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의 역사"에서 주로 다룰 주제는 기독교인들이 저질러온 죄악들, 예를들어 십자군, 마녀사냥, 이단사냥, 루터와 칼뱅의 망언 사례, 인디언과 인디오 학살 등을 역사적 자료를 통해 조명하고, 기독교가 로마에 의해 공인된 과정, 유대인들의 역사 등 다채로운 주제를 포함하게 될 것입니다. |
이종록 목사 (한일장신대 구약학 교수)
구약과 탈식민주의
고대 이스라엘의 역사를 다룬 구약성경만큼 탈식민주의1)를 연구하는 데 적합한 책은 없을 것이다. 고대 이스라엘은 끊임없이 주변 제국주의자들에 의해서 압제·수탈당하는 식민지적 역사였다. 그들은 오랜 세월 동안 이집트에 의해서 압제를 받았고(이스라엘은 이집트의 정치적 영향에서 벗어난 적이 없었다.), 주전 722년에 신앗시리아 제국에 의해서 북왕국 이스라엘이 멸망당하고, 주전 587년에 신바빌로니아 제국에 의해서 남왕국 유다가 멸망당했으며, 페르시아 제국에 이어서 고대근동을 장악한 헬라와 로마제국에 의해서도 억압을 받았고, 오랜 세월 동안 나라를 이루지 못하고 살아야 했다. 이런 이스라엘 역사를 담고있는 것이 구약성경이다. 그렇기 때문에 구약성경을 기록하고 편집하는 것 자체가 탈식민주의적이고, 또 구약을 연구하는 것도 탈식민주의적이라고 할 수 있겠다.
구약성경과 탈식민주의의 관계를 다룰 때, 논리적으로 세가지 작업이 가능하다. 하나는 구약성경에 반영되어 있는 식민주의적 요소를 찾아내서 비판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구약성경에 나타나는 탈식민주의적 요소를 찾아내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은 구약성경을 식민주의적으로 해석하고 사용하는 것, 즉 구약성경 이후에 이루어진 식민주의적 구약성경이해와 연구를 지적하고 비판하는 것이다. 이 논문에서는 마지막 작업을 택했다.2) 그러면 먼저 탈식민주의 작업이 무엇인지 간단하게 살펴보고 넘어가도록 하자.
탈식민주의가 분석해야 할 대상은 경제, 문화, 정치 등의 다방면에 걸쳐 다른 민족, 인종, 문화 사이에 (때로는 그 자체 내에서) 형성된 지배와 종속 관계로서, 이는 근대 유럽의 식민주의와 제국주의 역사에 그 뿌리를 두고 있으면서 동시에 현재의 신식민주의 체제하에서도 명백히 지속되고 있다.3)
탈식민주의는 식민지적인 시각과 영향에서 벗어나려는 것인데, 제국주의의 식민지 지배를 통해서 형성된 중심부와 주변부의 주종관계를 깨뜨리고, 주변부가 중심부와 동등한 위치로 부상하는 것을 의미한다. 주변부는 더 이상 종속적인 위치가 아니고, 비평적인 반성과 명료화를 위한 창의적인 공간이다.4)
그런데 "근대 유럽의 식민주의와 제국주의 역사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는 구절이 말하듯, 탈식민주의 이론이 주로 유럽 제국주의에 의해서 침략당하고 지배당한 지역을 다루기 때문에,5) 유럽제국주의가 아닌 일본제국주의에 의해서 침탈당한 한국은 제외될 수 밖에 없다는 문제가 있다.
<포스트 콜로니얼>이라는 용어는 식민주의 시기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제국주의적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던 모든 문화를 포괄하는 통칭적 개념으로 사용된다. 왜냐하면 <포스트 콜로니얼>이라는 용어는 유럽의 제국주의적 침략이 촉발한 일련의 유럽적 야심을 역사적 과정을 통해 반영하는 용어일 뿐만 아니라 근자에 출현한 새로운 <통문화적 비평 cross-cultural criticism>과 그 담론의 구성적 특성을 드러내는 데 가장 적합한 용어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이 저작은 유럽의 제국주의적 지배와 그 지배가 동시대 문학에 끼친 영향을 주요 관심사로 삼고 있다. 그러므로 아프리카 국가들과 호주, 방글라데시, 캐나다, 카리브해 국가들, 인도, 말레이시아, 말타, 뉴질랜드, 파키스탄, 싱카포르, 남태평양의 섬나라들 그리고 스리랑카 같은 국가들의 문학이 모두 포스트 콜로니얼한 문학의 범주에 속하게 된다.6)
여기서 보는 대로, 일반적으로 '탈식민주의'하면 유럽제국주의와 그 식민지의 관계로 이해한다. 유럽의 식민지는 아시아와 아프리카,7) 그리고 아메리카, 오세아니아 등 모든 대륙에 걸쳐 있었기 때문에8) 대개의 경우 탈식민주의는 유럽제국주의적인 영향, 유럽에 종속적인 상황에서 벗어나려는 데 목적을 둔다.9) 그런데 우리는 유럽이 아닌 일본에 의해서 식민지화된 경험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일반적인 탈식민주의 논의에서 한걸음 물러 설 수 밖에 없다 .10) 물론 넓게 보면, 한국교회가 초기부터 신학적으로 미국의 영향을 상당히 많이 받았고, 아직도 여러 가지로 종속되어 있기 때문에, 미국이 우리를 직접 지배하지는 않았다고 해도, 신식민주의적(neocolonial) 관점에서 미국과의 관계를 다룰 수 있을 것이다. 미국선교사는 1945년 이전에 한국에 온 외국 선교사 총 1529명 가운데 1059명으로 69.3%를 차지했다.11) 이런 점에서 미국선교사들이 한국 교회에 주도적인 영향을 미쳤을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미국의 선교운동은 기독교 문화와 결합된 백인우월주의와 대아메리카 구상에 입각한 미 국력의 대외 진출 의지가 결합되어 종교적 정열로 표출된 것이다"12)는 점에서도 미국 제국주의와 한국의 관계를 탈식민주의적으로 다룰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들의 신앙유형과 그들의 특정 신학전통만을 받아들이도록 교육시킨 것이다. 그들의 신학사상과 다른 교리나 성서해석은 아예 위험한 것으로 아니면 이단으로 정죄하고 배격하였던 것이다. 이런 그들의 신학적 편식이 결과적으로 한국 교회의 신학부재의 현상을 가져왔고 다른 신학사상에 대한 의구심과 자유로운 신학연구 분위기를 처음부터 봉쇄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리하여 초기 선교사들의 신학이 마치 한국 교회의 신학인 양 착각하고 있는 사람들도 있는 것이다.13)
