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의 왜곡 / 적 그리스도
한국 교회는 약자에 대한 강자의 폭력에 눈감고 침묵하고 방조하면서, 암묵적이건 명시적이건 국가 권력에 협조하여 특혜를 누려왔다.
이처럼 국가권력과 유착관계에 있는 종교권력은 국가권력을 정당화하고, 그 대가로 국가권력으로부터 물질적·제도적 성장을 위한 군종제도,교회 건립, 성직자 면세 등의 혜택을 받게 되었다.
이러한 유착관계를 정당화하는 바이블의 근거는 로마서의 바울의 말이었다.
마가복음 12장 17절의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라는 구절이 정치와 종교의 엄격한 분리를 뒷받침하는 근거를 제공되었고, 로마서 13장의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의 정하신바라.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리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림이니 거스리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 관원들은 선한 일에 대하여 두려움이 되지 않고 악한 일에 대하여 되나니 네가 권세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려느냐 선을 행하라. 그리하면 그에게 칭찬을 받으리라. 그는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네게 선을 이루는 자니라 그러나 네가 악을 행하거든 두려워하라 그가 공연히 칼을 가지지 아니하였으니 곧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악을 행하는 자에게 진노하심을 위하여 보응하는 자니라. 그러므로 굴복하지 아니할 수 없으니 노를 인하여만 할 것이 아니요 또한 양심을 인하여 할 것이라." [로마서 13장 1~5절] 바울의 말은 기독교의 권력유착을 더 강화하기 위한 증거물로 세상의 권위에 복종하는 이데올로기를 제시했다.
문제는 세상이 뒤바뀌니까 말을 바꾸어 역사를 왜곡하는 기독교의 행태이다.
해방직후 기독교는 떳떳하게 나설수 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친일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수십년의 세월이 지난후 오히려 민족의 독립에 앞장섰다고 큰소리를 치고 있다.
그들이 하고 있는 역사왜곡의 단서가 될만한 기사 하나를 살펴보자.
"제암리 유적 놓고 개신교ㆍ천도교 갈등우려/
3ㆍ1정신의 호국영령이 잠들어 있는 경기도 화성군 향남면 제암리 유적 을 놓고 개신교와 천도교간에 갈등이 우려된다.
천도교청년회 중앙본부(회장 김산)는 이 마을 주민들과 함께 15일 낮 12시 제암리 3ㆍ1운동 순국선열 위령탑 앞에서 81년만에 처음으로 천도교 예법에 따라 합동위령제를 개최한다.
유일한 생존자 전동례(92년 작고) 할머니의 증언에 따라 유해를 발굴, 82년 9월29일 경기도 주관으로 위령제를 지낸 적은 있었지만 순국일인 4 월 15일에 맞춰 천도교가 주관해 행사를 치르는 것은 최초이다.
길놀이에 이어 큰북공연, 천명, 위령제, 살풀이, 진혼제, 대동제, 모듬 북 공연등의 순서로 진행되며 한국민족종교협의회 소속교단 신도들도 참석할 예정이다.
천도교청년회가 개신교 성지로 알려진 이곳에서 위령제를 개최하는 것 은 당시희생자 가운데 상당수가 천도교인이었다는 주장에 근거하고 있다.
일제 헌병은 3ㆍ1 만세운동의 불길이 계속 타오르던 이곳의 주민 20여 명을 교회안에 몰아넣은 뒤 불을 질러 죽였으며 곧바로 인근의 팔탄면 고주리로 몰려가 김흥렬 천도교 전교사 일가족 7명을 난자해 목숨을 빼 앗았다.
김선진씨가 83년 펴낸 「일제의 학살만행을 고발한다」(미래문화사간)는 교회당 안에서 참살당한 주민 24명 가운데 천도교 신자가 15명이고 감리교 신자 및 기타가 9명이었다고 밝히고 있다.
김산 회장은 '고주리를 포함해 제암리 교회 주변에서 학살당한 주민은 모두 31명이며 이 가운데 천도교인은 22명'이라고 주장한 뒤 '일제가 많은 인원을 한꺼번에학살하기 위해 예배당을 택했을 뿐인데 기독교가 이를 왜곡해 기독교인의 순교성지로 둔갑시켰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료에는 '일본 헌병이 마을 기독교 주민 23명을 집단적으로학살'(민족문화대백과사전), '15세 이상 남자 신도들은 교회에 모이라고 하였다'(두산대백과사전)등 당시 교회에서 희생된 주민들이 개신교 신자라고 적혀 있다.
