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의 역사"에서 주로 다룰 주제는 기독교인들이 저질러온 죄악들,
예를들어 십자군, 마녀사냥, 이단사냥, 루터와 칼뱅의 망언 사례, 인디언과 인디오 학살 등을 역사적 자료를 통해 조명하고,
기독교가 로마에 의해 공인된 과정, 유대인들의 역사 등 다채로운 주제를 포함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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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성전시대 - 2
오디세이
일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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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08.05 23:02
제2성전시대 - 2
<로마의 통치와 헤롯 왕조>
세계의 새로운 지배자로 등장한 로마는 이스라엘의 전략적인 중요성을 간과하지 않았다. 팔레스타인은 소아시아와 이집트를 연결하는 교량 역할을 하고, 주변에는 로마가 정복하지 못한 나바티안과 파르티아 왕국이 남아 있었다. 로마의 폼페이는 하스몬 왕조 치하에 있던 많은 헬라 도시를 해방시켰다. 힐카누스는 왕이라는 칭호 없이 대 제사장만으로 만족해야 했으며 아리스토불루스는 로마로 잡혀갔다. 힐카누스를 도왔던 이두매 출신 안티파테르는 아리스토불루스의 아들이 일으킨 반란을 진압하는 로마를 도와 신임을 얻게 된다. 유대의 총독으로 임명된 안티파테르는 장남파사엘을 예루살렘의 총독으로, 차남 헤롯을 갈릴리의 총독으로 임명한다(주전 4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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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롯왕>
로마로 잡혀갔던 아리스토불루스의 아들 안티고노스와 파르티아 왕국이 팔레스타인으로 쳐들어오자 헤롯은 급히 로마로 건너가서 원조를 청한다. 안토니와 원로원의 신임을 얻어 유대의 왕으로 임명받은(주전 40년) 헤롯은 삼 년간 그의 반대자들과 전쟁을 치르고 예루살렘에 입성한다. 안토니에 의해 왕으로 임명된 헤롯은 안토니가 실각하고 옥타비안이 정권을 잡자(주전 30년) 위기를 느끼게 된다. 그러나 로마로 건너가서 옥타비안을 만난 그는 비굴하지 않고 도리어 당당한 자세로 자신이 안토니를 위해 충성을 바쳤듯이 옥타비안을 위해서도 충성을 다하겠다는 결의를 보이고 유대의 왕위를 유지시킬 수 있었다. 헤롯은 로마의 정세가 변해도 새로운 권력자들의 신임을 얻어 낼 수 있을 만큼 민첩하고 권력에 대한 애착이 많은 인물이었다.
헤롯에 대한 유대인의 시선은 곱지 않았다. 그는 하스몬 왕조의 찬탈자이면서 순수한 유대인이 아닌 개종한 이두매 출신이었다. 유대인 자료는 그가 하스몬의 노예였다고 경멸하기를 서슴지 않았다(바벨론 탈무드. 바바 바트라 3b). 그는 남아있는 하스몬의 후손을 하나 하나 제거해 나간다. 대 제사장이었던 힐카누스, 처남이며 대 제사장이었던 아리스토불루스를 제거하고, 하스몬 왕조의 마지막 왕녀이자 부인인 미리암을 누명을 씌어 살해한다. 부인 미리암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두 아들도 결국은 부친의 손에 죽음을 당하고, 헤롯 자신이 죽기 며칠 전에도 아들 안티파터를 살해 할 정도로 잔인했다.
로마에서는 그를 두고 헤롯의 아들로 태어나기보다는 돼지의 새끼로 태어나는 것이 낫겠다는 말이 생겨날 정도였다. 대제사장직은 하스몬 가문에서 맡아 왔으나 헤롯은 고의적으로 하스몬 가문과 연관이 없는 바벨론 출신의 하나멜을 대제사장으로 임명한다. 로마는 헤롯의 로마에 대한 충성심과 능력을 인정하여 그를 유대의 왕으로 임명하였다.
