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신의 논리

저는 신입니다. 왠줄 아십니까?

제 일기장에 제가 신이라고 적혀있기 때문입니다. 제 말은 진리입니다. 왠줄 아십니까? 제 일기장에 제 말은 진리라고 적어놨기 때문입니다. -엑스

광신의 논리

오브르 8 6,499 2004.11.09 18:04

광신의 논리

  

BY

 

오브르

  

 Ⅰ. 基督敎狂信史


 “두 사람이 같은 일을 하더라도, 그것은 결코 같을 수 없다.”는 라틴 속담이 있다. 예수가 하면 기적이고, 다른 종교에서 나타나는 기적은 사탄과 마귀의 궤계라 한다. 이를테면 터툴리안(Tertullian)은 교회 제도와 미트라 숭배의 유사성을 “사탄이 하나님의 성사를 모방한다”고 했으며, 저스틴(Justin)은 기독교의 주의 만찬과 페르시아의 하오마 성찬식의 일치성을 그저 악령의 소행이라고 주장했다.1)

 기독교 광신도들은 도그머(Dogma)를 위해서는 무력도 불사해야 한다고 믿으며, 진리는 기독교에만 있다고 확신한다. 그래서 타인에게 기독교의 도그머를 받아들이도록 강요하고,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을 적으로 인식한다. 일반적으로 기독교 광신도들은 이분법적 사고, 선과 악, 빛과 어둠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그렇기 때문에 이교(異敎)를 박멸시키고 학자들을 박해하거나 죽여도 전혀 양심에 거리낌 없이 성스러운 임무를 열성적으로 수행한다.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로 공인받게 되자, 기독교도들은 즉각 로마의 이교를 때려잡기 시작했다. 붙잡힌 이교도들은 고문을 당하면서 있지도 않은 죄를 자백하고, 처형당하고, 화형당했다. 이교도들의 성전은 기독교도들에 의해 파괴되거나, 교회로 모습을 바꾸게 된다. 더군다나 이교도들의 수많은 서적들도 불 속으로 들어가 잿더미로 화했다.

 다음은 이교도였던 라비니우스가 황제에게 호소한 내용이다.


 검은 복장을 한 이 폭도들은 엄연히 법이 있는데도 법을 무시하고, 곤봉과 돌과 쇠몽둥이를 들고 다니며 신전을 유린하며, 더러는 맨손 맨발로 유린합니다. 그래서 신전은 완전히 파괴되어 지붕이 내려앉고, 벽이 무너지고, 석상이 끌어내려지고, 제단이 뒤집어지고, 사제들은 입을 다물지 않으면 죽음을 당합니다. 첫 신전이 파괴되면, 두 번째, 세 번째 신전으로 달려갑니다.……그런 짓을 저지르는 자들은 수가 너무나 많은데……이루 헤아릴 수 없는 만행을 저지른 후 함께 모여서, 무슨 짓을 했는지 서로 다투어 자랑하다가, 최고의 만행을 저지르지 못한 것을 부끄러워합니다.


 390년대에 한 익명의 이교도는 세라피스 신전이 파괴되리라 예언했다. 그의 예언대로,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391년 6월 16일에 모든 이교도 신전을 없애버리라는 칙령을 내리자, 기독교도들은 즉각 알렉산드리아의 세라피스 신전을 파괴했다. 황제는 재차 ‘그리스도교에 적대적인 모든 책을 불살라라. 그 책들이 하나님의 분노를 사지 않도록, 그리고 경건한 자들을 오염시키지 않도록’이라고 명한다. 그 결과 수천 년 동안 축적된 지혜와 과학은 기독교도들에 의해 사라지고 만다.2)

 신플라톤학파의 철학자였던 히파티아(Hypatia, 370?∼415)는 415년에 알렉산드리아의 대주교 키릴로스의 선동에 의해 폭도로 변한 기독교도들에게 살해당했다. “그녀는 마차로부터 끌려 내려, 발가벗기우고, 교회로 끌려가서 독경사(讀經師) 피터와 한 무리의 광폭하고도 무자비한 광신자들의 손에 사정 없이 학살되었다. 날카로운 굴 껍데기로 그녀의 살은 뼈로부터 발라내졌고, 경련을 일으켜 떨고 있는 사지는 불꽃 속에 던져졌다.”3)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증명해낸 갈릴레이(Galileo Galilei, 1564∼1642)는 1633년에 종교재판에 회부되어 유죄판결을 받고 가택연금을 당해 플로렌스에 있는 그의 집에서 여생을 갇혀 지냈다.4)