이처럼 미국 선교사들이 한국교회에 미친 영향은 긍정적인 측면에서나 부정적인 측면에서나 지대하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는 미국 선교사들이 한국에 미친 영향을 냉철하게 검토해야 하고, 그들이 한국에 와서 어떤 일들을 했는지, 그들이 얼마나 제국주의적인 인물들이었는지도 알아야 할 것이다.14)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이 경험한 직접적인 식민지배는 유럽이나 미국이 아닌 일본제국주의에 의한 것이다. 한국은 같은 동양인, 그것도 인접한 국가에 의해서 식민지배를 받았기 때문에, 에드워드 사이드가 말하는 '오리엔탈리즘'15)도 일본과 한국과의 관계를 다룰 때에는 적합하지 않다.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오히려 일본이 탈서구화를 외치기 때문이다. 그리고 신학적 탈식민주의를 말하는 수기타라자의 저작들16)이나 서구 신학계에서 다루는 탈식민주의17)도 유럽제국주의와 비유럽 식민지의 관계에서 탈식민주의를 다루기 때문에 우리 경우에 잘 맞지 않다. 이런 이유로 우리의 식민지적 경험은 일반적인 탈식민주의 논의의 대상이 되지 못하고, 그래서 우리의 논의는 일반적인 탈식민주의 논의에 비해 열등해질 수 밖에 없다. 문학적으로도 일반 탈식민주의 문학에 관한 논의에서는 주로 영문학과의 관계성을 다루는데, 한국문학, 특히 근대서사에서 나타나는 식민성은 일본과의 관계에서 다루어야 하기 때문에18) 역시 주류 탈식민주의 문학 논의에서 벗어날 수 밖에 없다. 이런 양상은 종교적인 측면에서는 더하다. 그렇기에 일반적인 탈식민주의 논의와는 별개로, 우리는 자체적으로 탈식민주의 논의를 해야 한다. 이 논문은 그것을 위한 한 시도이기도 하다.
일본제국주의와 제국주의적 일본교회
일반적인 탈식민주의 논의가 우리 경험에 부적합하다는 것은 일본이 한국을 지배하면서 반서구적인 태도를 보이고 또 동양적인 주체성과 연대성을 강조했다는 사실에서도 입증된다.19) 종교적으로 일본은 한국을 식민화하는 과정에서 미국과 영국을 비롯한 서구열강들을 적절히 이용했는데, 나중에는 선교사들을 배격하고 동양적이고 일본적인 기독교를 세우고자 했다.20) 이런 정책은 한국교회에 즉각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1918년 황해도 봉산에서 김장호 목사를 중심으로 '조선기독교회'가 창설되었다....이스라엘 백성의 홍해 도하를 바닷물의 간조현상으로 해석하는 등 당시 서구 자유주의 신학적 성경해석을 그대로 채용하여 설교하였다......김장호 목사의 '조선기독교회'는 성경에 대한 미신적 해석을 반대하며 그같은 신학과 신앙을 주입하는 선교사들에 대한 비판의식이 강한 교회였다..... 조선기독교회가 초기에는 이처럼 신학적 자유주의와 '동양적 기독교' 수립에 초점을 맞추었으나 1920년대 중반 이후 '반(反) 선교사' 기치를 강하게 내세우기 시작했다. 이같은 반선교사 취지가 1930년대 후반 이후 일제의 종교정책에 유합되면서 1940년대에는 김장호가 일제로부터 '어대전기념장'(御大典紀念章)을 수여받기까지 조선기독교회는 '친일적' 교회로 전락하고 말았다.21)
일본은 본국 뿐만 아니라 한국에도 일본기독교를 건설하고자 했으며, 서양 선교사들과 그들의 영향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그리고 한국교회가 서구선교사들에 대해서 미묘한 감정을 갖고 있음을 간파하고 그것을 이용해서 한국교회로 하여금 반선교사적인 태도를 취하도록 유도했다.
기독교에 대하여는 종파가 많고 신교구가 분산되어 있어 중앙집권화가 곤란하기 때문에 「미국선교사의 태도에 반감을 품고 있는 자」를 이용해서 「순연한 독립교회를 설립케 하고 민간유지(내지인)의 심복자로 하여금 이를 조종하게 해서 상당한 편의와 원조를 제공하여 점차 그 확장을 도모케 하여 장래는 총독부 문화정책선전의 1기관으로 만드는」 방침을 취하였다. 이로써 외국인 선교사의 영향력을 배제하였으며 또한 어용적 「일본조합교회」를 확장 동원함으로써 민족주의자의 배제를 도모하였다.22)
김장호 목사처럼, 서구 선교사들에 대해서 비판적이던 한국교회 지도자들이 여기에 동조했다. 서구에서 온 선교사들이 성경해석을 비롯해서 거의 모든 면에서 보수적이었고 상당히 권위적이었기 때문에, 선교사들에 대해서 부정적인 견해를 가진 사람들이 있었는데, 이런 반선교사적인 성향이 일본기독교수립이라는 일본제국주의 정책과 맞아떨어진 것이다. 이런 일제의 입장은 한국교회 지도자가 쓴 글에서도 선명하게 나타난다.
캘비니즘을 양기하고, 메소디즘을 양기(揚棄)하고, 기타 외래의 교파적 사상을 파기하면서 여기에 새로운, 이 국토에서 돋아난 기독교를 실현하겠다는 정신이 없이는 기독교회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재출발이 되지 않는 것이다......현재의 조선에 진짜 기독교는 없다. 죽은 정통주의든가, 무신앙의 모더니즘이든가, 비기독교적 신비주의든가 그 중의 어느 것이며, 성서적 신앙을 현대에 살린 진짜 기독교는 없는 것이다......조선의 기독교회는 바르고 강한 종교를 낳기 위해서 이 국토에서 재생하고, 재출발하지 않으면 안된다. 조선의 기독교는 미영 선교사가 남겨놓고 간 골동품으로써 존재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현재적(現在的)으로 변모하고, 재생하고, 재출발하지 않으면 안된다.23)
이런 류의 발언이 갖는 정치적인 의도를 고려하지 않는다면, 매우 주체적인 신앙을 수립하려는 탈식민주의적인 의지로 볼 수도 있다. 기독교를 동양적인 종교로 규정함으로써, 서구일변도에서 벗어나려고 한 것은 우리가 현재 논의하는 탈식민주의적인 시각에서 주목할 만하다.
