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히피티아(Hypatia, AD 370-415)
히파티아는 잘 알려진 최초의 수학자(철학자이기도 하다.)이다. 그녀의 전설적인 재능과 미모, 전력을 다해서 연구에 몰두한 삶, 또한 수학과 천문학에서 올린 빛나는 성과의 행운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파란만장한 인생 역정은 고대 그리스 비극과도 같은 슬픔을 자아내게 한다.
히파티아는 370년경에 태어났다. 그녀의 아버지 테온은 알렉산드리아 대학의 수학과의 저명한 교수였는데, 후에 그는 대학의 책임자가 되었다. 히파티아는 유년기를 뮤지엄(Museum)이라는 연구소와 아주 긴밀한 관계를 가지며 성장했다.
히파티아는 유년기부터 학습, 질문, 탐구의 분위기에 싸여 있었다. 알렉산드리아는 세계적인 학문의 중심지였고 서로의 학문을 나누기 위해서 모든 문명국으로부터 학자들이 모여드는 세계의 중심부였다. 테온의 딸로서 히파티아는 이런 자극적이고 도전적인 환경에 둘러싸여 있었다. 더욱이 그녀는 예술, 문학, 자연과학, 철학에 이르기까지 상당히 균형 잡힌 교육을 받았다.
아버지 테온은 딸 히파티아의 개인교수이며, 선생이며, 친구였다. 테온이 가지고 있던 미와 수학 논리를 향한 강렬한 애정이 히파티아에게 쉽게 전해졌다. 이러한 면에서 아버지는 결국 그의 수준을 뛰어넘는 히파티아의 지적 개발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 당시, 수학은 어떤 행성에 태어난 한 개인의 자취 같은 불명료한 문제를 계산하는데 주로 이용되었다. 수학적인 계산을 통해 한 인간이 어느 날 정확히 어떤 위치에 있을 것인지를 결정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였다. 천문학과 점성술을 하나의 과학으로 간주하였으며, 수학은 과학과 종교를 결합한 것으로 생각하였다.
이런 원리는 히파티아가 일찍이 교육을 받은 바 있었고, 더욱이 테온은 문명화된 세계에 알려진 모든 종교체계를 그녀에게 가르쳐 주었다. 테온은 선생으로서 보기 드문 재능이 있어서 히파티아에게 축적된 지식을 전해 주는 것뿐만 아니라 이러한 지식을 형성하고 받아들이는데 필요한 식별력도 가르쳐 주었다. 이런 목적을 위하여 그는 종교에 대한 분별력을 자질 수 있도록 각별히 배려하였으며, 새로운 지리를 배척하는 어떠한 완고한 신앙도 그녀의 삶을 지배하지 못하도록 가르쳤다. 그는 그녀에게 "모든 형식적이고 독단적인 종교는 현혹시키는 것이어서 자존심 있는 사람이라면 절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라고 가르쳤다. "네가 생각하는 권리를 비축하여라. 왜냐하면 틀리게 생각하는 것이 오히려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는 것보다 낫기 때문이다."
히파티아의 정신은 놀랍고, 신속하며, 잘 단련되었다. 테온은 이런 그녀의 정신에 어울리는 건강한 육체를 가질 수 있도록 식이요법을 개발하였다. 그는 히파티아가 규칙적으로 연숩할 수 있도록 일정의 부드러운 미용체조도 고안해 냈다. 그녀는 노 젓는 법, 수영, 승마, 등산 등을 배웠고 하루 일과 중 일정한 시간을 이런 운동을 하는데 할애하였다.