 또한 기독교는 철학자·수학자였던 버트란드 러셀(Bertrand Russell, 1872∼1970)이 뉴욕 시립대학에서 강의를 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 갖은 방법으로 훼방을 놓아 결국 교수로 부임하지 못하게 했다. 화이트헤드, 존 듀이, 아인슈타인 외 여러 지식인들이 그를 옹호하고 나섰으나 기독교 앞에서는 그다지 효과를 보지 못했다. 그의 책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Why I Am Not a Christian)』의 편집자인 폴 에드워즈 교수는 서문에 이렇게 써놓았다. ‘미국의 경우 종교세력의 공격은 헌법의 명시된 교회와 국가의 분리 원칙을 뿌리부터 흔들어놓는 무수한 형태의 시도들로 나타나고 있으며 그러한 많은 시도들이 성공을 거두었다.……영국에서도, 종교를 옹호하는 저속한 선전이 맹위를 떨치고 있으며 보다 공격적인 종교집단들은 자유사상가들이 견해를 발표하지 못하도록 안간힘을 쓰고 있다.……버트런드 러셀이 뉴욕 시립대 철학과 교수로 부임하려하자 끝까지 방해하여 결국 좌초시킨 것도 바로 이런 세력들이다.’5)

 종파가 다른 기독교도 광신의 표적에서 벗어날 수 없다. 광신도들은 그런 것을 가리지 않고, 자신들의 지배영역 내의 이교도들에게 대했던 것과 별반 다르지 않는 입장을 취한다.

 1096년, 기사 무일푼 발터(Walter the Penniless)는 은수자 피에르(Peter the Hermit)와 함께 독일과 프랑스에서 십자군을 만들었다. 이들이 십자군을 이끌고 간 곳은 그리스 정교의 세력권인 헝가리였다. 같은 기독교였지만 가톨릭 외의 기독교는 적이라는 교회의 가르침을 받았기 때문에, 그들을 공격하는 것도 모슬렘을 쳐 없애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신들의 임무라 생각했다. 교회에서 가르친 그대로 피에르가 이끄는 십자군은 가차 없이 헝가리인들을 공격했고, 4만 명의 헝가리인들을 학살해 버렸다.

 쿼이커교는 1647년에 폭스(George Fox, 1624∼1691)가 친우회(the Religious Society of Friends)를 세우면서 시작되었다. 이들은 하나님 앞에서 떨었기(quake) 때문에 퀘이커교도(Quakers)로 알려졌다. 폭스는 1676년에 “예수가 흘린 피는 흑인을 포함한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였다”고 말하며 노예제도를 반대했다. 퀘이커교도들은 1650년대부터 뉴잉글랜드(메인, 뉴햄프셔, 버몬트, 매사추세츠, 코네티컷, 로드아일랜드 주를 합쳐서 ‘뉴잉글랜드’라 한다)에 들어와 포교활동을 하다가 이단으로 여겨져서 추방당했다. 그러나 1659∼1661년 사이에 추방되었던 4명의 퀘이커교도가 다시 매사추세츠 식민지로 돌아왔는데, 그들이 처형되는 사건으로 인해 퀘이커교도들은 사회 개혁 의지를 크게 상실하고 만다.

 청교도들은 퀘이커교도들을 심하게 박해했는데, 그들을 발가벗겨 여러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채찍으로 때린다거나 목과 발뒤꿈치를 인두로 지져 불구자로 만들었다. 역사가 매콜리(Thomas Macaulay)에 의하면, 초기에는 움직이지 못하게 묶어 놓고 굶주린 곰에게 잡아먹히게 했으나 이를 구경하는 사람들이 너무 즐긴다는 이유로 얼마 안 가 폐지되었다.

 1657년 10월 14일자로 보스턴 법정에서 공표된 한 법조문을 보면 아래와 같다.

 “첫 번째로 잡힌 남자 퀘이커는 귀를 하나 자르고 자비로 형무소에 보낼 것이며, 두 번째로 잡히면 나머지 귀를 마저 자른다. 그리고 첫 번째로 잡힌 퀘이커 여자는 심한 채찍질형을 가할 것이며, 두 번째에도 같은 벌을 준다. 그리고 세 번째 잡히는 경우에는 남녀구별 없이 불에 달군 쇠꼬챙이로 혀에 구멍을 뚫고 형무소 노동을 하게 되며, 모든 수감비용을 지불할 때까지 형무소 노동을 하도록 한다.”6)

 십자군 전쟁이란, 기독교도들이 모슬렘들로부터 예루살렘 성을 되찾기 위해 ‘성지 회복’이라는 종교적 명분 아래 200여 년 동안 9차례에 걸쳐 지속된 전쟁을 말한다. 십자군 전쟁이 일어나게 된 경위는 다음과 같다.