또 이곳 역사기념관에 전시된 교회 모형도 인형들이 모두 성경을 읽고 있는 모습으로 만들어져 있다.
뿐만 아니라 한국관광공사도 제암리 교회를 개신교 성지순례 코스로 지정해 개신교 순례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15일 행사를 두고 개신교와 천도교간에 갈등이 빚어 지고 있으며 제암리의 비개신교 주민과 교회 사이에도 어색한 분위기가 흐르고 있다.
실제로 해마다 이날 오후 8시 추모예배를 개최해온 제암리 교회의 강신 범 목사는 천도교청년회 주최의 위령제 참석요청을 거절했다.
강 목사 는 '주민들과 함께 천 도교 신도들이 위령제를 지내는 것 자체를 반대할 생각은 없지만 종교 간 갈등을 유발할 소지가 있는 행사를 개최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말하고 있다.
이에 대해 제암리의 안용웅 이장은 '3ㆍ1운동 당시에는 천도교가 번성 했으나 지금은 교세가 약해 개신교 위주로 순국 유적이 꾸며지는 것에 대해 주민들이 드러내놓고 반대를 하지 못했을 뿐'이라며 교회에 대해 불편한 심기를 내비쳤다." [연합뉴스 2000/04/12 이희용기자
heeyong@yonhapnews.co.kr][이와 비슷한 기사로 2000,04,15일의 한국경제신문의 윤승아 기자
ah@ked.co.kr의 기사도 있음]
참으로 놀라운 사실이다! 제암리에서 일제에게 학살당한 주민중 대다수가 천도교인이었고 나머지는 기독교인 몇 명과 기타종교, 무신론자들이라는 사실이다.
일본헌병은 단지 '대량 학살장소을 자행하기 위해 기독교의 예배당을 선택'한 것일 뿐인데, 기독교는 재빨리 자신들의 성지로 만들어 놓았다.
이 사건에 대한 또 다른 사료로써, 1998년 11월 4일 일본의 참의원 방한단으로 국내에 온 하시모토의원은 학살 관련 외교문서 복사본을 독립기념관에 기증했다.
일본 공산당 하시모토 아치(4선)의원은 독립기념관을 찾아와 박유철 관장에게 전해준 문서에는 당시 조선총독이던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1919년 4월 22일 오후 1시 50분 일본의 총리대신 앞으로 보낸 것으로, 펜으로 쓴 육필이 5장, 사건전모를 요약 정리한 내용 1장 등으로 모두 6장이었다.
이 문건에 따르면 수원군 발안장에 파견된 보병중위 12명은 4월 15일 부근 주재순사를 동행, 제암리 기독교회당에 천도교인과 기독교인 약 25명을 집합시켜 전부를 사살하고 불을 질렀다. 문건의 내용은 이 사건이 군대와 경찰의 위신에 관련되고 외국인들이 비난할 소지가 있으니 철저하게 은폐하겠다는 내용으로 끝난다.
문서를 건네준 하시모토 의원은 을사보호조약 체결에 항의해서 자결한 충정공(忠正公) 민영환(閔泳煥)선생에게 헌화했다고 한다.
일본측의 외교문서에서도 천도교인과 기독교인들을 교회로 몰아넣어 학살을 자행했다고 언급되어있다. 그런데 어느순간에 학살당한 사람들이 전부 기독교인으로 둔갑되어 버렸다!
일제에 의해 사망한 천도교인들을 기독교인들이 또 한번 죽인셈이다. 이 얼마나 파렴치한 행각인가!
만약 기독교의 독립운동이 활발했고, 항일운동에 대한 풍부한 역사적 증거가 있었다면 이러한 역사왜곡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기독교의 항일역사가 너무도 빈약해서 이렇게까지 할수 밖에 없었던 것이 아닐까?
뉴스엔조이에서도 이 문제를 언급한바 있는데 관련기사를 한번보도록 하자.
