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단의 네얼굴 (2)

"기독교의 역사"에서 주로 다룰 주제는 기독교인들이 저질러온 죄악들,
예를들어 십자군, 마녀사냥, 이단사냥, 루터와 칼뱅의 망언 사례, 인디언과 인디오 학살 등을 역사적 자료를 통해 조명하고,
기독교가 로마에 의해 공인된 과정, 유대인들의 역사 등 다채로운 주제를 포함하게 될 것입니다.

이단의 네얼굴 (2)

오디세이 0 2,831 2002.08.06 12:41


11. 12,13세기의 이단 운동

청교도주의, 천년왕국주의, 신비주의, 이성주의, 이것들은 이단의 네 가지 영속적인 원천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들이 반드시 이단적이라는 말은 아니다. 때로는 교회 내에서 수용되었다. 반드시 급진적이었던 것도 아니다. 때로 보수적인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기도 했다. 그러나 시대와 장소에 따라, 이 시냇물들은 거대한 홍수로 변해 교회와 사회의 모든 구조를 위협하는 상황을 유발하곤 했다. 이 홍수들 가운데 하나는 12세기와 13세기 서유럽에서 발생했고, 또 다른 홍수는 16세기와 17세기의 종교개혁 및 종교전쟁 시대에 발생했다. 이 시대를 고찰함으로써 우리는 이단의 역사적 의의 및 사회적 기여에 관한 결론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12,3세기에 갑작스럽게 등장한 이단 운동에서 주목할 만한 사실은, 그야말로 전 유럽에 널리 확산되었다는 점이다. 비잔티움 제국에서는 이단이 극적인 양상으로 등장했다. 비잔티움 정부는 엄청난 혼란에 휩싸였고, 대주교들은 서로 저주를 퍼부었으며, 수도사들은 그리스도가 인성만을 가졌는가 아니면 신성과 인성을 다 가졌는가를 놓고 격렬하게 충돌했다. 그러나 이들 난해한 이단 사상들은 콘스탄티노플 교회와 알렉산드리아 교회 사이에 이루어진 기나긴 권력 투쟁의 슬로건일 뿐이다. 진정한 중요성을 가진 이단 운동 (성경과 사회에 뿌리박고 거듭해서 등장했던 영속적 이단들) 은 산발적으로 일어났다. 4세기 아프리카에 나타난 도나투스파, 7세기 아르메이아의 바울파, 8세기 콘스탄티노플의 성상파괴운동 등이 여기에 속한다.

그러다 바야흐로 이단파들 전부가 같은 시기에, 그리고 그리스도교 문명권 전역에 걸쳐 등장하기에 이르렀다. 리용의 부유한 상인 왈도는 왈도파 도는 리용의 빈민들이란 집단을 모아, 그리스도 율법을 회복하기 위한 십자군 운동을 역설했다. 롬바르디아에서는 우밀리아티라는 청교도적 분파가 그와 비슷한 복음적인 미덕을 설교하고 실천했다. 움브리아에서는 프란체스코(1182 – 1226)가 청빈을 가르쳤다.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에서는 석학 아벨라르의 제자인 아르날도 디 브레시아(1100 – 1155) 가 교황의 세속 권력을 비난했다. 그리고 파리에서는 1209년에 교황을 사이비 그리스도라고 선언한 예언자가 화형에 처해졌다. 한편 남프랑스에서는 이단파들 가운데 가장 금욕적이고 가장 잘 조직화된 알비주아파가 교횡에 대립하는 조직을 건립함으로써 공공연히 교회에 도전장을 던졌다. 그들은 독자적인 성직자와 평신도를 거느렸으며, 마니교의 이원론에 토대를 둔 독자적인 신학을 확립했다. 이 신학은 악의 세력들과의 어떤 타협도 거부했는데, 악의 세력들 가운데는 로마 교회도 포함되어 있었다.

