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갈成書(7) 신명기는 요시아 문화혁명의 산물. 토라는 신명기파 이데올로기.

공갈成書(7) 신명기는 요시아 문화혁명의 산물. 토라는 신명기파 이데올로기.

반아편 1 5,528 2004.08.11 22:20

거의 모든 호서전문가들은  신명기(Deuteronomium)가 요시아의 문화개혁을 반영한다고 보고 있다.

신명기는 다른 장에서 찾아 볼수 없는 특이한 언어를 구사한다.
ㅡ  타신의 숭배를 무자비하게 비난하고 위배시는 전율의 징벌로 위협한다.
ㅡ  호신은 완전히 비세속적이고 초월적인 존재로 묘사되었다.
ㅡ  특히 절대금지: 야웨숭배는 오로지 예루살렘의 신전에서만 허락되었다.
     다른 어느곳 에서도 야웨제물은 있을수 없다.

위의 계명들로 시온제사장들은 신앙독점의 위치를 굳히려 했다.
무엇보다 앗시리아 치하의 이웃 이스라엘 제사장들의 권위를 박탈해야 했다.

왜냐하면 그들도 시온산에서 북쪽으로 50km 떨어진 Garizim산에
커다란 시온산에 맞먹는 야웨성소를 가지고 있었다.

유다와 이스라엘간의 종교 독점권 실랑이는 호서의 전체의 저변에  흐르고 있다.
남쪽의 시온인들은 가능한 자리만 있으면 북쪽의 Garizim들을 깎아 내렸다.

특히나 이상하게 두드러지기는 <열왕기서>이다. 이는  예루살렘 야웨파의 일방적인 묘사이다.

학자들은 이를 „논쟁적인 왜곡“(Polemische Verzehrung)이라 한다.
ㅡ  이스라엘(북쪽국)의 주민들은 대개 소심한 패배자로 표현된다.
ㅡ  북국의 왕들은 통째로 예외없이 죄인이고 신성모독자들이다.
ㅡ  남국의 왕들은 호신을 경외하는 신실한 자들이다.

시온의 제사장들은 서류위조와 사기도 서슴치 않았다.
그들은 거룩독점권을 합리화 하기 위해 교묘한 궁리를 해냈다.
ㅡ  열하에 대제사장 히스기야가(원전 622) 예루살렘신전을 청소하다
     „아주 오래된 법률서“를 발견했다 한다.
ㅡ  사실 율법서는 이때 „잉크도 채 마르지 않았다“는게 학자들의 분석이다.
ㅡ  이 금새 쓰여진 사기서가 <신명기>라는 „아주 오래 된“ 율법책이다.

중도파의 견해에 의하면 이 신명기 사기사건은 다음과 같다.
ㅡ 원전 630년경에 신명기파가 호서의 핵심을 저술했다. 
ㅡ 이들은 모세와 아불함이란 가상 인물을 만들어 과거의 역사에 밀어 넣었다.

최소파의 견해엔 Finkelstein부류 중도파의 주장은 너무 미약하다.
그들의 호서의심은 훨씬 더 크다. 또 그들의 주장은 그럴듯한  근거가 많다.

ㅡ  호서는 역사, 규율, 국가론 등의 방대한 범위를 다룬다.
     이 모든 것이 플라톤이나 헤로도트 이전에 쓰여질수 있었겠느냐?
ㅡ  실제로 고대에는 유태의 천재(모세오경)들이 언급되지 않는다.

ㅡ  헤로도트는 시리아-팔레스티나의 할례하는 어느 족속을 언급은 했으나
     그들의 위대한 행위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른다.
ㅡ  원전 4~3세기 이후부터는 이스라엘에 대한 언급이 생겨난다.

ㅡ  그들의 정신적 산물(토라)는 당시 기술 정도에 비해  수준 미달이다.
    (주: 이집트의 피라미드나 당시 과학, 그리고 메소포타미아의 공중정원등 세계의 기적을 상기 비교 바람)
    원전 720년에 있었다는 수로공사는 우둔하기 짝이 없다. 인부들은 20개이상의  엉뚱한  구멍을 뚫어대고는
    겨우 상대쪽 구멍과 마주쳤다.  그럼에도 호서는 이 졸작공사를 <위대한 수로공사>라 자찬한다.

ㅡ 요시아 문화혁명도 과장이다. „아주 오래된 율법서 발견“이란 이 구절도 실은
   훨씬 후의 조작이다.

새로 발굴되는 유적이나 유물들이 최소파의 견해를 뒷받침한다.
ㅡ 다신숭배의 섬멸은 실제로는 지금까지의 추측보다 더 오래 걸렸다.
ㅡ 원전 600년경 유다나 이스라엘의 백성은 이웃과 같이 다신을 섬겼다.
ㅡ „다신숭배에서 주변의 비유태 문화와 차이가 없었다“
       튀빙엔 구약신학자 Herbert Niehr

예루살렘 산 변두리에서 행해진 예식에 대한 중요한 새로운 인식은 스위스의
구약신학자 Othmar Keel의 공로 때문이다.
ㅡ 그는8500개의 시리아- 팔레스티나 지역의 유물을 심혈을 기울여 조사했다.
ㅡ   그의 결론은 „가나안엔 우상이 우글거렸다“
ㅡ   언덕마다 번제의 불길이 솟지 않은 곳이 없다.
ㅡ  농민들은 집앞에 석회석의 작은 제단을 만들어  조상을 섬겼다.
ㅡ  원전 650년경에는 정복자 앗시리아의 „아스트라숭배 의 붐“이 일었다.
     승전자들의 신들이 유행으로 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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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인드라 2004.08.12 19:16
저도 동의하는바입니다.
아벨과가인의 사건을 봐도 나타나는 이야기죠..
농경민(북이스라엘)과목축인(남유다)의 갈등에서 야훼는 남유다에 손을들어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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