물질문명은 서양에서 더 발달되었고 정신문화는 동양에서 시작되었으니 종교의 대부분이 동양에서 발원(發源)한 것이 사실이다. 속칭하기를 기독교는 서양 종교라 하지만 기독교도 아시아 서변 유태국에서 발상하였으니 구미의 소산은 아니다. 다만 기독의 복음이 동방으로 먼저 전파되지 않고 구미로 돌아서 극동으로 왔기 때문에 도중에서 서양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그 형식을 옷 입고 와서 얼른 보기에 서양식 종교로 알게 되었지만 기실은 그렇지 아니(不然)하다.24)
아직도 기독교와 성경을 서구태생으로 잘못 아는 사람들이 많은 상황에서, 이런 주장은 매우 정확하며, 서구에 의해서 형성된 동양인식, 즉 오리엔탈리즘을 탈피하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일제가 동양적 기독교 건설을 표방한 배후에 일본제국주의의 간악한 지배야욕이 감춰져 있었다는 사실이다. "조선감리교단 혁신안 실천 요의"에는 이런 내용이 나온다.
과거 2년간 미 영계의 사람들이 어떻게 감리교회의 혁신이나 신학교 합동을 방해했는지는 사실이 증명한다. 그 사람들에 대하여 감리교단은 별도로 적당히 처치해왔는데 그 주요한 사람은 양주삼(대명처분)을 위시하여 윤치호, 류형기 (파면처분), 정일형 (휴직), 김종만 (사직), 김활란, 개성의 우상용 김준옥 (사직), 평양의 이환신(파면처분), 배덕영(대명처분) 등으로 모두 미국계의 사람들이다. 지금도 저들은 비밀리에 한 무리가 되어 상통하면서 교단 혁신의 진행에 방해할 수단을 강구하고 있다. 아울러 그 반면에 혁신교단을 지지하고 열심히 활동하는 사람들에는 일본에 유학한 사람이 많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그 주요한 사람을 들면 교구장 중에 평양의 김종필·정지강, 공주의 안성호, 인천의 김응태, 진남포의 전진규 또한 목사 중에 평양의 정달무·박태진·박병철·전영택 등이나 경성의 김수철·심명섭·김영섭·박연서·홍현설 등은 모두 일본계의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다. 그밖에도 교단혁신에 협력하는 대다수의 사람은 모두 조선 안에서 교육받은 사람이요 미·영계에 유학한 자는 적다. 이로 보면 교단 혁신을 방해하는 자는 미·영계의 사상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이 증명될 것이다. 그러므로 감리교단에서는 금후 혁신을 방해하는 미·영계 사람들은 철저하게 배제하여 미·영사상에 근절을 꾀하며 일본정신 하에 재교육하여 일본적 기독교의 건설에 매진코자 한다.25)
일제는 종교가 갖는 영향력을 알고 있었고, 또 기독교가 한국민에게 미치는 영향력을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한국식민지배를 위해서 교회를 이용하려고 했다. 일제는 3·1운동 이후 1920년에 친일파를 조직해서 이용하는 계획을 세우고 실행했는데, 그 계획 가운데는 친일종교인들을 양산해서 친일단체를 조직하는 것도 들어있다.
1) 친일분자를 귀족, 양반, 유생, 부호, 실업가, 종교가 등 속에 침투시켜 그 계급과 사정을 참작해서 각종의 친일단체를 조직할 것.
2) 종교적 사회운동을 이용하기 위하여 寺刹令을 개정하여 불교 각 종파의 총본산을 「경성」에 두고 그 관장 내지 원조기관의 회장에 친일분자를 배치하는 동시에 기독교에 대해서도 상당한 편의와 원조를 제공할 것.26)
그리고 일제는 '일본적 기독교'를 제국주의 건설에 정치적으로 이용했고, 일본교회도 거기에 동조했다. 일본의 모든 교파들이 한국의 일본화, 즉 동화정책을 지지했던 것은 아니지만, 모든 교파들이 한일합방을 인정했다.27) 특히 일본 조합교회28)는 한국의 식민지화를 열렬히 지지했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한국에 와서 선교활동을 하면서 한국의 식민지화를 적극적으로 도왔다.
3·1 독립운동의 진압을 강행한 조선군(조선주둔 일본군) 참모부가 1919(大正 8)년 7월 14일에 제출한 「소요의 원인 및 조선통치에 있어서 주의해야될 점과 군비(軍備)에 대하여」의 제2장 12에 보면 「예수교 일본 조합기독교회로 하여금 적극적 활동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번 소요에 있어 동교회(同敎會)에 속하는 교회원 2만인 중 소요에 가담한 사람이 한사람도 없는 이것으로 보아도 가히 종교의 힘이 위대함을 알 수 있다」라는 최상급의 찬사를 보냈다.29)
일제는 한국민의 친일성향을 고취하고 한국민을 황민화(皇民化)하기 위해서 종교를 적극적으로 이용했고, 이미 어용화된 일본교회도 여기에 적극 협조했다. 한국교회가 결국 굴복하고 만 신사참배도 일본교회의 협조 아래 이루어진 한국민의 황민화를 위한 정책이었으며, 이를 위해 한국교회를 무력화(無力化)시키려는 의도에서 강행되었다.