로마인에게 웅변술, 수사법 같은 예술은 사회적 품위를 드러내는 것이었다. 한 개인의 성향을 드러냄으로써 타인을 감명 시킬 수 있는 이 능력은 신으로부터 인간이 부여받은 위대한 재능으로 생각되었다. 테온은 딸 히파티아가 자신이 이미 규정해 놓은 '완전한 인간'이 되기를 원하였다. 그러기 위한 하나의 준비단계로 히파티아는 연설에 필요한 정규교육을 받았다. 미사여구를 사용하는 법, 언어의 힘과 최면을 유도하는 힘, 음성을 적당하게 조절하는 법, 상대방의 기분을 좋게 만들 정도의 부드러운 음성을 내는 방법에 관련된 수업이었다. 테온은 히파티아가 환경의 변화에 좌우되지 않기 위해 매 순간마다 아주 정확하게 그녀의 생활을 감독하였다. 그러나 타인에 대해서 지녀야 할 책임감조차 도외시하는 강력한 인간으로 만들려고 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쉽게 영향받고, 감수성이 예민한 젊음 이의 마음은 쉽게 상처받을 수 있다는 것을 경고하였다. 그리고 미사여구를 사용하는 것은 단지 화장을 하는 효과가 있을 뿐이며, 타인에게 영향을 미쳐서 타인을 조정하는 것을 경계하도록 하였다. 그의 교육은 감수성이 강하고, 타고난 재능을 발휘하고, 언변이 좋은 스승이 되도록 하였다.
히파티아는 고등교육을 받기 위해서 외국 여행을 했는데 가는 곳마다 왕족처럼 대우를 받았다고 한다. 일설에 따르면, 히파티아는 10년 이상 계속 여행을 했다고 하고, 다른 말에 의하면 1년여 가량 지속되었을 뿐이라고 한다. 아마도 그녀의 여행은 오랫동안 계속되긴 하였으나 연속적이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러나 한동안 그녀는 젊은 플루타르크와 그의 딸 아셀피제니아가 운영한 아테네의 한 학교의 학생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바로 여기서 수학자로서의 명성이 시작되었다. 알렉산드리아로 돌아왔을 때, 그 곳의 행정장관이 수학과 철학을 가르치도록 대학으로 초빙하였고, 암모니우스(Ammonius), 히에로클레스(Hierocles), 그 외의 훌륭한 학자들이 가르쳤던 그 곳에서 강의를 하면서 여생을 보냈다.
그녀는 인기 있는 선생이었다. 그 시대의 가장 훌륭한 학자들이 그녀의 강의실은 물론이거니와 집도 종종 방문하였는데, 그 곳은 도서관과 뮤지엄과 더불어 위대한 학문의 도시에 있는 가장 확실한 지성의 중심지 중 하나였다고, 역사학자 소크라테스는 쓰고 있다. 그녀는 마치 제사장처럼 여겨졌다.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로부터 온 열정적인 학생들이 히파티아의 강의를 듣기 위해 몰려들었다. 그녀는 디오판토스의 <산술>과 디오판토스가 고안한 기호에 관하여 강의하였다. 그녀의 강의는 자신의 수학 자체로서, 또한 호기심이 많은 그녀의 마음을 자극한 순수하고 예민한 기쁨으로 사랑하였기 때문이다.
히파티아는 수학에 관한 몇 권의 책을 저술하였다. 10세기 말경의 그리스 문학사전 편찬자인 수이다스(Suidas)는 몇 권의 책이 그녀의 것이라 썼으나, 불행히도 이런 책들이 대부분은 알렉산드리아의 톨레미 도서관과 함께 완전히 파손되었거나 폭도들이 세라피스 신전을 약탈할 때 없어졌다. 그녀의 연구는 단편적인 부분만 남아 있을 뿐이다.<디오판토스의 천문학적 계산에 관하여>하는 그녀의 저서 일부분이 15세기경에 바티칸 도서관에서 발견되었다.
디오판토스의 대수는 일차와 이차 방정식을 주로 다루고 있다. 히파티아가 단 주석은 몇 가지의 다른 풀이과정과 그녀가 최초로 시도한 상당수의 새로운 문제를 포함하고 있다. 어떤 학자는 디오판토스의 고유한 연구였다고 하는데 비해, 이것들은 히파티아의 연구 업적이라 평가하고 있다.
