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하는 세계에서의 종교와 과학( 현대물리학이 발견한 창조주 중에서)
오디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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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08.05 17:48
변화하는 세계에서의 종교(宗敎)와 과학(科學)
출전(出典): "현대물리학이 발견한 창조주(God and the New Physics)," 폴 데이비즈(Paul Davies) 지음, 류시화 옮김, 정신세계사, 1988년 4월.
<전략(前略)>
과학과 종교는 두 가지 측면, 즉 지성적인 측면과 사회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다. 과학이든지 종교든지 그것이 사회에 미친 영향은 유감스러운 면이 많다. 과학은 질병과 힘든 노동의 고통을 줄여주고, 오락과 편리를 위한 기계 장치들을 많이 제공했지만, 동시에 대량 파괴가 가능한 공포의 무기를 양산했으며, 또한 삶의 질(質)을 현저하게 떨어뜨렸다. 산업사회에서의 과학의 영향은 어둠과 밝음이라는 양면성을 갖고 있다.
반면에 조직화된 종교는 어떻게 보면 더 나쁜 영향을 주어왔다. 각종 종교적인 공동체의 일꾼들이 세계 도처에서 행하고 있는 이기심 없는 헌신적인 사랑과 봉사를 부정할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종교는 이미 오래 전에 조직화되고 제도화되어서, 선악(善惡)의 구별보다는 권력과 정치욕에 관심을 갖는 경우가 더 많다.
게다가 종교적인 열의는 너무도 자주 폭력적인 갈등으로까지 발전하여, 사람이 정상적으로 지니고 있는 인내심을 파괴하고 대신에 야만적인 잔인성을 드러내게 하였다. 중세 시대의 남미 원주민들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대량 학살은 상상 못할 끔찍한 보기의 하나이지만, 유럽의 역사는 대부분이 사소한 교리의 차이 때문에 빚어진 대학살 부대의 말발굽으로 얼룩져 있다.
심지어 현대의 소위 `계몽'되었다고 하는 시대에서조차도 종교적인 미움과 갈등이 전세계를 멍들게 하고 있다. 종교라면 어느 것이나 사랑과 평화와 겸손의 미덕을 찬양함에도 불구하고, 세계의 거대한 종교 조직들의 역사를 특징짓는 것이 너무도 잦은 증오심과 전쟁과 적대감이라는 사실은 실로 아이러니칼한 일이다.
많은 과학자들은 조직화된 종교에 대하여 비판적이다. 그것은 그 종교들이 가지고 있는 개별적인 신앙의 내용 때문이 아니라, 종교적인 광신(狂信)으로 인해서 평소에는 정상적이던 사람이 비정상적인 행동을 하게 되고, 특히 종교가 권력정치와 결탁할 때에 사회적으로 타락하기 때문에 그렇다.
물리학자 허먼 본디(Hermann Bondi)는 종교에 대하여 심히 비판적이다. 그는 종교를 `심각한 습관성의 해악(害惡)'이라고까지 정의내리면서, 한 때 유럽에서 광적으로 유행했던 마녀(魔女) 화형식을 보기로 든다.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결국에 가서는 마녀라고 의심되는 여인들을 잔인하게 불태우게 했던 유럽의 기독교인들의 경우, 성경이 그들에게 지키기 힘든 무거운 의무를 안겨주었음이 분명하다. 마녀 화형이 우리에게 일깨워주는 사실은 너무도 명백하다. 첫째로, 평소에는 남부끄럽지 않은 행동을 하던 사람들이 소위 `신앙'이라는 것 때문에 끔찍하고 공포스런 행위를 자행하게 되며, 그리고 일상적으로 인간에 대하여 갖고 있던 친절한 감정이 종교적인 믿음에 의해서 돌연 잔인한 감정으로 바뀌는 과정을 보여준다. 둘째로, 이것은 종교가 도덕성을 절대적이고 불변의 근본으로 삼고 있다고 하는 모든 주장들이 얼마나 공허한 것인가를 일깨워준다[주: 허먼 본디의 "거짓 진리들(Lying Truths)" 가운데의 "종교는 좋은 것?(Religion is a good thing?)" (R. Duncan과 M. Weston-Smith 편저, 1979년 Pergamon 출판사)].
본디는 주장한다. 지난 수세기 동안 교회나 기타 여러 종교에 의해서 저질러진, 인정머리라곤 눈꼽만치도 없는 폭력들로 미루어볼 때 이러한 종교 조직들은 도덕적인 관점에서 완전히 구제불능이라는 것이다.
온갖 자부심에도 불구하고, 종교가 사회를 분열시키는 가장 강력한 힘으로 남아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사람은 거의 없다. 신자들의 좋은 의도가 무엇이든간에 피로 얼룩진 종교 갈등의 역사를 살피다보면, 과연 인간 도덕성에 대하여 종교가 갖고 있는 보편적인 기준이 있기나 한 것인가 의심이 간다. 아울러 종교 조직체에 가입하지 않은 사람이나, 또는 철저한 무신론자를 자처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이들에게 사랑과 자비심이 결여되어 있다고 믿을 근거는 아무 데에도 없다.