로마 황제를 위한 충성심은 그가 도시를 건설하고 황제의 이름을 따라 도시를 명명한 것에 잘 나타난다(가이사랴, 세바스테의 경우). 헤롯은 로마의 상류층과 특별히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 나갔다.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사위인 마르크스 아그립바와는 개인적인 친밀한 관계를 지속시켰으며 디아스포라 유대인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하여 이러한 관계를 적절히 이용하였다. 그리하여 내국의 유대인과 헤롯의 관계는 좋지 못하였으나, 디아스포라 유대인에게는 헤롯이야말로 헬라 세계에서 유대인을 보호하는 실력자로 여겨졌다. 헤롯의 통치 기간 중에 헬라 문화의 물결은 쉽게 유대인 세계로 유입되었다.
백성들의 헤롯에 대한 적개심은 그의 강압적인 통치로 인해 비록 그의 생전에는 크게 표면에 나타나지 않았으나, 그의 다음 세대에는 반란의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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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롯의 후예들 >
헤롯이 죽은 후(주전 4년) 그의 왕국은 세 아들에 의해 분할 통치되었으며, 이들은 로마에 의해 분봉왕으로 인정을 받았다. 헤롯이 죽자 백성들은 과중한 세금을 경감시켜 달라는 청을 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소요가 발생했다. 예루살렘과 유대, 이두매, 남부 사마리아 지역을 맡은 헤롯 아켈라오는 선정을 베풀지 못한 것이 원인이 되어 로마로부터 해임을 당한다(주후 6년). 아켈라오의 후임을 선정하려는 때에 더 이상 헤롯 가문에서 통치자를 세우지 말기를 호소하는 유대인들로 인해 로마는 대안을 마련해야만 했다.
시리아와 합병을 시키자니 유일신 사상의 유대인과 헬라인이 화합을 하지 못할 것은 분명하고, 결국 로마는 직접 유대에 총독을 파견하여 다스리기로 결정한다.헤롯 빌립(주전 4-주후 34)은 갈릴리 북부를 다스리며 가이사랴 빌립보라는 도시를 건설했다. 그의 영토는 주후 37년 이후 아그립바 1세가 다스리게 된다. 갈릴리와 베레아는 헤롯 안티파스(주전 4- 주후 39)가 통치하게 되었다. 갈릴리 호숫가에 도시를 세우고 로마 황제 티베리아스의 이름을 따라서 티베리아라고 불렀다. 남편을 버리고 안티파스와 결혼한 헤로디아스는 아그립바 1세가 로마의 신임을 얻어 빌립이 다스리던 지역을 얻게 되자, 안티파스에게 로마로 건너가 왕권을 얻어오라고 부추긴다. 마지못해 로마로 건너간 안티파스는 왕권을 얻기는커녕 반역죄로 기울로 추방당한다.
아그립바 1세는 부친인 헤롯 대왕에 의해 목숨을 잃은 아리스토불루스의 아들이었다. 그는 로마에서 지내면서 가이우스 갈리굴라와 친분을 맺고, 갈리굴라가 로마의 황제가 된 후 아그립바 1세는 빌립의 영토를 받는다. 주후41년 갈리굴라가 암살 당한 후 아그립바는 글라우디오스가 왕위에 오르는데 공헌하여 헤롯 대왕 이후 처음으로 분봉왕이 아닌 왕으로 임명된다. 그는 헤롯 대왕이 다스렸던 모든 영토를 손에 넣는다. 아그립바 1세가 죽을 당시(주후 44) 그의 아들 아그립바 2세는 17세에 불과했다. 로마는 어린 후계자에게 지배권을 넘겨주지 않았으나, 주후 50년 삼촌 칼키스가 죽은 후 그의 영토를 다스리게 되고 점차 빌립의 옛 왕국과 다른 영토를 얻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