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암리 글임니다..

"기독교의 역사"에서 주로 다룰 주제는 기독교인들이 저질러온 죄악들,
예를들어 십자군, 마녀사냥, 이단사냥, 루터와 칼뱅의 망언 사례, 인디언과 인디오 학살 등을 역사적 자료를 통해 조명하고,
기독교가 로마에 의해 공인된 과정, 유대인들의 역사 등 다채로운 주제를 포함하게 될 것입니다.

제암리 글임니다..

붉은악마 0 2,960 2002.12.12 03:58

역사와 진실


왜곡된 역사는 반드시 바로 세워야 한다(하)
- 경기도 제암리 사건의 진실을 중심으로
김 선 진 동천교구·동천고 종학실장

 

5. 3.1운동을 재조명한다


‘일제치하에서 항일 구국투쟁을 전개한 애국지사들의 유족은 3대(代)를 못 산다는 것이 대한민국의 병폐’라는 말들을 한다. 반면에 일제시대 친일을 한 민족반역자의 후손들은 대부분 오늘날까지 부와 권력을 유지하며 호의호식을 누리며 살아 왔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일 것이다. 이것은 역사가 잘못 되어도 크게 잘못된 일이 아닌가? 애국자는 매국노가 되고 매국노는 애국자가 되는 혼돈된 역사 속에서 이 사회가 어찌 안정을 유지하며 발전해 나갈 것인가? 왜곡된 역사를 바로 잡지 않는 한 진정한 국권 회복과 자주통일은 기대할 수 없는 것이다.
해방 후의 역사에 있어서도 긍정 부정의 평가는 연구가 완성된 후 밝힐 만큼 밝혀진 결과를 보아 결정된 문제이다. 그러나 백범 김구 선생의 피살 사건 하나도 그 진상이 드러나지 않은 채 살인자가 피살당한 현실에 와서도 긍정 부정을 따지자는 것은 어떤 종류의 목적의식에 맞춰서 역사를 왜곡하자는 말밖에 되지 않는 것이다. 이런 종류의 목적의식, 선입견, 편견 때문에 우리의 역사는 상당한 부분이 실체와 거리가 먼 허상의 역사가 되어 버린 것이다.
 1997년 3월호 한 월간잡지 기사에는 그 같은 역사인식의 오류를 실감나게 느낄 수 있는 대목이 실렸다. 월간 『우리용산』 3월호에 <3.1운동을 재조명한다>라는 제목으로 게재된 고 이명룡 선생(33인 중 한 분) 유족과의 대담기사 내용이 바로 그것이다.
기사의 요지는 ‘3.1운동의 주체는 기독교이며 왜곡된 역사를 고쳐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좀더 자세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3.1운동은 기독교에서 1919년 2월 5일경 논의가 시작돼 이승훈이 천도교의 최린, 권동진, 오세창을 설득하여 공동거사로 결정되었다. 천도교에서 선언문을 인쇄하고 자금을 대며, 기독교에서는 배포 및 영어·일어 번역을 맡았는데 기독교는 자금이 없어 천도교에서 5천환을 차용해 썼다. 거사비에는 손을 안 대고 자비로 묵묵히 일한 분은 이승훈, 이명룡 두 분으로, 이승훈이 아니었다면 아마도 3.1운동은 힘들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 5천환의 현금 사용 내역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 이승훈은 최린에게서 5천환을 채용하여 박희도에게 거사비로 주었다. 그 돈의 사용처는 현순이 상해 가는 여비로 2천환, 안세창에게 7백환, 이갑성에게 1백4십환으로 독립선언서를 각 지방에 보내는 여비, 또 1백4십환은 현순이 상해로 갈 때 서류가 되지 않아서 서류와 선언서를 안도연까지 가지고 가서 상해로 보내기로 사람을 보내는 여비, 함태영에게 오십환을 주어 평안도에 보내는 여비, 오화영에게 5십환을 주어 개성으로 동지 모집차 보냈고, 정춘수에게 4십환을 주어 함경도 가는 데 쓰도록 했고, 최성모에게 4십환을 주어 경성 체재 중 동지 모집에 쓰라고 이갑성에게 주고, 그밖에 경성에 있는 이필주에게 7십환, 박동환에게 1백환, 신석구에게 1백환, 이갑성에게 8십환, 오화영에게 8십환, 박희도가 1백환, 김창준에게 8십환을 각각 준 것은 가족 생활비였으며 현준의 여행도구 구입비도 지불되었다. 그리고 8십환은 동지들이 모일 때 음식과 교통비로 박희도가 썼고 유명근에게 나머지 돈을 맡겨둔 것은 그대로 있었다는 것이다. 또 민족대표의 서열 문제에도, 누구를 가장 앞에 내세우느냐 하는 문제에 대하여 이승훈은 손병희를 예우하여 민족대표로 하고 길선주, 이필주를 각 교단의 대표자로 앞세우고 그 다음 가나다 순으로 한 것이다. 여기에 또한 새로운 사실은 제 조부[이명룡]는 선천에 있는 양전백, 유여대, 김병근 세 분의 인장을 가지고 직접 경성에 가서 참석하여 찍고 대리 인장도 찍어준 것이다. 그렇다면 3.1운동 거사는 이승훈이 아니었다면 아마도 3.1운동은 힘들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다.”

