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한국 교회의 재건과 분열

"기독교의 역사"에서 주로 다룰 주제는 기독교인들이 저질러온 죄악들,
예를들어 십자군, 마녀사냥, 이단사냥, 루터와 칼뱅의 망언 사례, 인디언과 인디오 학살 등을 역사적 자료를 통해 조명하고,
기독교가 로마에 의해 공인된 과정, 유대인들의 역사 등 다채로운 주제를 포함하게 될 것입니다.

9. 한국 교회의 재건과 분열

발견 0 2,624 2002.09.14 14:51
1. 해방과 교회 재건

45년 8월 15일 해방이 되었을 때 그동안 많은 수난을 겪은 기독교인들은 남다 른 감격을느겼다. 후에 남, 북 분단의 아픔을 가져오기도 함.
(교회 재건 운동)

1)장로교

교회 재건에 있어 선두를 달린 곳이 평양 중심의 관서지방이다.
일제 탄압에 의해서 투옥된 교역자 중 50명이 순교함. 평양 감옥에서 20명이 출옥하고 그동안 지하에 숨어있던 자들이 나와 교회 재건에 힘쓴 곳도 평양이다.
이기선 목사를 중심으로 한 출옥성도들은 나오자마자 가정을 찾아간 것이 아니라 순교한 주기철 목사가 시무하던 평양의 삼정현교회에 모여 기도회를 갖고 교회 재건에 관한 협의를 함. 그리고 9월 20일 ' 교회 재건 5대 원칙'을 발 표함.

(1) 교회 지도자들은 일본 신사에 참배해 죄를 졌으니 통회 자복후 사역에 임할 것.
(2) 권징을 자책하고 2개월 간 휴직할 것 등등...

그후 11월 14일에 선천 월곡교회에서 평북 5개 노회의 교직자 연합수련회가 있었다.
여기에 참석한 사람 가운데 홍택기 목사 등 일제때 신사참배를 했던 많은 목사 들이 5대 원칙에 대해 반발하고 일어섰다. 그래서 출옥성도들과 싸움이 벌어졌다.

교회안에 난기류가 생김.
같은 해 12월 초 평양 장대현 교회에서 북한 5개도 연합회를 조직하고 북한 교회와 남한 교회의 교류를 위해 북한 교회에서 이인식 목사와 김양선 목사를 서울에 파송함.
남한 교회에서는 부산을 중심으로 한 경 상도에서 교회 재건 운동이 일어남. 이곳은 주기철 목사의 출생지이고 최상림, 손양원, 한상동,등 이들의 영향력 때문에 부산이 중심지가 됨.
부산 진교회에 서 회의를 소집하고 경남 재건 노회를 조직함.
주남선 목사를 노회장으로선출.

2) 감리교

재건 감리교회
부흥 감리교회 - 둘로 나뉨.
감리교도 해방과 함께 9월 8일 남부 교단 대회가 소집됨.
이 대회에서 변홍규, 이규갑, 윤성범, 나사행, 이봉구 목사들이 불법성을 지적하며 반기를 들었다. 왜냐하면 이 조직을 한 사람들이 일제 시대때 굴복하고 그들에게 동조했던 자 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재건 감리회와 부흥감리화가 나옴.
이 두파들은 서로가 자기측 사람이 감독이 되길 원하고 서로 양보하지 못함.

합동안이 나옴 - 일제 때 신사참배한 사람은 간부나 중요한 요직에서 제외시키 고 두 회에서 동수로 선출하여 간부를 뽑는다.
투표가 끝난 후 결과는 부흥 감리회에서 절대적인 숫자가 나오서 이에 불만을 품은 재건 측은 문제를 제기 또다시 갈라짐.
이때 평신도들이 양 파의 합력을 원하여 노력한 결과 분열 위기를 극복하고 다시 하나가 되어 감리교의 기틀을 마련함.
그 후로 평신도의 발언권이 높아짐.

3) 성결교

해방전 성결교는 약 5만 성도가 있었다. 그런데 성결교 교리중 4중 복음이라는 것(성결, 신유, 중생, 재림)이 있는데 이 중 재림에 관한 문제 때문에 성결교가 문을 닫았었다.
해방과 함께 폐쇄되었던 성결교회가 다시 문을 열었다.


