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차라투스트라는 더위를 피해 무화과나무 아래 누워 두 팔을 얼굴에 올려 놓은 채 자고 있었다. 그때 독사 한 마리가 기어와서 그의 목을 물었다. 그러자 차라투스타라는 아픔에 못 이겨 비명을 질렀다. 그는 얼굴에서 팔은 내리고 뱀을 뚥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 뱀은 차라투스트라의 눈을 알아보고는 어색한 듯이 몸을 돌려 달아나려고 했다. "달아나지 마라." 차라투스트라가 말했다. "너는 아직 내게서 고맙다는 인사를 받지 않았다. 너는 나를 적당한 시각에 깨워 주었던 것이다. 나는 아직도 갈 길이 멀다." "당신이 갈 길은 그다지 멀지 않습니다." 독사가 슬픈 듯이 말했다. "나의 독이 당신의 목숨을 빼앗을 테니까요." 그러자 차라투스트라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일찍이 용이 뱀의 독에 의해 죽은 적이 있느냐? 너의 독을 다시 가져가거라. 너의 독은, 내게 줄 만큼 넉넉하지 못하다." 그러자 독사는 다시 그의 목을 감고 상처를 핥았다.
"오오, 차라투스트라여, 당신은 그 이야기를 통해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주고자 합니까?"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대답했다. - 선하고 의로운 자들은 나를 도덕의 파괴자라고 부르고 있다. 즉 나의 이야기는 교훈적이 아닌 것이다. 그러나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그대들이 적을 가지고 있다면 적의 악에 대해 선으로 보답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것은 그대들에게 어떤 선을 행했는지를 입증하도록 하라. 적을 부끄럽게 만들기보다는 차라리 화를 내라. 저주해야 할 때에 축복하려는 것이 나는 못마땅하다. 오히려 저주를 받은 만큼 그대들도 저주하라. 그대들에게 큰 부정 하나가 가해질 경우, 이에 대해 재빨리 다섯 개의 작은 부정으로써 보복하라. 부정에 짓눌려 고뇌하는 자는 보기만 해도 불쾌하다.(마태복은 5장 44절과 비교해 보라) 그대들은 알고 있는가? 나누어서 진 부정의 절반은 정의이다. 그러므로 부정을 짊어질 수 있는 자는, 부정을 그 한몸에 떠맡는 것이 좋다. 복수를 전혀 하지 않은 것보다는 작은 복수라도 하는 것이 차라리 인간적이다. 그리고 만일 형별이 위법자에 있어서 또 하나의 정의와 명예를 의미하느나 것이 아니라면, 나는 그대들의 형별 역시 좋아하지 않는다. 자신의 옳음이 고집하는 것보다 자신의 그릇됨을 인정하는 사람이 더 고귀하다. 자신이 옳을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그러나 사람이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풍요롭게 않으면 안 된다. 나는 그대들의 냉혹한 정의를 싫어한다. 그대 재판관들의 눈에서는 항상 사형 집행인과 그의 싸늘한 칼날이 번득이고 있다. 말해 보라. 눈멀지 않은 사랑과도 같은 정의가 이 세상 어디에 있겠는가?(그리스 신화에서 법과 정의 여신인 테미스는 눈을 가리고 다닌다.)
그러므로 모든 형벌은 물론이고 모든 죄까지도 한몸에 짊어질 만한 사랑을 창조하라! 재판관들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에게 무죄 판결을 내리는 정의를 창조하라! 재판관들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에게 무죄 판결을 내리는 정의를 창조하라! 그대들은 이밖에도 더 듣고 싶은가? 철저히 정의로워지기를 원하는 자에게는 거짓말까지도 박애(博愛)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어찌 철저하게 정의로어지를 바라겠는가? 내가 어찌 모든 사람들에게 각각 그들의 것을 줄 수 있겠는가? 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나의 것을 주는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 끝으로 말하건대 나의 형제들이여, 모든 은둔자에게 부정을 저지르지 않도록 조심하라! 은둔자가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은둔자가 어찌 보족할 수 있겠는가! 은둔자는 마치 깊은 샘과도 같다. 그 속에 돌 하나를 던지는 것은 지극히 쉬운 일이다. 그러나 그 돌이 바닥으로 가라앉으면 누가 그것을 다시 꺼낼 수 있겠는가? 은둔자에게 모욕을 주지 않도록 조심하라! 그대들이 은둔자에게 모욕을 주기보다는 차라리 그를 죽여라!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이 게시물은 (ㅡ.ㅡ)님에 의해 2004-06-03 18:30:45 자유게시판(으)로 부터 복사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