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의 역사"에서 주로 다룰 주제는 기독교인들이 저질러온 죄악들, 예를들어 십자군, 마녀사냥, 이단사냥, 루터와 칼뱅의 망언 사례, 인디언과 인디오 학살 등을 역사적 자료를 통해 조명하고, 기독교가 로마에 의해 공인된 과정, 유대인들의 역사 등 다채로운 주제를 포함하게 될 것입니다. |
야웨는 분명 원전 600년경 까지는 미숙했다.
신명기에서 처럼 형상없고 세속을 벗은 존재가 아니었다.
금으로 뒤집어 씌운 야웨상이 케루빔의 보호를 받으며 최성소 Debir에
묵묵히 서 있는 모습을 상상하라.
야웨는 „명예의 주“로도 숭배되었다고 호서는 쓰고 있다.
원전 587년에 유일신제작의 틀이 완성되었다.
사실 이후로 야웨는 초월적인 존재로 가꾸어져 갔다.
이 해에 이스라엘의 역사에 전환점을 가져오는 사건이 있었다.
이스라엘은 민족 파멸위기에 봉착했다.
어느 여름날이었다. 북동쪽에서 거대한 군대가 예루살렘을 향하여 다가왔다.
멀리서도 창의 부디치는 소리와 전차의 바퀴소리를 들을수 있었다.
바빌론의 느브갓네살이 이집트 원정을 위해 지나가는 중이었다.
침략자는 18개월동안 예루살렘성을 에워쌌다.
그의 군대의 화살은 하늘이 어둡게 쏘아 댔으며 성문을 부수려는 통나무
부딪치는 소리가 진동했다.
길고긴 긴 싸움 끝에 시온산의 백성들은 항복했다. 당시에 보편적으로 그랬듯이 승전자는 잔혹했다.
예루살렘의 왕 세데기아는 두눈을 뽑혔고 작은 형제국 유다도 속국이 되었다.
적은 가장 성스러운 곳에서도 만행을 멈추지 않았다. 그들은 야웨신전도 불질렀다.
승자는 1만5천명의 상류층 사람들을 바빌론으로 압송했다. 바빌론에서 그들은 부락을 이루고 살았다.
거기가 91,5m 높이의 천문대 바벨탑이 서 있는 Etemenanki이다.
제일 빠르면 이때 객지에서 히브리인은 „약속된 땅“의 망향 동기를 가졌고 „약속된 땅“이 사실은 없기에
이를 계속 논리로 발전시켰다. 위의 설에 점점더 많은 학자들이 견해를 같이 한다.
페르시아의 객지에서 신에 대한 상상도 새로운 충동과 영향을 받았다.
ㅡ 따라서 유태는 복수심에서 공포의 느브갓네살과 그의 초대형 탑(바벨탑= 후에
풍화작용으로 파손)을 하나의 에피소드로 멸시 조작했다.
ㅡ 원전 539에 페르시아는 큰 부분의 고대세계를 점령했다.
ㅡ 종교지도자 짜라투스트라는 천사도 있고 선과 악의 교리에 바탕을 둔 교훈을 설파하고 있었다.
ㅡ 페르시아의 주신 Ahuramazda도 형상이 없는 존재이다. 이들은 제단도 쌓지 않는다. „제단이나
형상을 만들면 그들은 어리석다고 한다. 그들은 분명 신을 희랍인들 처럼 사람비슷한 형상으로는
보지 않는것 같다“ 고 고대사가 Hertodot는 썼다.
ㅡ 확실한 것은 페르시아인들은 야웨의 숭배를 가능한 장려했고 원전 538년엔
포로들을 석방했고 유태들은 팔레스티나로 돌아왔다.
ㅡ 당시 3만여명이 삭막한 유다로 왔고 상당수의 제사장들이 있었다.
ㅡ 그들은 곧장 시온산의 타버린 신전을 재건했다.
ㅡ 예루살렘의 새 지도자는 페르시아 왕 Artaxerxes의 관리로 있던 느헤미아였다.
에스라가 그를 보좌해 대제사장의 직분을 맡았다.
ㅡ 에스라는 호서에서 스스로를 „천신의 법을 위해 온 사자“라 칭했다.
ㅡ 페르시아의 속지이던 Jehud(반경이 30km)지방의 지도자가 된 이들 강경
개혁자들은 초강경의 개혁을 서둘렀다.(최소파의 견해)
ㅡ 중세의 수도원의 위조무리가 원서들의 연도와 날짜를 위조하듯 이들도
히브리 서류들을 샅샅이 훑고 바꾸어 쓰고 게다가 전체 왕국을 창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