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의 역사"에서 주로 다룰 주제는 기독교인들이 저질러온 죄악들,
예를들어 십자군, 마녀사냥, 이단사냥, 루터와 칼뱅의 망언 사례, 인디언과 인디오 학살 등을 역사적 자료를 통해 조명하고,
기독교가 로마에 의해 공인된 과정, 유대인들의 역사 등 다채로운 주제를 포함하게 될 것입니다.
|
8. 한국 교회의 수난사
발견
일반
0
2,876
2002.09.14 14:49
1. 신사참배의 강요와 박해
* 신사참배는 일본천왕과 전쟁 영웅들에 대한 경배이다.
1930년 만주사변 1936년 중국 본토 침략 전쟁 : 일본은 전쟁을 일으키고 '내선 일체' 즉 일본과 조선이 하나가 될수 있는 방법은 신사참배라고 생각하였다.
평양부터 점령해서 신사참배 시작 1935년 11월 평안남도 일본 지사 야스다께는 도내에 있는 각종학교장 회의를 소집하고 모든 학교는 신사참배를 해야 한다고 명령함. 이 회의에 참석했던 숭실전문 학교 교장 Mccune은 한국인 목사, 장로를 소집하고 신사참배를 할 수 없다고 단호한 결의를 하게된다. 이러한 소식을 들은 야스다께는 Muccne를 면직시키고 미국으로 추방시킴. 그후에도 일제는 대대적인 신사참배를 강요함. 미션 스쿨에 대해 많은 간섭을 하고 교단 총회 소집도 경찰의 허락 없이는 소집 할 수 없었고 예배도 일본 국회에서 일본 종교 단체법이 통과하게 된다.
신사란? 종교의 범위를 초월한 것.
신도란? 절대의 도로써 모든 일본 국민은 반드시 신사 참배를 해야하는 것. 이 에 순종치 않는 자는 절대 용납할 수 없다는 내용도 포함함.
(이 법에 대한 반응)
1. 로마 카톨릭 : 1918년 까지도 '나외의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입장에서 반대했는데, 1차 대전이 끝난 후에는 신사참배는 종교적 행사가 아니라 애국 적 행사에 지나지 않으므로 참배를 허락함.
2. 감리교 : 지도자의 대부분이 신사 참배가 국가적 의식이라는 것에 동의함. - 감리교 존속 가는케 함.
3. 장로교 : 굴복할 수 밖에 없었다.
1938년 9월 9일 서문밖교회에서 열린 장로교 27회 총회에서 여기에 참석한 사 람들 모두에게 압력을 가해 신사참배를 합법화하게 함.
주기철, 이기선등은 신사참배 반대. 일본 경찰은 총재를 만나 회유책을 쓰고 예 배당 분위기는 일본 경찰이 안팎으로 감시하는 살벌한 분위기였다.
193명이 이 총회에 참석했는데 결론은 신사 참배를 하는 것으로 끝남. 그 후에 도 일제는 계속 교활한 방법을 씀. 평양신학교 패쇄, 2천여 신도 투옥, 50여 명의 성직자 순교.
각 교단이 일제에 굴복한 다음 한국 교회 전체는 공식적으로 신사참배를 하는 양태를 보여줌.
전체 교회의 88%가 교회에다 일장기를 게양하는 탑을 세우고 일본기에 대한 경례를 하는 교회는 96%였고 동방 요배 실시 교회는 96%, 황국 시민 재창을 93%가 했고 예장은 애국 헌납 기성회를 조직해 그 기성회 이름으로 성금을 모아 일본 육군 비행기를 사주고, 총을 사주었으며, 교회의 종 1540개를 바쳤 다.
2. 일제의 단말마적 교회 탄압
1895년 청, 일 전쟁
1905년 러,일 전쟁
1930년 만주사변
1936년 중,일전쟁
1941년 태평양 전쟁
일본은 여러차례 승리로 기세 등등해짐. 우리나라는 지리적으로 '샌드위치'였 기 때문에 많은 피해를 봄. 이러한 때 일제는 신사참배 강요, 저항하면 투옥. 구 약의 모세 5경과 요한 계시록을 그들의 국시사상에 어긋남을 알고 읽지도, 가르 치지도 못하게 함. 사도신조 중에 '저리로써 산자와 죽은자를 심판하러 오시라 라'를 뺌. 찬송가도 거슬리는 것 모두 빼버리고 예배 중에도 천와에게 목례하고, 일장기를 달고, 목사에게 일본 군복을 입도록 함.
1943년에는 주일 오후 예배와 삼일 예배를 막음. 침례교는 재림사상이 강한데 1942년 전국 모든 침례교를 폐쇄시킴. 성결교도 마찬가지로 재림 사상 때문에 1943에 문을 닫게함. 그래서 모두 뿔뿔히 흩어지고 다른 교단으로 옮김. 많은 성 결교 침례교 성직자들이 체포, 구금됨.
3. 교회 분열의 징조
1930년대부터 분열의 징조가 생김.
* 징조는 지방적 요소와 신학적 요소
장로교 : 평양을 중심으로 관서지방이 장로교가 많았다. 이곳은 신학적으로 보수적인 경향이었다.
1911년 연희전문학교 보조문제로 총회를 열었는데 평양 중심의 교회들은 이 학교가 남쪽 지방에 있다는 이유로 보조를 반대했다.
