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기독교와 문학6-임화,

한국기독교와 문학6-임화, <지상의 시>

chung 0 4,030 2003.07.20 11:00

한국기독교와 문학6
임화, <지상의 시>

 

<지상의 시>
임화

태초에 말이 있었느니라……
인간은 고약한 전통을 가진 동물이다.
행위하지 않는 말,
말을 말하는 말,
이브가 아담에게 따준 무화과의 비밀은,
실상 지혜의 온갖 수다 속에 있었다.

포만의 이야기로 기아를,
천상의 노래로 지옥의 고통을,
어리석게도 인간은 곧잘 바꾸었었다.
그러나 지상의 빵으로 배부른 사람은
과연 하나도 없었던가?
신성한 지혜여! 광영이 있으라.
온전히 운명이란, 말 이상이다.
단지 사람은 말할 수 있는 운명을 가진 것,
운명을 이야기할 수 있는 도야지보타 우월한 점이다.
말을 행위로,
행위를 말로,
자유로 번역할 수 있는 기능,
그것이 시의 최고의 원리.

지상의 시는
지혜의 허위를 깨뜨릴 뿐 아니라,
지혜의 비극을 구한다.
분명히 태초의 행위가 있다……

 

 

 


임화는 1930년대의 사회주의 좌파 계열 시인이다. 서울 출생이고, 보성중학(普成中學)을 중퇴한 뒤 1926년 카프(좌익 문학단체)에 가입했다. 시인으로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은 1929년 무렵부터로, 대표작으로는 《우리 오빠와 화로》, 《우산 받은 요코하마[橫濱]의 부두》, 《네거리의 순이》 등이 있다.

<지상의 시>는 그가 평소 갖고 있던 시에 대한 철학을 나타낸 시이다. 자신의 생각을 드러내는 과정에서 기독교가 지닌 허위의 실상을 빌려 그것을 타파하는 수법을 썼다. 원래 시는 각자가 가슴으로 느끼는 것이지만, 그래도 독자들 편의를 위해 각 문장별로 분석을 해보자.

[이브가 아담에게 따준 무화과의 비밀은,/실상 지혜의 온갖 수다 속에 있었다.]
성경에서 무화과는 신만이 지닌 비밀영역으로 나온다. 인간은 그것을 범할 수 없고 알아서도 안 된다. 그러나 실상 그 무화과의 비밀은 인간들이 수다(대화)를 나눔으로써 알 수 있었던 별 거 아닌 것이었다. 시답지 않은 것에 권위를 부여하는 종교계의 폐단을 고발하는 시행(詩行)이다.

[포만의 이야기로 기아를,/천상의 노래로 지옥의 고통을,/어리석게도 인간은 곧잘 바꾸었었다.]
목사 등 종교인들이 얍실하게 말을 바꾸는 실상을 잘 노래하는 대목이다. 예를 들어 식민지 시절에, 처음에는 신사참배를 우상숭배라 하여 마구 반대하다가 나중에는 "신사참배는 국민의례이므로 우상숭배가 아니다"고 일구이언(一口二言)을 하던 교회의 행태를 생각해 보라. 딱 들어맞는 경우이다.

[지상의 시는/지혜의 허위를 깨뜨릴 뿐 아니라,/지혜의 비극을 구한다./분명히 태초의 행위가 있다……]
마지막 문장에서 시인은 말보다는 행동의 중요성 및 행동하는 말(언행일치)을 강조한다. 기독교인들이 뻔지르르하게 말만 내세우는 풍조를 꼬집는 대목이다.

혹자는 이런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다. 이 시가 어째서 기독교를 비판하는 시이냐고? 기독교 관련 단어는 아담과 이브 밖에 없는데, 속단하는 것 아니냐고. 좋다. 그럴 수도 있다. 기독교의 테두리를 벗어나 일반적인 속성으로 판단할 수도 있다. 그런데 왜 하필 허위의 권위의식을 비판하는 대목에서 아담과 이브가 인용된 것인가? 이는 성경의 아담-이브-무화과이야기가 허위의식을 잘 보여주기 때문 아닌가?

그렇다면, 백보 양보해서 이 작품이 기독교의 추태를 비난하는 시가 아니라고 하자. 그런데 이 시를 읽다보면 왜 기독교 지도자나 그 똘마니들의 모습이 떠오르는 것이지?
(추신: <지상의 시>를 쓴 임화가 사회주의자여서 종교를 싫어하니까 이런 시를 썼다고 주장하면 뭐, 할 말이 없지만……만일 사회주의자가 아니거나 무종교 시인, 기독교계 시인이 이와 비슷한 시를 썼다면 어떻게 되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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