선교사들의 비정치화 또는 친일화에서 나타나는 제국주의
일제는 1930년대 후반에 '동양적 기독교' 수립을 운운하며 서양 기독교 및 선교사 배척운동을 추진하였고, 결국은 1940년대 한국 기독교를 일본 기독교에 '병합'시켰다. 이같은 면에서 1920년대 반선교사운동이 "일제에 대하여는 한국 기독교의 친일화를 유도할 수 있는 통로를 제공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민족운동으로서의 한계점을 갖는 것"이란 지적도 타당하다고 하겠다. 그러나 1920-30년대 한국교회의 선교사 비판 내지 배척 운동은 한국 기독교인들의 '자립'과 '자치'운동의 측면에서 해석하는 것이 온당할 것이다. 복음 수용 1세대가 지나면서 주체적인 한국 기독교를 수립하려는 한국 기독교인들의 의지에 대해 일부 선교사들이 근시안적인 관점에서 이를 불순한 태도로 보았던 것이고 그 때문에 의식있는 한국 기독교인들에게서 선교사 비판과 배척 발언이 야기되었던 것이다.30)
선교사들에 대한 한국민의 반감(反感)은 초기부터 있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선교사들이 보여주는 신학적 종속화 시도, 즉 그들이 갖고 있는 제국주의적이고 오리엔탈리즘적인 시각에서 비롯되었다.31) 선교사들의 공로를 부정할 수는 없지만, 그들이 끼친 악영향도 부정할 수 없다. 선교사들이 들어와서 활동하던 시기가 극히 혼란스러운 시대였기 때문에, 선교사들이 어떤 정치적인 입장을 보이는지가 매우 중요했다. 그것이 한국교회의 가치관 형성, 특히 성경해석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이처럼 선교사들이 한국교회신학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었음에도, 선교사들은 신학적인 폐쇄성, 연소(年少)함과 경험부족,32) 그리고 교파주의로 인한 근시안적인 시각으로 인해서 한국과 일본의 관계를 충분히 고려하지 못했으며, 결국 일본의 정책에 휘둘릴 수 밖에 없었다. 이것은 일제와 선교사의 관계를 살펴보면 알 수 있다.33)
1901년 9월 장로회 공의회에서 결의한 "교회와 정부 사이에 교제할 몇 조건"34)은 지교회와 교우에게 편지형식으로 전달되었는데, 교회와 국가의 관계에 대해서 제시한 성경구절들은 로마서 13장 1-7절, 디모데전서 2장 1-2절, 베드로전서 2장 13-17절, 마태복음 22장 15-21절, 마태복음 17장 24-27절, 요한복음 18장 36절이었다. 선교사들은 이 성경구절들을 정교분리를 뒷받침해주는 본문들로 제시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 결의는 성경을 어떻게 해석할지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그리고 선교사들이 소용돌이치는 국제정세와 국내정치 상황에서 한국교회를 보호하기 위해 이런 결정을 내렸다고 해도, 이 결정이 내려질 때는 아직 한국인 목사가 한 사람도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모든 결정은 선교사들에 의해서 독단적으로 내려졌으며, 그 결정의 결과에 대해서 선교사들의 책임이 그만큼 막중하다는 사실도 알아야 한다.35)
선교사들이 보이는 정교분리적인 입장은 1907년 신앙대부흥운동에서 뚜렷하게 나타났으며, 이로 인해 "이 신앙 대부흥운동은 한국이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하는 과정에서 한국 민족으로 하여금 스스로 민족의 문제를 외면하도록 하는 원인이 되었다"36)는 지적을 받는다. 신앙대부흥운동의 핵심 인물이었던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 블레어(William N. Blair)는 명확하게 정교분리적인 입장을 보였다.
우리는 성령의 세계 밖에는 한국 형제들 앞에 놓인 시련을 이길 힘이 없다고 느꼈다. 한국 교회는 분리(分離)와 부조화의 죄를 뉘우칠 필요가 있으며 참 교인이 된다는 것은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데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한국 교회가 하나님의 거룩한 비젼을 가지고 비통한 영혼들이 이미 소망이 없는 나라 일을 잊고 주님과의 높은 인격적 관계를 맺어야 할 것을 느꼈다37)
이렇듯 선교사들이 애초부터 정교분리적인 입장을 취했기 때문에 그들은 대체로 한국과 일본의 관계에서 친일적인 성향을 보일 수 밖에 없었고,38) 일제의 회유정책39)에 쉽게 빠져들었다. 그런데 이런 선교사들의 태도는 애국과 충정으로 가득했던 초기 한국의 기독교인들과는 거리가 멀었다.40) 한국교회가 처음부터 현실문제를 회피했던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한국교회는 태동 당시부터 민족적이고 애국적이었다. 그 한 예로, 1896년 9월 2일 고종 황제의 탄신기념일을 맞이해서 새문안교회는 '황제탄신축가'를 만들었다.
1. 높으신 상주(上主)님 자비론 상주님 긍휼히 보소서
이 나라 이 땅을 지켜 주옵시고 오 주여 이 나라 보우하소서
2. 우리의 대군주 폐하 만세 만세로다 만만세로다
복되신 오늘날 은혜를 내리사 만수무강케 하여 주소서
3. 상주의 권능으로 우리의 대군주 폐하 등극하셨네
이 나라 이 땅은 영세불멸하겠네 대군주 폐하께 만만세로다
4. 상주님 은혜로 이 나라 독립하였네 우리들
백성은 상하반상(上下班常) 구별없이 오주여 상주님 기도하겠네
5. 홀로 한분이신 만왕의 왕이여 찬미 받으소서 상주님 경배
하는 나라와 백성들 국태민안 부귀영화 틀림없이 받겠네41)
한국기독교가 보여주는 이런 민족적인 성향은 기독교인들이 주도적으로 참여한 3·1운동에서 명백하게 드러난다. 3·1 운동에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참여했고, 기독교 지도자들이 이 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끌어갔다는 사실은 1901년에 선교사들이 내린 교회의 비정치화 결의가 한국교회에 그대로 수용되지는 않았음을 보여준다.
3·1운동은 일제의 무단적 식민통치를 근본에서부터 붕괴시키고, 한민족의 독립의지를 온 세상에 알린 거족적인 항일민족 독립운동이었다. 기독교인들이 이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된 것은 구한말 이래의 기독교 민족운동의 전통과 민족구원을 열망하는 애국적 신앙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성서를 통하여 정의·자유·평등·해방 등의 이념을 체득한 기독교인들은 비기독교국가인 일본의 지배를 받게 되자 그들의 기만적인 정교분리정책에도 불구하고 성서를 토대로 한 신앙의 기초 위에서 항일민족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를 통하여 민족의 고난에 동참하는 신앙의 전통을 수립하였다.42)
기독교인들은 3·1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함으로써 대중적인 지지를 얻었고, 이를 통해서 많은 사람들을 교회로 끌어들일 수 있었다. 물론 선교사들이 3·1 운동 과정에서 한국교회를 위해 많이 힘썼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이 운동을 주도하거나 지원하지 않았고, 오히려 비정치화를 촉구했었기 때문에,
선교사들은 놀라고 있었다. 자신들의 지시(?)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한국교인들이 자발적인 민족신앙을 표현하는 데 있어 조금은 기이한 시각을 가졌다. 그리고 주일날의 국기게양은 주일이 지닌 '나라를 위해 기도하는 날'이라는 한국인들의 개념을 파악하고 그들의 나라에 대한 애틋한 존경까지를 파악하고 있었다. 이러한 초기의 입장은 한일합병기를 전후해서 심각한 우려의 입장으로 바뀌었고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1907년의 '대부흥운동'의 진행 과정에서 한국 선교사들은 한국교회 '비민족화'의 과정을 면밀히 추진해갔다는 해석이 가능할 정도의 행동을 나타낸다. 이러한 주류 선교사들의 전체적인 입장은 3·1운동을 거쳐 일제 말기에 이르기까지 큰 변화를 보이지는 않는다.43)
이런 것을 보면, 한국교회는 애초부터 민족주의적이고 애국적이었는데, 선교사들에 의해서, 그리고 일제에 의해서 정교분리적인 성향을 주입받았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초기부터 정교분리적인 모습을 보이던 선교사들은 1920년대 일제의 선교사 회유정책으로 인해서, 상당수가 친일적인 경향으로 흘렀다.
