지명과 같지 않다. 강들과 호수들도 역시 실제지명과 같지 않다. 모든 내용이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보지도 못한 사람들에 의해 쓰여진 것이다." [라즈니쉬 <기독교와 선> p200]

▷ 조찬선 : "만일 과거 기독교인들이 진정한 예수의 그 위대한 희생정신과 참다운 사랑을 알고 실천하였더라면 기독교는 그러한 살인적인 종교가 되지 않았을 것이며, 또 잔인한 종교집단으로 타락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기독교가 또다시 그러한 과오를 범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영국의 토인비의 저서가 지적한 것과 같이 기독교는 국가와 경쟁하게 되고 인류사회의 암적인 존재가 될 수도 있다." [조찬선 <기독교죄악사下> p248 ]

▷ 버트란트 러셀 : "우리가 기독교를 지키지 않으면 모두 다 악한 사람이 된다고 하지만 제가 보기에는 기독교를 지켜온 사람들이 대개 매우 악했습니다. ..... 저는 많은 교회로 조직된 기독교도의 종교가 세계의 도덕적 진보의 으뜸가는 적이었고, 지금도 그러하다는 것을 신중히 말하고자 하는 바입니다." [ Bertrand Russell, 이재황譯, p31 ]

"기독교의 근본 교리는 수많은 윤리적 오류를 범하기 때문에 이를 받아들일 수가 없다."[같은 책, p39∼40]

"오늘날의 기독교도들은 약해진 것은 사실이나, 그것은 기독교의 덕분이 아니다. 이는 여러 세대를 겪어온 자유사상가들의 덕택이며, 이들은 르네상스로부터 오늘날까지 기독교도들로 하여금 수많은 그들의 전통적 신념에 부끄러움을 느끼게 해 주었던 것이다. 오늘의 기독교도가, 기독교가 얼마나 온유하며 이성적인가를 보이려고 하면서도 그 온유함과 이성적인 것이 당시의 모든 정통 기독교도들에게 박해를 받던 사람들의 덕분임을 무시하는 것은 재미있는 일이다. 오늘날에는 아무도 이 세계가 기원전 4004년에 창조되었다고 믿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를 의심한다는 것은 엄청난 죄악으로 간주되었다. 기독교 교리가 차차 부드러워진 것은 줄기찬 저항을 받았기 때문이며, 오직 자유사상가들이 취한 공격의 결과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같은 책, p45∼47 ] ※출처: http://xbible.com.ne.kr


버트란드 러셀"의 예수 평가


.. 그리스도가 그리 현명하다고 할 수 없는 일들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첫째, 그리스도는 자기의 재림이 당시에 살고 있던 모든 사람들이 죽기 전에 영광의 구름 속에서 반드시 일어날 것으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것을 증거할 만한 성경의 구절은 아주 많습니다. 예를 들면 그는 말하기를 "이 동네에서 핍박하거든 저 동네로 피하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의 모든 동네를 다 다니지 못하여서 인자(人子)가 오리라(마태 10:23)"고 하였고 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마가 9:1)"고 하였습니다.

[注1] 이 밖에도 그리스도가 자기의 재림이 그때 생존하던 많은 사람이 죽기 전에 있으리라는 걸 믿었다고 볼 수 있는 대목이 아주 많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 초기의 제자들의 믿음이었으며, 그의 도덕적 교훈의 기본이었습니다. 그가 "내일을 위해서 염려하지 말라"라든지, 이와 비슷한 말을 한 것은 그의 재림이 곧 있을 것과 모든 세속의 일들을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 데에 더 큰 원인이 있었던 것입니다."

" 제가 생각하기에 정말 인간미가 넘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영원한 형벌을 옳게 보지 않을 것입니다. 복음서에 서술되어 있는 그리스도는 확실히 영원한 형벌을 믿었으며, 그의 설교를 듣고자 하지 않는 자에게는 여러 번 보복적인 분노를 나타내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이것은 설교자에게는 흔히 있는 태도이기는 하나, 지존(至尊)의 성품을 어딘지 손상시키는 일입니다. 예를 들면 소크라테스에게서는 이러한 태도를 찾아볼 수 없을 것입니다. 그는 자기 말을 들으려 하지 않는 자에게도 매우 온화하고 정중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저는 이렇게 하는 것이 격분하기보다는 훨씬 성자다운 행동이라 생각합니다.

