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신입니다. 왠줄 아십니까?
제 일기장에 제가 신이라고 적혀있기 때문입니다. 제 말은 진리입니다.
왠줄 아십니까? 제 일기장에 제 말은 진리라고 적어놨기 때문입니다. -엑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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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문이 나를 어떻게 바꾸어 놓았는가? 3부
인류애
일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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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4.28 16:07
2부에서 이어집니다.
나는 내 마음에 새로운 생각들을 적용시키기 시작했다. 나는 이러한 문제들에도 불구하고 나의 믿음을 지킬 수 있는 진보적인 삶의 철학을 결합하는데 최선을 다하였다. 나는 진화, 오류적 성경, 자신에 대한 고차원적 관점 그리고 인류애를 나의 기독교에 넣기까지 포함하는 여러 방법들을 실험해 보았다.
그러는 동안 나는 다른 흥미거리로 옮겨 갔다: 컨트리 춤, 영화 그리고 로만스. 아 그래, 로만스. 나는 아주 특별한 여인과 사람에 빠졌고, 그녀는 삶의 가장 좋은 벗이 되었다. 그녀는 몇 번의 힘든 시절에 나를 지지해주었고, 그녀에게 매우 감사한다. 그녀는 열정적이었고 내가 단지 꿈으로만 꿔오던 다른 것들에 대해 신경 써 주었다. 38살이 되어서야, 나는 전심을 다해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을 찾았다 우리는 곧 결혼했다.(그녀는 나의 회의론이 나를 최종적으로 어디로 이끌었는지에 대해 동의하지 않았으나 항상 나의 가장 좋은 친구이다.)
나는 교회 일에 참여하는 것으로부터 멀어졌다. 이제 나의 거처를 다시 찾는 노력을 했다. 나의 사고 체계에 급격한 변화가 생겼다. 이제 나는 더 이상 그곳의 가장 보수적인 사색자가 아니었다. 이제 나는 교회에서 가장 자유스러운 사색자였다 (내가 말할 수 있는 한). 나는 그곳에서 여전히 적응할 수 있다고 스스로를 설득했다— 결국 나의 여정을 시작하게 한 것도 자유적 요소였다 – 그러나 점점 더 나는 교회의 여러 프로그람과 차별화 하는 것이 어려움을 알았다. 그리고 나는 모든 이들을 놀래키는 질문들을 했다.
의심하는 마음을 멈출 수 없다. 그것은 마치 댐을 통해 새는 첫번 째 물과 같다. 임계 크기에 도달하면 자유롭게 터져버린다. 나의 사고는 멈추기를 거부한다—댐은 무너졌다. 나는 성경에 비판적인 책들을 읽었다. 나는 전적으로 새로운 관점에서 성경을 읽었다. 나는 인터넷에서 무신론 사이트들을 발견했다. 나는 많은 질문들을 했다—질문들 중 많은 부분이 본 사이트에서 보여진다. 나는 점점 더 내 자신을 기독교도로 보기 어려워졌다. ”자유주의 기독교인”이란 딱지 조차도 호소력을 잃고 있었다. 나는 더 이상 기독교의 기본적인 것들을 믿을 수 없었다.
어느 것이 우리를 오늘날에 이르게 하였는가. 나는 더 이상 내 자신을 기독교도로 구별하면 않된다 고 결심하였다. 나는 어떤 존재인가? 만일 당신이 나를 위한 딱지가 필요하다면, 나를 전(前)기독교도, 인도주의자 혹은 자유사상가라고 불러도 좋다. 2002년 9월에 내게 일어난 모든 것을 설명하기 위해 나는 본 웹사이트를 만들었다. 나는 이것이 여러분이 나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기를 희망한다. 나는 쉬운 길을 선택하지 않았다. 내가 더 이상 이 메시지가 사실임을 믿지 않는다고 사람들에게 말하는 것이 쉽지 않다. 그러나 나는 압도적인 증거들을 안다. 만일 증거의 무게가 제한적이라면, 나는 믿는 다수를 따르고 문제 거리를 제기하지 않을 텐데. 그러나 성경에 대해 단지 너무도 많은 문제들이 존재한다. 그래서 나는 남들이 덜 간 길을 선택한다.
나는 여러분들에게 나를 따르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의 마음을 갖고 있다. 스스로의 힘으로 결정할 수 있다. 그러나 아마도 내게서 배울 수는 있었으리라.
나는 이제 삶에 대한 다른 관점을 갖고 있다. 예를 들어, 나는 더 이상 사람들을 악하다고 보지 않는다. 누군가가 내게 상처를 준다면, 나는 그들이 악하기 때문에 그런다는 더 이상 생각하지 않는다. 이제는, 상황과 세상의 지식에 대한 그들의 인식으로부터 그들에게는 그 당시 그렇게 하는 것이 최선으로 보여 그렇게 했다고 나는 생각한다. 가증스러운 행위들을 한 가증스러운 사회악들을 용서하기란 쉽지 않았다. 상처 주는 행위들을 하는, 혼란스럽지만 자기 뜻이 분명한 개인들을 용서하기는 쉽다. 이 관점의 차이가 이적을 행한다. 말로만 부산 떠는데 집중하는 대신에, 상처 주는 행위를 한 사람을 이해하는데 집중할 수 있게 된다. 이성적 질문하기는 관점을 바꿔 놓으며, 바뀐 관점이 삶을 바꾼다.
나는 종교와 무관한 것이 훨씬 더 행복하다는 것을 발견한다. 모든 것을 미리 정해진 편견에 짜맞출 필요로부터 마음이 자유롭게 되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나는 여러분과 내가 결코 의심하는 것을 멈추지 않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