조선총독부 學務局에 「宗敎課」를 신설해서 종교행정과 제반조사 및 선교단과의 연락을 담당하게 하였다. 뒤이어 포교규칙을 개정(1920년 4월)하여 교회당, 설교소, 강의소의 설립을 허가제로부터 계출제로 변경함으로써 선교사의 환심을 샀다. 또한 선교계 사립학교에 있어서 성서의 敎授를 공인제도화하여 외국인 선교사의 호감을 사기도 했다. 그리고 1920년 「종교 및 제사를 목적으로 하는 재산」에 한에서 이를 民事令에 의한 공익법인으로서 그 기본재산관리·유지의 편의를 도모하였다. 이와 같은 일련의 조치는 선교사로 하여금 친일경향으로 전향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사실상 齋藤實의 선교사 회유정책으로 선교사의 친일적 경향은 급속히 촉진되어 교회도 한때 일부 민족주의자의 피난처가 되었지만 다시는 이러한 역할을 기대할 수 없기에 이르렀다.44)
일본제국주의의 구약말살정책
지금까지 일본교회와 한국에 온 선교사들이 직·간접적으로 일본제국주의에 어떻게 협조했으며, 그것이 한국교회신앙형성, 특히 성경이해에 어떤 영향을 주었을지를 알아보았다. 이제는 좀더 구체적으로 일본제국주의가 한국교회구약성경이해에 미친 영향을 살펴보기로 하겠다. 초기부터 한국교회는 성경을 사랑하는 교회로 소문났다.45)
선교사가 공식적으로 입국하기 전에 만주와 일본에서 성경이 부분적으로 번역되고 있었다. 이 점은 그 뒤의 한국 기독교의 성격을 규정하고, 중요한 역사적 조건이 되기도 했다. 기독교가 성경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는 성경 지상주의적 성격이 이러한 전통 속에서 자리 잡혀 갔다고 할 것이다. 한국 기독교는 성경을 읽히는 데서부터 기독교의 터를 잡아갔다.46)
1907년 대부흥운동도 성경연구를 통해서 시작되었고, 또 성경연구를 신앙생활에 필수적인 것으로 자리잡게 했다.47) 사경회가 한국만큼 성행한 곳은 세계 어느 곳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이다.48)
그런데 현재 우리가 성경을 읽는 방식은 여러 가지 영향을 받았지만, 특히 일본제국주의에 의한 식민지배경험이 한국교회 성경읽기방식에 큰 영향을 미치는 요소 가운데 하나이다. 한국교회는 구약보다는 신약을 더 좋아한다. 설교자들도 설교할 때 구약보다는 신약을 선호한다.49) 그런데 이런 경향 배후에 일본제국주의의 영향이 있다는 것이 이 논문의 주제이다. 원래 한국교회는 구약적 속성이 강했다.50)
일제 치하 성탄은 예수 탄생의 기념축제였지만 언제나 모세의 출애굽 테마가 연극으로 연출되곤 하였다.51) 한국의 비운이 이스라엘의 오랜 삶과 역사에 직접 비교되었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한국에서 '탈이스라엘'의 구조보다 '이스라엘화'가 훨씬 생동적으로 수용될 입지에 놓여 있었다. 생활관습이나 그 수탈과 붕괴, 포수(捕手)의 쓰라림이 피차에 병행한다고 보아, '제2의 이스라엘', '동양의 예루살렘'과 같은 유비(類比)가 돋보였다.52)
성탄절에 신약성경을 소재로 연극을 하지 않고, 구약성경, 특히 출애굽 사건을 소재로 연극을 했다는 것에서 일본제국주의에 의해 가혹한 식민지배를 받으면서 한국 기독교인들이 얼마나 구약성경을 사랑했는지 알 수 있다. 한국 기독교인들은 구약성경을 읽으면서 이스라엘 역사와 한국역사를 동일시했고, 위로를 받았던 것이다. 한국 기독교인들은 구약성경을 읽으면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명확하게 했다.
이동휘는 "사랑하는 형제들아! 우리는 구약의 이스라엘처럼 하나님께 헌신된 민족이다. 우리가 어디를 가든지 우리는 [하나님께] 이런 우리의 적당한 봉사[자기희생]를 해야 한다."고 기록하였다. 동경의 YMCA의 연설에서 한 한국 학생이 "한반도의 상황은 유대의 이스라엘 민족의 상황과 너무도 유사하게 정말 비참하며, 기독교를 통하지 않고는 한국을 구할 길이 없다."고 진술하였다.53)
이처럼 당시 한국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을 이스라엘의 남은 자와 동일시하고, 성직자들은 교인들에게 애국심을 고취하기 위해서 에스더, 에스라, 느헤미야를 내용으로 설교했다.54) 일본인인 사카모토도 한국교회의 유태적 정체성을 상세하게 논했다.
오늘날 한국의 환경 및 열국과의 관계를 보니, 마치 예언자 이사야 시대의 유태의 그것과 유사함을 본다. 이천육백년 전 아시아의 극서(極西)에 있었던 역사적인 현상이 이천육백년 후 아시아의 극동(極東)에 다시 나타남은 아주 흥미있는 일이다.55)
사카모토는 한국 기독교인들이 이스라엘과 자신들을 동일시하고, 거기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발견하는 것을 보고, 매우 경이롭게 여겼다. 그리고 사카모토는 이어 에스겔의 환상과 사명, 그 역할을 들어 한국과 이스라엘 역사의 유사성을 상세히 논하고 이스라엘에 내린 곤고가 다시 희망으로 전개될 섭리적 경륜을 발견하였다.56) 이렇듯 한국교회는 한민족과 이스라엘민족을 동일시하고, 감정이입했다. 임영신은 자신이 에스더 왕비의 역할을 하면서 고대 이스라엘인의 감정을 경험했다고 말한다.
