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에 관한 짧은 생각 둘(by 박현도)

종교에 관한 짧은 생각 둘(by 박현도)

김창운 0 2,892 2003.01.24 15:41
우선, 저자분의 동의도 없이 글을 퍼온데 대해 사죄를 드립니다.

이 글은 캐나다 몬트리올 한인 대학원생 협회( http://ssmu.mcgill.ca/mkgsa/ormak.html) 에서

퍼 왔읍니다.




종교에 관한 짧은 생각 둘


박 현 도 (McGill대 이슬람 연구소 박사과정)


*** 하나 ***

역사와 신앙. 신앙을 가지고 자신의 종교를 공부하는 사람들이 한번쯤은 겪는 홍역이 바로 역사와 신앙의 갈등이다. 여기서 내 가 말하는 역사란 굳이 구분하자면 미시적 역사, 즉, 6하 원칙에 의해 한 사건의 발생을 추적하는 의미의 역사학을 말한다.

좀 더 쉽게 말해보자. 우리에게 인도주의 의사로 알려진 슈바이쩌 박사가 역사적 예수 연구의 포문을 연 이래로 기독교는 역사 적 예수 연구에 많은 발전을 이루어냈다. 예수의 출생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그의 생애가 주변 학문의 도움과 철저한 문헌 분석 으로 밝혀지기 시작하였다. 공관복음은 역사서가 아닌 신앙고백서라는 것, 현존 공관복음은 Q (독일어 Quelle의 약자. Source라 는 뜻) 라는 예수 어록을 바탕으로 후대 성서작가 내지 그가 속한 교회의 신앙이 서술되었다는 등 주목할만한 연구 결과가 발표 되었다. 이러한 역사적 성서연구, 혹은 성서 역사해석학은 현대 종교연구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지만 정작 기독인 들에게는 충격적인 사실로 받아들여졌다. 예수의 베들레헴 탄생설, 예수 출생시의 호구조사, 유아 살해 등등 철석같이 믿어온 성서의 이야 기가 역사적 사실이 아닌 신앙고백의 언어로 드러났을 때 성서학을 모르는 기독인들이 받는 혼란과 충격은 굳이 더 말 할 여지가 없을 것이다. 꽉 막힐 정도로 기도신앙에 독실했던 나 자신도 대학에서 신약성서 역사학을 배웠을 때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나 와 같이 수강하던 동료들도 그러했다. 강의실이 부정과 혼돈의 공기로 가득찼으니까.

역사와 신앙의 충돌. 유대의 구약사도 학자들의 정교한 역사 탐구 앞에 신화와 역사의 선이 그어지기 시작했고, 그 선이 선명 해질 때마다 유대인들의 충격은 기독인의 그것에 못지 않게 대단했다. 길가메시 서사시와 노아의 홍수, 모세의 역사성 등등, 신화 의 옷이 한 꺼풀 한 꺼풀 벗겨질 때마다 유대인들은 자기 신앙의 정체성을 재확인해야 만 했다. 이슬람도 마찬가지다. 무함마드, 꾸르안 (Qur'an)의 역사성이 신화의 껍질을 벗겨낼 때마다 무슬림들은 분노하였다.

종교사 (宗敎史)가 전공인지라 가끔 나의 순 수한 학문적 열의가 신앙인들의 폐부 깊숙이 비수로 꼽히는 불상사가 발생하곤 한다. 지난 2월말 학회에서 무함마드의 종교체험 이 이슬람 사료들이 주장하는 바와는 달리 역사적 재구성이 불가능하다는 논문을 무슬림들 앞에서 발표했을 때, 나는 항의에 가 까운 질의를 받기도 했다. 역시 문제는 역사와 신앙으로 귀착된다. 특히나 이는 역사속에 현존하는 유일신의 계시를 중시하는 유 대, 기독교, 이슬람에서 두드러진다.

신앙을 지키려는 차원에서, 호교론 적인 차원에서 이들 종교의 신앙인들은 종교사가들의 역사연구에 반격의 기치를 들고 어떻 게 해서든지 자신들 전통의 무오류성을 옹호하고자 한다: 어떻게 몇 천년전의 사실을 감히 후대의 사람들이 사실여부를 판별할 수 있는가, 한가지 사실에 대해 두 가지 다른 이야기가 있으면 한가지를 버리고 다른 하나를 택해 사실을 만들수도 있지 어떻게 둘다 역사적 신빙성 부족 내지 신화적 기술로 치부해버리는가 등등... 자신의 종교의 정통성을 방어하려는 세력의 발흥이 사뭇 거세게 부는 게 요즘 종교계가 아닌가 싶다.

성서의 예수가 역사적이라는, 꽤나 대중적인 신학적 예수 연구서의 활발한 출판은 신앙인들의 방어의식에서 나온 호교론적 주관적 역사연구의 그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신앙과 역사의 조화.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다고 역사적 연구를 무시하고 그냥 공감하는 자세로 종교인들의 신앙적 진술 에만 귀를 기울여야만 할까? 아니다. 적어도 우리는 역사와 신앙을 구분할 수 있는 눈을 가져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인간의 종 교심성이 제대로 드러나고 심층의 종교심을 파악할 수 있지 않겠는가. 혹자는 종교사가를 "형사"로 오해하는 경향이 있다. 종교사가는 "오제이 심슨 (O. J. Simpson)" 사건의 형사가 아니다. 종교사가 (宗敎史家)가 굳이 어떠한 역사적 사실을 추구하는 것은 어떠한 종교 현상이 어떠한 역사적 맥락에서 어떻게 드러나는 가를 추적하여 종교심성의 현현을 보고자 함 이다. 어떠한 신앙이 거짓이므로 믿지 말아야하고 어떤 신조는 역사적으로 옳은 것이므로 더 확대 해석해야한다라는 등등의 가치 판단을 내리는 심판관도 아니다.

