格義.....어려우면 ....... <비스무리> (by OhNo)

格義.....어려우면 ....... &lt;비스무리&gt; (by OhNo)

오디세이 0 2,873 2002.10.09 01:31


이름&nbsp;&nbsp;OhNo
제목&nbsp;&nbsp;格義.....어려우면 ....... &lt;비스무리&gt;


왜 일본은 기독교가 번성은커녕 1%도 안되는데 바로 옆의 우리나라는 기독교 불길이 이렇게 거센가? 그야말로 성령 하나님의 불길과 축복과 인도하에 포교가 이루어졌단 말인가?&nbsp;&nbsp;역사적으로는 지울수 없는 악행을 주저없이 저질러온 일본은 선진국이고 우리보다 몇배나 더 잘 살며 세계에서 미국 다음으로 큰 경제대국이나, 우리는 그와 비교하면 아직도 이루지 못한게 너무 많은데, 하나님 기적이 일어나는 우리는 왜 일본보다도 못하단 말인가? 성령의 축복이 어디 누수로 샜는가?

인간의 의식은 유사한 구조에 대해서는 이해하기도 빠를 뿐 아니라 수용하는 속도도 그에 상응해서 받아들인다. 불교가 중국에 처음 전래된후 수백년 동안 불교는 중국인에게 전혀 뿌리를 내리지 못하였다. 다만 중국에 교역하러 왔거나 머물던 관리 등 인도인들을 위한 종교로서밖에 역할을 하지 못했다.

이건 마치 오래 전부터 한남동에 이슬람 사원이 있으나 한국에 이슬람을 전파하기 위하여 있는게 주목적이 아니고, 한국에 체류하는 이슬람인들을 위여 존재한 것과 같다. 오래 전에 중국에 기독교 일파인 네스토리우스교가 전파되었으나 사라졌듯이, 통일신라 때에도 이 네스토리우스교가 전파된 것은 중국처럼 통일신라에 머물던 외국 기독교인을 위한 종교였을 뿐이다.

그럼 왜 처음에 불교가 중국에 발을 딛지 못했을까? 중국인들에게는 불교적 세계관과 상응하는게 없었다. 중국식으로 보면 불교에서 말하는 空이나 色, 해탈 같은 용어가 너무 낯설은 것이며, 거기에다가 중국 자존의 철학적 기반이 탄탄한데 무엇하러 이해되지도 않는 불교를 받아들일까? 그러니 외래인을 위한 외래종교로만 수백년간 머물다가 사라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꾀를 낸 것이 바로 그것이다. 도교에서 말하는 道가 불교의 法과 다른 것이 아니며, 空이 無爲랑 다른 것이 아니며, 색이 유의와 다르지 않다고 설파한 것이다. 그러니 이제야 중국인들은 중국 전래의 사상과 같은 것은 아니지만, 전혀 다른 것은 아니다라고 여겼으니, 그때서야 불교가 점차 전파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비슷한 뜻을 가진 다른 말과 개념을 헤아려 자신의 중국식으로 대치 변용하는 방법을 격의(格義)라 한다.&nbsp;&nbsp;이 격의는 문화나 종교의 전파방법 중 가장 일반적이고도 억지나 강제가 없이도 일단 수용되면 자발적으로 번져나가는 디딤돌인 것이다.

그런데 이 격의를 통하여 얻어낸 전파는 하나의 짐을 반드시 수반한다. 그 격의의 모태가 된 바탕을 항상 밑바탕에 깔고 다니는 것이다. 이를테면 심층의식으로 작용하며 새롭게 빙의된 종교에 따라붙어서 어지간하면 떨어지지가 않는다. 예를 들면, 불교가 도교적 격의로 엎히었으니, 그 바탕에 도교가 보이지는 않지만 따라붙어 있다. 그게 불교현상으로 남아있는게 바로 불교수행법의 중국적 변화인 선이다. 선은 중국재래적 도교의 수행방법과 인도식 명상수도가 불교적으로 합체되어 변용된 것이다. 그래서 중국불교는 인도불교와 다르다.

그러니 불교선사들의 행위와 이적 속에는 도교적 그림자가 항상 따라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그런 면목은 얼마든지 발견할 수 있다. 사명대사의 왜란시 부린 도술 이야기는 사명당이 도사이지 승려인가 분명치도 않다. 그러면서도 도술을 부리는 스님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다. 마치 도력이 높으면 법력이 높은듯 자연스레 혼동하게 된다.

며칠전 제국의 아침에 보면 비가 너무 많이 와서 기청제를 올리는데, 균여스님이 하늘에 제를 올리니 갑자기 하늘이 비를 그치고 해가 빛난다. 여기에 나타나는 그것이 바로 격의의 숙명적 그림자다. 균여가 도술을 부리는 듯하나, 불교승려는 원래 도술하고는 멀고, 도술은 도교적 도사들의 분야이다. 그런데 불교승려가 도술을 행하는데도 우리는 친숙하고도 당연하다 여긴다.

기독교가 중국에 처음 발을 못붙이고 떠난 후에 그들은 전파의 방법을 찾지 못했다. 명나라시대에 마테오리치는 다시 격의란 방법을 차용하여 중국에 발을 디민다. 그게 바로 천주실의다. 중국 전래의 하늘의 주관자인 천제개념을 도용하여 하늘에 계신 세상의 주관자라는 비스무리한 개념으로 도입을 한 것이다. 또한 지옥과 극락도 이미 불교를 통해 민간에 퍼져있었으므로 지옥과 천국이 쉽게 스며들었던 것이다. 지상의 왕은 천제의 아들인 천자이듯이 성자란 개념도 천부로부터 온 존재라는 등식이 먹히는 것이다.