끝으로, 이 시기에는 교회가 비유적 해석에 의해 그 존재를 근절시켰다고 생각했던 천년왕국사상이 다시 등장했다. 이탈리아 반도의 발가락에 해당하는 지역에서, 학구적인 수도원장 요아킴(1130 – 1201) 은 이 세상 최후의 위대한 시대가 시작하려 한다는 것을 입증해주는 과학적인 예언들을 성경에서 발췌해냈다. 그때가 오면 로마 교회를 포함한 모든 조직들은 소멸하고, 성직자나 성사가 없는 성자들의 왕국이 지상에 건설되어 최후심판 때까지 지속된다는 것이다.

마치 이런 이론들을 예증이라도 하려는 듯이 일련의 메시아들이 등장했다. 대표적으로 두 인물을 들 수 있는데, 먼저 탄헬름은 성직자들의 부도독과 착취를 규탄하는 것으로 시작하여, 자신이 그리스도의 속성을 지니고 있다고 주장하고, 자신의 목욕물을 추종자들에게 성찬용 음료로 나누어주었다. 그리고 에옹은 자신이야말로 왕 중의 왕이자 신의 동반자라고 주장했으며, 브르타뉴 숲을 휘젓고 다니면서 교회와 수도원들을 파괴했다. 그와 같은 광적인 메시아들은 이단 운동이 일어난 모든 시대마다 나타났다. 가장 유명한 인물은 얀 보켈손(1509 – 1536) 이었다. 그는 1534년 뮌스터에서 재세례파 혁명의 지도자가 되어 극심한 혼란을 야기함으로써 수십 년 동안 기성 교회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12. 로마 교황청의 대응

그러한 이단의 만연은 자연히 교황들을 놀라게 했다. 처음에 교황들은 그 운동을 포용하고자 했다. 그들은 요아킴을 격력하면서 그의 예언을 활용하고자 했다. 아르날도를 교수형에 처하고 시신을 불태웠지만, 우밀리아티와 왈도파는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 했다. 하지만 이러한 조치는 우밀리아티에 대해서는 성공을 거두었지만 왈도파에 대해서는 속수무책이었다. 왈도파는 보헤미아의 산 속으로 은둔하여 뒤이어 출현한 이단들과 통합되었다. 그들은 알프스 계곡에 은둔해 모여 살기도 했는데, 정통을 신봉하는 농민들에게 주기적으로 학살을 당하곤 했다. 1655년에 있었던 유명한 학살 사건은 존 밀턴의 소네트에 영감을 주었다.


오 주여, 주의 도살된 성자들의 원수를 갚으소서. 그들이 뼈는
차디찬 알프스에 흩뿌려졌으니,
우리의 선조들이 나무토막과 돌덩이를 섬기던 때부터,
그토록 오랜 동안 순결하게 주의 진리를 지켜온 그들일지니.


로마가 거둔 가장 뛰어난 승리는 프란체스코 신앙 운동을 교회 편으로 끌어들인 일이었다. 프란체스코 교단에는 항상 기성 교회의 포용 정책에 반대하는 영적인 일파가 있었지만, 교단 그 자체는 순치되어 있었다. 성 프란체스코를 다룬 초기 전지 저작들은 프란체스코의 위험스런 교리를 강조했다는 이유로 불에 태워졌다. 그리고 1322년에는 사도적 청빈의 교리 그 자체가 이단으로 단죄되었다. 이 무렵 프란체스코 교단은 부유해지고 강력해져서, 정통, 아니 반동의 편에 굳건히 서 있었던 것이다.

이런 사례들은 로마의 승리를 보여준다. 그러나 외줄을 타듯 아슬아슬한 승리였다. 가장 큰 위험은 13세기 초에 있었다. 이 무렵에는 모든 이단들이 전 유럽에 걸쳐 파괴적인 국제적 연대를 이루었으며, 심지어 영토적 기반을 마련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그 가운데에서도 세력이 가장 강력했던 알비주아파 교회는 부유한 독립 왕조인 툴루즈 백작령의 후원을 받았다. 중세의 가장 위대한 교황인 인노켄티우스 3세 (1160 – 1216) 는 이미 제4차 십자군 원정을 통해 ‘분열적인’ 콘스탄티노플 교회를 그리스도 교회로 복귀시키고, 비잔티움 제국의 영토를 서유럽과 이탈리아의 탐욕스런 군주들에게 분배한 바 있었다. 그런 가가 이번에는 이단 발흥의 위험을 제거하기 위해 이단적인 알비주아파를 상대로 또 다른 십자군 전쟁을 선포하고, 비옥한, 그러나 폐허가 된 랑그독 영토를 북프랑스의 약탈적인 귀족들에게 분배했다. 그후 도미니쿠스가 설립한 새로운 수도 교단이 정통 수호를 위한 돌격대가 되었고, 로마에는 또다시 있을지 모를 대대적인 이단 운동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종교재판소가 설립되었다.