내가 무대를 걸어다니며 소녀들과 부모 청중들을 둘러보았을 때, 나는 변화되었다. 내가 그렇게 조심스럽게 연습한 말들은 새로운 의미로 다가왔다. 그 말들은 과거 뿐 아니라 현재에도 적합한 것으로 보였다. 내가 아하수에로 왕에게 히브리인들을 구해줄 것을 간청하였을 때, 그 말은 한국을 위한 애원이 되었다. 그리고 나의 의도의 의미는......청중들에 의해 분명하게 이해되어졌다.57)
이런 감정을 한 두 사람이 경험한 것이 아니었다. 거의 모든 한국 기독교인들이 동일한 경험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한국의 기독교인들은 구약성서는 읽으면 읽을수록 마음이 흥분되었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저절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리고는 우리도 이스라엘 민족과 같이 대적과 싸워야 하겠다고 결심을 다짐하였다.58)
선교사들 가운데 타마자(Talmage)도 구약에 깊은 관심을 보였는데, 평소에도 구약성경을 열심히 연구했으며, 감옥에 갇혀서도 구약성경을 읽었고, 구약을 통해서 환란을 이겨냈다.
60년 세월이 지나왔다. 그동안 나는 여러 각도에서 구약성경이 공격당하고, 또 공격당하는 소리를 들었다. 구약을 불신하는 이론들이 쭉 제기되어 왔다. 그러나 이 이론들은 바위를 때리는 파도처럼 시끄럽게 부서져 거품을 남길 뿐이었다. 구약성경이 폭풍에 시달려 오는 동안 구약에 대한 내 믿음이 자라났다. 나는 대학과 신학교에서, 또한 외국의 선교현장에서 구약성경을 증험했다. 그러한 증험은 역사, 고고학, 언어학, 과학, 인류학, 비교종교학, 그리고 개인 경험의 관점에서 이루어졌다. 구약은 나에게 깊은 믿음과 매력을 주었다. 나는 3~4천 년 전에 하나님에 대해 말하는 내용이 오늘도 절대 진리라는 것을 알았다. 그것은 우리에게 불변의 하나님이 있다는 사실을 막힘없이 보여주고 있다. 이교도 일본에 의해 몇 개월을 갇혀 있는 동안, 나는 신약성경보다 구약성경을 더 자주 펼쳐 보았다. 거기에서 나는 내게 무례하게 구는 이교도와 싸우면서 용기와 위로를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59)
주제에서 약간 비켜가지만, 한국교회 지도자들에게 많은 영향을 준 우치무라 간조(內村鑑三)도 미국에서 신학을 공부할 때, 구약 예언서, 그중에서도 예레미야서를 읽고 크게 감동받았다.
우치무라에게 큰 영향을 준 것은 구약성서의 의(義)의 정신이었다. 구약성서의 하나님의 의(의) 없이는 신약성서의 하나님 사랑은 성립될 수 없다고 본 우치무라는 말하기를 "나는 그리스도와 사도들로부터 나의 영혼의 구원을 배웠고 예언자들로부터는 나의 나라의 구원을 배웠다."고 하였다. 또 우치무라는 예레미야가 고독과 허무를 하나님의 사랑으로써 극복할 수가 있었음을 깨달았다. 이와 같은 정신적 지탱이 있었기 때문에 예레미야는 유다왕국에 대한 자기의 임무를 다하는 동시에 하나님에 대한 자기의 책임을 다할 수가 있었다. 우치무라는 예레미야에서 신앙과 애국을 일치시킬 수 있는 논리구조를 발견하였던 바 그는 '칙어사건' 이후의 자기의 고독이 바로 예레미야의 그것임을 발견하였던 것이다.60)
우치무라 간조의 성경관과 애국관은 그의 한국인 제자들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61) 우치무라 간조에 대해서는 비판적으로 재평가할 여지가 있지만, 아무튼 선교 초기에 한국교회는 구약에 매우 깊은 관심을 보였는데, 그런 경향이 아쉽게도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신약 위주로, 그것도 4복음서 위주로 흘러갔다.
일제 통치기의 한국교회, 즉 이른바 '민족교회시대'로 규정되는 시기의 한국교회 강단은 비교적 구약설교의 비중이 높았던 것은 여러 자료에서 입증된다.....이에 일제 말기로 들어서면서 일제당국은 민족주의 고취라는 이유로 교회에서의 구약의 상고, 강독을 금지시키고 결국에는 신약 중에서 4복음서만을 사용하도록 한 극단적 조처까지 내렸던 경우를 볼 수 있다. ......해방 이후 한국교회 강단의 설교는 급격히 신약중심으로 경사되었다.62)
이런 그릇된 경향은 한국교회를 무력화(無力化)하려는 일본제국주의의 정책에 의한 것이다. 일본은 애초부터 기독교를 긍정적으로 보지 않았는데, 특히 유대교와 구약에 대해서 상당한 반감을 갖고 있었다. 그 이유는 유대교와 구약성경이 일본의 천황제도에 걸림돌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일본기독교는 일본 정부의 입장을 그대로 수용했다.
일본기독교는 출발단계에서는 철저한 '정교분리', 예수복음 중심의 '신약적 신앙'을 목표로 삼았던 것은 분명하다. '로마의 것과 이스라엘 것'의 분리, '내재적 신앙'과 '역사'와의 분리도 나타난다. 때로는 구약적이라거나 유태적인 사상 자체를 '악'으로 규정하는 분위기가 팽배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일본기독교 안팎의 신학적 조류에 따라 일본 내에서든지, 혹은 한국교회에 대해서든지 '유태적'이라는 개념은 일본의 국체에 맞지 않는 것, 기독교 신앙의 정수에도 맞지 않는 것으로 단정하는 입장이 강했다.63)
일본 정부와 일본 기독교는 이런 반유대적·반구약적 성향을 한국교회에 심기 위해서 애썼다. "조선예수교장로회의 특성"이라는 글은 유대 역사를 아브라함으로부터 그리스도 시대까지를 다루면서 이렇게 말한다.
