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용] 비판할 수 없는 것은 진리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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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9.21 23:16
비판할 수 없는 것은 진리가 아니다 - K.Popper
긴 시간의 고뇌와 사색을 통해 저자는 감히 단언하고자 한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과 하이젠베르그의 불확정 원리가 제공한 양자역학을 포함하는 새로운 과학적 업적은 종교인 - 특히 기독교인 - 중에서는 절대로 나오지 못할 것이라고 말이다. 물론 옛날처럼 기술적인 문제나 지엽적인 문제해결에는 종교인의 지적 수준으로도 꽤 훌륭한 업적을 남길 수 있었다. 그렇지만 상대성 이론과 양자역학을 넘어서는 자연의 더욱 심오한 섭리를 이해하려는 도전이라면 종교인의 지적 수준으로는 결코 어림없을 것이다.
종교인들에게 있어서 우주의 존재는 너무나 당연하여 이상스러울 것도 없다. 우주란 단지 창조주의 작품이므로 창조주에게 그 은혜와 영광을 돌리는 것만으로도 인생의 모든 고민꺼리는 해결될 수 있기 때문이다. 종교인들의 눈에 보이는 우주는 창조주의 목적과 의지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므로 의심스러운 것이 있을 수 없다. 또 눈에 보이는 자연 현상을 근본적인 원리에서 유도하려고 고민할 필요도 없다. 가장 근본적인 원리를 이미 창조주가 제공했기 때문이다.
알겠지만 지구는 태양을 중심으로 돌고 있다. 그러나 이 사실이 알려지기 전에는 천동설이라하여 하늘의 별들이 지구를 중심으로 돌고 있다고 생각했다. 지상의 관찰자 입장에서 볼 때 땅이 움직인다고는 도저히 느낄 수 없었으므로 움직이는 것은 지구가 아니라 태양과 같은 별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성서를 기록할 당시에만 해도 하나의 상식이었기 때문에 - 의심스러운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 특별히 성서에 언급할 필요조차도 없었다. 실제로 성서에는 '별을 만들었다'는 식의 추상적인 표현만 사용할 뿐 구체적으로 천동설을 거론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갈릴레오가 주장했을 때는 종교의 박해를 받아야만 했다. 즉, 성서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반대한 것도 아닌데 말이다. 그것은 성서에는 언급하고 있지 않았지만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는 것은 종교인의 입장에서는 상식적인 요청이었다. 다시 말해서 창조주의 지극정성으로 탄생시킨 지구가 실은 우주의 중심도 아니고 변두리에서 초라한 모습으로 움직인다는 것은 창조주의 작품을 모독하는 행위와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천동설이 여러 천체현상을 설명하는데 다소 불합리한 것이 있더라도 그 점이 종교인들의 관심을 끌기는 힘들었다. 그것은 그러한 관심이 종교박해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가 아니라 현실 세계의 문제점이 창조주에게는 별로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어차피 세상은 창조주의 작품인데 그 세상이 인간에게 불합리하게 보인다는 것은 별 문제꺼리가 아니었다. 왜냐하면 자연현상의 이해되지 않는 부분은 인간에게만 해당하는 것이고 창조주에게는 해결될 수 있는 사소한 문제라고 생각하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과학의 발전은 언제나 의문에서 시작한다. 그런데 종교인의 입장에서는 세상의 이치가 너무나 완벽하기 때문에 감탄만이 있을 뿐이다. 의문이란 인간이 느끼는 감정일 뿐, 창조주의 작품에 문제가 있다고 볼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종교인으로서는 지적 열정이 자극될 수가 없었다.
지적 열정이란 어떤 문제점이 발견됨으로써 뭔가 더 근본적인 원리로부터 유도될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어야만 생길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것이 창조주의 통제하에 있다고 믿게 되면 문제점 역시 창조주의 의도 속으로 숨어 버린다. 그 결과, 문제점이란 창조주의 특별한 의도를 표현하는 상징으로 해석되며 결국 인간이 해결해야할 문제꺼리는 아예 존재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지구의 문제로 되돌아가 생각해 보자. 지구는 둥글게 생겼다. 그리고 그것은 이미 과학자들에 의해 확인되었다. 그런데 그것이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면 종교인의 지적 수준에서 - 과학자의 도움없이 - 경험이 아닌 순수한 논리적 추론만으로 과연 그 사실을 알아낼 수 있었을까? 다시 말해서 오직 성서의 교리만으로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이 유도될 수 있을까 하는 점이다. 그것은 절대로 불가능하다.