복음서에서 그리스도가 "너희들 뱀의 무리여, 독사의 세대여, 어찌 지옥의 저주를 면할 수 있을 것인가?"라고 말한 것을 여러분은 알 것입니다. 이 말은 자기의 설교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한 말인데, 제 생각으로는 최선의 말씨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지옥에 관한 이와 같은 말은 이외에도 많습니다.

그리스도는 말하기를 "人子는 그의 천사를 보내어 그의 왕국에서 거역하는 자와 부정을 범하는 자를 거두어 이글거리는 불가마에 넣으리니 거기서 통곡하고 이(齒)를 갈리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는 계속해서 이를 갈고 통곡하는 광경을 말합니다. 이것은 여러 절에 걸쳐 나옵니다. 이것을 읽는 사람이 분명히 느낄 수 있는 것은 이 통곡과 분노를 머리에 그리면서 어떤 쾌감을 느끼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처럼 자주 나올 수는 없습니다. 다음에는 양과 산양을 두고 한 말을 모두 기억하실 줄로 압니다. 재림할 때에 양과 산양을 분간하기 위하여 어떻게 산양에게 말하려고 했는가 들어 봅시다. "너희 저주받을 자여, 내게서 떠나 영원의 불 속으로 들어가라"고 하였고, "이 들을 영원의 불 속에 넣어라"고도 하였으며, "만약 너의 한 손이 거역하면 그 손을 끊을지니 병신이 되어 생명으로 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으로 가기보다, 영원히 꺼질 수 없는 불 속으로 들어가기보다는 나으리라. 거기에는 구더기가 언제나 끓고 불이 꺼지지 않느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는 이 말을 되풀이하고 또 되풀이합니다. 이 전체 교의(敎義), 즉 지옥의 불이 죄에 대한 형벌이라고 하는 이 교의를 저는 잔인한 교의라고 보고 있음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는 이 세계에 잔인성을 퍼뜨린 교의이며, 여러 세대에 가해지는 잔인한 고문을 이 세상에 남겼습니다. 그리스도의 기록자들이 쓴 대로 그리스도를 볼 수 있다면, 복음서의 그리스도는 이 점에 대해 확실히 어느 정도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것만큼은 중요하지 않은 것도 있습니다. 가다렌 지방의 돼지떼의 경우를 보면 비정스럽게도 귀신들을 이 돼지떼 속에 들어가게 하여 모든 돼지가 비탈로 내리달아 바다 속으로 빠지게 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전지전능함을 기억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러기에 그는 악마로 하여금 그냥 지나가게 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악마를 돼지들 속에 들여 보냈습니다.

다음에는 무화과나무의 기묘한 이야기가 있는데 "그리스도께서 배고픔을 느끼시자 멀리 잎사귀가 무성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혹시 먹을 것이 있을까 하여 그리로 갔으나 이에 이르자 아직 무화과 나무가 열매 맺을 때가 되지 않아 잎사귀밖에 아무 것도 없음을 아시게 되었더라." 그리스도가 이에 "누구도 네 열매를 영원히 먹지 않으리라" 말씀하시니, 베드로가 그리스도께 말씀드리기를 "주여, 주께서 저주하신 저 무화과나무를 보소서, 시들어 버렸나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이것은 아주 기묘한 이야기입니다. 왜냐하면 아직 무화과 나무가 열매 맺을 만큼 자라지 않았다고 그 나무를 나무랄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로서는 그리스도가 지혜에 있어서나 덕(德)에 있어서나 역사상에 나타난 어떤 다른 사람보다 높다고는 느껴지지 않습니다. 저는 석가나 소크라테스를 이런 점에서 그리스도의 위에 놓아야 한다고 봅니다."

[ Bertrand Russell, 중에서 ]


[무신론]의 입장에서 본 의문들.

수학자 러셀은 Why I am not a Christian 이라는 책에서
제1원인과 내세론에 대한 반론을 내세웁니다.

