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의 약육강식 우주관(세계관) 비판
眞如
일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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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3.12 01:29
바이블엔 본디 우주관이란 것이 없다. 여느 종교와 마찬가지로 삶과 죽음이란 고리에 주목하여, 영혼주체에 대한 평안과 해방이 원죄론을 통하여 투영된다. 원죄에 대한 주재자 설정이 곧 세계창조이고, 인간의 존재적 제한성으로 바라 본 세계창조에 대한 구성적 핵심이 원죄론이다. 그것이 바이블에서 이야기하는 '깨닫지 못하면 짐승과 같다'는 실질적 진리이자 평면형 우주관이다.
그렇다면, 깨닫지 못하여 짐승과 같다라고 말한 '세속에 젖은 무지의 삶'이란 무엇일까? 소위, 해방신학 나부랭이가 주절대는 '가라지들이 원죄에 대한 거부를 통하여 체험하게 되는 지옥'일까?
교회를 믿든, 야웨를 믿든, 야소를 믿든, 마리아를 믿든지 간에 태어남에 대한 무지로 비롯된, 죽음이란 공포에 대처하려고, 마음의 의지처(依支處)를 찾아 원죄에 대한 해방감(안도감)을 갖는 것과 기독교 자체를 거부하여 '난 죄인이 아니다'라는 기독교적 진리에 대한 무시나 무식을 모두 '가라지'라고 그들은 부른다. 가라지는 곧, 무지이며 '깨닫지 못하여 짐승과 같다'라고 말한 바이블처럼 기독교가 창조해낸 진리에 반역하고 거역하는 사타니즘(사단주의) 그룹이다. 또, 그들만의 '이단놀이'의 원형이기도 하다.
즉, 원죄는 피할 수 없는 운명이며, 이에 대하여 야웨를 믿음으로써 '벗어났다'라고 함부로 말해서도 안되고, 야웨 따위에 별반 관심이 없어서, 원죄 자체에 대하여 회의적인 입장에서 '죄인이 아니다'라고 말해서도 안된다고 주장한다.
현재 인류의 모든 문제는 인간이 태어날 때, 싸질러 놓은 정액 중 2억 ~ 4억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선택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운명적으로 지니게 된 원죄(불가에서는 '번뇌' - 싯다르타는 절대자에 의하여서만 치유되는 죄의식이 아닌, 자성으로 치유 가능한 번뇌로써 중생의 내재적 불성에 청정한 깨달음이 있다고 보았으므로 많은 차이를 지닌다)에 대한 끊임 없는 성찰이 없게 된 가라지들의 세속적 사타니즘에 기인한다고 보는 시각이 기독교의 세계관이다. 또, 원죄에 대한 치유는 환자를 돌보는 의사와 마찬가지로 환자 스스로는 치유할 수 없으며, 반드시 의사(절대자 = 야웨)를 통해서만 치유가 가능하다고 하였다.
우리는 기독교가 개념을 도입시킨 '가라지(사타니즘, 무지한 생명, 짐승)'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바이블이 표현한 '가라지'는 본래 뜻인 쓸모 없는 독초와 마찬가지로 버려질 운명의 생명그룹이다. 역으로 야웨에 대한 믿음은 곧, 원죄에 대한 깊은 성찰을 통하여 구원되는 알곡이 되는 것이다. 또, 자연과 세상 속엔 많은 희소성의 원리가 있는데, 알곡의 구원을 위하여 대다수의 가라지를 몰인정하게 버리는 이런 희소성의 원리를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 기독교의 세계관이다. 희소성의 원리는 항상 약육강식의 정글법칙을 지니고 다닌다. 정자가 질내(膣內)에서 살아남아 알곡으로 선택되기 위해선 나머지 수억 개의 경쟁자를 물리칠 수 있도록 강해져야 하는데, 한 놈의 수정을 위해 나머지 가라지들은 알곡이 강해질 수 있도록 경쟁을 벌이는 소임을 하게 된다. 심지어, 우리가 섭취한 음식에서도 알곡은 영양분으로 흡수되고 가라지는 몸 밖으로 버려진다. 또, 희소의 법칙은 시장경제에서 가격을 결정하는 요인이 된다. 이렇듯 희소의 법칙은 약육강식 경쟁력이 그대로 녹아 있는 자본주의 질서에 상당히 중요한 요소다. 기회균등으로 포장된 자본주의식 경쟁사회는 부(富)의 대부분을 알곡이라 볼 수 있는 귀족계층이 소유하게 만들었다. 귀족계층이란 알곡이 이 사회 구성원의 고작 몇 %나 된단 말인가!
