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세, 여호아의 부름에 답하다

모세, 여호아의 부름에 답하다

조한주 3 3,886 2004.08.23 07:38
 


 “모세야.”

 “예.”

 “너는 이집트 땅에 가서 내 백성들을 해방시켜라.”

 여호와의 부름에 모세는 대답했고, 그리하여 히브리 노예를 해방시키는 ‘주체’ 가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이름을 부른
여호와의 ‘신민’ 이 된 것이기도 했다. 영어의 subject는 그래서 주체와 신민이라는 상반되는 뜻을 동시에 갖고 있다.

 이름을 부르는 것을 ‘호명’ 이라고 한다. 알튀세르는 호명을 통해 대답한 사람은 주체/신민이 된다고 말했다.
 
 그런데 만약 여호와가 실수를 해서 “한주야” 라고 불렀다면 어떻게 될까? 모세는 대답하지 않을 것이고, 히브리 해방의 주체가 되지도, 여호와의 신민이 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여호와도, 우리도 바보가 아니다. 이름을 불렀는데 대답을 하지 않으면, “아, 이건 그의 이름이 아니군.” 하며 그의 이름을 다시 찾을 것이다.

 그렇다면 토끼나 여우는 제대로 된 이름일까? 아무리 “여우야! 여우야! 뭐하니?” 소리쳐 불러도 여우의 대답을 들은 적이 없지 않은가? 우리가 아는 대부분의 이름이 “불러도 대답없는 이름” 아닌가?
 
그럼 이 모두가 잘못된 이름은 아닐까? 이는 기호(이름)의 자의성을 증명하는 것일까? 아니면 그것을 반박하는 것일까?



 알튀세르는 이데올로기를 ‘대중들의 무의식적 표상체계’ 라고 정의한다.


 ‘표상’ 은 representation을 번역한 말인데, 알다시피 represent는 ‘표상하다’ 는 뜻말고도 ‘재현하다’, ‘대표하다’ 는 뜻을 가지고 있다.


 표상한다는 말은 ‘눈 앞에 떠올린다’ 는 뜻인데, 예컨대 ‘자동차’ 란 말을 듣고 그에 상응하는 물건을 떠올리는 경우나, 역으로 어떤 물체를 보고 ‘컴퓨터’ 라는 단어를 떠올리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이는 단어를 통해 사물을 눈 앞에 재현하거나, 사물을 보고 그에 상응하는 단어를 머릿 속에 재현하는 것이다.



 그럼 표상체계란 무엇인가? 예컨대 이 물건을 보고 ‘책’ 이라고 판단함으로써 우리는 이 물건에 대한 조치를 취할 수 있다. ‘먹을 것/못 먹을 것’ 이란 개념만으로 판단하는 어린 아기라면 그걸 입으로 가져갈 것이다. 연인사이의 대화도 서로가 연인 관계에 있다는 것을 ‘떠올리지’ 않는다면 아마 불가능할 것이다.


 한편 어떤 행동을 하거나 판단을 하는 것은 언제나 특정한 표상과 함께 진행된다. 일관된 표상이 없으면 일관된 판단이나 행동을 할 수 없다.


 예를 들어 A가 지금 이 자리를 학교라고 떠올리고, 또 잠시 뒤엔 연극무대라고 생각한다면 A의 행동은 어떤 일관성도 동일성도 갖지 못한 채 뒤죽박죽되고 말 것이다. 이처럼 무언가를 떠올리도록 해주는 개념이나 상상, 판단의 체계를 ‘표상체계’ 라고 한다.



 이러한 표상체계는 개인마다 약간의 편차는 있지만 대개 집단적으로 유사한 구조를 갖고 있다. 왜냐하면 주변에 있는 다른 사람들의 판단에 영향을 받아서 만들어지거나, 학교나 교회 등 제도적 장치 속에서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식당에서 흑인을 보고 등을 돌리는 남부의 미국인이나, 십자가를 보면 자세를 가다듬는 기독교도들을 생각해 보라. 남부의 미국인이라면 대개 다 그럴 거고, 기독교도라면 대개 다 그럴 거란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런 표상체계는 무의식적으로 작동한다. 예를 들어 방 청소를 한다고 가정해 보자. 바닥에 있는 책을 보고 “이건 책이고, 책은 책장에 꽂혀 있어야 하니 이건 책장에 꽂아 두자” 하지는 않을 것이다.