실로 어처구니 없게도 “손병희는 직접 거사에 참여한 분이 아니라 천도교 영수이기에 대접해 드린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역사의 진실은 어떠한가. 천도교에서는 1917년 말부터 국권회복운동의 최적기라는 의견이 모아졌고 의암 손병희 성사와 권동진, 오세창과의 잦은 토의에서 국권피탈 직후부터 국권 회복을 위한 준비에 착수했으며 최린이 이에 가세했다. 1919년 1월 권동진, 오세창, 최린이 독립운동을 대중화·일원화·비폭력화의 3대원칙으로 진행하기로 합의하고 각계 인사들과 교섭을 하였으나 유림과 귀족층들로부터는 대부분 거절당했다.
기독교에서는 이승훈을 중심으로 자발적인 움직임이 있었으며, 한때 공동거사에 반대하는 측도 있었으나 천도교에서 운동비용 5천환을 지원하기로 합의하고, 이승훈은 독자적 운동으로 방침이 기운 기독교측을 설득했다. 불교측에서는 한용운, 백용성이 가담했다. 이렇게 하여 3.1운동은 천도교, 기독교, 불교 등이 합심하여 주동하게 되었으며 특히 천도교는 전국에 산재한 각지역 종리원을 근거지로 하여 일사불란한 연락체계를 조직화하여 독립만세시위가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했던 것이다.
천도교에서 3.1국권회복운동에 부담한 자금 내역의 전모가 자세히 밝혀지지는 않았으나 실로 막대한 금액이 지출되었다는 사실은 명백하다. 기독교측에 대여 명목으로 나간 5천환과 거사자금, 그리고 해외로 송금한 독립운동자금은 상상을 초월한 헤아릴 수 없는 큰 돈이었다. 천도교인들 대부분이 가난한 농민이었던 것을 감안한다면 그 값어치는 더욱 막대한 것이다.
 1918년 이미 손병희 선생은 국권 회복에 대해 교인들에게 은밀히 설교하면서 계속되어 오던 성금모금을 더욱 독려하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월간 『우리용산』 3월호 기사에서 “손병희는 직접 거사운동에 참여한 분이 아니라 천도교 영수이기에 대접해 드린 것”이라는 유족의 말은 실로 아연질색하지 않을 수 없는 대목이다. 역사적인 사실들을 깊이 알아보지도 않고 단편적이고 지엽적인 사실만으로 맹목적으로 주장하는 것은 손병희 선생뿐만 아니라 이명룡 선생, 아니 33인 민족대표까지 욕되게 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그러면 천도교의 주도로 일어난 3.1국권회복운동의 진정한 주체는 누구일까? 고 임종국 씨의 유고에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이상이 만세에 등을 돌린 계층들인데 그럼 만세는 도대체 누가 불렀는가? ① 한말 지배층 ② 직업적 친일분자 ③ 친일 관료층 ④ 예속지주 ⑤ 매판자본가 ⑥ 시천교 ⑦ 구세군 ⑧ 천주교 ⑨ 지식계층 일부가 조선동포 1,680만명 중에서 빠졌다면 상류층은 모두 다 등을 돌렸다는 이야기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만세에 침을 뱉고 등을 돌린 반역자들이 자기들도 한몫 한듯이 가장하여 남이 해놓은 밥에 숟가락을 들고 덤벼들어 ‘거족적’ 항쟁으로 위조시키고 만 것이다. 그렇다면 만세는 1년여 동안 누가 불렀단 말인가? 그것은 틀림없이 갑오년의 동학항전과 같은 일반 민초들이었다는 것이 틀림없는 사실일 것이다.”
임종국 씨의 발언은 주로 당시 민족반역자였던 상류층이 훗날 역사서술에서 두루뭉실하게 3.1운동의 주체로 동참한 것처럼 서술되는 것을 경계하는 말이다. 반면에, 33인의 민족대표가 독립선언식을 마치고 그 즉시로 연행된 후 민족지도자들의 지도력은 상실되었다고 말하나, 어찌 지도자 없이 1년여 동안 계속적으로 전국 방방곡곡에서 노인, 노동자, 소상인, 그리고 학생들이 목숨을 걸고 항쟁을 계속할 수 있었을까? 3·1운동의 연구는 그들의 역할이 올바로 인식되는 바탕에서 출발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6. 제암리·고주리 사건의 진상


