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에 어떤 멍청한 예수쟁이가 버트런드 러셀이 말년에 자신이 반기독교 신념을 후회했다는 말은 한 적이 있는데, 여기에 위대한 철학자 러셀이 1967년에 쓴 생애 마지막 글을 그 반론으로 올린다.
마지막으로 신에게 용서를 빌었다거나, 기독교를 호되게 비판한 자신의 생애를 후회했다거나 하는 기미는 조금도 없고, 오히려 대량무기의 확산으로 언제라도 인류가 종말을 맞이할 수 있는 시대의 상황에 대해 우려하고 어떻게 하면 인류가 화합하면서 번영을 계속 이루어 나갈 수 있는가를 제시하는 인류애로 가득한 글이다.
죽음이 가까워진 것을 깨달은 백조가 더 없이 아름다운 마지막 노래를 부른다는 말도 있지만, 19세기와 20세기 인류사의 격동을 두루 목격하며 어떤 의미에서는 격동의 무대에 직접 뛰어들기까지 했던 러셀이기에, 그의 마지막 말은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각별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세계 정세를 진단하고 예견하는 러셀의 시각은 단순히 국제정치에 대한 식견의 차원을 넘어서, 어떤 예지 또는 지혜의 차원에 도달하고 있다. 대량 살상 무기의 확산과 강대국 사이의 갈등, 그로 인한 인류 평화에 대한 심각한 위협. 이런 문제에 대해 반전주의자, 반핵주의자로서 러셀이 지녔던 위기 의식이 극명하게 드러나 있기도 하다.
그러한 위기를 해소하기 위한 노력에 뜻 있는 전 세계의 개인들이 적극적으로 동참할 것을 호소하는 러셀의 간절한 마음이 깊은 여운을 남긴다.
이제, 내 지난 삶 전체를 되돌아보아야 할 때가 오고야 말았다. 나의 삶이 과연 모종의 유익한 목적에 봉사해왔는지, 아니면 무익하고 하찮은 것들에 바쳐졌는지를 나 자신에게 되물어야 하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안타까운 일이기도 하지만, 무릇 미래를 알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과거에 대한 물음에 대해서 그 어떤 대답도 제대로 할 수 없다.
현대의 최신 무기들을 보건대, 다음 세대에 일어날 전쟁은 인간이라는 종을 절멸시키게 될 것이 틀림없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충분한 식견을 갖춘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위의 말에 동의할 것이다. 그러니 새삼스럽게 위의 말을 입증하는데 시간을 낭비하기는 싫다. 미래에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지 걱정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무(無), 절멸 등 절망에 속하는 것들과, 화해, 협력 등 희망에 속하는 것들 사이에서 어떤 선택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더구나 단 한 차례의 선택이 아니라, 태양이 식어버릴 때까지 미래에도 계속 선택의 기로가 이어질 것이다.
불행한 일이지만, 오늘날의 정치가들은 그런 선택에 익숙하지 않다. 그런 선택의 기로에 직면하는 것 자체를 꺼려하는 그들로서는 결국, 어쩔 수 없이 법정이나 형사 사건의 테두리 안에서 모든 문제를 다루려고 한다. 그 누구라도 인류의 마지막 인간이 될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고 볼 때, 우리 마지막 인간은 다른 마지막 인간의 최후를 어느 정도 예견할 수 있다.
법적인 강제와 구속을 강화하려는 움직임 속에서, 모든 사법 및 치안 기구, 영국이라면 런던 경찰국과 판사들이 인류의 마지막 인간을 붙잡아 처벌할 태세를 갖추고 있는 것이다. 요컨대 무수한 마지막 인간들이 차례로 죽어가는 셈이다.
그러나 미래에 전개될 장면은 이와는 사뭇 다를 것이다. 먼저 뉴욕, 런던, 베이징, 또는 도쿄와 같은 거대 도시의 거의 모든 주민들이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죽음은 그 발걸음을 온 나라 전역으로 옮기게 될 것이다. 교역의 중단으로 인한 기근이 창궐할 것이며, 결국 인류 최후의 생존자는 이름 모를 산 한 구석에서 마지막 가쁜 숨을 헐떡이다가 이내 소름끼치도록 외로운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그리고 영원한 침묵이 이어질 것이다.
만일 강대국들이 현재의 정책을 고수한다면, 위와 같은 결과는 피할 수 없다. 둘 혹은 그 이상의 강대국들이 심각한 견해 차이를 보이며 갈등 국면으로 치달을 경우, 과연 그런 강대국들은 어떻게 할 수 있을까? 강대국 A가 B에 양보할 수 있다. 또는 강대국 B가 A에 양보할 수 있다. 또는 강대국 A와 B가 모종의 합의에 도달할 수도 있다. 또는 강대국 A와 B가 싸울 수도 있다. 두 강대국들 중 하나가 상대방에게 양보한다면, 아마도 나약하다는 평판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두 강대국 가운데 하나가 그 위신이 심각하게 손상된다면, 결국은 싸우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유력한 동맹국을 확보해야만 할 것이다.
사실 강대국의 숫자는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이러한 일련의 과정들은 비교적 빠른 시간 안에 진행되어 그 결과가 드러나지 않을 수 없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우리는 이러한 일련의 수순 또는 단계를 목격해왔다. 쿠바 위기 당시 일어난 일들을 생각해 보라. 양 진영은 기꺼이 서로 싸우고자 했다. 그러나 마지막 파국 직전에 흐루시초프의 용기가 부족했고, 결과적으로 그는 다음 번 위기 때까지 잠정적으로나마 세계가 존속할 수 있게 했다. 그러나 러시아는 죽음의 길로 나서는 용기를 포기한 것이 결코 아니었다. 결국 흐루시초프는 실각했다.