1. 제1원인에 대한 반론
세계의 모든 것에는 원인이 있고 제1원인으로서 신이 존재한다고 합시다. 그렇다면 신은 더이상 인과법칙을 따르지 않는 자기원인적 존재일 것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볼때의 신은 인과율이 적용되는 인간 세상에 개입할 여지가 없습니다. 인과율은 시간의 흐름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데 인간 세계에 신이 개입하기 위해선 특정한 시간과 공간에 미치는 영향이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러셀은 '신이 원인이 없는 존재라면 세계의 시작 또한 원인이 없이 만들어질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가톨릭 교황청은 빅뱅 이론의 초석을 만든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에게 기사 작위를 수여하였으나 호킹은 얼마 지나지 않아 세계는 시작이 없는 고리와 같은 존재라고 주장하였다는 사실도 있습니다.

2. 내세론과 심판론에 대한 반론
이 세상에 모순과 부정이 존재하는 곳임은 누구나 알고 있을 것입니다. 내세를 믿는 사람들은 내세에서 현세의 모든 잘못이 심판된다고 믿습니다. 이 주장에 대한 러셀의 유명한 반론을 소개하겠습니다.
속이 가려진 귤상자에서 귤 하나를 꺼냈다고 합시다. 뽑아든 귤이 썩어 있었을때, 합리적인 사람의 판단은 나머지 귤들 또한 썩어 있다고 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살아보지 못한 내세(또는 다른 세계)에 대한 믿음은 현세와 비슷하다고 보는 게 가장 타당합니다.
사실 '권선징악'에 대한 믿음은 그야말로 소박한 것으로서, 세상에는 신조차 판단을 내리기 어려울 정도로 복잡한 상황이 존재합니다. 예컨대 아프리카에 서식하는 영양류이며 치타의 먹이인 가젤을 생각해봅시다. 가젤의 최고속도는 치타의 것을 능가합니다. 가젤이 빨리 달리게 된 원인은 치타로부터 도망가기 위해서이고, 치타가 빨리 달리는 이유는 가젤을 따라잡기 위해서입니다. 이러한 상황은 절대적 심판자의 인위가 작용한 것으로 보기에는 너무 임의적입니다. 세상은 신이 설계한 것보다는 훨씬 우연적이면서 안정적으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3. 신의 영향력에 대한 회의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연법칙은 객관적이며 간단하게 이루어진 질서를 벗어나지 않습니다. 인간이 이 정도나마 문명을 이루고 현실을 바꾸어 온 것 또한 세상이 인간의 지식으로 이해가 되는 수준이기 때문입니다.
낯선 게임을 관찰하는 한 사람을 생각해 봅시다. 그 사람은 다른 사람들의 게임방식을 유심히 관찰하면서 게임의 규칙에 대한 가설을 세우고 그것을 검증해갑니다. 그 결과 발견한 규칙들을 법칙으로 생각하고 그것을 믿게 됩니다. 만약 게임이 규칙이 없이 마음대로 이루어지는 것이었다면 그 사람은 결코 규칙을 발견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인간의 지식 또한 이런 식으로 발전해오고 있는 것이기에 세계에 질서가 있다는 사실은 놀랍도록 행복한 일입니다.
현재까지 자연과학은 꽤 엄밀한 수준에서 발견된 법칙을 지지하고 있으며, 신이 만약 존재한다고 해도 이러한 법칙을 거스른 적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현대신학자들은 양자 수준에서 이루어지는 개개의 확률 수준에서 신이 개입하는 것이며, 그러한 신의 개입 전체는 통계적으로 확률모형을 잘 만족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그렇다면 과연 신을 믿어야 할 이유가 있을까요? 존재한다고 해도 자연법칙 하나 손대지 못하는 무력한 신은 믿으나 안믿으나 우리의 삶과는 관계가 없는 (우리의 관심 밖의) 존재에 지나지 않습니다. 또한 그런 존재를 신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도 의문입니다.

4. 이분법
영혼-육체 이분법 또한 데카르트 이후로 이미 사라져가는 믿음입니다. 현재까지의 물리학과 인지과학은 인간이 물질적 존재임을 강하게 시사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뇌의 해마 부분을 다친 환자는 영화 <메멘토>에서처럼 현재 받아들인 사실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우리의 의식이 영혼에서 나온 것이기보다는 뇌에 의해 자극되는 전기자극의 결과로서 나타나는 것이 더욱 설득력있는 답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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