기독교가 스스로 도입시킨 '가라지'의 운명은 참으로 비참하다. 지구에 매장된 제한성 자원을 수탈해온 알곡 미국이 세계 부(富)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면서, 가라지 국가들과 부익부빈익빈(富益富貧益貧)을 더욱 더 부추기고 있다.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화의 무한 경쟁체제는 알곡 미국에 상당히 유리한 출발시점이란 것을 알아야 하며, 기독교적 약육강식 세계관이 그대로 반영된 결과이기도 하다. 부(富)의 세습을 막지 않고는 기회균등이란 있을 수 없다. 미국이 아프리카 빈국들과 균등한 경쟁을 벌인다고 아무도 생각하지 않는다.
약육강식 세계관에서 말하는 지식은 인간 중심의 도덕지향이 아니라, 지구환경 파괴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속한 그룹의 안위만 생각하는 옹졸한 도구이다.
바이블에서 말한 사타니즘에 빠진 무지한 짐승이란, 그들이 바라는 알곡을 위한 가라지의 희생이다.
하지만, 그들 스스로가 정글 속의 사자와 같으니, 누가 짐승이란 말인가?
'가라지'란 개념을 통한 극단의 이분법은 고작 몇 %의 인류를 위하여, 대부분의 인류를 들러리 그룹으로 만방에 각인시키고 있다. 세상에 태어나면서 들러리 그룹으로 정해지는 세습적 정글구조이다. 이는 대뇌가 많이 차지하는 인간이 짐승과 다를 바 없는 것이다. 약육강식 세계관은 우리의 미래를 위해서도, 지구의 환경을 위해서도 경계해야 할 생존법칙의 종양이다. 종양이 활기찬 세포처럼 보인다면, 기독교 세력에 의하여 잠재의식 속에 세뇌되었는지 돌아봐야 한다.
1980년대 교육정책 중에 전인교육(全人敎育)이란 말이 있었다. 학습의 획일성 논란을 떠나, 모든 인민 대중을 균등하게 교육시킨다는 뜻이었다. 물론, 말뿐이었고 오히려 입시지옥이란 말을 만들어 냈으니 처음부터 전인교육(全人敎育)은 없었다. 하지만, 짐승이 아닌 인간이기에... 가능한 생각이란 것이다. 뉴런의 반응과 처리능력이 주어진 인간의 뇌를 짐승과 같이 쓰는 것은 참으로 아까운 일이 아니겠는가?
하물며, 인간구원을 표방하면서 숭고해야할 종교가 오히려 약육강식 세계관을 강조하고 있으니, 기독교자체가 참으로 한심하다고 하는 것이다.
그들 스스로가 약육강식의 구원론과 원죄론을 펼치면서, 깨닫지 못하면 짐승과 같다고 바이블에서 말하고 있으니 웃지 않을 수가 없다.
[이 게시물은 (ㅡ.ㅡ)님에 의해 2004-08-02 10:43:43 자유게시판(으)로 부터 복사됨]
가상의 적을 만들고 패거리 의식 조장이나 하며 매국질 하는 개독의 역사
모든 불가지론을 끌어들이며 결국 "반휴머니즘"의 궁극적 목표인 개독의 뻔뻔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