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군 전쟁의 역사를 요약해 봤습니다.

"기독교의 역사"에서 주로 다룰 주제는 기독교인들이 저질러온 죄악들,
예를들어 십자군, 마녀사냥, 이단사냥, 루터와 칼뱅의 망언 사례, 인디언과 인디오 학살 등을 역사적 자료를 통해 조명하고,
기독교가 로마에 의해 공인된 과정, 유대인들의 역사 등 다채로운 주제를 포함하게 될 것입니다.

십자군 전쟁의 역사를 요약해 봤습니다.

러셀 0 6,107 2004.03.27 22:00
초기의 기독교도가 세계의 종말이 온다고 믿었던 서기 1000년경, 스페인에서의 아리비안인들의 세력이 점차 사라지고 있던 무렵, 스칸디나비아의 용병을 태운 비잔티움 함대는 아리비아의 해적을 섬멸하고 북아프리카의 이슬람 요새를 분쇄하였다.

아라비아인의 퇴조로 비잔티움은 오히려 곤란에 처하게 된다. 바그다드의 중요성이 엷어짐에 따라 동방에서 유럽으로의 교역은 바그다드를 피하기 시작하고, 바그다드와의 교역통로 중간에 있던 비잔티움도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게 된다.

설상가상으로 비잔티움의 동쪽에서 터키인들이 강력하게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강인한 유목민족 이었던 터키인을 셀주크라는 강력한 일족이 지배하기 시작한다. 사라센 제국의 시작이다.
셀주크 터키는 바그다드를 제압하고 그리스로부터 아르메니아를 빼앗고 최후에는 소아시아 전역을 지배하기에 이른다. 이로서 비잔틴 제국(동로마 제국) 과의 격돌을 피할 수 없는 상황이 된다.

1071년 터키군은 아르메니아의 마라즈길드 전투에서 비잔티움 군대에 완벽한 승리를 거두고 예수살렘은 저항없이 터키인의 손에 들어간다.
비잔틴 제국의 황제 미카엘 7세는 로마 교황에게 구원을 청한다. 당시의 교황은 프랑스 출신 우르바누스2세, 1095년 교황은 프랑스로 달려가서 각지의 주교들에게 클레르몽으로 집합하라고 명하고 옥외의 높은 곳으로 올라가서 성지에서의 기독교도에 대한 터키인의 잔학한 행위를 전하였다.

사실은 터키인이 기독교도를 박해하였다는 증거는 거의 없다. 터키인이 엄격하게 대한 상대는 자신들 종교의 분파이다. 그러나 성지순례가 종전보다 훨씬 위험해진것만은 사실. 교황이 성지십자군을 제창하자 수백명의 귀족은 무릎을 꿇고 자신의 몸과 재산을 신에 대한 봉사에 바치는 것을 동의 하였다.

또 한명의 십자군 제창자는 은자 피에르, 이가 득실거리는 지저분한 수도사이다. 훗날의 히틀러와 같은 카리스마적 마력이 있었는지 민중들은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당시의 민중들은 고달픈 생활에 찌들려 있었다.

성지순례는 하루에 16시간이나 밭을 가는 생활보다는 월등히 나을것으로 생각하고 그들은 따라 나섰다. 이리하여 불길한 어릿광대 놀음이 시작된다. 십자군 전쟁의 시작이다.

무지한 농부들은 자신들과 싸울 상대가 누구인지 조차 모르고 있다. 다른나라 사람들은 모두 이교도라고 막연하게 생각할 뿐이다.

독일의 라인라트에서는 에미히 백작이라는 인물 주변에 수천 명이 몰려들었다. 어느날 아침 눈을 떠보니 자신의 몸에 십자가의 각인이 찍혀 있었다고 주장한 인물이다. 에미히 백작은 학살은 국내에서 시작하여도 괜찮다고 생각한 모양인지, 추종자들에게 슈파이어의 유대인에 대한 공격을 명령하였다. 남자는 죽음의 고통에 의하여, 여자는 능욕에 의하여 이교도는 기독교도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 그들은 보르무스 도시에서는 이틀간에 걸쳐 수많은 유대교도들을 학살하고, 라인강으로 남하하여 유대인을 닥치는 대로 학살하였다.

헝가리에서는 질서있게 행동한다는 조건으로 왕으로부터 식량공급을 약속받은 십자군도 있었다. 그들은 이것을 국내에서 약탈해도 된다는 묵인으로 받아들여 헝가리의 어린 사내아이를 꼬챙이로 꿰어 다니기도 하였다. 이에 헝가리 왕은 자기나라 를 통과하려면 일시적으로 무장을 해제하여야 한다고 포고하고, 십자군들이 무장해제한 사실을 확인하자 헝가리 군대는 십자군들을 덮쳐 몰살시켜 버렸다.

에미히의 십자군은 헝가리 입국을 거부 당하자 헝가리와 맞서 싸우지만 전멸의 쓰라림을 맞보고 만다.

은자 피에로를 따르는 무리들은 1096년에 콘스탄티노플에 도착하였다. 도중에 헝가리의 어느 도시를 덮쳐 약 4000여명의 주민을 학살하였다. 콘스탄티노플에서 약탈과 강도짓을 일삼자 동로마 황제 알렉시우스 1세는 서둘러 그들을 적지로 내 보낸다.