이는 어디까지나 신앙인들이 해야할 일이다. 종교사가는 역사적 사실을 쫓고 한 역사적 사실이 어떻게 신앙인들에 의해 해석되었는가를 추적하여 종교의 의미를 알아내려고 노력할 뿐이다. 이러한 노력없이 신앙이 참 의미를 지닐 수 있을 것인가. 결국 한 전통의 수많은 종파도 나름의 해석에 의한 분파현상이 아닌가.

역사를 신봉하는 역사교 신자는 아니지만 종교사의 발전과 무엇이 과연 일어났었는가 라는 의문이 우리 인간의 종교심성연구에 아주 중요한 디딤돌이라고 나는 믿는다. 비록 "certainty"가 아닌 "probability"에 불과하더라도 우리가 밝혀낼 수 있는 한 역사적 사실은 우리네 신앙을 재점검하고 그를 바탕으로 새로운 전통을 형성하는 출발점이라고 생각한다. 물 론 그 새로운 전통은 신자들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지만 말이다.



*** 둘 ***

불가 (佛家)의 표현을 빌자면 성경은 우주 존재의 근거인 하느님을 "가르키는" 손가락에 불과할 것이다. 이러한 말 에 고개를 끄덕일 수 있다면 우리는 성경을 놀라울 만큼 명료하게 이해할 수 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성서의 역사성이나 진위 문제는 그다지 큰 문제가 안된다는 것이다. 성경의 표현이 사실이든 아니든 간에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의 진위는 중요한 게 아니다 .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왜 했느냐는 육하원칙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왜" 일 것이고 그 답은 하느님을 증언 하기 위하여가 될 것 이며 우리는 성서를 통하여 하느님의 위대하심과 전능하심 등 창조주 유일신을 형용하는 모든 언어를 동원 하여 그 분을 이해하면 될 것이다. 성서는 주님을 가르키는 손가락에 불과하므로...

그런데 바로 여기서 문제는 시작된다. 기독인들은 성서가 바로 달을 가르키는 손가락으로 보지 않는다는 데에 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손가락을 통해 지존(至尊)의 하느님을 보는 데에 관심이 있는 것보다는 손가락의 생김새에 관심이 더 많다. 이 손가락을 여러 개의 손가락중 하나라고 보지도 않을 뿐더러 이 손가락이 가장 완벽한 것이라고 믿는 데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손가락의 생김생김, 지문 하나 하나, 손가락 마디 하나 하나가 모두 완벽하고 생물학적으로 문제가 없다고 보는 것이다. 불가에 서 말하는 달을 가르키는 손가락은 손가락의 완전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손가락이 지향하는 바에 관심을 가지라고 가르치지만 기독교에서 이 표현은 완벽한 손가락이 가르키는 달을 보라는 말로 변이되는 것이다. 불가의 손가락은 손가락 자체의 생물학적 해부도에는 관심이 없으나 기독교에서는 그것이 중요하게 되어버렸다는 것이란 말이다.

사실이 이러하기에 성경은 단지 하느님을 가르치는 교훈서라기보단 그 말 한마디 한마디를 한 점 그릇됨 없는 진실로 수용할 것을 강요하는 애물단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러한 기독교의 전통은 중세의 마르틴 루터의 "오로지 성경만으로 (Sola Scri ptura)"라는 말로 더욱 강화되어 오늘날 기독교 성서숭배로 굳건히 자리를 잡았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성경이 자체적으로 많은 모순을 지니고 있을 뿐 아니라 역사적 사실과 상이한 기록을 담고 있으며 때로 는 역사적 사실을 왜곡 윤색한 경우도 많다는 것이다. 달을 가르키는 손가락이라면 이러한 것이 별 문제가 없을 텐데 달만큼이나 손가락에 관심이 많은 기독인들에게 달에는 관심이 없으나
손가락엔 관심이 많은 기독신앙의 종교사가들은 신앙의 이단자로 쉽 게 내몰리게 되는 것이다.

손가락에 관심이 많은 기독인들이라면 먼저 손가락 공부를 깊고 냉철한 이성의 눈으로 하여야 함이 마땅하다. 그렇지 않고 손 가락보다 달에 관심이 많은 기독인이라면 손가락 생김새가 어떻든 그것이 지향하는 달만 보면 되는 것이다.

우리 유학생회에도 많은 기독교인들이 있다. 현재 몬트리얼 한인사회에는 기독교외에 타종교가 없기에 그러는 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신앙인의 주류는 기독인들이다. 나는 우리 기독 학형들이 석박사 학위를 추구하는 지적 엘리트인만큼 성경에 관해서도 고 품질의 기독인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을 가지고 있다. 최고 지성의 요람인 대학원에서 공부하는 만큼 그저 상처 투성이의 손가락 을 옹호하는 것이 달에 대한 도리라고 믿는 기독인이 아니라 상처투성이의 손가락을 냉정하게 인식하고 손가락이 지향하는 달을 곧이 볼 수 있는 기독인이 되어주길 바라는 것이다. 과학자가 많은 우리 유학생회 기독학형들에게 이러한 부탁을 하는 것이 지나 치진 않으리라 생각하는 밤, 몬트리얼은 살포시 비에 젖어있다.





 
 
* 오디세이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03-01-24 1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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