"한 예를 소개하겠다. 1971년에 명예 박사학위를 두개나 가지고 해방후 KNCC 회장까지 지낸 교계의 어떤 거물급 목사님이 《말씀 따라 한 평생》이라는 430여페이지에 이르는 자신의 자서전을 펴냈다. 이 목사님은 그의 자서전에 자신의 명예 박사학위 축하예배 순서지까지 전재하여 10여 페이지에 걸쳐서 서술하면서도, 오늘 우리가 생각해 보고자 하는 시기인 1930년대 중반부터 1945년에 이르는 10년간의 시기는 단 두페이지 반으로 줄여서 서술하고 있다.
여기서 그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이렇게 10여년을 지내는 동안 시대는 더욱 각박해졌고 종교탄압은 날로 극심해만 갔다. 이윽고 [대동아전쟁]이 발발하였다. 점점 전쟁이 막바지로 치닫자 일제의 발악은 더욱 심해졌다. 전쟁마당에 강제로 이 나라의 청장년들을 징병 혹은 징용이란 이름 아래 사지(死地)로 끌려 들어 갔고 심지어는 교회당의 종까지도 무기 제조를 위해 헌납을 강요당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종교인들은 이들의 건국신(建國神)인 [아마데라스 오미가미](天照大神)를 모시는 신사참배와 가정마다 [가미다나]라는 천조대신의 위패를 모시라는 것이다.
따라서 성수주일(聖守主日)을 방해하기 위하여 주일이면 보국대에 동원을 지시하고 찬송가도 압수하여 황국신민의 사상고취에 영향을 끼칠만한 가사는 모조리 검은 잉크로 지워서 되돌려주는 등 이루 말할 수 없는 탄압이 계속되었다. 이러한 판국에서도 나는 용기를 잃지 않고 계속 교회발전을 위해 목숨을 내걸고 노력해왔다.---
이런 기록을 대할 때 여러분은 어떤 생각이 드는가? 여기에 기록한 것들은 모두 일반적인 일제의 탄압 실상에 대한 것뿐이고, 자서전인데도 여기서 자신에 관한 언급은 맨 마지막 단 한 구절 뿐이다. 그리고 그것도 그가 성직자임에도 불구하고 사실과는 거리가 먼 거짓된 기록을 하고 있다. 이 기록을 그대로 믿는다면 이 목사님은 일제의 가혹한 핍박 중에도 교회를 위해 목숨을 걸고 투쟁한 신앙의 용사처럼 보인다.......(중략)......
그의 자서전에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이러한 부일협력에 대한 참회의 문구는 한 마디도 없다. 이것은 해방 후 기독교계가 일제의 잔재청산에 실패하였으며, 해방된지 반세기가 훨씬 지난 지금까지도 이의 극복은커녕 반성하지도 못하고 있다는 것을 웅변적으로 이야기해 주고 있다." [뉴스엔조이 2002-05-06 조선교회가 섬긴 3위 '하느님, 돈, 일본' 김승태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연구실장)]
뉴스엔조이의 기사는 참으로 많은 것은 우리에게 시사해준다.
친일행위에 사죄하지 않고, 자신의 행위를 은글슬쩍 미화하는 자서전을 쓴 거물급목사.....이 얼마나 파렴치한 일인가!
신이 있다고 생각하는 종교지도자가 어찌 무신론자들보다도 하늘을 두려워하지 않는지!
이제 대한민국은 민주사회로 발전했다.
부끄러운 친일행위를 감추고 오히려 항일운동을 했다는 큰소리치는 기독교의 모습으로 볼 때, 수십년후 그들은 역사를 조작해서 기독교가 민주화 운동을 했다고 주장할 가능성이 아주높다.
군사정권에 머리를 숙였던 역사는 슬쩍 감춰버리고, 목회직을 박탈당한 도시산업선교회목사들같은 분을 전면에 내세워 "한국 기독교는 민주화운동의 선봉장이었다!"라고 주장할 가능성이 아주 확실하다.
따라서 안티기독교 형제 여러분께서는 개신교의 행태를 두 눈 부릅뜨고 지켜보아야 할것이다.
끝으로 두산세계대백과를 검색해 보니 재미있는 자료가 눈에 띄었다.
놀랍게도 한국의 '반기독교운동'의 선구자들은 사회주의자들이었다고 한다.
그들은 친일과 제국주의의 앞잡이가된 기독교의 행각에 이를갈며 반기독교운동을 전개 해나갔다고 한다.