 11세기에 기독교도들의 성지 순례가 성행했고, 11세기 중엽에 이르러 성지 순례가 절정에 달했다. 예루살렘은 638년 이후 쭉 이슬람의 영토였는데, 아랍의 법이 비교적 관대하여 기독교도들의 성지 순례를 막지 않았었다. 그러나 1079년 셀주크 투르크족(Seljuk Turks, 터키계 모슬렘)이 소아시아의 대부분을 차지하게 되자 성지 순례의 길이 막히게 되었다. 11세기는 기독교가 이슬람을 스페인에서 밀어내는 상황이었고, 이탈리아 남부의 시칠리아 섬을 빼앗기도 했다. 즉, 기독교가 이슬람과의 경쟁에서 우위를 차지하던 때였다. 유럽 세계는 이 시기에 이르러 경제적으로 안정되기 시작했다. 토지의 생산성이 증대되었으며, 인구도 증가했다. 당연히 영주나 귀족들의 수도 많아지게 되고, 국왕은 이들에게 줄 땅이 부족하게 되었다. 그래서 영주나 귀족들의 세력 싸움이 생겨났고, 세력 싸움에서 밀려난 자들은 힘을 합쳐 국왕을 압박했다. 국왕은 이를 해결하기 위해 전쟁을 통한 새로운 영토의 획득을 원했다. 이러한 현실적인 문제들이 중첩되면서 결국 교황도 위협을 받게 되는 상황에 이르렀다. 때마침 비잔틴 제국의 황제 알렉시우스 1세(Alexius, 1081∼1118)가 교황 우르바노 2세(Urban Ⅱ, 1088∼1099)에게 빼앗긴 아시아 영토를 되찾기 위한 원군을 요청했다. 교황은 가톨릭의 영향력을 강화하려 했기에 비잔틴 제국을 도울 것을 약속한다. 교황은 1095년 11월 27일 프랑스의 클레르몽에서 종교회의(Council of Clermont)를 열고 십자군을 선언했다. 그러나 교황은 군대를 동원시킬 수 있는 권한이 없었기 때문에 십자군으로 종군하는 사람들에게 특권을 주기로 한다.


 1. 종군자의 가족과 재산은 교황이 보호해 준다.

 2. 종군자의 모든 죄는 사함을 받을 수 있다.

 3. 형무소에서 복역 중인 자가 종군하면 세상의 법적인 죄와 종교적인 모든 죄도 사함을 받는다.

 4. 종군자의 빚은 탕감되고 전사하면 하나님 나라에 갈 수 있다.

 5. 동방에는 성자의 유골, 금은보화, 미녀가 많으니 전리품으로 얼마든지 가져올 수 있다.


 교황이 십자군 지원자들에게 주는 특권으로 인해 유럽 전역에서 폭발적으로 십자군에 지원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국왕들은 장거리 출정에 드는 막대한 비용을 감당할 수 없었기에 나중에 이자를 쳐서 갚는 방법으로 재벌(財閥)들에게 돈을 빌렸다. 이렇게 구성된 십자군은 겉으로 보기엔 한 가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뭉친 군대로 보였지만, 그 내부를 들여다보면 신앙심만 깊은 텅 빈 머리의 소유자, 범죄자, 일확천금을 꿈꾸는 자, 새로운 영토를 획득하려는 자와 같은 무리였다. 이렇게 구성된 십자군은 군기가 있을 리 만무했다. 그저 ‘하나님이 십자군을 직접 지휘하므로 무조건 승리할 것’이라 믿었다.7)

 1차 십자군(1096∼1099)은 유럽의 봉건 귀족들이 부대를 모집하면서 이루어졌다. 그러나 군대 전체를 지휘할 지도자가 없었기에 부대는 질서가 없고 난잡했다. 1098년 6월 3일 십자군은 시리아 지방의 안티옥(Antioch)을 점령한 뒤 11월 말에 인근의 마라라는 성을 공격했다. 마라에는 군인이 없었으나, 모슬렘들은 십자군에 2주 동안 맞서 싸웠다. 그러자 십자군은 성벽을 넘기 위해 나무탑을 만들었으며, 이를 본 모슬렘들은 전의를 상실하고 성벽을 버렸다. 십자군은 성벽을 넘어 들어와 닥치는 대로 살육을 자행했으며, 심지어 인육을 먹기까지 했다. 십자군 연대기 저자인 라울 드 카엥은 ‘마라에서 우리들은 이교도 어른들을 커다란 솥에 넣어 삶았다. 또 그들의 아이들을 꼬챙이에 꿰어 불에 구웠다’고 고백하고 있다. 십자군 지휘관들은 교황에게 보낸 공식 서한에서 자신들이 주둔하고 있는 마라에 기근이 들어 인육을 먹지 않으면 안 되는 어쩔 수 없는 상황에 처했다고 한다. 그러나 마라 주민들은 ‘광분한 십자군이 사라센인들을 가죽을 벗겨 먹을 것이라고 외치며 거리를 누비는 모습과 노획물을 먹어치우기 위해 불가로 몰려드는 모습’을 목격한 산 증인들이었다. 게다가 십자군 연대기 저자 알베르 덱스트는 ‘우리들은 투르크인들과 사라센인들의 인육을 먹는 일은 물론이거니와 심지어 개조차 먹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고 증언하고 있다.8)