2. 북한에서의 교회의 참화

해방되던해 11월 16일 , 북한의 많은 뜻 있는 기독교도들이 보다 더 좋은나라 를 건설하기 위해 기독교 민주당을 설립했는데 윤영하, 한경직 목사가 중심 인 물이었다.
공산당은 이것을 미리 알고 기독교 민주당의 출현을 막기 위해서 창당 대회에서 장로 1명을 살해했고 부근에 있는 교회에 방화를 저질렀다.
이에 충격 받은 신의주 학생들이 시위를 벌였는데 러시아의 전투기와 탱크를 동원해 학생들을 저지해 많은 학생들이 수난을 당함. (신의주 학생의거 사건) 2년이 지 난 1947년 11월 북한 평양에서 김화시 목사와 고한규 장로가 있었는데, 이들 이 기독교 자유당을 조직하려 했다. 그런데 역시 이들도 창당 대회 하는날 40여 명의 교회 지도자들이 체포, 투옥되거나 러시아로 유배됨.
1948년 북한에서도 공산국가를 위해서 주일을 기해 선거일을 정하고 투표를 하는데 모든 기독교인 들을 선거에 동원 시킴. 여기에 반기를 들고 북한 기독교도의 입장을 발표하였 다.

1) 주일에는 어떠한 행사에도 불참한다.
2) 기독교는 신앙과 집회의 자유를 확보한다.
3) 교회당은 예배 외의 어떠한 것에도 사용을 불허한다.

이것이 화근이 되어 많은 기독교 지도자들이 구금된다.
마침내 50년 6.25사변 이 일어날 때 북한은 남침 준비를 끝내고 기독교인들을 먼저 검거해 투옥시켰다. 이 때 기독교인들을 찾아볼수 없도록 만들었다.


3. 민족 분열과 교회의 분열

공산당에 대항해 투쟁하던 목사들 순교.
6.25때 여순 반란사건시 두아들을 잃은 손양원 목사, 김익두, 남궁 혁, 송창근 목 사, 그리고 많은 신학자들과 지도자들이 납북됨.
6.25를 거치면서 파괴되고 손실된 교회 수가 장로교 152개, 감리교 84개, 성결교 27개 구세군이 4개 교회였고 순교자도 많았다.

6.25때 서울은 북괴에 동조하는 교인들이 몇 있었다.
경동교회에 출석하는 김욱 이라는 자는 기독교 민주 동맹을 Y.M.C.A 건물에 걸고 김일성이 서울에 왔 을 때 환영식을 함.
6.25가 나기전 기독교 사상범으로 투옥되었던 최근식 목사 는 교도소에서 나와 목사들을 고발 해 북괴군에 의해 끌려가도록 했다.

1950년 4월 경남 부산을 중심으로 해서 장로교에서 교회 재건 운동이 있었다.
6.25가 터져서 모든 지방이 공산화가 되었을 때 교회 지도자들이 모두 부산으로 모임.
1951년 5월 당시에 정기 총회를 소집했으나, 이 때 출옥성도들과 일제 때 영창에 들어가지 않았던 사람들간에 의견 대립이 생김.

비고려파와 고려파 간에 싸움이 일어나고 결국 비고려파가 장로교에서 갈라져 나감.
싸움이 여기서 끝난 것이 아니라 같은해 7월 서로 무서운 공격을 하기 시작했고 고려파는 그당시 국회의원22명의 명의로 비고려파를 용공단체라고 비난함.

1953년 기장과 예장이 갈라짐.
조선신학교의 김재준목사의 신학이 신신학 이라고 해서 그 문제를 총회에 제출했고 신학생 51명이 학교를 나가 장신대를 세움.

1953년 정기 총회에서 조선신학교를 나온 사람은 목사 안수를 예장에서 받을수 없다고 해서 갈라짐.
1958년에 같은 예장에서 통합, 합동으로 나뉘게 됨. 학교 부지 관계 때문에, 부정이 있었음을 들고 일어나서 박형용 박사를 지지하는 사람들과 반대하는 자들로 각각 나뉘게 되었다.

그 후 합동에서 분열이 이어져 많은 교단이 생김.





* 오디세이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02-09-16 1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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