물론 종교는 몇 가지의 장점이 있다. 주어진 모든 조건이 창조주의 설계에 의한 것으로 보기 때문에 모든 것을 자연스럽게 보기 마련이다. 즉, 논리적으로 불합리한 것이 존재한다는 의심은 애초부터 불가능하다. 모든 존재대상은 창조주의 목적을 갖고 가장 합리적인 방식으로 존재할 뿐이다. 따라서 배타적인 자연의 섭리란 존재할 수 없으며, 현실적인 조건을 인정만 하면 된다.
그러니 새로운 사실이 밝혀져도 자신들의 믿음이 틀렸다고 염려할 걱정꺼리는 생기지 않는다. 가령,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이 밝혀졌지만 그것은 창조주가 그렇게 만들었다고 생각하면 의문점은 합리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창조주로서는 지구를 둥글게 만들지 말았어야 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바로 그 점 때문에 창조주는 지구를 반드시 둥글게 만들었어야 할 이유도 없어지는 것이다. 창조주에게 있어 지구의 모양은 특별하지가 않다. 어차피 창조주는 모든 모양의 지구를 만들 수 있었을 터이므로 지구의 모양은 단지 창조주의 선택사항일 뿐이었다.
따라서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을 과학자들이 말해 주지 않았다면 성서만을 보고서 지구를 둥글다고 말할 수 있는 근거는 아무 것도 없다. 성서에서는 눈에 보이는 것이나 이미 알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당연하다고 말하지만 알지 못하는 주제에 대해서 당연하다고 말할 수 있는 근거는 가지지 못했다. 창조주는 모든 것이 당연하다는 것만 알려줄 뿐, 특별히 당연한 것에 대해서는 알려주지 않기 때문이다.
가령, 지구의 모습은 논리적으로 아주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둥근 지구의 모습은 수학적으로 볼 때 일정한 각도와 변을 가진 매우 특별한 형태이기 때문이다. 탐험가들은 망망대해에서 배의 동체가 먼저 사라지고 돛이 점차적으로 나중에 사라지는 것을 보고 지구가 평탄하지 않음을 느끼게 되었다. 그러자 지구의 모습을 구형으로 파악하는 일은 신속하게 진행될 수 있었다. 다시 말해서 여러 가지 모형을 가정하는 시행착오 끝에 구형을 생각한 것이 아니라 곧장 생각하는 것이 가능했다. 그만큼 구형은 논리적으로 특별한 존재였던 것이다.
일반적으로 과학자들은 선입관 없이 사물을 바라볼 수 있으며 세심한 관찰을 통해 문제점을 발견하면 그 문제점을 설명할 수 있는 근본적인 원리를 찾아 나선다. 과학자에게 있어 새로운 문제점은 앞으로 이해해야될 과제로서 남겨지며, 그것은 곧 연구해볼 만한 가치를 부여한다. 여기서 연구해볼 만한 가치의 기준이란 기존의 상식에서 당연한 것이 아니어야 한다. 만약 기존의 상식으로 충분히 설명되는 것이면 그것으로 문제점은 해소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해결되지 않은 문제를 찾아내는 것보다 그 문제가 당연한 것이라고 볼 수 없는 이유를 먼저 파악하는 일이다. 그리고 이것이 파악되면 문제해결은 절반을 이룬 셈이다. 그렇지만 종교인들에게는 이 부분을 기대하기가 어렵다. 설령, 불합리한 점이 발견되어도 그것은 창조주의 특별한 목적으로 해석할 수 있기 때문에 결국 불합리한 것은 존재할 수가 없게 된다. 적어도 종교인에게 있어 자연현상을 불합리하다고 보는 것은 곧바로 창조주의 능력을 의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의문은 어떻게 해서 생기는가? 의문이란 당연한 현상에서는 생길 수가 없다. 그렇다면 그 질문을 우주에 대해 적용시키는 것은 가능할까? 즉, 우주의 존재는 당연한 것일까? 그런데 여기에서처럼 자기자신을 포함하는 명제가 스스로를 질문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므로 질문으로서의 의미가 없다. 사실상 우주는 자기자신을 포함하는 모든 대상 즉, 존재 그 자체이기 때문에 우주의 개념은 곧 존재의 개념으로 환원될 수 있다. 따라서 '우주의 존재'를 묻는 질문은 '존재의 존재'를 묻는 동어반복형 질문이 아닐 수 없다. 결국 이 질문은 "존재하는 것을 존재한다고 하는 것은 당연할까?" 라고 묻는 꼴이 된다.