 1099년 6월 7일 십자군은 감격 속에 예루살렘 성에 도착했다. 7월 8일 아다마(Adamar) 주교는 2만 명이나 되는 십자군을 이끌고 성 아래에 주둔하고, 찬송가를 부르고, 오랫동안 설교를 했다. 아다마 주교와 십자군은 성 아래서 기도를 하면 성이 무너질 줄로 믿었다. 그러나 그들의 생각과는 달리 아무리 기도를 해도 성이 무너지지 않자 이상하게 여겼다고 한다. 이를 지켜보던 모슬렘들은 십자군이 종교행사를 하는 줄 알고 그들을 공격하지 않았다. 7월 15일 모슬렘들이 방심한 틈을 타 십자군은 성 안으로 난입하여 회교도, 유대교도, 기독교도를 가리지 않고 참살하고 불태웠다. 그렇게 2주일 동안 약탈과 살육이 이어졌다.9)

 십자군의 성품이 어떠했는지는 성 버나드(St. Bernard, 1090∼1153)의 설교를 본다면 알 수 있다.

 “그리스도의 전투사로서 이교도들과 싸우는 것은 주님을 위해서다.……적을 살해하였다고 죄책감을 갖거나 혹은 자신이 살해당할 것이라고 걱정할 필요는 조금도 없다.……적을 죽이는 것은 주님께 쓰임받는 행동이며 자신이 죽임을 당하는 것은 주님 곁으로 가기 위한 행동이다.……이교도가 죽으면 정의의 사람들은 이교도가 벌받은 것으로 보고 기뻐할 것이다.……우리 하나님의 믿음, 즉 천주교 신앙에 반대하는 자들을 모두 절멸하기 위하여…….”10)

 마녀사냥은 종교재판의 연속이다. 종교재판소는 ‘거룩한 재판소’라 불렸고, ‘이단은 왕에 대한 반역보다 더 나쁜 것이므로, 죽음으로써 다스려야 한다’고 했다. 이단은 유대인, 이교도, 모슬렘, 이단 판정을 받은 기독교도를 의미한다. 교황 그레고리오 9세(Gregor Ⅸ, 1227∼1241)는 1233년에 종교재판을 도미니코회―도미니코 수도사들은 도미니 칸네스(Domini Canes) 즉 신의 경비견(the sleuth-hounds of god)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종교재판소를 충실히 수행했다―에 위임했다. 교황 인노첸시오 4세(Innocenz Ⅳ, 1243∼1254)는 교서를 통해 종교재판소의 관한 규정을 반포했다. 마녀사냥에서 나타난 고문, 화형, 마녀의 재산 나눠 갖기 등은 모두 종교재판에서 유래한다. 스페인의 종교재판이 가장 무자비했는데 2천만 명이던 인구가 200년 후에는 6백만 명으로 줄었을 정도다. 15세기가 되면서 종교재판소에서 봉건제후, 왕실법정으로 마녀사냥의 임무가 떠넘겨졌다.11)

 1484년 12월 5일 교황 인노첸시오 8세(Innocenz Ⅷ, 1484∼1492)가 종교재판과 마녀 화형을 정당화시키는 칙서를 반포했는데, 인쇄술의 발달로 이 칙서는 『마녀의 망치(Malleus Maleficarum)』12)라는 책과 함께 유럽으로 퍼져나갔다. 마녀사냥은 15세기 말부터 18세기 말까지 대략 300여 년 동안 지속되었다. 특히 16세기 말에서 17세기 말에는 마녀사냥이 극에 달했다.

 마녀사냥은 유럽 전역에서 일어났는데, 지역마다 피해 정도가 다르다. 칼뱅의 고향인 스위스 제네바에서는 단 세달 동안 5백여 명의 사람들이 이단과 마녀로 처형을 당했던 반면, 핀란드 오스트로보트니아에서는 1665년에서 1684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132명이 기소되어 그 중에서 20명 만 처형되었다.13)

 마녀 사냥은 끝없는 종교 전쟁, 30년 전쟁, 프롱드의 난(1648∼1653, 프랑스의 내란), 악화된 경제, 기근, 페스트, 가축 전염병으로 인한 유럽의 황폐화에서도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즉 모든 불행의 원인인 어떤 것을 찾고자 했다. 어떤 것이란 15세기 말에 이르러 팽배해진 ‘마법’에 대한 믿음이다. 흔히 마법사란 상징과 의식을 통해 타인의 운명을 변화시키는 능력을 가진 자를 뜻한다. 그런데 15세기 초가 되면서 마법을 악마에 기인한 일종의 저주로 인식하게 되었다. 종교재판에서 마법사란 이교도, 유대교도와 같은 의미였다. 유대교의 안식일인 사바스(Sabbath)는 반유대주의적인 종교재판에서 마녀 집회를 뜻하는 용어로 쓰였다.