3·1운동 당시 삼괴 지역을 초토화 시키고 제암리 학살사건과 고주리 참살사건이 발생한 지 81주년을 맞아 이에 대한 고증과 정확한 진상이 밝혀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부 알려진 사실조차 왜곡되고 있는 현실은 유감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것은 학계와 관계 당국의 무성의에도 기인하겠지만 종교적 편견이 상승 작용을 하고 있다는 사실에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다.
제암리·고주리 사건을 둘러싼 역사적 요지는 한마디로 그 사건을 일으킨 일본군의 목적이 무엇인가 하는 점과 그때 학살당한 분들이 누구인가 하는 점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일본군이 노린 것은 삼괴지역 3.1운동의 주력이었던 천도교 세력에 대해 보복과 경고를 하겠다는 것이었으며 제암리 교회 현장에서 학살당한 23명 중 16명 이상은 천도교인들이었다는 것이 가장 중요한 역사적 사실이라는 점이다. 그런데 기독교 일각에서는 학살 장소가 예배당이었다는 점에만 주목하여 사건의 전후 사정을 모두 무시한 채 제암리를 기독교의 성지로 ‘왜곡’시키고 있는 것이다.
천도교는 이 민족의 종교이다. 따라서 외래종교인 서학과는 교리상 다르기 때문에 그들은 예배당에 들어갈 이유가 없다. 그러면 그 때 그 분들은 무슨 이유로 예배당에 들어가 참변을 당해야만 했을까? 여기서 우리들은 이 분들이 외부 강압에 의해 강제로 그곳에 끌려갔으며 또 많은 사람들을 한곳에 모아 몰살시키려면 넓은 장소가 필수적이었는데 그 기준에 맞는 장소가 오로지 예배당밖에 없었기 때문에 그 곳이 학살장소로 선택됐을 뿐이라는 전후 사정을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모든 학살사건은 사람과 그 사건 당사자간의 인과관계가 중요한 것이지 학살 장소 같은 것은 논외로 치는 것이 상식이다. 따라서 예배당에서 사건이 발생하였으니 이곳을 기독교 성지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일련의 주장들은 주객이 뒤바뀐 엉터리 역사를 억지로 꾸미려 획책하는 자들이라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
사실이 이러함에도 기독교인들은 독립운동 얘기만 나오면 으레 ‘유관순 열사’와 제암리 사건을 자랑스레 이야기 하고 이곳을 자기들 성지순례 코스로 잡고 있다. 따지고 보면 ‘유관순 열사’는 3.1운동 때 학살당한 수많은 사람 중 한 사람이고 제암리 학살사건 역시도 장소만 예배당이지 그 실상은 천도교의 성지로 삼아야 할 곳이다. 더욱 중대한 것은 기독교인들이 이렇듯 역사를 과장 왜곡하고자 하는 의도에 언론, 공기업 더구나 지자체까지 장단을 맞춰주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당시 희생된 순국선열들을 위해서나 또한 앞으로 후학들에게 민족 수난에 대한 산교육을 하는 데 있어서도 도무지 바람직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포덕 141(2000)년 4월 15일 오후 1시 천도교청년회중앙본부 주최로 이 마을 주민들과 함께 제암리 3.1운동순국선열위령탑 앞에서 81년 만에 처음으로 천도교 의식에 따라 순국선열 합동위령제를 봉행하였다. 이에 앞서 포덕123(1982)년 9월에도 경기도 주관으로 향남면 도이리 공동묘지에 있는 23구 선열의 유해를 발굴하여 현 제암리 뒷산에 묘소를 이장하면서 위령제를 지낸 적은 있었지만 순국일인 4월 15일에 맞춰 천도교가 주관해 행사를 치른 것은 처음이었다.
행사는 길놀이에 이어 큰북공연, 천명위령제, 살풀이, 진혼제, 대동제, 모듬북 공연 등의 순서로 진행되었으며 한국민족종교협의회 소속 교단 신도들도 참석하였다. 그런데도 이 행사에 즈음하여 각 신문들은 일제히 ‘제암리 유적 놓고, 개신교 천도교 갈등 우려’라고 논평을 하였다.
기독교(감리교)인들이 기독교 3.1운동의 대표적인 성지라고 선전하는 제암리 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천도교 제3세 교조 의암 손병희 선생의 10년에 걸친 치밀한 준비 끝에 거국적으로 일어난 기미 3.1운동의 뜨거운 열기가 식지 않은 1919년 4월 15일 오후 두시반경 교활한 일본 수비대들은 발안주재소장 사사키를 선두로 하여 마을에 들어와 “4월 5일 발안만세시위로 인해 마을사람들과 감정이 좋지 않아 사사키가 화해하고자 하오니 15세 이상 남자들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마을 예배당으로 모이시오” 하고 순사보 조희창은 주민들에게 이 말을 전했다. 그리고 명단을 조사하여 빠진 사람들은 쫓아가 잡아서 끌어왔다. 그들은 교회당 문밖에서 못질을 해놓고 예배당을 향해 집중사격을 하여 모두 23명을 사살한 후 석유를 뿌려 불을 질러 시체를 태우는 한편 31채의 집에다 불을 질러서 제암리를 초토화시켰다.
그리고 곧바로 10분 거리쯤 떨어져 있는 고주리로 올라가서 천도교인 김흥렬 선열 일가족 6명을 포박하여 집 뒤 언덕으로 끌고 올라가 삼괴지역 주동자 백낙렬의 출처를 묻는 데 불응하자 군도로 6명의 목을 치고 이어서 여섯 토막을 내어 살해한 후 불질러 유해마저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하는 천인공노할 희대의 참살극을 저질렀다. 김주업의 부인 한씨는 결혼한 지 3일 만에 너무나 잔인한 가족들의 참살 현장을 목격하고 큰 충격을 받아 그 날로 자리에 누워 3일 만에 죽고 말았다. 그래서 김흥렬 일가족 7명이 한꺼번에 몰살되고 만 것이다. 이것이 제암리·고주리 학살참살사건의 진상이다. 이는 일제가 저지른 만행 중 가장 잔혹한 사건으로서 한국판 난징(南京) 대학살로 비견되는 천인공노할 살륙사건이다.

