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의 역사"에서 주로 다룰 주제는 기독교인들이 저질러온 죄악들,
예를들어 십자군, 마녀사냥, 이단사냥, 루터와 칼뱅의 망언 사례, 인디언과 인디오 학살 등을 역사적 자료를 통해 조명하고,
기독교가 로마에 의해 공인된 과정, 유대인들의 역사 등 다채로운 주제를 포함하게 될 것입니다.
해방 후 그의 행적에 대해서는 반민특위에 피체되었다가 풀려난 것 외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아마 과거 지나친 친일 행각 때문에 나서서 행동하기는 어려웠던 것 같다.
1949년 2월 반민특위가 활동을 개시할 무렵 나온 {민족정기의 심판}이라는 책에서는 "민족운동에서 황민화운동으로 전향한 동양지광 사장 박희도의 죄상"이라는 제하에 그의 친일 변절을 다음과 같이 신랄하게 매도(罵倒)하고 있다.
"박희도는 과거 민족운동자의 한 사람으로 3·1운동 당시 33인 중에 1인으로서 열심히 운동하던 자로서 한 동안은 그의 명성이 자자하더니, 일본 세력이 점점 강해짐을 본 그는 돌연히 방면을 돌려 일본에 아부하여 자기 개성을 발전시키려고 과거의 투지와 절개를 초개같이 버리고, 또 동지를 배반하고 부귀공명을 누리려고 일제의 충신이 된 그는 황국신민화 운동을 철저히 함으로써 왜인(倭人)들에게 다대한 신임을 받았으며, 또 {동양지광}이라는 잡지를 발간하여 친일과 전쟁협력에 유일한 일본의 기관지가 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황민화운동에 열중한 박희도는 지방순회강연대 평안남도 책임반으로 피선되어 김영필 등과 함께 순회강연을 하였다 하며, 그 외에도 강연·좌담회 등에 열심히 참가하여 우리 조선 민족의 혼을 말살하기에 부심하며, 황민화운동·지원병·학병·국방헌납 독려 등에 적극적으로 활동하였을 뿐 아니라, 일제에 가장 충견이 된 1인자로 그야말로 의식적인 일본의 적자(赤子)요, 황민(皇民)이었던 것이다....해방이 되고 건국이 된 오늘날은 그 모습이 가장 음흉하고 추잡한 민족반역자를 낙인한 듯 해괴한 흉악상으로 보인 것이다. 머리털로 발굽까지 변절하여 왜놈의 적자가 된 박희도는...민족적 견지로 보아서 용서치 못할 반역자라 아니할 수 없을 것이다."(186-187쪽)
그리고 이보다 앞서 1948년 9월에 나온 {친일파의 군상}에서도 박희도를 "자진적으로 나서서 성심으로 활동한 자"로 분류하고, 그 중에서도 "친일을 하여 내선일체를 기하고 전쟁에 협력하여 일본인 승리할 시는 조선민족의 복리를 도모할 수 있다고 생각한 자"의 대표적인 예로 거명하고 있다.
그는 1949년 반민특위에 피체되었다가 풀려난 후, 6·25전란 중인 1951년 9월 21일에 세상을 떠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