 마녀(witch)라는 말은 고대 영어의 wicca(남자 마녀, 발음은 witch), wicce(여자마녀, 발음은 witcheh), wiccian(마법을 걸다)에서 유래한다. 마녀라 하면 보통 여자만을 생각하는데, 마녀사냥에는 남녀노소가 없었다. 단지, 마녀사냥에서 여성이 차지하는 비율이 높았기 때문―여성은 남성보다 육체적인 힘과 정치적인 힘이 약했다. 여성은 주로 산파·요리·치료 등의 일을 도맡아 했는데, 이 일들이 ‘마녀술’로 의심을 샀다. 게다가 기독교는 여성을 남성보다 유혹에 쉽게 빠지는 존재로 인식했기에 마녀사냥에 주된 표적은 여성이었다―에 마녀사냥하면 검은 옷, 빗자루, 매부리코, 고깔모자, 쭈글쭈글한 얼굴의 노파 등을 연상하게 된다. 그러나 마녀로 몰린 실제 인물들은 한국의 경우에 비유한다면, 이웃집 아저씨나 아줌마, 이모나 삼촌, 무당, 점치는 사람, 토정비결 보는 사람, 불공드리는 사람, 제사 지내는 사람, 부적 붙이는 사람, 손금이나 관상 보는 사람처럼 우리들 곁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14)

 마녀로 지목된 사람들은 고문에 못이겨 자신이 마녀라고 자백을 했는데 고문의 종류는 실로 다양했다. 일례로 1631년 한 여성에 대한 심문 과정이 있다.


 고문 집행인은 임신한 여자를 묶고 고문대에 눕혔다. 그리고는 심장이 거의 터질 때까지 고문했으나 동정심이라고는 보이지 않았다. 그녀가 자백하지 않자, 고문은 다시 반복되었다. 그는 그녀의 손을 묶고, 머리카락을 모두 잘랐으며, 브랜디를 그녀의 머리 위에 붓고는 불을 질렀다. 유황을 그녀의 겨드랑이에 발라 불을 질렀다. 두 손이 등 뒤로 묶인 채, 그녀를 천장까지 올렸다가는 갑자기 아래로 떨어뜨렸다. 올렸다가 내동댕이치는 고문은 집행인과 그 조수들이 저녁을 먹으러 갈 때까지 몇 시간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그들이 다시 돌아왔을 때, 고문장은 그녀의 발과 손을 등께로 묶은 뒤, 브랜디를 등에 붓고는 불을 질렀다. 무거운 쇳덩이를 그녀의 등에 지워놓은 채로 끌어당겼다. 이런 뒤, 다시 고문대에서 사지를 잡아당기는 고문을 가했다. 날카로운 못이 솟은 고문대를 등에 올려놓고는 다시 천장까지 올린다. 집행장은 다시 그녀의 발을 묶고 거기에 50파운드나 나가는 도르래를 매달아 심장이 터질 만큼 고통을 주었다. 그래도 여자가 자백하지 않자, 집행인은 그녀의 발을 풀고 바이스로 발가락에서 피가 스며나올 때까지 그녀의 다리를 조였다. 이것 역시 소용이 없자, 다시 여러 가지 방식으로 사지를 늘어뜨리고 조이는 고문을 가했다. 이제 고문 집행인은 고문의 세 번째 단계에 돌입한다. 그녀를 의자에 눕히고 자신의 웃옷을 덮어주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난 너를 하루, 이틀, 삼일, 혹은 일주일이나 몇 주 동안 잡아두는 것이 아니라, 반 년이나 일 년, 혹은 평생을 잡아둘 수 있다. 네가 자백할 때까지 말이다. 그리고 만일 자백하지 않으면, 결국 난 네가 죽을 때까지 고문할 수밖에 없고, 결국 넌 화형을 당하게 되지.” 집행인의 사위가 그녀의 팔을 잡아당겨 다시 위로 끌어올렸다. 고문 집행인이 말을 때리는 채찍으로 그녀를 때렸다. 그녀를 바이스에 놓고는 6시간 동안이나 고문했다. 그리고 나서, 다시 무자비하게 채찍으로 때렸다.15)


 이렇게 고문을 받은 사람들은 고통에 못이겨 대부분이 자백을 하고 말았다. 마녀집회에 나갔으며16), 악마예배를 했으며17), 악마와 계약을 했으며18), 악마와 성관계를 맺었다19)고 모두 허위 자백할 수밖에 없었다.