13. 14세기 이후의 이단 운동

300년 동안 이러한 조치들은 성공적인 효과를 가져다 주었다. 그러나 분명 이단은 근절되지 않았다. 이단에 대응하기 위해 취해진 조치들은 교회의 타락을 심화시킴으로써 교회에 대한 저항을 더욱 거세게 만들었다. 1260년 (수도원장 요아킴이 성자들의 지혜가 시직된다고 말했던 그 해) 에는 메시아주의적 청교도들의 무리가 이탈리아에 나타나, 도시들을 휘젓고 돌아다니며 자신들의 몸에 채찍질을 하고, 모든 사람에게 회개를 역설했다. 이 운동은 이탈리아에서 시작하여 다른 나라들로 번졌다. 통제가 불가능해지자 1349년에 교회는 이 운동을 이단으로 단죄했다.

그 후 14세기에 위클리프(1330경 – 1394) 는 청교도적인 롤라드파 반란을 이끌었으며, 잉글랜드 등지의 대중 설교자들은 초대 교회의 평등성으로 복귀할 것을 촉구했다. 위클리프이 사상은 15세기에 접어들어 보헤미아에서 후스(1372 – 1415) 에 의한 혁명 운동을 산출했으며, 이로써 보헤미아는 새로운 국제적 혁명의 영토적 기반이 되었다. 그러나 결국 이 모든 저항들은 진압되었다. 보헤미아 급진파인 타보르파는 알비주아파가 그랬듯이 궤멸되고 말았다. 밀턴의 표현에 의하면, 위클리프의 반란은 “짧은 순간의 섬광과도 같아서, 곧 불꽃이 사그라들고 말았다.” 그리고 급진적 이단들은 대개 신비적 체념으로 끝나곤 했다. 신비주의는 그것이 이단이든 아니든, 종종 패배한 급진주의의 피난처가 되곤 했던 것이다. 보헤미아의 메시아적 타보르파는 진압당한 후 평화적이고 신비주의적인 보헤미아 형제단이 되었다. 마찬가지로, 그 후 메시아적인 독일 재세례파느 평화적이고 신비주의적인 메노파가 되었고, 메시아적인 잉글랜드의 제5왕국파는 평화적이고 신비주의적인 퀘이커파가 되었다.

14세기와 15세기는, 이단은 진압되었으되 아직 교회는 개혁되지 않았던 시기였다. 이 시기는 유럽 신비주의의 전성기였다. 독일인 쥐제(1295 – 1366)와 타울러(1300 – 1361)의 신플라톤주의적 신비주의, 로이스브뤽(1293 – 1381)과 토마스 아 켐피스(1379 – 1471)의 네덜란드 신비주의, 켐프(1373 – 1440)와 롤(1300 – 1349) 의 잉글랜드 신비주의 등이 그것들이다.

16세기에는 새로운 이단 운동이 대대적으로 발흥했다. 과거의 이단 운동에 비추어볼 때, 종교개혁에는 새로운 것이라곤 거의 없다. 다른 점이 있다면 이 시기에는 이단파들이 국제적 연대를 이루어 영토적 기반을 획득하고 널리 세력을 떨쳤다는 것이다. 그들 가운데 일부 이단파들은 압도적 우세를 보였으며, 그 우세를 통해 그들 스스로가 정통이 되고 국가 교회가 되었다. 그러나 다른 이단파들은 그렇지 못했다. 재세례파, 소시누스파, 그리고 다른 10여 종의 영속적 이단파들은 로마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곳에서 프로테스탄트 사회의 갈라진 틈새를 헤쳐가며 투쟁을 계속했다. 때로 그들은 권력 획득을 시도하기도 했다. 재세례파는 1534년에 뮌스터에서, 그리고 1653년에는 다시 잉글랜드에서 권력을 쟁취하려 했던 것이다. 그리나 수적인 열세 때문에 이들 이단파들은 항상 메시아주의적 교리의 지원을 받아야 했고, 그 결과 광신자들의 지배하에 들어가 파멸하고 말았다. 그들은 대개의 경우 기존 사회로부터 도피하여, 언젠가 자신들의 때가 올 것을 기다리며 사적인 영역에서 복음주의적 덕성을 계발했다.