이런 연구 외에도 그녀는 디오판토스이 책을 대중화시킨<아풀리니우스의 원추곡선에 관하여>라는 책을 썼다. 그리스 시대가 막을 내림에 따라서 원추곡선에 대한 흥미는 점점 시들해졌다. 히파티아 이후부터 17세기 중반에 이르기까지 수학자들은 대개 이런 곡선들에 대해서는 무관심하였다.
히파티아는 별에 관련된 많은 연구 자료가 들어있는 톨레미의 천체관측 규범인 알마게스트(Almaguest)에 관한 해설서를 썼다. 그뿐 아니라 아버지 테온과 함께 유클리드에 관하여 최소한 한 권 이상의 책을 썼다. 이런 연구 활동의 대부분은 학생들을 가르치기 위한 교재로 준비된 것이었다. 원추곡선에 대해 히파티아가 주석을 쓰고 난 후 수세기가 지나 데카르트나 뉴턴 그리고 라이프니츠 등의 연구가 나올 때까지는 수리관학 분야에서의 발전은 더 이상 없었다.
히파티아의 동시대 사람들은 그녀의 천재성에 대하여 대부분 서정적으로 쓰고 있다. 소크라테스, 니세포로스, 필로스토르기우스 등은 모두 히파티아와 다른 교파의 역사학자였는데, 그녀의 성품이나 학문을 찬양하는데 인색한 법이 없었다. 그녀의 명성은 널리 알려져 있었고, 왕자들이나 철학자로부터 여러 차례 구혼을 받았다고 하는데 그녀는 그런 청혼에 대하여 "나는 진리와 결혼하였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그녀는 수학자로서 유명한 것만큼이나 철학자로서도 잘 알려져 있고, '뮤즈 여신에게' 또는 '철학자에게' 라고 주소가 쓰여진 편지는 당연히 그녀에게 배달되었다는 전설적인 이야기가 전해온다. 그녀는 '신플라톤학파'하고 불리는 그리스 사상을 추구하는 학교에 소속되어 있었다. 이 학교의 과학적인 이성주의 는 당시 지배적인 그리스도 종교의 사상에 반대되는 것이었고, 기독교 지도자들에게는 심각한 위협으로 느껴졌다. 이러한 신앙인 들은 히파티아의 철학을 사교로 생각하게 되었고, 기원전 412년에 키릴로스가 알렉산드리아의 주교가 되었을 때, 그러한 사교들을 조직적으로 억압하기 시작하였다. 키릴로스의 유일한 반대세력으로 보이는 오레스테와 맺은 우정과 신뢰로 인하여 히파티아는 두 파벌 사이에서 정치적 보복을 위한 인질로 붙잡혔다. 키릴로스는 대중의 열정에 불을 질렀고, 그를 비방하는 사람들을 제거하기 위해 폭도를 구성하였으며, 유대교회를 뒤엎고, 행정 장관의 지위와 권한을 거의 장악하였다. 그 자신의 지지자들이 거친 성향과 그의 행동에 뒤따른 정치적인 사건을 처녀를 제물로 바침으로써 자신의 세력이 가장 극대화될 것이라고 확신하게 해 주었다. 그의 지시를 받은 기독교 광신자 폭도들은 대학으로 강의하려 가는 히파티아를 도중에 마차에서 끌어내려 머리카락을 다 뽑고 결국은 고문으로 죽이고 말았다.
오래테스는 히파티아의 비참한 죽음에 대한 책임감을 느껴, 범인들을 재판정으로 끌어내려고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하려 했다. 그러나 생명의 위협을 느낀 나머지 도시를 떠났고, 조사는 '증거부족'리라는 이유로 여러 차례 기각되었고 결국 히파티아는 아테네에서 어떠한 비극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주교가 발표함으로써 조사는 일단락 되었다.
역사에서 히파티아는 비교적 확실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실제로, 그녀는 수학사에서 언급되는 최초의 여성으로 일컬어진다.
출처: 어린철학(
http://youngphilosophy.maru.net) [이 게시물은 (ㅡ.ㅡ)님에 의해 2004-08-02 10:51:31 자유게시판(으)로 부터 복사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