 마녀를 판별하는 방법에는 여러가지가 있었다. 마녀집회에 나간 마녀는 악마와 결탁한 표시로 몸의 어느 부분인가에 ‘마녀마크’가 남겨진다. 몸에 난 사마귀나 흉터나 유두나 음핵과 같은 돌출 부분이 보통 사람보다 크면 마녀마크인 셈이다. 또 마녀마크를 찾아내기 위해 사람을 발가벗겨 몸의 있는 털을 모두 깎아내고 이를 찾아내기 위해 온 몸을 바늘로 찔렀다. 찔러서 아픔이 없는 곳이 있으면 마녀로 판명났다. 그리고 몸을 묶고 물에 던져서 떠오르면 마녀이고 가라앉으면 무죄(그런데 가라앉으면 당연히 숨을 쉴 수 없기 때문에 죽는다)인 ‘마녀의 수영’. 또 저울의 한 쪽에 성서를 올려놓고, 다른 한 쪽에 사람을 올려놓는다. 저울이 사람 쪽으로 기울면 유죄가 된다. 그리고 처형된 마녀의 재산은 교황청, 교회, 마녀사냥꾼들의 몫으로 돌아갔다.20)

 종교 개혁의 시대(1520∼1650)는 마녀 사냥이 극에 달했던 시기와 겹친다. 신교도 구교와 마찬가지로 악마의 실재를 믿고 있었고, 마녀 사냥에 열을 올렸다. 루터는 악마가 마법사와 마녀를 돕고 있다고 믿었다. 그는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견해를 따라 몽마(夢魔)의 가능성을 인정했다. 악마가 떠드는 소리에 시달렸었던 적도 있었고, 성경을 번역하다가 자신을 바라보며 웃는 악마를 향해 잉크병을 던지기도 했다. 그의 저서인 『식탁담화(Tisch reden)』에서 사탄과 말을 주고받는 루터의 모습이 있다.


 오늘 아침 일찍 일어났을 때, 악마가 다가와서 내게 논쟁을 걸었다.

 “그대는 대역죄인일세.”

 그의 말에 내가 대답했다.

 “뭔가 좀 새로운 말을 할 수 없나, 사탄?”


 그의 다른 저서인 『교리문답』에서는 ‘나는 이런 마녀에게는 어떤 동정도 갖지 않는다. 나는 그들을 모두 죽이고 싶다.……창조주를 반역하고, 또 악마에게는 인정하는 권리를 신에게 대해서는 인정하려 하지 않는 마녀가 사형으로 대가를 치르지 않는 일이 어떻게 있을 수 있을까.’라고 하며 마녀에 대해 강한 증오를 나타내고 있다. 장 칼뱅은 사탄의 힘이 너무나 강대하기 때문에 끊임없는 저항을 해야 한다고 했다. 감리교의 창시자인 존 웨슬리 역시 마녀의 실재를 믿었고, 『신앙일지』 1768년 5월 25일자에 ‘마녀를 묵살하는 것은 성서를 묵살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라고 자신의 견해를 피력했다.

 루터파이자 라이프치히 대학 교수이자 최고재판사였던 베네딕트 칼푸초푸(1595∼1666)는 ‘작센의 입법가’로 칭송을 받은 사람이다. 그는 1635년에 『형법의 실제』를 발행했는 데, 그 중 마녀에 관한 부분은 신교판 마녀의 망치였다. 마녀집회, 악마와 성교, 마녀마크는 말할 필요도 없다. 그리고 손가락 조르기, 손톱사이에 나무 쐐기를 박아넣는 법 등 17종류의 고문 방법도 나와 있다. 이 책의 실려 있는 1582년의 판결문을 보면, 2명의 마녀를 화형에 처하고 2명의 남자는 달군 철펜치로 살을 찢은 후 차바퀴에 치이게 해 죽였다고 한다. 스코틀랜드에서는 종교개혁 이전까지는 마녀가 화형당한 일이 없었다. 마녀 사냥이 시작된 것은 신교도인 제임스 6세와 칼뱅주의의 장로교에 의해서였다. 제임스 6세는 1590년부터 2년 동안 친히 마녀 재판을 주재했다. 이 때 연루되어 자백하길 거부한 존 하이안 박사에게 고문을 가했다. 밧줄 장치로 목을 비틀어 구부러뜨리고, 달군 철구두를 신기게 한 뒤 구두를 망치로 두들겨 발을 으스러뜨리고, 손톱을 모두 뽑고 그 자리에 바늘을 꼿았다. 박사가 고문해도 자백하지 않자 목을 졸라 죽인 뒤 불태웠다. 잉글랜드에서는 엘리자베스 여왕이 1563년 마녀 사냥 강화령을 반포하면서 마녀 사냥이 격렬해졌고, 1604년에 제임스 1세의 강화령은 청교도의 영향 아래에서 절정에 달했다.21)

