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의 역사"에서 주로 다룰 주제는 기독교인들이 저질러온 죄악들,
예를들어 십자군, 마녀사냥, 이단사냥, 루터와 칼뱅의 망언 사례, 인디언과 인디오 학살 등을 역사적 자료를 통해 조명하고,
기독교가 로마에 의해 공인된 과정, 유대인들의 역사 등 다채로운 주제를 포함하게 될 것입니다.
해방 후 감리교계는 교회의 재건 방향을 둘러싸고 복흥파와 재건파로 나뉘어 분열을 가져왔다. 재건파는 주로 정춘수가 통리자로 있을 때 교계에서 소외되거나 징계를 당했던 사람들로 교계내의 부일세력의 숙청을 요구하고 나섰다.
그러나 이들의 요구가 받아들여 지지 않자 1947년 2월 3일 다음과 같은 내용의 성명서와 함께 정춘수를 비롯한 감리교 지도자들의 친일행각을 구체적으로 폭로하는 '감리교회 배신(背信)·배족(背族) 교역자 행장기'라는 것을 발표하였다.
"1940년부터 왜적의 경찰과 군부를 업고 우리 교회를 마음대로 농락질하던 이른바 혁명파 배신교역자들은 감리교회의 재건을 거절하고 방해하였다. 그 뿐 아니라 그들은 작당하여 가지고 이른바 남부대회를 빙자하다가 나중에는 복흥파니 무엇이니 하면서 교파 하나를 따로 만들어 놓기까지 하였다. 그들은 자기의 손으로 죄상가죄(罪上加罪)하였다....
우리 교회가 천직을 감당하여 인류에게 행복을 끼치며 건국 도상에 우리 조선 민족에게 큰 공헌이 있으려면 교회 안에 그와 같이 불순하고 부정한 자들을 그냥 두고는 절대로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런고로 교회 재건을 주장할 때에 친일적이요 배신적인 그들의 숙청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앞에서 인용한 '배신 배족 교역자 행장기'에서도 잘 드러나듯이 정춘수는 해방 후 감리교 내부에서도 친일파의 거두로 지목되어 비판의 표적이 되었으며, 더욱이 1949년 초에는 이러한 친일 전력 때문에 국회의 반민특위에 체포되어 60일간 구속당하기까지 하였다.
그는 강력한 내외의 비판을 받게 되자, 더 이상 감리교에 머물기 어렵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교직을 사임하고 또 한 번의 변신을 하였다. 1949년 10월 어느 날 서울 명동 성당 노기남 주교를 찾아가 천주교로 '개종'한 것이 그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1949년 11월 22일자 경향신문에 보도되어 세상에 알려졌다. 이 사실의 진부를 확인하려고 김유순 감독이 보낸 사람들과의 면담에서 "50년이나 정드렸던 교회를 일조 일석에 떠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을 받고, 그는 다음과 같이 자신을 위한 변명을 하고 있다.
"물론 어려운 문제다. 그러나 이 문제를 말하려면 자연 과거지사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3·1운동 때 33인의 하나로 나라를 위하여 싸우겠다는 나의 정신은 오늘까지 변치 않았다. 그러나 세태의 변함을 따라 전쟁이 점점 심해짐으로 일본 정부와 협력하는 척했고, 아홉 교회를 살리기 위하여 한 교회를 희생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이 세인들이 나를 친일파라고 부르는 까닭이다. 나의 밑에서 나의 지도를 받고 지내던 사람들이 나를 친일파라고 교회적으로 사회적으로 정치적으로 갖은 방법과 수단을 다해서 나를 중상하며 전부터 말해오던 숙청을 하려하니 나는 숙청을 당하기 전에 먼저 내가 자가숙청을 한 것이다....
하여튼 내가 50년이나 인도한 교회가 나에게 불만하다. 가령 예배 보는 것도 엄숙을 많이 주장했으나 그대로 되지 않고 개신교를 무식한 구교인들이 열교라고 하는데 참말 교파의 갈래가 너무 많아 열교이다. 그러니 감리교회에서 떠난다고 장로교회나 성결교회로 갈 수 없고 결국 천주교회에 들어가 평신도의 자격으로 남은 여생을 조용히 지내려 한다....
정춘수는 감리교회와 아주 관계가 없다는 것을 알리려 한다."(<대한감리회보> 1949.12.25일자)
그의 말대로라면 그가 변한 것이 아니라 세상이 변하였기 때문에 '일본 정부에 협력하는 척'하였고 '개종'하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그에게서 진정하고 공개적인 참회의 고백은 기대할 수 없었다.
그는 이듬해 일어난 6·25전란을 피하여 피난길에 올라 충북 청원군 강외면 궁평리 족손(族孫) 정인환의 집에 머물다가 1951년 10월 27일 피난지에서 79세로 생을 마쳤다.(<천주교회보> 1952. 12. 23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