 <미시시피 버닝> 이란 영화에는 어린 꼬마들도 흑인을 하찮은 존재고 경멸받아 마땅하다는 태도를 보이는 게 나온다. 이건 그 아이들이 사고하고 의식해서 하는 판단이 아니다. 의식은 이 표상체계 안에서 일어나며 표상이 의식에 선행한다. 즉 표상체계는 무의식적으로 작동한다.



 알튀세르는 이데올로기를 ‘대중적인 표상체계’ 라고 이해한다. 이 이데올로기 속에서 대중은 ‘나는 한국인이야’, ‘나는 대학생이지’, ‘나는 조씨 가문의 아들이지’ 따라서 ‘나는 어떻게 해야 해’ 라고 무의식적으로 판단하고 행동한다는 것이다. ‘돈을 받았으니 그만큼 일을 해주는 건 당연해’ 라는 판단도 그렇다.


 결국 이데올로기는 어느 사회에나 있는 것이며 “이데올로기는 현실적 존재 조건에 대한 상상적 관계의 표상” 이라는 것이다. 즉 이데올로기는 있는 그대로의 현실이나 현실관계를 보여주는 게 아니라, ‘이럴 것이다’ 라고 당연시되어 있는 방향으로 변형된 관계를 보여준다는 것이다.


 그리고 있는 그대로가 아니란 뜻에서 이러한 ‘비현실적’ 관계를 마치 ‘있는 그대로의 현실적 관계’ 로 상상하고 오인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엄밀한 의미에서 그 누구도 ‘있는 그대로의 현실이나 현실관계’를 볼 수는 없다. 왜냐하면 이데올로기의 지배를 받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외계인이 아닌 지구인 모두가 이데올로기의 지배를 받고 있다는 것이다. 이데올로기의 종류는 다양할 수 있지만···)



 알튀세르는 “이데올로기는 단순한 관념이 아니라 물질적인 효과를 갖는 물질적 존재며, 물질적 장치를 통해 존재한다” 고 한다. 이는 결국 이데올로기가 물질적 장치를 통해 제도화된 특정한 방식의 실천을 통해 존재하고 작동한다는 말이다. 


 그는 “무릎 꿇고 기도하라. 그러면 믿을 것이다” 라는 파스칼의 말을 인용한다. 종교적 이데올로기는 단순한 ‘믿음’ 이나 ‘관념’ 이 아니라, 매주 교회에 나가고, 가서 무릎 꿇고 기도하는 실천을 통해 작동하는 물질적 존재라는 것이다. 이처럼 특정한 실천을 지속화하는 장치를 알튀세르는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 라고 한다. 학교나 교회, 가족 등등이 그것이다.



 마지막으로 “이데올로기는 항상-이미 개인들을 주체로 호명한다” 고 한다. 이는 그의 이데올로기론에서 매우 핵심적인 주장인데, 


 예를 들어 “너는 신의 어린 양이다” “너는 누구의 아들이다” 또는 “너는 한국인이다” “너는 백인이다” 와 같이 ‘너는 누구’ 라고 불러주는 것이 호명(interpellation)이다.


그 뒤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생략되어 있다. “너는 (한국인이니) 이걸 해야 한다. 이렇게 해야 한다” 는 식의 말이 생략되어 있는 것이다.