 17세기 청교도들은 영국교회의 박해―영국교회는 국법으로 운영되었기에 예배에 출석하지 않거나 교회의식에 반대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으며, 종교집회도 허가 없이는 할 수 없었다. 위반자에게는 투옥, 추방, 사형 등의 형벌이 기다리고 있었다. 청교도들은 영국교회와 심한 대립 관계였다―를 피하여 신대륙으로 대거 이주하기 시작하였다. 원주민들은 헐벗고 굶주린 그들을 불쌍히 여겨 신대륙에서 자리 잡을 수 있게 도와주었지만, 그들은 원주민들을 살육하고, 약탈·방화·강간을 했다. 예를 들면, 기독교도들이 원주민 채로키족이 살고 있는 지역으로 침입하여 여자들을 살해하고 그들의 음부를 무참히 찌르고, 어린아이들의 두 팔을 잘라 어머니의 가슴에 안겨 주었다. 또 다른 예로, 1637년 5월 매사추세츠 주 당국은 존 메이슨(John Mason) 대위로 하여금 그 부근 일대의 원주민을 소탕할 것을 명령한다. 결국 원주민은 몰살되었고, 생존자는 노예로 팔아버렸다.

 영국교회의 박해를 견디지 못하고 신앙의 자유를 위해 신대륙으로 온 청교도들은, 영국교회가 자신들을 박해한 것과 똑같이 원주민들의 종교를 박해했다. 청교도들은 원주민들의 종교를 미신, 마귀, 사탄으로 여겼다. 그래서 그들에게 야만적인 사교를 버리고 기독교로 개종할 것을 강요했다. 기독교의 교리가 무엇인지 전혀 알지 못하는 원주민들에게도 그것을 강요하고 지키지 않으면 처벌하기까지 했다.

 원주민들은 토지에 대한 개념이 청교도들과 달랐다. 그들에게 있어 땅이란 공기와 물과 같은 공동의 재산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유럽인들이 땅을 원하면 땅을 양보해주거나 빌려주었다. 청교도들은 그들의 토지를 ‘합법적’으로 빼앗기 위해 「권리 매각증서」를 만들어서 원주민들에게 내보이며 거기에 X표를 그리게 하면서 그들의 토지를 강탈했다. 또는 술에 취하게 만든 뒤, X표를 그리게 했다. 원주민들은 문서상의 계약이 땅에서 아예 쫓겨나는 것을 의미하는지 알지 못했다. 이런 방법으로 청교도들은 원주민들의 땅을 빼앗았다.

 콜럼버스가 도착하기 전 북중남미의 원주민 수는 대략 1억 4천 5백만 명 정도였다. 천주교와 개신교가 북중남미에 들어오면서 1억 2천만 명이라는 원주민들이 죽고 말았다.22)

 광신으로 생겨나는 가장 큰 문제는 광신도가 ‘신, 진리, 빛, 정신, 사랑, 지혜, 삶, 선, 의’23)의 개념을 자기네와 동일시한다는 것이고, 그와 반대되는 개념들을 비기독교에게 적용한다는 것이다. 맹신, 몰이성, 이분법적 사고, 편협. 이 요소들은 모두 광신의 영역에 포함된다. 광신의 영역은 생각보다 광범위하다. 폭력도 광신의 한 요소며, 증오도 마찬가지다.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자들에 대한 증오, 그리고 증오에서 표출되는 폭력은 광신의 울타리 안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광신도에게는 그 어떠한 것보다 우월한 절대 진리가 있다. 그리고 신에게 복종하고 신의 뜻을 따르는 길이 최선(最善)이라 확신한다. 나만이 진리를 알고 있고, 나만이 신의 뜻을 안다는 생각에서 얻을 수 있는 기쁨과 위안은 광신을 구성하고 있는 여러 요소들 가운데서 가장 핵심이 되는 요소다. 이런 원칙 하에 다른 신앙의 소유자, 또는 비기독교에 대한 기독교의 박해가 시작되는 것이다.



