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상에 대하여
Ⅰ
역사는 기독교도들에게는 그다지 달가운 것이 아니기에 그들의 대부분은 있는 그대로를 보는 것을 대단히 불편하게 여긴다. 이미 기독교에 의해 형성되어진 인식은 그 사실들을 기독교도로 하여금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게 만든다. 따라서 사람들이 아무리 기독교를 비판해도 비난, 비방, 욕설, 음해 등으로 재정의 되어 기독교도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드는 것이다. 만약 기독교도가 사실들을 받아들이더라도 어디까지나 선택적으로만 받아들일 뿐이다. 즉 인간의 잘못, 잘못된 믿음으로만 생각할 뿐이지 기독교의 본질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따라서 역사의 부재는 그들을 당당하고 거침없는 성격의 소유자로 뒤바꿔 놓는다. 로마의 기독교에 대한 박해는 ‘대 박해’로 떠벌이기를 좋아하지만, 콘스탄티누스 대제 이후 기독교의 비기독교에 대한 박해는 알기조차 거부한다. 이교도들이 기독교도들에 의해 어떻게 박해를 당하고 씨가 마를 때까지 ‘순교’를 당했는지는 그들이 상관할 바가 아니다. 마찬가지로 이교도들의 성전이 이 사나운 폭도들에게 어떻게 모욕을 당하고 파괴되었는지는 신앙의 영역 바깥에 존재한다.
이 폭도들의 성질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은 없지만, 더 이상 난폭한 방식은 용납될 수 없다는 세계인의 사고관이 변했기에 이전처럼 함부로 날뛰지는 못한다.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는 잔학한 짓은 더는 할 수 없게 되었다. 이것은 기독교도들에게서 ‘폭력’이라는 권태를 풀 자극제를 빼앗아 간 셈이다. 현대인의 그 누가 이교도가 잔인하게 고문을 당하는 것을 보며 쾌감을 느끼고, 마녀가 화형당하는 곳에서 장터가 열리는 망측한 짓을 똑같이 따라할 수 있을까? 적어도 비기독교인인 당신이 이런 사악한 행위들이 지금에도 잔존하고 있다면 그대로 보고 있겠는가, 아니면 강력히 비난을 하겠는가? 신교도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굶주린 곰에게 산채로 잡아먹히는 퀘이커교도를 보며 당신도 쾌감을 느낄 수 있겠는가?
망상증에는 정신 이상으로 생기는 증세뿐만 아니라 ‘객관적으로 잘못된 것인데도 옳다고 확신하고 고집하는 증세’란 뜻도 있다. 상대방의 것을 신화(허구)나 거짓으로 치부하고 자신의 것은 역사요 사실이라고 주장하는 망상증은 도저히 고쳐지지 않는 기독교도들의 고질병이다. 이 망상증 앞에서는 정신과 의사의 노력도 물거품이 되며, 정신치료나 약물치료로도 증세가 완화되지 않는다. 그냥 그렇게 살다가 가게끔, 최소한 남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게끔 해주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다.
타 종교의 시설물을 우상숭배로 여겨 방화와 파괴를 일삼는 기독교도들을 굳이 구분 짓자면 편집증 환자가 적당할 것이다. 편집증 환자는 자신이 믿고 싶은 것만을 보는 우리에게는 주어지지 않은 특별한 눈을 가졌기 때문이다. 이 편집증 환자들과 평범한 기독교도들은 당연히 다르겠지만, 위에서 언급한 망상증을 십중팔구는 소유하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래서 둘 모두 비판을 받기 시작하면 상대방이 박해와 핍박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피해망상을 재확인하며 더욱 더 믿음이 좋아질 뿐이다.
왜 기독교도는 비판하지 말라고 하면서도 비판에 혈안이 되어 있으며, 그와는 반대로 비판받는 것을 참지 못하는 것일까? 이 기이한 특성을 이해하기 위해 기독교도들의 사고방식을 망상장애 환자의 허위사회가 가지는 특징과 비교해보자.
(극복할 수 없는 좌절로 인해 사회적 관계를 회피하고 은둔적이 된다.) 망상장애 환자는 자신의 증오감과 공격적 성향을 자신이 만들어낸 상상 속의 허위사회에 투사를 하여 정당화 한다. 이 허위사회는 환자를 위협하고 해치려는 음모자들의 집단으로, 환자는 바로 이 허위사회에 실제로 존재하는 사람들과 공상 속의 사람들까지 포함시킨다. 환자는 이 허위사회를 통해 자신의 불안을 설명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허위사회에 속하지 않는 사람들과는 사회적 관계가 유지된다.