14. 이단과 경제성장

그렇다면 과연 그들의 때가 도래했는가? 나는 어떤 의미에서 그들의 때가 이미 왔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생각보다 근대 세계는 이단파들로부터 휠씬 큰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정확히 얼마만큼이나 영향을 받았는지는 불분명하다. 그리고 모두가 내 주장에 동의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근대 사회, 유럽에 그 기반을 두고 전 세계를 변화시킨 이 비범한 사회가 상당 부분 이단파들에 의해 창조되었다고 믿는다. 물론 그들이 의도적으로 그것을 창출한 것은 아니다. (그들이 근대 사회를 보게 된다면 아마 크게 놀랄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대 사회는 그들이 이룬 것이다. 분명 정통파의 작품은 아니다.

정통파의 세계를 보라. 콘스탄티누스 시대로부터 그리스도교의 정통파는 로마 세계와 밀착되어 있었는데, 이 로마 세계는 강고하고, 서열화되어 있었으며, 관료들이 장악한 세계였다. 그리스도교 정통파는 바로 그 세계에서 자신의 성격을 획득했고, 이단파들은 교회의 그러한 성격이야말로 그리스도의 정신을 배반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암흑시대에 교회의 결속력은 사회에 긍정적 기여를 했다. 그러나 경제가 크게 성장한 12세기에 이르면서 긴장 상태가 나타났다. 그러한 긴장은 특히 경제 활동이 왕성한 지역, 즉 롬바르디아, 라인란트, 플랑드르, 보헤미아, 그리고 부유한 상업 도시인 랑그독 등지에서 나타났다. 주목할 것은, ‘원시 그리스도교’ 공동체들은 대체로 직물 노동자나 광부들의 공동체였다는 점이다. 알비주아파는 직조공파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져 있었다. 플랑드르 이단파들도 대부분 직조공들이었다. 우밀리아티는 밀라노의 직물 공장에서 일했다. 왈도파는 한 직물 상인이 주도했으며, 그 신도들은 리용에서 충원되었다. 타보르파는 대부분 보헤미아 광부들이었다. 중부 유럽 이단파의 또 다른 중심지인 작센과 실레지아는 독일의 광산지대였다.

직물 산업과 광산업은 중세의 산업들 가운데 가장 규모가 컸다. 어떤 측면에서 12세기 이단파들의 국제적 연대는 봉건 사회의 각종 제도에 대한 평신도의 총체적인 저항으로 파악할 수 있다. 그리고 저항의 실질적인 세포 역할을 한 것은 유럽 내에 산재된 소규모의 단위 작업장들이었다. 기성 교회가 승리를 거두었을 때 과연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봉건적 관료 구조는 두 배, 네 배로 강화되어 유럽의 부와 인재를 더 많이 흡수했고, 그것은 유럽 경제에 무거운 짐이 되었다. 교황에 의한 반동 종교개혁이 일어났던 1300년에서 1450년 까지의 시기는 전반적으로 경제 쇠퇴의 시기였으니, 이 시기는 중세 전성기에 만연했던 장밋빛 전망이 무위로 끝나고 말았음을 증명해 주었다.

