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희도 4. 용서받지 못할 민족 반역자

박희도 4. 용서받지 못할 민족 반역자

발견 0 5,099 2002.09.17 18:34


해방 후 그의 행적에 대해서는 반민특위에 피체되었다가 풀려난 것 외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아마 과거 지나친 친일 행각 때문에 나서서 행동하기는 어려웠던 것 같다.

1949년 2월 반민특위가 활동을 개시할 무렵 나온 {민족정기의 심판}이라는 책에서는
"민족운동에서 황민화운동으로 전향한 동양지광 사장 박희도의 죄상"이라는 제하에 그의 친일 변절을 다음과 같이 신랄하게 매도(罵倒)하고 있다.

"박희도는 과거 민족운동자의 한 사람으로 3·1운동 당시 33인 중에 1인으로서 열심히 운동하던 자로서 한 동안은 그의 명성이 자자하더니, 일본 세력이 점점 강해짐을 본 그는 돌연히 방면을 돌려 일본에 아부하여 자기 개성을 발전시키려고 과거의 투지와 절개를 초개같이 버리고, 또 동지를 배반하고 부귀공명을 누리려고 일제의 충신이 된 그는 황국신민화 운동을 철저히 함으로써 왜인(倭人)들에게 다대한 신임을 받았으며, 또 {동양지광}이라는 잡지를 발간하여 친일과 전쟁협력에 유일한 일본의 기관지가 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황민화운동에 열중한 박희도는 지방순회강연대 평안남도 책임반으로 피선되어 김영필 등과 함께 순회강연을 하였다 하며, 그 외에도 강연·좌담회 등에 열심히 참가하여 우리 조선 민족의 혼을 말살하기에 부심하며, 황민화운동·지원병·학병·국방헌납 독려 등에 적극적으로 활동하였을 뿐 아니라, 일제에 가장 충견이 된 1인자로 그야말로 의식적인 일본의 적자(赤子)요, 황민(皇民)이었던 것이다....해방이 되고 건국이 된 오늘날은 그 모습이 가장 음흉하고 추잡한 민족반역자를 낙인한 듯 해괴한 흉악상으로 보인 것이다. 머리털로 발굽까지 변절하여 왜놈의 적자가 된 박희도는...민족적 견지로 보아서 용서치 못할 반역자라 아니할 수 없을 것이다."(186-187쪽)


그리고 이보다 앞서 1948년 9월에 나온 {친일파의 군상}에서도 박희도를 "자진적으로 나서서 성심으로 활동한 자"로 분류하고, 그 중에서도 "친일을 하여 내선일체를 기하고 전쟁에 협력하여 일본인 승리할 시는 조선민족의 복리를 도모할 수 있다고 생각한 자"의 대표적인 예로 거명하고 있다.

그는 1949년 반민특위에 피체되었다가 풀려난 후, 6·25전란 중인 1951년 9월 21일에 세상을 떠났다. ***


<참고문헌>

·이병헌,{3·1운동 비사}(1959)

·{新生活}(1922)

·{중앙대학교사}(1970)

·{東洋之光}(1939-1944)

·{민족정기의 심판}(1949)

·{친일파군상}(1948)

·윤치영,{尹致暎의 20世紀}(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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