괄호 안의 내용만을 제외하고―이는 보다 특수한 경우에 속하기 때문이다―, 이 망상장애 환자 대신 기독교도를 넣어 보라. 기독교도들이 악에 처한 온 세상과 야웨에 속한 자신들을 구분 짓는 행태가 망상장애 환자가 만들어내는 허위사회와 다를 게 없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이미 기독교도들은 이 허위사회에 비판가들을 집어넣었기 때문에 그들이 하는 비판이나 비난은 모두 기독교를 음해하려는 움직임으로 받아들인다. 따라서 아무리 기독교도들을 향해 기독교를 비판해 봐야 그들에게서 얻을 수 있는 소득은 불평꾼으로서의 모습, 앙분풀이, 봉기(蜂起)와 같은 것 말고는 거의 기대할 것이 없다.
병식이 없는 환자는 때때로 자신의 병을 인정하려들지 않으며, 오히려 상대방이 병이 있다고 주장을 한다. 기독교도들의 몰이해와 몰인격적인 행위 역시 병식이 없는 환자의 반응과 전혀 다를 것이 없다. 기독교도들을 향해 비판·비난을 하는 것은 그들의 상태를 더욱 악화시켜 믿음이 공고해지거나(혹은 자신의 믿음을 확인하려고 비판가들과 접촉한다) 박해받고 있다는 망상을 재확인하게 만들거나 폭력의 심리를 자극할 뿐이다. 비판이 기독교도들을 건설적인 방향으로 이끌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자신이 기독교란 세계에 대해 얼마나 우유부단하고 낙관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는지를 심사숙고해볼 일이다.
Ⅱ
과학은 증명이 중요시 되는 ‘학문’이다. 폴 쿠르츠가 정의한 믿음의 세 가지 유형에서는 증거에 기초한 가설에 속하는 것이 바로 과학이다. 확인되는 것까지만 수용하고 나머지는 미지의 영역으로 그대로 두고 쉬지 않고 탐구를 한다. 이론은 얼마든지 폐기되고 수정 보완이 가능하다. 과학은 이와 같은 특성으로 말미암아 종교와 자주 충돌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종교와 충돌할 경우에 과학은 물론이고 모든 것들은 종교에 의해 억압되어야 한다. 이는 버트런드 러셀이 지적한 종교가 주는 두 가지 해악으로 인해 벌어지는 지극히 당연한 결과다.――The harm that is done by a religion is of two sorts, the one depending on the kind of belief which it is thought ought to be given to it, and the other upon the particular tenets believed. As regards the kind of belief: it is thought virtuous to have Faith―that is to say, to have a conviction which cannot be shaken by contrary evidence. Or, if contrary evidence might induce doubt, it is held that contrary evidence must be suppressed.
종교가 주는 해악을 알기 위해 우리는 몇 가지 사례가 필요하다.
1) 벤자민 프랭클린이 피뢰침을 발명했을 때, 영국과 미국의 목사들은 그것이 신의 의지를 파괴하는 것이라며 비난했다.
2) 버트런드 러셀의 고조부는 에트나 화산의 용암층 두께를 보고 세상은 정통파의 추정보다(4004년 B.C.E.) 더 오래되었다는 견해를 책자로 출판했다가 주정부와 사회로부터 배척당했다.
3) 마르틴 루터는 코페르니쿠스를 향해 바이블을 집어던지며 「여호수아」를 부정하려는 바보라고 했다.
4) 천연두의 예방법으로 종두가 의사들에 의해 주장되자 신학자들은 병도 신이 주신 것이라며 그것을 막겠다는 것은 악마나 할 짓이라고 했다.
5) 여성의 출산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마취제를 사용하자고 주장하자, 출산의 고통은 신이 이브에게 내려준 벌이므로 마취를 하겠다는 것은 신에 대한 모독이라며 성직자들은 즉각 비난하고 나섰다.
6) 현대 해부학의 창시자 안드레아스 베살리우스는 남녀의 갈빗대 수는 공히 같다고 했다가 기독교도들에게 바이블을 믿지 않는다며 비난을 샀다.
헛된 망상에 사로잡혀 역사가 부재한 기독교도들은 이런 몇 가지 사례들이 극히 일부라며 코웃음을 칠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이 단지 사례들에 지나지 않으며, 실제 역사에서는 그보다 더한 일이 무수히 많음을 알고 있으니 괘념치 말자.
오브르
2004. 7. 14.
2004. 9. 12. 증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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