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인과.. 독립운동가에서 친일파로..

"기독교의 역사"에서 주로 다룰 주제는 기독교인들이 저질러온 죄악들,
예를들어 십자군, 마녀사냥, 이단사냥, 루터와 칼뱅의 망언 사례, 인디언과 인디오 학살 등을 역사적 자료를 통해 조명하고,
기독교가 로마에 의해 공인된 과정, 유대인들의 역사 등 다채로운 주제를 포함하게 될 것입니다.

정인과.. 독립운동가에서 친일파로..

발견 0 3,115 2002.09.17 17:27

 By 김승태 연구위원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정인과 목사의 본적지는 서울로 되어 있지만 평남 순천에서 1888년에 태어나서 평양 숭실중학교를 거쳐 숭실전문학교를 1911년에 졸업하였다. 그후 잠시 숭실중학교에서 교편을 잡다가 1913년 8월 사임하고 미국에 건너가 유학하였다. 그는 미국에서 신학을 공부하여 1919년 산·엔셀모신학교를 졸업하였다.

1919년 그가 미국에 있을 때에 국내에서 3·1운동이 일어나고 그해 4월 상해에 임시정부가 조직되었다. 3·1운동의 소식이 전해지자 미주의 교포 단체인 국민회는 "원동에 대표를 파송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수립에 봉사"하게 한다는 결의를 하고 이에 따라 국민회 북미 지방총회에서 안창호를 특파원으로 파송하고 정인과·황진남이 그를 수행하게 되었다. 이들은 1919년 4월 5일 미국을 출발하여 마닐라를 거쳐 5월 25일 목적지인 중국 상해에 도착하였다. 안창호는 이미 상해 임시정부의 내무 총장에 선임되어 있었기 때문에 6월 28일에 내무총장에 취임하여 임시정부의 살림을 맡게 되고, 안창호를 수행 했던 정인과와 황진남은 7월 7일에 열린 제5회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미령(美領) 교민 대표로 의원이 되어 임시정부 활동에 참여하게 되었다. 정인과는 8월 18일에 열린 제6회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당시 부의장이었던 신익희가 법무차장으로서 업무 때문에 부의장을 사임함에 따라 부의장 보선 투표에서 임시의정원 부의장에 당선되었다. 당시 임시의정원 의장이던 손정도 목사는 건강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부의장인 정인과가 회의를 진행하기도 하였다. 그후 그는 외무차장을 맡아 1920년 8월 미국의원단 동양 유람단이 중국을 방문했을 때 여운형 등과 함께 이들에 대한 활발한 외교활동을 벌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임시정부의 내분이 격화되고 독립에 대한 전망이 흐려지자 1920년 10월경 외무차장직과 임시의정원 의원직을 사임(그의 사임은 1921년 3월 18일 제18회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수리되었다.)하고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김구는 그의 {백범일지}에 이러한 현상을 "원년(元年:대한민국 원년 = 1919)에서 3·4년을 지내고 보니, 당시에는 열렬하던 독립운동자들 중 하나씩 둘씩 왜놈들에게 투항하고 귀국하는 자들이 생겨났다. 임시정부 군무차장 김희선과 독립신문사 주필인 이광수, 의정원 부의장 정인과 등을 위시하여, 점점 그 수가 증가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정인과는 임시정부에서 떠나기는 하였지만 바로 국내로 들어왔던 것은 아니다. 미국에 다시 건너가 1921년 프린스턴신학연구과에서 신학사 학위를 받고 1923년에는 같은 대학 정치사회학과에 들어가 문학사 학위를 받았다. 이어서 그는 콜럼비아대학대학원에서 교육학을 공부하다가 영국·중국을 거쳐 1924년 11월말경 입국하여 1925년부터 조선주일학교연합회 협동총무를 맡았다. 그때부터 그는 각종 강연과 교회 활동에 참여하는 등 본격적인 국내 활동을 하게 되었다. 1924년 11월 18일자 동아일보는 중국 남경발로 정인과에 대한 소식을 다음과 같이 보도하고 있다.