필자는 1976년 이전부터 경기도 화성군 우정면, 장안면, 향남면, 팔탄면, 양감면을 중심으로 한 이 지방의 3.1운동사를 정리하기 위해서 약 3년에 걸쳐서 관계문헌의 조사와 현지답사 그리고 전동례(1976년 당시 86세), 김순남(1976년 당시 85세) 할머니를 비롯한 약 300여 명에 이르는 현지 증인들을 대상으로 증언을 청취한 바 있다. 필자가 제암리 고주리 학살사건을 조사하게 된 것은 이 지방이 삼괴지역 3.1운동의 주류를 이루고 있으면서 발안 만세시위와 제암리·고주리 학살사건이 깊게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이었고, 또 하나는 당시를 증언할 수 있는 증인들이 고령층이기 때문에 이 분들이 한 분이라도 더 생존하여 계실 때 정확한 조사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더욱 더 서두르게 된 것이다.
조사 결과는 제암리와 고주리뿐만 아니라 당시 삼괴지역 일대에서 광범위하게 진행된 일본군의 잔혹한 보복사건의 진상을 파악하게 되었고, 특히 제암리와 고주리 집단학살은 그 중에서도 가장 잔혹하고 악랄하여 일제의 잔학상의 일단을 잘 대변하여 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일제 식민지치하의 무단통치로 인한 민족 수난의 대표적 사례로 손꼽을 수 있다는 것이다.
 3.1운동은 천도교 제3세 교조 손병희 선생께서 기독교 대표와 불교 대표를 설득하고 그에 따른 막대한 거사자금을 전담한, 사실상 천도교가 주도한 운동이다.
당시 천도교인 숫자가 300 만명이었으며 민족대표 15분이 천도교인이었다는 사실 등 모든 역사책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그 중 제암리·고주리는 천도교 선도사 김흥렬 선생의 열렬한 포교로 천도교가 전국에서 가장 강했던 지역 중의 한 곳이었다.
 4월 15일 그 처참한 학살 당일. 10분 거리를 수비대들이 걸어 올라가서 김흥렬 선생 일가족을 무참히 난도질을 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따라서 필자는 제암리·고주리를 중심으로 한 일본군의 학살진상 및 이 지방의 3.1운동을 재조명함으로써 비명에 간 선열의 넋을 위로하고 다시는 이 땅에 이러한 비극이 되풀이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진상을 밝힌다.
일반적으로 제암리에서 희생된 선열들이 대부분 기독교인으로 알려져 있고 또 그렇게 왜곡시켜 왔다. 그리고 한때는 고주리에서 죽은 김흥렬 일가족도 교회당에서 죽인 것으로 왜곡시켜 왔다. 그러나 필자가 조사 추적한 바로는 어린이까지 합쳐서 제암리와 고주리의 희생자는 총 31명이다. 이중 22명이 천도교인이었고 나머지 9명이 감리교인 및 유교인이었다.
사실이 이럼에도 역사가 왜곡된 이유는, 첫째 희생된 장소가 감리교당이였다는 점, 둘째 3.1운동 이후 천도교에 대한 일제의 탄압으로 이 지역에 천도교인이 존속할 수 없었다는 점, 셋째 사건의 진상을 선교사들이 취재하여 왜곡하였다는 점, 넷째 왜곡시킨 일본의 기록을 참작한 점, 다섯째 사건의 경과를 주변 부락 사건과 연계해서 확인해야 하는데 그 부락에서 미화하여 멋대로 왜곡 정리했다는 이유 때문이다.