적지에 밀고 들어간 피에로의 십자군은 말로 다하지 못할 잔학한 행위를 저지르다가 터키군대의 포위공격을 받고 거의 전멸하고 만다. 일부 동로마 황제의 구출에 의해 살아남은 무리들은 무장을 해제당하고 고향으로 돌아가게 된다. 이것이 제1차 십자군의 실질적인 최후였다.

이듬해 고드프라 드 부용이라는 인물이 이끄는 무리들이 콘스탄티노플에 도착하였다. 터키군과 옥신각신을 되풀이 하고, 더위와 갈증으로 많은 사람들이 목슴을 잃었다. 그래도 십자군은 시리아의 들판으로 진격하여 안티오크를 포위공격 하기를 9개월, 간신히 함락하였다. 당연한 일이지만 그도시의 터키인들은 한사람도 남지 않고 학살 되었다.

십자군들은 예루살렘으로 행진을 계속하여 7일동안 무자비한 살육을 저지른다. 단 한사람의 예외도 없다. 유대인들이 교회당으로 도망하면 거기에 불을 질러 전원을 태워 죽였다. 역사가 살로몬 라이나흐는 저서 [오르페우스, 종교의 역사]에서 비꼬는 투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일주일 안에 7만 명의 인간이 죽음을 당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의 도덕률의 우위성을 증명하는 행위라는 것이었다"

역사의 관점에서 보면 최초의 십자군 전쟁에서의 성공은 유럽을 파멸로 이끈 요인이 된다. 기독교도들은 이것으로 성지를 일종의 교회 영지로 만들 수 있다고 확신하였다. 그 결과 2세기에 걸쳐 8회의 십자군 원정이 행해진다. 거의 모두가 참담한 패배였다. 최초의 성공은 두 번 다시 되풀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최초의 성공은 뒤의 행동을 계속 부추긴다. 1144년 터키군이 에데사를 점령하자 프랑스의 루이 7세는 제2차 십자군을 파병하지만 큰 실패로 끝난다. 1174년에는 살라딘이라는 아라비아의 뛰어난 우두머리가 기독교도에 대한 성전을 부르짖으며 전쟁을 일으켜 1187년에는 예루살렘을 탈취한다. 이것을 탈환하기 위하여 제3차 십자군이 파견되지만
역시 실패한다.

십자군 중에서도 가장 미친짓이요, 비극적인 것은 1212년 소년십자군의 파병이다. 크루아라는 마을의 스테판이라는 12세의 양치기 소년이 양을 돌보고 있을 때 예수가 나타나서 건네주었다는 한통의 편지를 프랑스의 필리프왕에게 전하고 성전을 주장하였으나 왕은 믿지 않았다. 그러나 소년은 꺾이지 않고 계속 주장하였다. 자신이 전투에 나가면 바다는 바싹 말라 육지가 되고, 신의 가호를 받은 소년들은 사라센 군대를 타도할 것이라고.

12세 이하의 남녀 어린이 3만명이 방돔에 모여 슬픈눈으로 지켜보는 부모들을 뒤로하고 마르세유를 향하여 진격하였다. 행군도중 많은 아이들이 갈증으로 죽고, 바다에 도착한 아이들은 스테판의 말대로 물이 바싹마르기를 기다렸으나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계속 기적이 일어나기를 고대하던 아이들을 바다상인들이 팔레스티나로 데려다 주겠다고 꼬드겨 사라센 상인을 통하여 알렉산드리아와 바그다드의 노예로 팔아먹는다.

독일에서는 니콜라스라는 소년이 2만여명의 어린아이를 인솔하여 십자군 전쟁에 나섰다가 로마 교황이 간곡하게 타일러 집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무사히 집으로 돌아간 아이들은 얼마되지 않았고 니콜라스라는 소년도 사라져 버렸다.

소년 십자군은 제5차 십자군의 도화선이 된다. "아이들 까지도..."라고 교황은 선동하였다. 터키군의 협상제의를 무시하고 전쟁을 치렀으나 술탄의 군대는 기독교도보다 강하였다. 십자군은 타협에 응하고 유럽으로 철수하였다.

그후십자군은 6차, 7차, 8차, 9차로 이어지지만 한결같이 실패로 끝난다. 성지를 사라센으로부터 해방하기는커녕, 십자군 원정이 끝날 무렵에는 도나우강 유역은 터키의 지배하에 들어가 있었다.

사라센은 또다른 의미에서도 승리하였다.
1096년 고향을 출발한 무지한 농부십자군들과 마찬가지로 무지한 귀족들은 자기 마을의 경계선 너머로 가본 일도 없는 자들이었다. 이교도와의 싸움을 그만둔 지금, 그들은 배우기 시작하였다. 이슬람교도는 선량한 기독교도 보다 더욱 존경할 만하고 예의 바르며, 자기들의 대부분보다 훨씬 더 교양이 있다는 것을.

또 시골에서 자란 수많은 무식쟁이들에게 십자군은 일종의 대학이기도 하였다. 십자군이 종결되었을 무렵, 유럽은 시골의 후진상태에서 간신이 벗어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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