"정인과씨 환영...십이년전 미국으로 건너가 많은 풍상을 겪으며 학업을 힘쓰던 정인과(鄭仁果)씨는 재작년 미국 가주(加州)에서 신학(神學)을 졸업하고 다시 프린스턴대학에서 더욱 연구를 가하야 신학사(神學士)와 문학사(文學士)의 존귀한 학위를 얻고 다시 교육학을 연구하다가 금년 여름 영국 런던에서 열린 만국주일학교 대회에 참석하고 동아의 그리운 땅을 밟고자 나오던 길에 상해에 들렸는데 동지의 간곡한 권고를 못 이겨 할 수 없이 길을 멈추고 중국에 얼마동안 있게 되었는 바...씨는 년전 상해에 와서 임시정부의 중요한 직임을 띠고 많이 노력한 일도 있었다더라."

이러한 전력을 가졌기 때문에 정인과는 일제 경찰에 의해 평소에도 요시찰 인물로 감시를 받고 있었다. 그러다 마침내 성진에서 개최된 유년주일학교 대회 겸 부흥회에서 한 강연 내용이 문제가 되어 1930년 1월 25일에 보안법위반 혐의로 3일간 성진경찰서 구류되어 조사를 받고 불구속으로 풀려 났다가 그해 5월에야 경성지법에서 무혐의로 불기소 처분을 받았다. 이 때 그의 고향인 평남 순천경찰서에서 작성한 '피의자 소행 조서'에 의하면 정인과는 "성품이 담백하고 온순하지만 강한 배일사상을 가지고 있는 자다."라고 기록하고, 비고사항으로 "전과는 없으나, 배일사상을 가지고 있어 비밀결사 조직의 우려가 있기 때문에 요시찰인(要視察人)에 편입되어 있는 자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때까지만 하여도 그는 소극적이지만 민족주의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일제의 감시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그가 교계에서 주목을 받게 된 것은 1932년 장로회총회 종교교육부 총무를 맡게 되면서부터이다. 이때부터 그의 파당적·독선적 색채를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그 첫번째가 찬송가의 판권문제다. 찬송가는 원래 1908년 이후 장로교와 감리교가 공동으로 사용하였는데,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와 조선예수교서회가 편집·발행 및 판권을 가지고 있었다. 그후 연합공의회는 1924년부터 찬송가개편위원회를 구성하고 개편작업을 하여 1931년 4월 서회에서 {신정찬송가}라는 이름으로 개정판을 발간하였다. 그러자 감리교는 이를 공식으로 채택하였으나 장로교는 채택을 보류하고 서회에 재개정을 요구하였다. 그러다 정인과가 총무로 있는 종교교육부의 헌의로 장로교 단독으로 찬송가를 편집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장로교 내부에서도 교회연합운동 분위기를 해칠 우려가 있다는 것과 편찬과정에서 정인과의 독선적인 행위에 대한 강한 반발이 있었으나, 이를 무시하고 1935년 6월 {신편찬송가}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찬송가를 종교교육부에서 발행하여 장로교에서 사용하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20여년간 같은 찬송가를 사용하던 장·감 두 교파의 연합운동 분위기는 큰 손상을 입었다. 이 무렵 정인과는 1935년 총회에는 경기노회장으로 참가하여 총회장에 당선되었다. 그리고 이 총회에서 자신이 편집한 {신편찬송가}를 장로교에서 공식적으로 사용하도록 결의하게 하였다. 그만큼 1930년대 중반에 장로회 안에서 그의 지위가 확고해 졌음을 알 수 있다.

해방 후 기독교서회 총무가 된 김춘배 목사가 정인과 목사를 찾아가 그가 가지고 있는 {신편찬송가}의 판권을 서회로 돌려달라고 요구하였으나 거부당했다. 그후 그는 이 판권을 고려신학교 교단측에 팔아넘겼다고 한다.({대한기독교서회 백년사}, 58쪽) 사실 정인과가 교계의 비난을 받으면서까지 찬송가를 별도로 편집하고 자신의 명의로 발간하였던 것은 그가 내세운 명분이야 어떠튼 바로 이 판권에 따른 막대한 이권에 있었던 것을 시사해 주는 대목이다.