물론 모든 종교인들이 저마다 광신적인 열광자(熱狂者)인 것은 아니다.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은 종교적인 갈등을 뿌리뽑는 데에 공동 참여하고 있으며, 교회가 과거에 고문과 살인과 압제를 휘두른 것을 한탄하고 있다.
하지만 아직도 오늘날의 사회를 괴롭히고 있는, 신의 이름으로 행해지고 있는 엄청난 파괴와 야만적인 행위들만이 종교의 반(反)사회적인 면을 입증하는 유일한 증거는 아니다. 교육의 차별, 심지어 주거지의 차별이 북아일랜드와 사이프러스 같은, 문명화된 국가라고 하는 곳에서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또한 같은 종교 조직 내부에서도 여성과 소수 인종과 동성연애자들에 대한 차별, 또는 자신의 지도층에서 열등하다고 판단한 부류의 사람들에 대한 차별을 그 종교 자체가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있는 형편이다. 카톨릭국가와 회교국가에서의 여성들에 대한 차별, 그리고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교회에서의 흑인에 대한 차별은 특히 공격적이다.
많은 이들이, 자신이 믿고 있는 종교가 사악하고 편협한 것으로 묘사될 수도 있다는 사실에 소스라쳐 놀라겠지만, 그러나 세상의 `다른' 종교들이 거기에 상당한 책임이 있다는 말에는 쉽게 동의할 것이다.
이 슬픈 편견과 편협의 역사는 일단 종교가 제도화 되고 조직화 되면 당연한 결과인 것처럼 보인다. 이것이 자극제가 되어 서구에서는 토착화된 기성 종교에 대하여 강한 불만을 터뜨리게 되었다. 많은 이들이 기성 종교 대신에 소위 `유사(類似)종교집단'쪽으로 방향을 바꾸고 있다. 신경에 덜 거슬리고 영적인 완성을 향한 더 무난한 경로를 발견하기 위해서이다.
물론 새로운 운동들은 다양하고 폭이 넓어서, 그중의 어떤 것은 전통의 기성 종교보다도 더 편협하고 사악하다. 그러나 대부분은 복음 전파라는 광적인 정열에 반대하여 신비적이고 조용한 내면 탐구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으며, 그래서 기성 종교가 사회에 미치는 악영향에 대하여 비판의 눈길을 던지는 사람들에게 매력을 주고 있다.
종교의 사회적인 측면에 대해서는 그만 이야기를 하자. 그것의 지성적인 내용은 무엇인가?
인간 역사상 상당한 부분을 사람들은 도덕적인 안내자로서 뿐만 아니라 존재의 근본적인 의문에 대한 대답을 찾기 위해서 종교에 관심을 가져왔다. 우주는 어떻게 창조되었으며 어떻게 종말을 맞이할 것인가? 생명과 인류의 기원은 무엇인가?
과학은 겨우 지난 이삼 세기에서만 그러한 주제들에 대하여 나름대로의 기여를 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일어난 갈등과 충돌은 잘 기록되어 있다. 초창기의 갈릴레오와 코페르니쿠스, 뉴우튼, 그리고 다아윈과 아인슈타인을 거쳐 현대의 컴퓨터와 고도의 테크놀로지 시대에까지도 근대 이후의 과학은 깊이 뿌리내린 종교적인 믿음에 찬물을 끼얹고, 이따금 위협적인 해석을 가하기도 한다.
따라서 과학과 종교는 본질적으로 상반(相反)되고 적대적이라는 느낌이 크게 자리잡게 되었다. 과학적인 진보가 이루어지지 못하도록 문을 폐쇄시키려는 교회의 초기의 시도는 과학 집단들 사이에 종교에 대한 깊은 의구심을 심어놓았다. 종교 쪽에서도 마찬가지로 과학자들을 소중한 종교적인 믿음의 파괴자, 신앙의 파괴자로 간주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과학적인 방법의 성공에 대해서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과학의 여왕인 물리학은 몇 세기 전만 해도 생각지 않았던, 인간에 대한 새로운 이해의 장(章)을 열어 놓았다. 원자(原子)의 내부 작용에서부터 블랙홀(black hole)의 가장 어두운 비밀 몇 가지를 이해할 수 있게 해주었다. 또한 주변의 물질계에 대한 통제 능력을 갖도록 해주었다. 과학적인 생각의 엄청난 힘은 경이로운 현대 기술 속에서 나날이 증명되고 있다. 따라서 과학자들의 세계관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신뢰를 하는 것이 합리적일지도 모른다.
과학자와 신학자는 전적으로 다른 출발점에서 존재의 깊은 의문에 접근해 들어간다. 과학은 서로 다른 경험들을 연결하는 하나의 이론이 성립될 수 있도록 정밀한 관찰과 실험에 그 기초를 두고 있다. 물질과 힘의 행동을 지배하는 근본 법칙을 발견하겠다는 희망을 갖고 과학자는 자연계 속에서 작용하고 있는 불변의 법칙들을 찾고 있다.