그럼 우주의 변화과정을 묻는 것은 타당할까? 즉, 현재 존재하는 우주의 모습만이 논리적으로 유일한지 아니면 논리적으로 다른 많은 가능성을 포함할 수 있는지 그것에 대해서는 물을 수 있을까? 만약 존재하는 우주의 모습이 현재와 같은 방식만을 (논리적으로) 허용한다면 이 물음 역시 당연한 사실에 대한 자기언급이므로 질문이 될 수는 없다. 그러나 그것은 그러한 사실이 논리적으로 밝혀졌을 때 내려질 수 있는 판단이므로 아직 그 판단을 할 수 없는 지금으로서는 가능한 질문이다.
그런데 이 점과 관련해서 저자의 견해를 피력하자면 우주의 변화과정에 대한 의문은 원리적으로 가능한 질문이다. 그 이유는 앞에서도 잠시 언급했듯이 존재의 논리는 다양한 가능성을 포함하고 또 그 자연스러운 다양성을 보존하기 위해 우주의 존재는 필연적일 수밖에 없다. 즉, 현재의 우주가 논리적으로 유일한 존재방식이라면 우주는 존재할 수 없다는 점이다. 존재의 속성이란 다름아닌 다양성을 보존시키는 것이므로 다양성이 보존되지 않는 존재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점은 가장 확실히 증명되었다. 실제로 우주의 모습은 과거에도 변해왔고 앞으로도 변할 것이며 지금 이 순간에도 변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천체는 끊임없이 움직이면서 새로운 별의 탄생과 소멸을 지켜보고 있으며 우리의 눈과 귀도 매일 쏟아지는 새로운 사건과 뉴스를 접하고 있지 않는가?
한편 이 질문이 종교인에게 던져지면 어떻게 될까? 당연하겠지만 우주의 변화과정 역시 창조주의 주관이므로 창조주의 고유 영역을 인간이 이해하려는 시도는 적어도 종교적인 관점에서는 대단히 불경스러운 행위이다. 그런데 정말 불경스러운 것은 창조주를 믿는 신앙에 있음을 알아야 한다. 즉, 창조주의 존재는 우주를 창조했다는 황당한 이야기로 끝나지 않고 우주의 존재를 논리적으로 이해하는 길까지 막아 버린 것이다. 결국 창조주는 우주변화의 주인공으로 있으면서 우주를 이해하려는 인간의 지적 욕구를 막았던 것이다.
좀 더 직설적으로 이야기하면 아인슈타인이나, 하이젠베르크, 그리고 보어 같은 과학자들이 만약 기독교인이었다면 상대성 이론이나 양자역학은 결코 발견될 수 없었을 것이다. 하물며 이 두 이론을 동시에 설명할 수 있는 더 근본적인 원리가 어떻게 기독교인의 지적 수준에서 밝혀질 수 있겠는가? 말하자면 현대 물리학의 중심 과제는 이미 기독교인들의 지적 수준을 훨씬 넘어서고 말았다
[이 게시물은 (ㅡ.ㅡ)님에 의해 2005-03-20 05:53:04 자유게시판(으)로 부터 복사됨]
과학이 안좋은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좋은 방향은 머야? 창조학회가 주장하는 그런건가?
쩝. 포인트나 제대로 잡지....
실천하자~!!! 마태복음 5장 27절~30절
그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아시고 얘기했으면 좋겠습니다. 당신도 그당시 사람이였다면 갈릴레오을 욕했을 겁니다.
기독교가 인간의 지적욕구를 막는다. 너무다 단정적이지 않나요?과학을 멸시하는 것이아니라 그로인한 위험한 일들이 벌어지기 때문이다. 과학발전하는 건 좋지만 그것이 안좋은 방향으로 가고 있기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