실지로 필자가 이 사건을 조사하기 위하여 1974년 3월 1일 제암리에 거주하는 안경순, 안상용의 유족인 김순이 할머니를 찾아 뵈었을 때 “3.1운동 당시는 우리도 모두 언니네와 같이 천도교를 믿고 있었지만 그 후 이 지방에 천도교가 없어지고 살아오는 동안 너무나 고통이 심해서 감리교로 개종했다”는 말을 천도교 조암교구 교역자 다섯 사람과 같이 분명히 들은 바 있다. 그리고 같은 해에 시집와서 제암리에서 함께 살고 있는 김순남(카톨릭), 전동례 할머니 등이 당시의 상황을 정확히 증언하여 주었으며, 고주리 김흥렬 일가족 시체를 추려 월문리 공동묘지에 장례를 치른 현병기(78년 94세), 김시열(78년 87세) 옹은 당시 천도교 신앙을 하였기 때문에 제암리·고주리 교인들의 이름을 상세히 전해 주었다.
따라서 학살 장소는 비록 예배당과 그 인근이었지만 사망자 대부분은 천도교인이었다는 사실은 움직일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이 가공할 학살사건의 진상을 날이 갈수록 기독교인들은 자기들 구미에 맞춰 멋대로 왜곡 날조하고 있기에 천도교 청년회에서는 ‘역사 바로잡기’ 차원에서 그 진상을 명백히 밝힘으로써 제암리 사건의 진상을 전국민에게 올바로 알리고자 노력하고 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2000년 1월 9일자 조선일보 기사에서는 제암리 사건은 3.1운동 직후인 1919년 4월 15일 일본 헌병들이 제암리 교회에 신도들을 가둬놓고 불을 질러 양민 23명을 살해한 사건이라고 기술하고 있으며, 화성군 문화원에서 발간한 『화성군지』를 비롯한 각종 자료에도 희생자 모두가 기독교인이라고 잘못 표기되어 있다. 또 1982년 경기도에서는 2억의 예산을 이 곳에 내려보내 교육관을 지어 기독교 자녀들을 교육시키고 있다. 게다가 공기업인 한국관광공사는 기독교 단체와 함께 작년 5월 이 곳을 기독교 성지순례 코스로 정했을 뿐만 아니라 화성군청에서조차 36억이라는 막대한 혈세를 투입, 이 곳에 교회와 역사교육관을 신축하고 주변의 단장 공사를 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문제는 역사교육관은 국민에게 올바른 역사를 가르쳐야 하는 곳임에도 불구하고 왜곡된 역사를 전파함으로써 마치 특정 종교의 홍보관으로 전락한 듯한 느낌을 주고 있다는 점이다.
교육관 내부에 있는 ‘학살현장 모형도’에는 역사적 진실을 외면한 채 등장인물 전체가 성경책을 읽고 있으며, 기념탑 안내문이나 순국유적지 간판 그 어디에도 이 사건의 주역인 천도교인을 언급한 글귀는 한마디 없이 두루뭉실하게 오로지 교회라는 장소만을 한껏 부각시킴으로써 관람객 누구나 제암리 사건은 기독교인들만 희생당한 사건이라는 착각을 일으키게끔 오도하고 있다. 이로 인해 제암리 주민들과 교회 사이에도 어색한 분위기가 흐르고 있다고 주민들은 말한다.
제암리의 안용웅 이장은 “3.1운동 당시에는 천도교가 번성했으나 지금은 교세가 약해 개신교 위주로 순국 유적이 꾸며지는 것에 대해 주민들이 드러내놓고 반대는 하지 못했을 뿐”이라며 교회에 대해 불편한 심기를 내비치기도 했다.
* 오디세이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02-12-12 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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