이러한 접근 방식에 있어서 한 가지 중요한 것은, 만일 지금까지의 이론에 반대되는 증거가 나타나면 그 이론을 기꺼이 포기하는 열린 자세이다.
비록 어떤 과학자는 개인적으로 한 가지 소중한 생각에 고집스럽게 집착할지도 모르지만, 과학 집단은 언제나 새로운 접근 방식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 하나의 과학의 원리를 놓고 상반된 견해를 가진 두 집단이 무력 전쟁을 벌이지는 않는다.
이와 반대로 종교는 계시를 받았다거나 또는 자신이 인정하는 지혜에 기초를 두고 있다. 불변의 진리라고 주장하는 종교의 교리를 시대의 변화에 따라 매번 고치기는 어렵다.
참된 신자는 아무리 많은 표면상의 증거가 자신의 믿음에 반대된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굳게 지켜야 한다. 이 `진리'는 집단적인 조사와 실험의 여과 과정을 거치기보다는 그 신자에게 거의 직접적으로 전달된다.
개인적으로 계시를 받은 `진리'에 있어서 한 가지 곤란한 점은, 그것이 빗나간 것이기 쉬우며, 그리고 비록 그것이 옳은 것이라 해도 다른 사람들에게 무작정 그것을 믿게끔 강요하기보다는 그 믿음을 함께 나눌만한 정당한 이유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많은 과학자들은 계시된 진리에 대하여 냉소적이다. 실제로 어떤 이들은 그것이 대단히 해로운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자신이 계시받은 것을 믿는 이들은 일반적으로 몹시 오만한 심리 상태에서 이런 식으로 말한다. "나는 `안다'. 그리고 내 믿음에 찬성하지 않는 사람들은 모두 잘못된 것이다." 다른 어떤 분야에서도 이러한 오만은 찾아볼 수가 없으며, 자신이 갖고 있는 `지식'에 대하여 그토록 철저한 확신을 갖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그토록 대단한 우월감을 갖고서, 다른 믿음을 가졌거나 믿음을 갖지 않은 사람들에 비하여 자신이 선택받은 존재라고 느낀다는 것은 나로서는 정말 혐오스런 일이다.
대단히 잘못된 현상이지만, 너무나 많은 신자들이 자신의 믿음을 선전하는 데에 최선을 다하고 있으며, 자신의 자녀들뿐만 아니라 남에게도 자신의 믿음을 강요하고 있다(순전히 강제적으로, 그리고 야만적으로 그러한 선전과 강요가 저질러진 증거를 세상의 역사는 충분히 가지고 있다).
븐명한 사실 하나는 대단히 성실하며 각 분야의 지성을 대표하는 인물들이 종교적인 믿음에 있어서는 서로 다르며, 언제나 달랐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하나의 신앙만이 옳을 수 있다면, 인간 존재는 계시받은 종교 분야에서 옳지 못한 어떤 것을 굳게, 그리고 정직하게 믿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이러한 명백한 사실로 미루어 자신의 믿음이 아무리 깊다고 할지라도 자신이 지금 실수를 저지르고 있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인정하고 약간의 겸손한 태도라도 가져야 할 것이다.
그런데 어떤 신자든지 이러한 기본적인 겸손함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온갖 힘을 동원하여 자신의 신앙을 남의 머리 속에 강제로 주입시키려 하고 있다(오늘날 발전된 국가에서는 공개적으로 그렇게 할 수가 없으므로 우선적으로 자녀들에게 자신의 신앙을 강요하는 경향이 있다). 많은 경우에 어린이들은 자신들이 남보다 우월한 지식을 가진 집단에 소속되어 있으며, 또한 자신들만이 전능하신 하느님의 사무실과 전화통화가 가능하다고 믿게끔 길들여져왔다. 그리고 그밖의 다른 모든 존재들에 비해 자신이 무척 행운아라는 생각을 갖도록 교육받아 왔다[주: 허먼 본디의 앞의 책].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교적인 체험을 가진 사람들은 여전히 믿음에 대한 정당한 근거로 수많은 과학 실험보다는 그들 자신이 개인적으로 받은 계시에 더 많이 의존하고 있다. 실제로 많은 전문 과학자들 역시 대단히 종교적이며, 겉으로 봐서는 그 두 세계를 평화롭게 공존시키는 데에 별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 같지 않다.
문제는 근본적으로 다른 많은 종교적인 체험들을 어떻게 하면 하나의 일관성 있는 종교적인 세계관으로 엮는가 하는 것이다. 한 예로, 기독교의 우주론(宇宙論)은 동양의 우주론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최소한 둘 중의 어느 한 쪽은 틀린 것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계시받은 진리에 대하여 의심한다고 해서 과학자들이 반드시 차갑고, 딱딱하고, 계산적인 인간들이며, 영혼이 없이, 오로지 사실과 숫자에만 관심이 있는 이기적인 존재들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큰 잘못이다. 실제로 현대 물리학의 성장과 더불어 과학이 갖고 있는 깊은 철학적인 의미에 관한 관심이 더욱 커진 것이 사실이다.
<후략(後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