1) Carus, Paul, 악마의 역사, 이지현 옮김, 서울: 더불어책, 2003., pp. 255∼257, 305.
2) Freke, Timothy․Gandy, Peter, 예수는 신화다, 승영조 옮김, 서울: 동아일보사, 2002., pp. 418∼421.
3) Russell, Bertrand, 서양철학사, 최신 개정판, 한철하 역, 서울: 대한교과서(주), 2000., p. 505.
4) 민영기·우종욱·윤홍식, 교양 천문학, 서울: 형설출판사, 1996., pp. 35∼36.
5) Russell, Bertrand,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 송은경 옮김, 서울: 사회평론, 2003., 편집자 서문., Russell, Bertrand, 종교는 필요한가, 2판, 이재황 옮김, 서울: 범우사, 1999., pp. 289∼340.
6) 김형인, 두 얼굴을 가진 하나님: 성서로 보는 미국 노예제, 서울: 살림, 2003., pp. 26∼30., 이리유카바 최, 교회에서 쉬쉬하는 그리스도교 이야기, 서울: 대원출판, 2002., pp. 365∼366, 418∼419., Walker, Williston, 기독교회사, 중판, 송인설 옮김, 경기도: 크리스챤다이제스트, 2000., pp. 321, 624.
7) 이리유카바 최, Ibid., pp. 352~357., 조찬선, 기독교 죄악사(상), 서울: 평단문화사, 2000., pp. 163∼168., Waker, Ibid., pp. 319∼321.
8) 조찬선, (상), Ibid., pp. 189∼190., Maalouf, Amin, 아랍인의 눈으로 본 십자군 전쟁, 김미선 옮김, 서울: 아침이슬, 2002., pp. 69∼72., Waker, Ibid., p. 322.
9) 이리유카바 최, op. cit., pp. 361∼362., Tate, Georges, 십자군 전쟁: 성전탈환의 시나리오, 안정미 옮김, 서울: 시공사, 2002., pp. 44∼45.
10) 조찬선, (상), op. cit., pp. 194∼195.
11) 조찬선, (상), Ibid., pp. 329~330., Fischer-Wollpert, Rudolf, 교황사전, 안명옥 옮김, 서울: 가톨릭대학교출판사, 2001., pp. 259∼261., Carus, op. cit., p. 347., Sallmann, Jean-Michel, 사탄과 약혼한 마녀, 은위영 옮김, 서울: 시공사, 2002., p. 40., Waker, op. cit., p. 350.
12) 이 책의 문체는 빈약하고 사상은 어리석으며, 그 의도는 극악무도하고, 종교재판관들에게 주는 재판의 절차와 관련된 충고는 비열한 속임수를 드러내고 있다. 또한 이 책은 너무나 터무니없는 말로 자주 자가당착에 빠지고 있으며, 시종일관 불합리하고 미신적이다. 마녀의 망치는 “재판을 받는 자가 마술행위를 믿는지 믿지 않는지”를 묻는 것으로 심문을 시작한다. 이를 부인하면 “대개 마녀들은 그 질문을 부인하기 마련이라는 점을 잊지 말라”고 충고를 한다. 자백하길 거부한다면 잔인한 고문이 기다리고 있었다. 모든 질문에 긍정하면 고통스런 고문을 받을 필요 없이 화형당할 수 있었다. 처

Comments

Forsake 2004.11.10 00:11
후아... 몇 십장될까....
song 2004.11.09 22:03
많이 배우고갑니다 너무길어 뒷부분은 다못봤습니다 ,,,
시간날때 마져 보려고합니다...좋은글,,감사합니다
dick 2004.11.09 19:43
아무리 개독에게 진실을 이야기 해도 소귀에 경읽기 차라리 짱깨들 처럼 처 죽이는 것이 나은 듯
개독소화기 2004.11.09 19:28
넘 내용 이 많아요 조금씩 공부해야되는데,,,,,,,,,,
내 주위에서 개독을을 볼때 공감이 가는 내용이 많음
"정신적인 공황 상태에서 사람들은 정신의 안정을 취하기 위해 종교라는 것에 기대게 된다. 종교를 판별하기엔 이미 심신이 지쳐버린 상태를, 사이비 종교는 바로 이 순간을 노리고 우리에게 접근한다. 만약 이러한 사이비 종교에 빠져 몸도, 마음도, 가족도, 친구도, 돈도 모두 잃어버리게 되면 결국 사회에서도 버림받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개인은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방향으로 치닫게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럴 때일수록 더더욱 정신을 차리고, 이성의 힘에 의지해 해로운 것들을 물리쳐야 한다. 투철한 역사 의식을 기르는 것도 좋은 방편이고, 휴식 시간에 틈틈히 폭넓은 교양을 쌓아 헛된 것에 홀리지 않도록 하는 것도 좋다."
세일러문 2004.11.09 19:28
일단 스크랩;;
도무지 2004.11.09 19:21
일단 복사.emoticon_038emoticon_038
黑花 2004.11.09 19:01
좋은 자료로군요.
잘 읽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동포 2004.11.09 18:38
음~~ 다는 못읽었지만....찬사를 미리 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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