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일제 치하의 교회

"기독교의 역사"에서 주로 다룰 주제는 기독교인들이 저질러온 죄악들,
예를들어 십자군, 마녀사냥, 이단사냥, 루터와 칼뱅의 망언 사례, 인디언과 인디오 학살 등을 역사적 자료를 통해 조명하고,
기독교가 로마에 의해 공인된 과정, 유대인들의 역사 등 다채로운 주제를 포함하게 될 것입니다.

7. 일제 치하의 교회

발견 0 2,915 2002.09.14 14:47
1. 십자가를 걸머진 교회

우리나라는 민족운동이나 독립운동은 교회의 움직임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기독교의 교리 - 유일신 사상과 또한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았기 때 문에 인간의 자유와 존엄성을 귀하게 여겼다.

이러한 사상 때문에 일제는 기독교를 다른 종교보다 더 탄압했다.

그 당시 교회는 일본 침략에 항거하는 강력한 조직체가 되었고 이를 눈치챈 일 제는 기독교를 말살하려는 음모를 꾸밈.

(기독교 말살 정책)
- 1910년 12월 27일 일본의 데라우찌 총독이 압록강 철교를 놓고 그 준공식에 참석하러 갔다. 그곳에 가던 기차는 선천역에 한 번 정지하게 된다. 헌데 이 때 기독교 지도자들이 데라우찌를 암살한 음모를 꾸몄다고 거짓 소문을 퍼뜨려 많은 지도자들을 체포하였다.
그당시 인구 2000만명중 크리스챤이 18만명이 넘었다.
700명을 체포하고 그 가운데서 105인을 유죄 판결을 내렸다. 105인은 여러차례 감형으로 형기를 마치고 나오게 된다.
105인중 94명이 기독교인이었다. 이것이 105인 사건이다. 저들이 평양역에 도착했을 때 9000명이 나와서 그들을 환영했다.


2. 3.1운동을 통한 교회의 애국 운동.

1918년 파리에서 세계 평화 회의가 열렸을 때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민족 자 결 주의'를 내세웠다.
이것으로 인해 우리 민족은 여러 가지 생각을 하면서 '왜 우리가 일제의 압력 하에 살아야 하는가?' 라는 회의를 품게됨.

그후 1년이 지난 1919년 3.1운동이 일어났을 때 33인중 16명이 크리스챤이었다.
대부분 기독교인이 앞장섰고 이 운동은 비폭력 무저항 주의로 기독교 정신 에 의해 진행되었다.
일본의 헌병과 경찰들은 기독교인들을 투옥시키고, 체포, 교회를 파괴시킴.

이 운동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4월 15일 12시경 수원 부근 제암리 교회에 일본헌병이 몰려와 교민들을 모이게 하고 창문에 못을 박고 교회 주변에 불을 지르고 나오려는 사람들은 칼로 찌르고 죽였다.
많은 교회가 이와 같은 일을 당함.
1919년 일본 보고에 의하면 파괴된 교회가 17개, 일부 파괴된 교회는24개, 그외에 교회에 큰 손해를 본 곳이 41개, 교회 재산 피해가 3만불이 었다.
장로교 보고에 의해 체포된 목사, 장로수가 134명 교인수가 3천 8백 4명, 사살된 신도수가 47명, 감리교 기타 다른 교회의 신도들을 합친수는 타 종교의 신도 숫자를 합친 숫자보다 많았다.

3. 선교사의 관여도.

일제는 독립운동 배후에 선교사들이 관여하고, 조종하고 있다고 판단했다.
당시 선교사들은 조선 독립운동의 열렬한 후원자였다. 평양 숭실학교에 모우리 모펫이라는 교수가 있었는데 일제가 그를 잡아갔다.
피신하는 학생들을 은둔 시켜 준 죄였다.
호주에서 온 선교사들도 독립운동 시위에 동향을 미국 선교회 에 보고하고 총독과 일제의 잔악상을 세계에 알렸다.


* 오디세이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02-09-16 1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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