원래 기독교의 모체가 되는 유태민족이라는 것은 대개 민족적 결벽성·우월감·혁명사상을 가진 자로서 그 성격은 기독교 교리 가운데도 농후하게 나타나고 있는데......유태민족이 가진 천재적인 혁명사상은 이렇게 오랜 세월에 걸쳐 그들 역사에서 배양된 것으로 그들의 혁명 수단이 참으로 악마의 영이 만든 것처럼 생각될 정도로 극히 교묘한 까닭이 실로 여기에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64)
이 글을 보면, 일본인들의 반유대적·반기독교적 정서가 얼마나 강한지 알 수 있다. 그리고 "일본기독교 조선장로교단 실천요목"에는 교회혁신을 위한 규정이 있는데, 그 가운데 구약성경과 유대교에 대한 것도 나온다.
11) 일본기독교를 확립하기 위하여 특히 전문가로서 일본교학의 연찬에 노력하고 일본적 신학을 수립시킬 것.
12) 말세·심판·재림 등은 세상적·물질적 해석을 고쳐 그것을 종교적·심령적으로 해석할 것.
13) 구약성서에 나타나는 비기독교적 유대사상을 시정하기 위하여 그 적당한 해석교본을 편찬할 것.
14) 전시에 있는 반도 교화의 실을 거두기 위하여 신앙 부흥 및 전도 진흥의 구체적 방법을 강구할 것.
15) 신도필휴·신찬미가·기도문 및 예전 요의(要義) 등을 편찬할 것.
16) 국어(일본어) 상용을 극력 장려할 것.
17) 예배당은 신축 또는 개축할 경우 일본적 양식을 고려할 것.
18) 예배 혹은 집회 양식에 대하여는 연구를 진행하여 될 수 있는 한 일본적 풍습을 채용할 것.65)
일본적 기독교 수립을 위해서, 또 한국 기독교를 일본 제국주의의 착실한 지지세력으로 만들기 위해서 이런 규정을 정하고, 특히 구약성경을 일본제국주의에 유리하게 해석하도록 하기 위한 지침을 담은 교본까지 마련하려고 했다는 사실에서 일제가 얼마나 구약성경에 대해 민감한 반응을 보였는지 알 수 있다. 이것은 한국교회가 그만큼 구약에 심취한 구약적 기독교였음을 반증한다. 일제는 한국교회가 구약성경을 통해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애국심을 고취하며 반일감정을 북돋운다는 것을 잘 알았기 때문에, 한국 기독교인들이 구약성경을 아예 읽지 못하게 했다.
특히 이와 같은 분위기는 제2차세계대전 기간 유태인 적대의 독일 나치 정권과 일본이 동맹적 관계에 있으면서 더욱 고조되었고, 그 영향은 한일 기독교의 변질화 종용에도 크게 작용하였다. 심지어 한국에서는 일제 말 구약성서의 강독 금지, 이스라엘 민족구원사와 관련하여 신앙고백된 찬송가의 찬양 금지 등으로까지 나타났다.66)
이런 상황이었기 때문에 일제말기로 갈수록 한국교회는 구약성경으로 인해서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일본은 한국기독교를 자신들의 뜻에 따라서 통합시키려고 했고, 혁신교단을 조종하면서, 한국교회가 구약성경을 바르게 읽지 못하게 했다.
그러나 제2차 합동준비위원회에서 감리교단 측으로부터 소위 혁신기독교단에 관한 12개조의 혁신안이 제출되어 이에 대한 수정안이 의결되자, 원안 통과를 주장하는 감리교측이 준비위원회에서 탈퇴하여 결렬되었다. 여기서 논쟁의 초점이 되었던 것은 구약을 시인하느냐 않느냐는 것이었다. 즉 혁신교단은 "신약성서를 기초로 하야 교의를 선포하고 구약성서에 나타난 유대사상을 일체 없애기 위하야 구약성서의 새로운 해석교본을 제정"하고 이것으로 신도를 가르칠 것을 주장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사실상 구약성서의 폐기를 의미하는 것이었다.67)
한국교회 지도자들은 일제의 강경한 요구를 거부할 수 없었다. 1943년 12월 29일에 나온 "성결교 해산 성명서"를 보면, 성결교는 지금껏 미국인 선교사의 지도를 받고 재정적으로도 의존해온 것을 반성하고, 또 성경해석에도 문제가 있었다고 자백한다.
더구나 교리로서 신생(新生), 성결(聖潔), 신유(神癒), 재림(再臨)의 네가지 가운데 복음을 고조하여 왔는데 그 가운데(就中) 재림의 항은 기독이 가까운 장래 육체로써 지상에 재림하여 유태인을 모으고 건국하여 그 왕이 될 뿐 아니라 만왕(萬王)의 왕인 자격으로서 전세계 각국의 주권자로부터 그 통치권을 섭정(攝政)하여 이를 통치한다는 것으로 근본적으로 국체의 본의에 적합하지 못할뿐더러, 신관(神觀)에 대하여도 성서의 해석에 기초하여 '여호와' 이외에 신이 없다는 사상을 선포하여 온 것은 현재 우리들(我等)의 심경으로 보면 실로 국민 사상을 혼미(昏迷)에 빠뜨린 것으로 그 죄를 통감하는 바입니다. 우리들은 최근 이점에 깊이 깨달은 바 있어 여하히 하여 성서의 해석을 우리 국체의 본의에 적합케 할 것이냐에 관한 연찬(硏鑽)을 거듭하여 왔으나, 필경 성서는 그 기지(基址)를 유태사상에 두어 우리 국체의 본의에 배반하는 기다적(幾多的) 치명적 결함을 포장하는 것으로서 성서 자체로부터 이탈치 못한다면 완전한 국민적 종교로서 성립하지 못할 것으로 결론에 도달하였다.68)
물론 일제의 강요에 의해서 작성되었겠지만, 그렇다고 해도 한국교회가 역사에 남을 이런 공식문서를 작성했다는 것은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다. 특히 한국교회 구약성경이해에 있어서 지울 수 없는 오점을 남겼다고 할 수 밖에 없다. 이런 정도로 일제는 한국교회가 구약사상을 수용하는 것을 막으려고 했다. 한편, 한국교회의 친일인사들은 구약성경을 일본제국주의적인 시각에서 읽게 하려는 일본 정부의 지시를 충실히 시행해서, 구약성경을 통해 친일사상을 전파하려고 했다. 강백남은 구약 출애굽기에 나오는 십계명을 강론하면서, 신사참배는 결코 우상숭배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북미합중국의 워싱톤 동상이 있는데 합중국 국민으로는 그 동상에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고, 합중국 국기에 합중국 국민으로 누구나 다 경의를 표합니다. 합중국은 기독교국이니만치 기독교인이 대다수입니다. 그러면 그들은 다 우상숭배자로 간주합니까. 그렇치 않습니다. 그렇다면 대일본 황국신민만이 국조숭모(國祖崇慕)하는 의식에 기독교인이 어찌 참례할 수 없으며 황국(皇國)을 대표한 일본 국기에 경의를 표함이 어찌 기독교인에게 죄가 되겠습니까. 전화위복(轉禍爲福)하는 자 있으나 기독교인은 그러한 의미에서 참배함은 절대로 아니요 국가의식에 국민의 의무로서 참례(參禮)함이 당연한 줄로 각오(覺悟)하고 시인(是認)한 즉 양심이 평안하고 충군애국지심(忠君愛國之心)이 날이 감을 따라 두터워집니다. 사신우상(邪神偶像)은 금수 곤충 어별(魚瞥)의 형상으로 된 것인데 어찌 우리의 조상이 그 우상과 동류(同類)가 될 수 있으랴? 그런즉 신사참배하는 일을 우상숭배라고 한다면 이(此)는 불경죄(不敬罪)에 가깝다고 말하여 둡니다.69)
이들은 구약성경 뿐만 아니라 신약성경도 인용하면서 일제의 한국침략을 합리화하기 위해 애썼다. 한국인들이 앞장서서 식민주의적으로 성경을 해석한 것이다. 한국인으로서 구약에 관한 논문을 최초로 쓴 영광을 누린 양주삼(梁柱三, 감리교 협성신학교 교수)은 "신동아 건설과 반도인 기독교도의 책임"라는 글에서 이렇게 말했다.