또 하나의 교회 연합운동에 걸림돌이 되고 심지어는 장로교 내부에서도 남북분열의 위기로까지 몰고 갔던 것은 지역적 인맥적 당파성이었다. 특히 이 시기 국내 교계에서 이승만의 동지회 계열과 안창호의 흥사단 계열간의 대립은 심각했다. 그런데 바로 이 동지회 계열의 지도적 인물이 중앙기독교청년회의 신흥우 총무였고, 흥사단 계열의 교계 실력자는 종교교육부의 정인과 총무였다. 김인서는 그가 발행하던 {신앙생활}지 1935년 1월호에 이러한 대립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청주회의 석상에 드러난 소위 남북분열의 원인은 1왈 '경성목사의 분쟁이요' 2왈 '정인과 목사와 신흥우 박사의 불화라고'. 청주회의에 나타난 바와 같이 남북 분열의 원인이 과연 이상 2조에 있다 하더라도 제1원인에 대하여는 분쟁하는 경성 목사를 총회가 이미 권징하였지만 경성노회는 여전히 불복이고, 제2원에 재하여는 중앙기독청년회의 신 총무와 종교교육부 정 총무와의 불화에는 총회도 어찌할 방법이 없을 것이다. 그러면 조선 교회의 병인을 알고도 수술 못하는 난치병에 걸린 것이다."

결국 장로교는 정인과 계열 동우회만 합법화 하고 신흥우 계열의 적극신앙단은 이단으로 정죄하여 이에 가담했던 인물들을 교계에 사과성명을 내고 탈퇴하게 하였다. 이는 정인과 계열이 장로교의 교권을 지배하게 되었음을 말해준다.

정인과 목사가 일제에 적극적으로 협력하게 된 것은 1937년 6월 이른바 [동우회 사건]으로 구속되어 취조를 받은 후부터로 알려져 있다. 동우회 사건이란 일제가 본격적인 대륙침략을 앞두고 조선 지식인 내지 지도자들을 적극적인 정책 협력자로 만들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일으킨 사건으로 그간 묵인하거나 방조하였던 민족개량주의 노선에 대한 본격적인 탄압사건이었다. 정인과는 미주와 상해 등지에서부터 안창호의 권유로 흥사단에 가입하여 활동하였으며 국내에 들어와서도 같은 계열인 동우회에 가담하여 활동하던 지도적 인물이었다. 그는 이 사건으로 구속되었다가 이미 친일파로 전향하여 일제에 적극적으로 협력하고 있던 오문환의 도움으로 풀려나 일제 경찰의 비호를 받으면서 그도 적극적 친일활동에 가담하였다. 이에 대하여 해방 후 어떤 목사는 익명의 기고문에서 이렇게 이야기 하고 있다.

"기타무라(北村)가 경기도 경찰부 고등과장으로 영전되자 H의 활동 무대는 서울로 옮겨졌고 대담한 활동을 벌리게 되었다. 전쟁중 선교사가 쫓겨나자 대영성서공회와 기독교서회를 작난했고,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검거된 종교교육부의 C를 무사히 석방시켜준 구실로 그를 황국신민으로 전향케 하여, 군기헌납운동에 열광케 했다."

여기서 H는 오문환이요 C는 정인과 목사를 지칭하는 것임은 물론이다.

장로교는 신사참배를 가결한 이듬해인 1939년 9월 총회에서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예수교장로회연맹]을 결성하고, 일제의 이른바 "국책 수행에 협력"할 것을 다짐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협력을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 이듬해 일제의 지시에 따라 '총회 중앙상치위원회'를 조직하고 총간사로 정인과 목사가 취임하였다. 이 상치위원회는 1940년 11월 성명과 함께 '장로회지도요강'이라는 것을 발표하였는데 그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국체의 본의에 기하야 당국의 지도를 준수하고 국책에 순응하야 과거 구미(歐美)의존의 사념(邪念)을 금절(禁切)하고 일본적 기독교의 순화갱정에 노력하는 동시에 교도로 하야금 그 직에서 멸사봉공의 성을 봉하야 충량한 제국신민으로서 협심육력(協心戮力) 동아질서의 건설에 용왕(勇往) 매진키를 기함."(매일신보 1940.11.10일자)