강도 높은 반기독교강연이 활발히 열렸으나 일본경찰과 기독교의 탄압으로 무산되었다고 한다. (일본경찰이 왜 반기독교 운동을 탄압했을까? 답은 뻔하지 않겠는가!)
반기독교 선구자 선배님들의 활동내용을 여기 옮겨본다.
"반기독교운동(反基督敎運動) 출처 :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개요:1920년대 사회주의 운동세력의 주도하에 진행된 기독교 배척운동.
언제 : 1920년대
누가 : 사회주의 운동세력
무엇을 : 기독교배척운동
어떻게 : 종교의 존재의의를 부정하고 반기독교의 입장을 표명
기독교계는 3 ·1운동의 준비와 전국적 확산에 크게 기여하였지만, 일제의 기만적인 문화통치 하에서 타협적 성격을 드러냄으로써 반기독교운동을 자초하였다. 본래 미국인 선교사는 일제로부터 선교활동을 보장받는 대가로 교회의 비정치화를 강화시킴으로써, 한국 기독교인의 정치참여와 민족운동을 방해하였다. 더욱이 백인우월주의에 사로잡힌 일부 선교사의 모욕적인 인종차별이 한국인의 민족감정을 폭발시켰다. 한편 YMCA를 비롯한 기독교사회운동 진영도 3 ·1운동 이후 온건노선인 실력양성운동을 벌임으로써, 민족해방운동선상에서 일정한 한계를 나타냈다. 이 같은 기독교계 내부의 문제점이 반기독교운동의 기폭제가 되었다. 그러나 이 운동의 보다 근본적인 원인은, 1920년대 초반 해외로부터 유입된 사회주의사상의 영향으로 종교, 특히 기독교의 특성에 대한 인식이 심화된 데 있다. 이 당시 사회주의자의 기독교 비판논리는 대략 다음과 같다.
첫째, 기독교는 자본주의의 이익 관철 및 제국주의의 식민지 침탈을 위한 유용한 도구로서 기능한다. 둘째, 현실에 대한 긍정과 복종을 강요하여 일제에 대한 저항정신을 말살시킨다. 셋째, 과학사상의 눈부신 발전에도 불구하고 미신과 허위를 선전하는 시대착오적인 현상이다. 이러한 논지하에1923년 3월 전조선청년당대회, 1924년 1월 경성신흥청년동맹회 등 사회주의계 청년운동으로부터 반기독교운동이 시작되었다. 이들은 종교의 존재의의를 부정하고 반기독교의 입장을 표명하였다. 그러나 본격적인 반기독교운동은 1925년 10월 한양청년동맹이 개최한 반기독교대강연회이었다. 이것은 기독교계가 준비한 제2회 전조선주일학교대회에 대한 조직적인 저항의 방편으로 기획되었다. 박헌영(朴憲永)의 ‘과학과 종교’, 김장현의 ‘지배계급과 기독교’, 허정숙(許貞淑)의 ‘현하(現下) 조선과 기독교의 해독(害毒)’ 등 강도높은 반기독교 강연이 준비되었다. 그러나 이 강연회는 끝내 일본경찰의 탄압과 기독교측의 방해로 무산되었고, 이를 두고 사회주의자는 일제와 기독교가 유착되어 있는 증거라고 대대적인 선전활동을 벌임으로써, 기독교계와 사회주의계와의 골은 더욱 깊어졌다.
한편, 기독교계 일부에서는 반기독교운동과 관련하여 자기비판의 움직임을 나타내기도 하였다. YMCA의 진보적 이론가는 사회주의계의 비판을 겸허하게 수용하여 기독교계가 현실 사회문제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신흥우(申興雨) ·이대위 ·조병옥(趙炳玉) 등은 종래 기독교계가 복음만을 강조해온 것을 비판하고, 경제 ·사회분야의 여러 문제점을 신학과 관련지어 분석하였다. 특히 이대위는 기독교와 사회주의의 연원 및 근본사상을 비교 분석하여 양자의 접목을 시도함으로써, ‘기독교 사회주의’라 불리는 독특한 사상체계를 실험하였다. 요컨대, 반기독교운동은 사회주의 이론으로 무장한 청년단체가 기독교의 본질적 부분에 대한 비판을 감행함으로써, 기독교계와 사회주의 진영의 갈등을 증폭시킨 사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