흐루시초프의 개인적인 용기 부족 때문이건 그 무엇 때문이건 여하튼 또 한 번의 위기가 잦아들기는 했지만, 과연 앞으로도 계속해서 그런 행운을 바랄 수 있을까? 도대체 지금의 체제는 무엇인가? 심각한 갈등 국면이 발생하면, 협상 테이블이 마련되고, 양측은 각자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밀고 당기는 논쟁을 벌인다. 그리고 보통 그 각각이 한 쪽 진영의 이익을 반영하고 있는 두 개의 절충안에 도달하곤 한다. 그러한 절충안 각각에 군비 축소 관련 조항이 포함되어 있으면, 양측은 그런 조항들이 언제라도 아무렇지 않게 위반될 수 있다는 것을 지레짐작으로 알 수 있는 형편이다.
그리고 양측은 상대방이 군비 축소 조항을 사소하게라도 위반할 가능성을 인류의 종말보다도 더 큰 재난으로 여긴다. 결국 아무 것도 실질적으로 이루지지 못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강대국들은 깨달아야만 한다. 평화는 실로 모든 인류가 주목하고 바라는 최대의 관심사라는 것을 말이다. 각국 정부가 이런 점을 분명하게 깨닫도록 만드는 것이야말로 최우선적인 목표가 되어야 마땅하다.
이러한 최우선적인 목표를 향해 과연 어떤 일들이 성취되어 왔던가? 그리고 내가 개인적으로 그런 성취에 기여한 바가 있다면 과연 무엇일까? 공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요컨대 국가 간의 관계의 측면에서라면, 지금까지 성취된 것들은 아주 없다고 하지는 못하겠지만 정말 하찮은 것에 불과하다. 러시아는 스스로 나토에 참여함으로써 나토의 성격을 바꾸려는 의지를 표명해 왔다. 그러나 중국이 새로운 위협이 되고 있다. 베트남 전쟁은 아무래도 협상에 의해 종식될 것 같다. 일반적으로, 미국을 제외한 열강들은 전쟁으로 치닫는 것을 무척 꺼리는 태도를 보여주고 있다. 프랑스는 다소 불확실하기는 하지만 희망의 여지를 남겨두고 있다. 여하튼, 공산권과 비공산권 사이의 강고한 대결 구도는 허물어지고 있다. 향후 10년 동안 그럭저럭 평화가 유지된다면, 희망의 가능성이 있다.
그렇다면 개인은 과연 무엇을 할 수 있는가? 개인은 보다 나은 세상을 위해 선동가의 일을 자임할 수 있다. 요컨대 현대의 전쟁이 초래할 심각한 결과를 지적할 수도 있으며, 인류 절멸의 위협을 소리 높여 외칠 수도 있다. 비록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미워하게 되는 한이 있더라도, 계급, 종족, 인종, 국가 등이 다르다는 이유에서 사람들을 증오하지는 말라고 가르칠 수도 있다. 인간이 이룩한 예술과 과학의 위대한 성취들을 제대로 평가할 수 있고,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제대로 평가할 수 있게 만들 수도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경쟁보다 협력이 나은 것임을 강조할 수도 있다.
마지막으로 질문을 던져 본다. 그러한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과연 나는 무언가 한 일이 있는가? 아마도 있기는 있겠지만, 슬프게도, 거대하기 짝이 없는 세상의 악(惡)에 비한다면 그야말로 보잘 것이 없다. 영국과 미국의 극소수 사람들에게 나는 자유주의적인 견해를 주저 없이 표현하도록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그리고 현대의 최신 무기들이 어떤 끔찍한 결과를 낳을 수 있는지 몸서리 치게 만드는데도 얼마간 기여를 했다. 물론 보잘 것 없는 수준의 기여라 하겠지만, 만일 모든 사람이 보잘 것 없는 수준의 행동이나마 적극적으로 취한다면, 우리가 사는 지구는 머지 않아 낙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잠시나마, 우리가 사는 이 행성이 도대체 무엇인지, 어떤 형편인지 곰곰이 생각해보자. 지금도 힘겨운 노동과, 배고픔과, 항시적인 위험이 도처에 기다리고 있으며, 사랑보다는 증오가 득세하고 있다. 그러나 보다 행복한 세상도 얼마든지 가능한 법이다. 기계가 수행하는 단조롭고 반복적인 일의 연속보다는, 그리고 무시무시한 경쟁보다는, 사람과 사람의 화해와 상호 협력이 훨씬 더 두드러진 곳, 우리가 마음 속 깊이 사랑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이 오로지 죽이고 파괴하는 것만을 임무로 하는 가공할만한 기계를 위해 희생당하지 않는 곳, 산을 이룰 정도로 무수한 시체가 쌓이는 곳이 아니라 웃음과 환희가 흘러 넘치는 곳. 이런 것이 불가능하다고 하지는 말자. 결코 그렇지 않다. 간절히 소망을 품고 보잘 것 없으나마 행동에 나설 수 있는 사람, 남들을 고문하여 고통을 주는 따위의 일과는 애초부터 거리가 먼 사람, 그런 사람들에게만이 어떤 가능성이 있다.
우리들은 각자의 내면 안에 이 세상을 보다 아름답게 만들 수 있는 예술가를 한 명씩 가두어 놓고 있다. 부디, 우리가 가는 모든 곳에서 그 예술가가 환희와 행복을 마음껏 펼칠 수 있도록, 자신 안의 그를 기꺼이 석방하기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