여기에 이어서 실천방책으로 신사참배, 궁성요배, 황국신민서사 제창 등을 규정하고 교회의 헌법·교리·교법·의식 등을 전반적으로 재검토하여 민족주의적 색채를 배제하고 순정 일본적 기독교로 할 것과 찬미가 등 전기독교 서적 출판물을 검토하여 일본 국체에 배치되는 자구를 개정할 것 등을 규정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내용을 이미 일제측이 마련한 것을 발표한 것에 불과하였지만 일제측의 요구대로 정인과를 중심으로 한 상치위원회는 이를 충실히 수행하여 교회의 본질까지도 내팽개치고 교회를 일제의 침략정책에 따르는 일종의 어용 교회기구로 전락시켰던 것이다. 1942년 5월 11일 국민총력조선야소교장로회총회연맹 총간사 덕천인과(정인과)의 명의로 각노회연맹 이사장에게 보낸 다음과 같은 [헌종(獻鐘)보고서 독촉의 건]이라는 공문은 위협적 언사까지 사용하면서 일제에 협력을 강요하고 있다.

"수제(首題)의 건에 관하여 4월 24일부로써 공문을 발하였던 바, 5월 5일까지 다수 보고서가 도착하지 않기 때문에 전(全)노회의 보고 통계서를 작성함에 곤란할 뿐더러 당국 관계 방면에도 크게 영향이 되는 동시 귀노회 연맹의 사무처리상에도 여하한 영향이 미치게 될 점까지 착념하여, 우 보고 연기기간되는 5월 15일까지 동봉 엽서에 귀노회 연맹의 헌종 보고서를 꼭 제출하도록 주의하여 주시기를 절망(切望)하여 마지 않는 바입니다."([기독교신문] 1942년 5월 20일자)

정인과는 이러한 친일협력 성향 때문에 장로교 내에서뿐만 아니라 1941년 1월에는 국민총력연맹 문화부 문화위원에 임명되어 활동하기도 하였다.

정인과가 일제의 기관지 [매일신보]에 1941년 9월 3일부터 5일까지 3회에 걸쳐서 기고한 "일본적 기독교로서-익찬일로의 신출발"이라는 글에서 장로교의 친일협력 상황을 상세하게 소개 하면서 결론 부분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과거 50년 동안이나 구미사상에 교착되었던 조선기독교가 불과 3-4년간에 그 거단(巨團)을 움직여 시국의 기치 아래 일체 동원이 되도록 기구가 혁신되어 감은 멸사봉공의 정신을 함양해 온 교단으로서 현명한 당국의 선도와 지도적 원리를 일단 해득하게 될 때에 당국 신뢰의 추세는 실로 창류(漲流)의 감을 금치 못한다...그렇다고 해서 자화자찬으로 우리는 결코 이에 만족치 아니한다. 앞으로 일보 일보 내선일체의 철저화에 최후적 단계에 이르도록 계속 노력하려 하는 바인즉 사회 각 방면의 편달과 당국의 끊임없는 선도를 기대하여 마지 아니한다."

부일협력을 자랑으로 여기고 일제의 적극적인 간섭을 자청할 정도로 그는 변해있었던 것이다. 그는 그후에도 {동양지광} 1942년 2월호 특집 "영미타도좌담회"에 참석하여 "미·영인의 종교정책"을 발표하고,{조광} 1942년 2월호에도 "필승의 신념"이라는 글을 게재하여 친일논설을 폈다.

당시 이러한 정인과에 대한 일제 경찰의 신뢰와 비호는 대단하였던 것 같다. 한때 신사참배문제로 60일동안 경기도 경찰부 유치장에 구금되었던 전필순은 그 때 일을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신문할 때 사유를 알게 되었는데 이러했다. 만주에 있는 선교사 헌트(韓富善)씨와 결탁해서 신사참배(神社參拜)를 거부할 것을 목적으로 하는 조직체를 만들어 전국적으로 운동을 전개하고 있으니 그 장본인을 지명수배해서 잡아 가두어 그 일을 좌절시키라는 상부의 명령이 내려져 구속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배후의 인물은 정인과(鄭仁果)씨인데 장본인은 나를 위시한 모모 인사들이라고 경기도 경찰부 고등계 주임 재하(齋賀)라는 작자의 설명이었다. 그는 또 정인과씨와 사이가 좋아지면 문제는 간단하게 해결될 것이라고 하였다. 그의 말을 전적으로 신용한다는 것도 고려할 일이지마는, 여하간 분노가 들끓어 치솟던 것만은 사실이었다."({목회여운},97쪽)

성서공회도 영국인 홉스 총무가 떠난 후 정태응 총무가 맡고 있었으나 일제 당국은 그를 간첩혐의로 검속하고 1941년 4월 1일부터 정인과에게 맡기도록 지시하였다가, 이듬해 5월 23일자로 적산으로 압류하고 말았다.