1934년에 와서는 북쪽에서 남쪽의 총재들에게 진보 또는 근대주의자들이라고 비난 이에 맞서 남쪽은 북쪽교회에게 교회 전제주의자들이라고 혹평하였다.
그당시 미국과 일본에 유학을 다녀온 사람들은 신학의 깊이와 넓이가 달랐다.
이들은 너무나도 근본적인 한국신학에 대해 비판을 하기 시작. 그래서 평양 신학교는 외국에서 공부하고 온 사람들을 싫어함. 평양신학교는 같은 교단의 사 람이라도 유학생은 별과에 들어가 공부를 시킨후 목사로 만들었다.
감리교 : 1930대에 제 1차 총회를 소집하고 여기서 채택한 것이 "기도교의 근 본원리가 시대를 따라 다른 형식으로 표명되었고... 우리 교회의 회원이 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아무런 교리적 체험을 요구하지 않는다. 우리의 중요한 요구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충성과 그를 따르는 다짐에 있다. 그러므로 우리의 입회 조건은 신학적이기 보다는 도덕적이요 신령적인 면을 강조한다.." 이러한 것을 볼 때 감리교는 좀 더 자유주의적이고 개방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평양신학교의 당시 교장이었던 박형용박사와 그리고 숭인 상업학교의 김재준 박사는 그 당시 신학논쟁의 거두들이었다. 박형용은 미국 프린스턴 대학의 극 보수적인 신학교수의 영향을 받아 성서 무오설과 축자 영감설의 교육을 받았다. 김재준은 같은 곳에서 공부하였는데 박씨와는 달리 자유주의적이었다. 그는 한 국교회 신학의 부재에 대해 비판하였다.
이 논쟁이 계속되다가 1934년과 1935년 장로교 총회의 문제로 대두함.
김영주 : 모세 5경 저작설 부인 (박형용은 이에게, 스스로 목사됨을 거절하는 것 이라 함)
김춘배 : 여권운동에 대한 자유주의적 해석을 함.(박씨는 이를 징계에 처함이 옳다고 했다)
1935년 Abingdon 주석이 나왔을 때 감리교의 류형기 감독이 그것을 편집, 번역 하였다. 이 일을 채필근, 한경직, 송창근이 같이 했는데 이 책이 아주 자유주의적이어서 번역한 자들에게 공개사과를 요구하고 Abingdon주석을 교인들로 하여금 사지도, 보지도 못하게 함. 점점 신학적으로 개방적이 되어갔다.
4. 교회내의 난기류
1920년대 부터 지적인 변화, 경제적 빈곤, 일제의 탄압심화등으로 목회자 양 성이 쉽지 않았다.
그당시 소설가 이광수 왈 " 기독교는 이성을 경멸, 종교외의 과학, 모든 다른 사상르 경시하는 풍조를 낳아서 현세를 무시하고 죽어서 천당만 가려고 든다"라 고 혹평. 그 때 사회는 소망이 없었으므로 목사들은 재림, 즉 이세상 보다는 저 세상을 바라는 설교를 했다.
이러한 때 신비주의자들 등장 - 소망을 심어줌.
1.이용도 목사 : 협성신학교 졸업. 감리교 목사. 교파 초월 부흥사역. 각교회를 돌아다니며 민족의 고난에 울었고 교회 형식주의를 비판. 전형적인 경건주의자 의 모델. 진리는 말에 있지않고 삶에 있다고함. 종교는 설교가 아니라 곧 삶이 다. 믿음보다 사랑에 진리가 있다. 요한 복음서를 제일로 생각. 그는 무조건적인 사랑을 표방했고 심지어는 사탄, 불경, 사회주의 책에도 진리가 있을 수 있다고 강조. 신학과 기독교 교리를 공격함으로서 신비주의 공통의 오류에 빠짐. 그의 절대적인 사랑은 나무랄 데가 없지만 사랑의 융합을 통하여 그리스도와 혈관적 연관을 잇는다고 믿고 한걸음 더 나아가 그리스도와 자기 자신을 동일시 여김.
이때 한국교회는 이용도 목사에게 금종령을 내렸고 평양 장로교에서는 그를 부 흥사로 초청하지 못하도록 함. 그리고 그가 속해있던 감리교는 1933년 그에게 휴직 처분함. 얼마후 결핵으로 사망.
2. 길선주 목사 : 계시록 1만 2백번을 독파. 신구약 성서를 30독. 절망과 고통 가운데 헤매는 사람들에게 주예수의 강림에 대해 말하고 설교의 주제는 항상 '마라나타'였다. 그에 의해 세례받은 자는 3천명 또한 그의 설교를 듣고 기독교 로 돌아온 자가 7만을 헤아렸다.
3. 황국주 : 백일 기도 중에 은혜의 체험을 했다고 함.
그는 머리와 수염을 기르고 한복을 차려입고 예수그리스도와 비슷한 풍채라 고 하기도 함.예수 그리스도와 영 육간의 합일이 이루어져 자기 속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들어왔고, 자기 목소리는 예수의 목소리로 변했다고 했다. 그 가 가는 곳마다 그를 보고 모여드는 신자가 많았다. 심지어는 가정을 버리고 따 라 다니던 유부녀들도 있었다. 그가 서울역에 왔을 때에는 전국 교회가 떠들석 했다. 그는 삼각산에 가서 기도원을 차리고 그곳에서 몸가름, 피가름을 하였다. 황국주가 죽은 후 그의 피가름 교리가 통리교로 이어짐.
* 오디세이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02-09-16 10: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