기독교의 설립자라고 칭할만한 사도 바울은 자기가 로마제국의 공민(공민)이 된 것을 영광스럽게 여기고 자랑하였습니다. 그와 같이 반도인들은 대 일본제국의 신민이 된 것을 영광스럽게 여기고 자랑할 것입니다. 그것이 반도인의 유일한 활로입니다. 반도인들은 이 기회에 죽은 과거를 청산하고 산 장래를 위하여 활동하여야 되겠습니다. 선각자가 된 기독교도들은 민중에게 이 활로를 지시할 책임이 있습니다.70)
양주삼을 비롯해서 일본제국주의에 협조한 친일적인 조선 기독교 지도자들은 사도 바울이 유태인이면서도 협소한 민족주의를 버리고 로마제국의 시민임을 자랑스럽게 여겼고, 또 이름도 로마식으로 창씨개명한 것처럼 조선기독교도들도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당시 로마를 중심으로 전세계 교통이 통하는 것처럼 지금은 누구나 대일본제국의 길을 밟고 다닌다고 말했다. 그리고 바울이 헬라어를 사용하고 신약성경도 헬라어로 기록했던 것처럼 우리도 국어인 일본어를 반드시 사용해야 한다고 말한다.71) 그리고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일본의 한국지배를 신의 뜻으로 본 사람도 있었다. 최태용은 "조선기독교회의 재출발"이라는 글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리스도는 그 제자들이 이스라엘의 회복을 희망하며 따르는 것에 대해서 "나의 나라는 이 세상의 것이 아니다"(요한복음 18:36)하면서 이를 물리치고, 영적 사명에 적합하도록 그들을 정결히 하여, 그들을 종교적 사명을 달성하는 세계의 사도로 하였던 것이다. 즉, 그리스도는 그 제자들이 로마의 주권에 복종하면서 그 종교적 사명을 달성하도록 인도했던 것이다. 조선을 일본에 넘긴 것은 신(신)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을 섬기듯이 일본국가를 섬겨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오늘날 우리들에게 있어서 국가는 일본국가가 있을 뿐이다. 우리가 다해야 할 국가적 의무와 지성(지성)은 이를 일본국가에 바쳐야 마땅할 것이다. 우리는 가장 사랑하는 것을 일본국에 바치도록 신에게서 명령받고 있는 것이다.
이런 터무니없는 주장들을 일본 사람들이나 일본교회가 아닌 한국인 종교지도자들이 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이들은 성경을 일본제국주의의 한국식민통치를 정당화하려는 수단으로 삼은 식민주의적 성경해석의 전범(典範)들이다. 그리고 일본제국주의의 한국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한국에 진출한 일본조합교회도 당연히 구약에 대해서 부정적이었다.
조선전도부의 어용적 성격은 1919년 3·1독립운동에 대한 반응에서도 유감없이 나타났다. 3·1독립운동을 목격한 와타세는 즉각적으로 "조선 소요 사건과 그 선후책"을 <新人> 4월호에 기고해, 3·1운동에 참가한 조선 기독교인들은 구약의 정신이 농후하고 기독교의 사랑의 정신이 없는 유대교도에 불과하다고 비난했다. 즉, 만일 기독교인들이 산상수훈의 정신을 안다면 그들은 그런 식으로 반행해서는 안될 것이며, "하나님을 아버지로 하는 형제로서 더 포용적으로 내선일체를 대성하는 정신"에 근거하여 행동했어야만 했다고 비판했던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건전한 신앙을 근거로 해 건전한 사상"을 배양함으로써 유다주의를 극복하고 "양민족의 새로운 영적 일치"를 달성하기 위한 조합교회의 조선 전도의 의의를 더욱 강조하였다.72)
일본 조합교회가 일본 정부의 입장에 발맞추어 구약을 비판하고 신약 복음서를 앞세우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일본기독교도들 가운데는 구약성경을 식민주의적으로 이해하면서, 일본이 한국을 병합한 것을 '출애굽사건'으로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한국은 드디어 제국의 판도(版圖)에 병합되었도다. 일장기가 계림의 아침을 비추어 참으로 빛나리라고 나는 마음 속으로 엄숙히 하나님께 기도하는 바이다. "모세가 여호수아를 불러 온 이스라엘 목전에서 그에게 이르되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너는 이 백성을 거느리고 여호와께서 그들의 열조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에 들어가서 그들로 그 땅을 얻게 하라 여호와 그가 네 앞서 행하시며 너와 함께하사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 아니하시리니 너는 두려워 말라 놀라지 말라"(
요약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