16세기 종교개혁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말을 할 수 있다. 종교개혁의 이단파들은 대개 경제적으로 앞선 지역에서 나타났다. 그들의 지도자들 가운데 상당수는 상인 계급 출신이었다. 가장 완강했던 순교자들은 잉글랜드, 플랑드르, 라인란트, 그리고 독일 광업 도시의 재세례파였다. 기성 교회가 개혁파에 대해 승리를 거두었을 때, 그것은 또다시 그 ‘관료제적’ 구조를 두 배나 강화시켰다. 13세기의 카톨릭 교회가 새로운 교단들(탁발 수도교단) 및 로마 종교재판소의 힘을 빌어 이단파에 대해 승리를 거두었던 것과 같이, 16세기의 카톨릭 교회는 새로운 교단들(예수회) 및 에스파냐 종교재판소의 힘을 빌어 이단파를 제압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동일한 것이었다. 1300년에서 1450년까지의 시기가 12세기 유럽인의 낙관적 기대를 무너뜨린 경제적 침체기였던 것처럼,  1600년에서 1750년까지의 시기는, 이단파들이 추방당한 유럽 국가들의 경우에 있어서, 르네상스의 화려한 전망이 깨진 경제적 침체의 시기였던 것이다.

13세기와는 달리, 16세기의 반동 종교개혁은 완벽하지 않았다. 유럽 상당 부분 (프로테스탄트 유럽) 에서 실패하고 말았다. 그리고 반동 종교개혁이 실패한 프로테스탄트 국가들에서는 경제적 팽창이 이어졌다. 그리고 프로테스탄트 국가들 내에서도, 경제적 성장은 정통파에 의해서라기보다는 이단파들, 특히 카톨릭 국가들에서 쭃겨난 이단파들에 의해 유지되고 있었다. 루르의 공업을 확립한 것은 플랑드르에서 쫓겨 온 칼뱅주의자들과 메노파였다. 잉글랜드의 산업혁명을 이룩한 것은 침례파와 퀘이커파였다. 동부 독일의 공업화를 시작한 것은 작센의 경건주의자들이었다. 그리고 오늘날 세계 최대 공업 국가인 미국의 국가 형성은 유럽 전역으로부터 이주해 온 이단파들에 힘입은 것이었다.



15. 이단과 과학진보

우리가 이단파들에게 은혜를 입은 것은 이것만이 아니다. 과학의 진보 역시 정통파보다는이단파에 힘입은 것이었다. 역사의 모든 단계에서 정통파는 지적 사고를 억누르는 경향이 있었고, 새로운 진보적 사고는 대담한 이단파 또는 신비주의자들의 몫이었다. 그들은 다행스럽게도 문자적 교의의 구속에서 벗어나 있었기 때문이다. 신플라톤주의적 신비주의 (당시에는 아직 이단이었다.) 는 로마 제국 말기의 과학 발전에 있어서 하나의 강력한 힘이었다. 그리스도교라고 하는 형태를 가지게 되자, 신플라톤주의는 중세 말기 스콜라 신학자들이 만들어낸 진부하고 철두철미한 지적 체제를 부수는 데 한층 강력한 힘을 발휘했다.

종교개혁 시대에 신플라톤주의적 신비주의자들이 쓴 글의 상당수는 우리에게 잘 납득이 되지 않는다. 16세기 스위스 외과 의사였던 파라켈수스의 저작, 17세기 실레지아의 신비주의자 신발 제조공이었던 야콥 뵈메의 글은, 우리가 볼 때는 뜻 모를 횡설수설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새로운 과학 개념들은 형이상학적 비전으로부터 떠오르는 것이며, 일단 새로운 과학이 성립되고 나면 과학자들은 그러한 비전을 폐기해버렸다. 뉴턴과 그 시대의 많은 과학자들은 원래 이단 신비주의자였다. 뉴턴은 야콥 뵈메로부터 영감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잉글랜드 이신론은 신플라톤주의자들과 퀘이커 교도들의 신비주의로부터 탄생했는데, 그것은 18세기 계몽사상의 모태가 되었다. 18세기 말에 생물학 발달에 영감을 준 것도 바로 신플라톤주의자였다.



16. 소시누스파

종교개혁 시대의 모든 이단파들 가운데 가장 이성주의적이었던 소시누스파는 우리의 입장에서 볼 때 신플라톤주의보다 휠씬 친숙한 느낌을 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역시 이단에 속했다. 소시누스파의 진정한 창시자는 에라스무스였다. 그는 신약성서 가운데에서 삼위일체 교리를 입증하는 근거가 되는 유일한 구절이 후대에 조작돼 삽입된 것임을 처음으로 증명해냈다. 그는 1516년에 죽었다. 소시누스파는 신이 세 분이 아니라 한 분이라는 명백한 결론을 끌어 냈으며, 그 결과 순전히 지적인 측면에서 해묵은 아리우스 이단을 부활시켰다. 그들은 또한 교회의 폐지와 신앙적 관용을 옹호했다. 국가 교회들 (프로테스탄트 및 카톨릭 양측 모두) 은 그러한 기과한 사상에 대해 경악을 금치 못했고, 소시누스파는 양측 모두로부터 핍박을 당했다.

