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에 대한 개독의 오해

영혼에 대한 개독의 오해

眞如 0 3,310 2003.08.10 01:44

저는 개인적으로 영혼이나 혼령,
그러니까 인간의 지식이 도달하지 못한 비시각적 세계에 대하여
나름으로 경험을 통한 정립을 하고서 살아간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좋아하는 일이 기계적이다 보니 이런 類의 학습된 지식이 없어서
잘 표현하지 못하는데도 불구하고,
일반 개독들이 자주 주절대는 ‘영혼’에 대한 이해가 너무 비논리적이며,
심각하리만치 맹목적 믿음이라서 몇자 적고자 합니다.
인간이 볼 수 있는 기관인 ‘눈’은 실상(물질)을 주로 정확히 보게 되지만,
관념에서 도출되는 ‘만들어진’ 허상도 볼 수 있습니다.
그 허상이란 것은 각자의 관념에 따라 제각각 다르게 도출되기 때문에 똑 같은 현상을 보고도
해석은 제각각 입니다.
즉, 물질은 보는 눈이 같지만 허상(실체는 있으나 형체가 없는 것을 보는 것을 의미)은
물질과 차원이 다른 임의적 존재일 수도 있고, 다각적(다형체) 존재일 수도 있습니다.
마약에 취한 자가 보는 것은 그 자의 관념에서 나오는 ‘만들어진 형상’입니다.
그것을 분명히 이해하면서 다른 경우의 허상을 같이 해석하지 않는 것은
수직관념 속에 수평적 동질의 차원을 무시하는 모순된 사고가 아닐 수 없습니다.
개독은 영적인 침체나 과거의 상처를 안고 살아가며 아파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야웨 보다는 자신의 고통스러운 처지를 주목하게 되는데
야웨는 자기를 바라보는 자들에게만 치유의 은혜를 베푸는 한계성이 있는 허상을 말합니다.
물질계 이외의 실체에 대한 에너지는 신내림 받는 무속인들을 통해서 알아볼 수 있습니다.
 ‘작두를 걷는 일’ 등은 분명 에너지 이지만,
그것이 허상계에서 어떤 경로로 인간에게 전달되어 물질계에 비과학적 실현을
가져오는 지 알 길이 없지만 비슷한 경우의 초능력자(마술이 아닌)가 못을 세운 날카로운 면을 걷는 묘기에도
일반인과 다른 어떤 에너지가 전달 될 것입니다.
이 두 경우에서 보면 무속인은 신내림으로 받아들이고,
초능력자는 수련을 통한 신념의 에너지로 받아들입니다.
인간은 3차원이라는 한계적 공간에서 다차원으로의 구원(신의 힘에 의해, 영적 힘에 의해)을
기다리는 존재가 아니라, 다차원 우주 속에서 인간이 느끼는 것이 3차원인 것입니다.
물질이 진화하는 것은 두 눈을 뜨고 보고 있기 때문에 부정할 수 없습니다.
과학에서 말하는 진화론의 개념이 아니라, 우리가 사실 그대로 객관적으로 말할 수 있는 변화 말입니다.
이조시대의 우리 사진을 보면 지금 현재의 우리 모습과 많이 달라져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을 굳이 진화란 말까지 꺼내어 과학적으로 증명하려고 애쓰지 않아도,
분명 누구나 다 느끼는 것 아닙니까?
이런 작은 변화들은 계속 발전되어 가는지, 퇴화되어 가는 지는 정할 수 없는
무수한 변화의 틀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그것과 마찬가지로 관념도 시대의 흐름에 따라 앞으로 계속 변화되어 갈 것이고,
막스의 이야기처럼 나중에는 신앙(믿음)이라는 관념이 무참히 깨지는 변화가 도래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제일 중요한 것은 자신의 관념을 타인에게 전달하는 통로가 실체 한다고 하더라도
그 관념이 전달되어 전달 받은 사람이 그 관념에 익숙해 지는 것 뿐,
옷이 익숙해졌다고 옷을 잘입었다고 평가하는 것은 무의미하며,
자신 입맛에 맞는 옷을 입고 생활하면 그 뿐인 것입니다.
어느 나라인지 집단으로 개독들이 똑 같은 장소에서 예수를 보고서,
각자 다른 사람처럼 얼굴을 묘사하는 것을 두고 개독끼리 논란이 일은 적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납니다.
각자의 관념대로 본 것을 두고,
획일적으로 맞추려다 보니 그런 코메디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보는 것 또한 그들끼리 만의 일치된 관념 하에 발생하였을 것입니다.
자신의 영혼을 살찌우는데 도움을 줄 수 있는 스승을 찾는다면,
그 스승의 인간적인 됨됨이, 상식적이고 이성적인 사고가 결여되지 않은 양심성 등을
갖추고 자신의 기준을 세우고, 채워서 나눠줄 수 있는 사람인 것을
인간 본성에 접근하는 신비적 호기심을 자극하고, 죽음이란 변화를 공포로 포장하여
‘만들어진’ 신에게 의지하는 것 만큼 어리석은 일이 없는 것입니다.
자신의 관념을 목사가 대신 ‘만들어 주길’ 바라게 된 다면 그 타인에 의해 형성되어진 사상을
자신의 관념 속에 도입한 자신 스스로가 책임을 져야 되며,
자신 속에 선악의 이분법 사고와 천당 지옥의 관념을 두고
물질계가 아닌 차원(질은 현실보다 낮은지 높은지 알 수 없음)에 속하게 되면
자신 앞에 벌어지는 관념 속의 허상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정신적 고통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경험일 뿐이겠지요.
자신이 어떤 사고체계를 가지고 삶을 살아가느냐를
목사에게 ‘결정’하라고 맡기는 것(그것도 머나먼 유대의 관념에)은
이미 자신을 포기하게 된 것이며,
‘영혼 구원’이 아니라 안일하게 행복을 찾는 수렁 속으로 자신을 들이미는
지극히 어리석고도 어리석은 짓입니다.
일률적 허상을 지향하는 것으로 이미 기독교는 끝난 것입니다.

자신의 영혼은 자신이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명을 다하고 죽음에 이르러 돌아볼 때 후회하지 않는 삶을 살려고 노력한다면
우주 속에 흩어진들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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