 Bible에 보면 이런 장면이 매우 많지 않은가? 신의 부름을 받은 모세나 선지자들이 그 부름에 따라 무언가를 한다. 즉 신이라는 호명한 주체(이를 큰 주체 Subject라고 한다)에 복속되어 그가 지시하는 바를 따르고 행동하는 것이다. 이건 ‘신의 백성’ 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여기서 ‘항상-이미’ 라는 말을 쓴 것은, 예를 들어 내가 태어나기 이전부터 나는 누구의 아들이고 한국인이고 황색인종이라는 등의 호명이 항상-이미 정해진 채 기다리고 있기에 그런 것이다. 즉 내가 불리어질 호칭은 항상-이미 정해져 있는 것이다.


그에 대해 내가 “예” 하고 대답하는 순간, 나는 큰 주체(예를 들어 ‘한국인’)의 부름을 내 것으로(“나는 한국인이야”) 하게 된다. 이로써 나는 ‘주체’ 가 되는 것이다. 그게 말 잘 듣는 주체든, 말썽 피우는 주체든 또는 욕을 잘하는 주체든 간에 말이다.



 여기서 S(큰 주체)와 me의 관계가 설정되는 것이다. 내가 태어나기 이전부터 항상-이미 존재하는 호명, 즉 내게 주어질 나의 자리요, 내가 호명에 답해 채워야 할 질서 속의 빈자리가 있다는 것이다(내가 태어나기 이전부터 ‘한국인’이란 호명은 존재한다).


그리고 S(큰 주체)의 호명에 답함으로써 나는 s(주체/신하)로 되고, 그것이 부르는 내 이름(예를 들어 ‘한국인’)을 내 안에 옮겨 놓게 된다. 그게 바로 내 안의 주체이다. 이는 라캉이 말하는 에스와 마찬가지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주체의 부름에 답하는 다양한 방법, 형태를 other 라고 부른다. 이는 ‘조국의 부름을 받은’ 용감한 군인이 되기도 했다가, 힘든 생활을 견디지 못해 빠져나가기도 하고, 때로는 근면한 노동자가 되지만 종종 힘든 삶에 찌들어 술을 따르는 ‘편한’ 직업의 유혹에 넘어가기도 하는 것 등이 other 라고 할 수 있다.



 이로써 알튀세르는 이데올로기에 의해 개인이 항상-이미 주체로 구성되어 가는 메커니즘을 설명하고 있다. 즉, 항상-이미 호명된 주체로 개개인이 ‘주체화’ 되어 가는 메커니즘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 메커니즘 자체는 타자에 의해 개개인이 주체로 되어가는 라캉의 메커니즘과 거의 유사한 것이다.


 덧붙이자면 알튀세르의 이런한 문제설정은 재생산을 넘어 항상-이미 존재하는 체계의 전복을 사고하기 곤란하다는 문제점이 있다. 즉 간단히 말해 변화의 가능성이 아예 차단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그의 가장 큰 한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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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흐프프 2004.08.23 09:42
"모세야~"... 할아버지께서 부르셔~~
"예~~" 하고 달려가면
"너말고 개새꺄~"
제삼자 2004.08.23 09:17
(생기에)--->(생기게)
제삼자 2004.08.23 09:15
여호와는 손과 발이 없나 봅니다.
스스로 할 생각을 못하고 왜 중간에 사람을 시킬까요?
그래도 입은 있나 봅니다. 말을 한 것을 보면.

직접 했어도 의문이 생기에 마련인데,
무엇이든지 중간에 사람을 시켜서 하니까, 그게 묘한 수작이 아니고 뭘까요?
그렇게 의심스럼게 해서 무엇을 얻으려는 것일까요?

다른 긴 얘기 다 필요 없습니다.
여호와는 직접하지 못하고 왜 중간에 사람을 시킵니까?
이것만 밝히 설명하면 됩니다.

그리고 여호와(예수)는 뭘 그렇게 믿으라고 합니까?
믿는 것보다 <알게> 하는 것이 더 정확하지 않습니까?
이제 앞으로는 <믿게> 하지 말고 <알게> 하심이 어떨지?

우리 정확하게 하고서 맘 편히 삽시다.
어떻습니까?
그럴 의향이 없으신지?

거짓이 들통날까봐 그건 불가능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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