그들은 처음에는 폴란드에서 피난처를 구했다. 그후 예수회가 폴란드로 오자 다시 홀란드에 피난처를 정했다. 홀란드의 소시누스파는 17세기 들어 잉글랜드에 영향을 주었는데, 그들은 심지어 잉글랜드 국가 교회 내에도 커다란 영향력을 미쳤다. 뉴턴의 경우, 뵈메의 제자인지 여부는 확실치 않으나 분명 소시누스파였다. 존 로크(1632 – 1704)도 마찬가지였다. 17, 18세기에 소시누스파는 잉글랜드 비국가교도들의 지적인 지도자로 간주되었다. 마침내 국가 교회마저도 그들에게 휘말려들었다. 18세기 이후 대부분의 프로테스탄트들은 신약성서에 언급된 삼위일체 기사에 관한 한 에라스무스의 견해가 옳다고 믿었다. 그러나 교황도, 캔터베리 대주교도, 루터파도, 칼뱅주의자도, 그리스 정교회도, 아직 하나님이 셋이 아니라 한 분이라는 좀더 급진적인 ‘소시누스적’ 결론에 이르지는 않고 있다. 그것은 지금으로서도 매우 어려운 일일 것이다.



17. 이단과 예술

이상이 유럽 이단파들의 오랜 전통이 우리에게 기여한 것들이다. 이단파들이 산업 사회, 과학 발달, 국가 교회 제도의 폐지, 종교적 관용 등을 직접 이끌어 낸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그 견인차 구실을 했던 것만은 틀림없다. 그러나 정통파를 선호하는 사람들은 적어도 한 가지만은 공박할 수 있다. 이단파는 예술에 대해 아무것도 한 일이 없다고. 그 한 가지 이유는 물론 경제적인 것이다. 예술에 소용되는 재력과 후원 능력을 가진 것은 국가 교회일 수 밖에 없었다. 박해 받던 비판자에게 그런 능력이 있을 리 없었다. 그리고 이러한 경제적 현실은 하나의 도덕적 태도로 굳어지기도 했다. 본질적으로 강한 지적 성향을 보였던 이단파는 감각에 대한 호소를 경멸했다. 더욱이 이단파의 두드러진 특징을 형성한 청교도 정신은 예술 활동을 적극적으로 거부했다. 이단파의 눈으로 볼 때, 장엄한 교회당은 교회의 부와 타락을 상징해 줄 뿐이었다. 종교적 그림들은 복음 정신을 왜곡시킨 것이었고, 조각상들은 파괴해 마땅한 ‘죽은 형상’이요 우상일 뿐이었다.

에라스무스는 화려한 체르토사 디 파비아 수도원을 보고 거기에 든 비용을 모두 가난한 사람들에게 써야 했다고 외쳤다. 츠빙글리는 호화찬란한 아인지델른 수도원을 보고는, 경전과 자비보다는 장엄미와 마술적 의식을 좋아하는 부유하고 타락한 교회에 대해 증오를 드러냈다. 잉글랜드의 청교도들은 조각상들의 목을 베어내고, 스테인드 글래사를 박살냈으며, 루벤스의 그림을 강에 던졌다.

2,000년에 걸쳐 생산된 이단파의 예술적 산물들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들이다. 그와 대조적으로, 에드워드 기번의 말처럼 ‘항상 이성의 적이었던 미신적인 카톨릭’은 종종 “예술의 후원자 노릇”을 했다. 오직 부유한 국가 교회 (그것은 양상 뿐만 아니라 감각에서도 호소했다.) 만이 조토, 안젤라, 그레코, 루벤스 같은 예술가들을 후원하거나 고용할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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