일제가 모든 기독교계 신문 잡지를 폐간 시킨 후 1942년 4월 유일한 교계언론으로 [기독교신문]을 창간할 때도, 창립총회를 경기도 경찰부에서 관계관들의 참석하에 하게 하고, 경기도경찰부 고등경찰과장 사노(佐野吾作)가 정인과 목사를 이 신문의 발간 주체인 기독교신문협회 회장으로 지명하였다. 이것도 그가 얼마나 일제 경찰의 신임을 얻고 있었나를 단적으로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만큼 그는 일제 경찰에 철저히 "순응"하여 비호를 받았던 것이다. 이 신문은 1942년 4월 29일 소위 천장절에 창간호를 내게 되는데, 정인과는 이 신문의 창간사에서 "본보(本報)는 반도 기독교의 일본적 진전에 기여하려고 출생하는 것"이라고 발행 목적과 강령을 밝히고 있다. 이 신문은 그 첫호부터 이러한 목적과 취지에 충실하여, 해방이 되기까지 그야말로 기독교계 부일협력의 유일한 기관지 역할을 하였다. 정인과는 이 신문을 통하여 해방이 되기까지 기독교계의 부일협력을 독려하였던 것이다.

정인과 목사는 이러한 적극적인 친일 행각 때문에 해방 후 기독교 목사로서는 제일 먼저 1949년 2월 22일에 반민특위에 체포되었다. 이에 대하여 {반민자죄상기}(1949)는 "[유다]의 직계 정인과"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2월 22일 특위는 8·15전 일제에 충성하는 데 민족과 신앙을 판 새로운 [유다] 정인과를 체포하였다. 기독교 신자로서 교회 목사로서 '요단강 건너가 만나리' '주께 영광이 있으라'고 찬송가를 부르고 성경을 읽으며 기도하던 목사 정인과는 배신자로서 [유다]도 놀라게끔 전쟁 말기에 온갖 매족 매교 행위를 하였으니 기독교 대신 신도(神道)니 황도(皇道)를 모시고 기독교총진회장이 되어 신도배(神道輩)들과 손을 잡고 신궁참배를 한다고 숨이 턱에 닿도록 남산 돌층계를 오르내렸으며, 십자가 앞에 수난의 미사를 올리는 양같은 교인들을 강제로 끌고 나가 신궁참배를 시켰다. 여기서 한 수를 더 떠 헌금헌납운동을 일으키고 신궁참배를 반대하는 교인들을 '비국민'이고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것이니 '참회를 하라'고 도리어 꾸짖고 대들었으며, 신궁참배 않는 교회는 그 교회당까지 일제와 손을 잡고 폐쇄 혹은 팔아먹기까지 하였다. '신궁을 참배하자' '성전(聖戰)에 헌금 헌납을 하자' '신도와 황도를 모시고 이 앞에 고개 숙여 기도를 하자'고 설교하기에 목이 쉴 지경이었으며 여기서 더욱 광신에 들떠 '미소기를 한번 해 보지'하고 나서기까지 하였다. 이토록 기독교를 팔고 민족을 파는 데 애쓴 대한판(大韓版) [유다] 정인과는 지금 죄의 심판을 앞두고 신궁 대신 철창 안에서 무슨 기도를 또 하느라고 눈을 지긋이 감고 있다고 한다."

그는 이러한 지나친 친일 행각 때문에 거기서 석방된 후에도 교계에 복귀하지 못하고 경기도 파주, 송탄 등지에서 외롭게 은거하다가 1972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변절은 일제의 위협과 회유에도 그 원인이 있었겠지만, 그가 교계에서의 지위에 지나치게 집착하였기 때문이었던 것같다. 이러한 그릇된 집착은 개인을 파멸시킬뿐만 아니라 교회와 사회에도 누를 끼치게 되는 것이다.

* 오디세이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02-09-17 1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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