이런 천주교를 조선후기에 우리나라 학자네가 자발적으로 도입한 것이다. 우리나라는 전래의 하늘 개념이 있었다. 거기에 단군으로부터 화랑도로 이어지는 재래적 선도, 거기에 시베리아 대륙에서 온 무속, 도교와 짬봉이 된 민간불교, 여기에 가정 국가 윤리의 유교 모두가 혼재해 있었으며, 표면적으로는 유교, 그 심층아래는 불교, 그 아래 심층에는 선도가 숨어 있었다.&nbsp;&nbsp;

기독교의 교의를 우리 민간에 갖다 놓아보자. 우리의 하늘님이 천부인 하느님이요, 미래부처님인 미륵불이나 정도령 재림예수요, 지옥극락은 지옥천당이며, 염마왕이나 시왕 같은 사후재판이며, 예수기적은 도사나 무당이 행하고 있으며, 사랑은 자비요, 구원은 왕생극락이요, 무속적 감성은 성령의 불길이요, 마을마다 있었던 서낭당이며 무당이며, 산속마다 사찰에 모두가 기독교적 교의와 격의로 변용 매치되지 않는 것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삶이 힘들수록, 외세에 휘둘릴수록 자연히 찾게 되는 것이 센무당이요 큰신이다. 그러니 기독교 특히 개신교는 현실이 어두워 힘들었던 조선말부터 이땅에서 재래의 격의적 토양에서 쉽게 결합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땅은 원래 한국적 기독교가 자라기에 충분히도 그 토양과 분위기를 이미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일본이 개신교가 1%도 안된다고, 800만의 우상을 모시는 사탄국가라는 규정하는건 그걸 모르고서 하는 일이다. 일본의 신, 카미는 일본이라는 나라를 위하는 신이다. 일본의 국조를 비롯하여, 국가를 위해 죽은 영혼, 의로운 영혼, 위대한 조상, 자신의 가업과 집안을 시조, 모든 위대하다고 여기는 영혼을 신이라 여긴다. 일본의 신개념은 기독교의 신하고는 매치 자체가 안된다.

여기에는 기독교적 토양이 내릴 격의적 요소가 없다. 물론 어떤 이는 수백년전에 수만명의 기독교 순교자가 있다고 항변할지 모른다. 그 순교자란, 우리의 위대한 황석영이와 같은 민족과 국가를 외세와 외래신에게 팔아먹는 자들로 규정하여, 십자가 위를 걷게 하는 방법으로 모조리 처형해버렸다. 우리나라도 또한 정치적 이유이긴 하지만 그런 박해시절이 았었다.

일본에 예전이나 지금이라도 기독교적 신관이 들어갈 자리가 있는가? 비스무리한 격의적 변용으로 들어갈 수 있는가? 천부나 천주 또는 하느님의 개념이 그들의 가미속에 있는가? 결코 없다. 그래서 일본은 전도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한국은 어떤가? 그 격의적 토양이 너무도 충만해서 개신기독교에서 보면 온갖 재래적 민간신앙이 다 포함되어 있다. 성령의 불길? 우습지 무당신명판이다. 무당이 춤출 때 곁에 있는 모든 참석자들도 신명을 좆는다. 서낭당 무당집이 모두 고을고을 교회가 되버렸다. 목사의 기적은 예수의 기적이라기 보다는 도사나 승려의 기적처럼 그냥 다반사로 일어난다.

불신지옥은 좀 심했지만 그것도 다 불교에 나온 지옥상이 있기 때문에 아주 쉽게 다가온다. 우리가 무당에게 윤리를 바라지 않듯이 목사네 뻔한 짓거리도 그리 잘 묻힌다. 이 목사 도력이 없으면 저 저 목사 찾듯이, 원래 그게 시원찮은 무당 버리고 용한 무당집 찾는 것과 다름이 없다. 특히나 성령강림이라는 말은 무당접신하고 너무도 맞아서, 성령충만을 바라면 바랄수록 그 양상이 무당 접신능력하고 교차하게 된다..

일제시대에 우리나라에 미륵교도의 범죄가 심했다. 이를 테면 지금의 휴거기독교도의 양상과 같아서 자기가 재림미륵불이요, 모든 것 다 팔고 그 산동네로 이사하고, 모든것 다 바치라니 여자들 몸은 교주에게 바치느라 난리가 났고, 하다가 내분이 나서 서로 죽이고, 배반자도 살해하고 하다가 일경에 잡혀버렸던 것이다.

지금 기독교 이단이라는 데서 일어나는 모든 요소가 같은 격의인 미륵불교에서도 일어난다는 사실은, 어제 불당 앞에서 기원하며 절하던 아주머니는 오늘 교회당에서 할렐루야를 외치는 것이며, 어제 무당 앞에서 자식 살풀이하던 사람도 내일은 신앙간증으로 그것을 욕하는 것이다.

격의, 그것은 무서운 것이다. 결코 기독교는 한국적 토양을 벗어나지 못한다. 이들의 신앙형태는 이나라 심성과 기층에 박혀 있는 토양 속에서 허우적거릴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비스무리해서 혹하고 교회 들어가서 보니 무당앞에서 하는 짓과 같고 다만 이름하고 용어 몇 개만 틀리기 때문이다. 광란 기독교는 그래서 무당목사와 그 보살신도들이라는 사실을 숙명적으로 버릴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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