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얼굴마담

"기독교의 역사"에서 주로 다룰 주제는 기독교인들이 저질러온 죄악들,
예를들어 십자군, 마녀사냥, 이단사냥, 루터와 칼뱅의 망언 사례, 인디언과 인디오 학살 등을 역사적 자료를 통해 조명하고,
기독교가 로마에 의해 공인된 과정, 유대인들의 역사 등 다채로운 주제를 포함하게 될 것입니다.

새로운 얼굴마담

. 0 2,994 2002.07.29 11:31
작성자 : 구경꾼

한때 기독교계를 대표하는 목사중 한경직목사가 있다. 그전에도 이야기 한것처럼 단지 청빈한거외에는 내세울게 없는 목사이다. 신사참배및 군사정권에 기생한 권력지향형 목사이기때문이다. 박정권시기 5.16을 친절하게도 설명하려 미국까지 건너간 인물이다. 그이후에 전두환을 위한 조찬기도회에 여호수와같은 지도자가 되달라며 축원을 아끼지 않았다.

자! 그는 이미 천수를 누리다 죽음을 맞이 했다.

최근에 또다른 얼굴마담이 등장했다 바로 주기철 목사이다. 그는 한경직목사와는 달리 나름대로 지조가 있는 목사였다. 신사참배를 거부하다가 옥중에서 숨을 거둔것이다. 그런데 웃기는 사실은 주기철목사가 비로서 최근에야 목사직분을 복권받았다. 사후 오십여년이 지난후에.... 그 이유가 분명히 있을것이다.

친일에 동조햇던 기득권층의 사후 그는 정당한 대접을 받기시작한것이다. 기독교가 반일에 선봉이였던처럼 역사적사실을 호도하기위해 새로운 이미지에 걸맞는 인물이 필요했던것이다. 그가 바로 주기철목사이다.

자 기독교가 그간 신사참배와 친일에 앞장섰던 전력을 살펴보자. 그에 앞서 수많은 우리나라에서 기독교전파를 한 선교사들의 시각을 먼저 알아봄이 후의 기독교인의 친일행위에 좋은 근거가 될수있을것이다.

- 장로교 선교위원회 총무 브라운(A.J.Brown)
"한국은 어린애와 같이 천진하기 때문에 독립할 처지가 못된다"

- 멕켄지(F.A.Mckenzie)는 일본의 침략이 가시화되는 과정 속에서 한국인들에게 아래와 같이 말하였다.
"복종하라. 그리고 여러분 자신들이 더 좋은 사람이 되기를 힘쓰라. 당신들은 지금 무력으로써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당신들의 자녀들을 교육하라... 당신들도 그들(일본인)만큼의 자치력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라."

- J.H.Wells는 이렇게 말했다
"을사조약이 조인된 날은 후대에 한국의 독립 기념일로 지켜지리라고 확신한다. 이 조약은 한국인들에게 유럽에서 스위스가 누리는 정도의 자유를 누리게 할것이다.... 기쁜것은 이미 한국인들이 예전보다 더욱 많은 자유와 희망,그리고 야망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 그리고 피셔(J.E.Fisher)는 아래와 같이 말하였다.
"선교사들은 일반적으로 준법적이요. 수헌적(守憲的)인 사람들이다. 한국인들을 뒤밀어서 일정(日政)에게 항거하거나 불복케 할 사람들이 아니다. 더구나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이다. ..한국인들로 하여금 일본 사람들을 미워하게 한다면 그것은 기독교 근본 교리에 배치되고 따라서 그것은 죄가 된다."

- 게일(J.S.Gale)은 당시의 의병활동을 가리켜
"거짓 애국의 미친듯한 광란이 전국을 휩쓸고 자살,자해,거짓 맹세,게릴라, 냉혹과 무자비한 저항이 넘치고있다"고 민중들의 반제투쟁을 매도하였다."

- 존스(G.H.Jones)와 스크랜튼(W.B.Scranton)은 1907년 이토 통감을 만난 자리에서
"선교사들은 통감의 시정에 동정을 갖고 더 나아가서는 한국민의 도덕적,정신적 계발을 위하여 노력하며 정치적인 문제에 대하여는 초연한 태도로 임하는 것을 상궤(常軌)로 한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정치적인 일은 이토 통감이 ,정신적인 면은 선교사들이 각각 담당하여 조선인민을 교회계몽시킨다"

이들은 철저한 정교분리적인 측면을 강조하며 민족구원의 신앙형태보다는 비정치적 개인 구원의 신앙형태로 전개되어갔다

자 이제부터 본격적인 기독교계의 친일행위에 대해서 자세히 알아보자.

초기에 신사참배는 기독교의 십계명중 우상숭배와 정면으로 상반되어 많은 반발을 일으켰다. 하지만 곧 신사참배는 국민의례라는 형태로 포장되기 시작했다 일제는 신앙의 변절이 아닌 국민의례라는 기독교인의 행위에 정당성을 부여한것이다.  물론 일부 강렬한 반발에 부딪치기도 했지만 1936년 1월 29일 윤치호와 양주삼이 총독부 학무국을 찾아 갔을 때 국장인 도변(渡邊)은

" 신도의식은 종교의식이 아니고 국민으로서의 의식이며 의식에 참여하는 것은 예배행위가 아니라 조상에 대하여 최고의 경의를 표하는 행위다."

라는 설명을 통하여 교회지도자들이 앞장서서 이해시켜 주기를 강요했다.

신사참배 거부운동이 거세게 일고 있는 와중에서 <기독교와 시국>이라는 글에서는

「조선기독교도는 황국신민으로 이상 제(諸)행사를 충성스럽게 행하여야 할 것이요 행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황국신민의 의무와 행사를 행하는 것과 종교를 신앙하는 신심과 하등의 틀린 점이 없는 것이다.
-생략-
그러므로 황국신민으로 국가의 선조를 숭배하는 신사참배 곧 예배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요 이론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라고 신사참배를 지지하였다.

감리교회는 이미 총리사가 <신사문제에 대한 통첩>에서 "신사의 봉사는 종교가 아니다' 라는 공문으로 신사참배를 묵인하였으므로 이 두 가지 사건은 한국교회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1938년 2월 9일에는 전국에서 교세가 가장 강한 평북노회가 노회장 김일선에 의해 소집되어 선천에서 모였다. 이 회의에서 일제의 강요에 의해 신사참배를 논의한 결과 '신사는 국가의식' 이라 하여 참배를 결의하였으며, 총회에 상정하기로 하였다. 이러한 고무적인 현상에 자신감을 얻은 일제는 가장 강하게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있는 장로교 총회에 대하여 신사참배 수용을 총회에서 결정하도록 방법을 모색하였다.

일제는 <평양기독교친목회> 지도인물 오문환, 이승길, 김응순, 장운경 등을 1938년 5월에 일본에 다녀오게 하는 회유책을 썼으며, 6월에는 일본기독교 의장 도미다(副田滿)을 초청하여 평양시내에 있는 유력한 교회지도자들을 집합시켜 신사참배 강연을 듣게 했다. 그리고 평양 기독교친목회를 통하여 신사참배 결의에 성공할 수 있도록 조종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1938년 9월 9일, 제 27회 총회가 평양 서문외교회에서 열렸다. 회무중(會務中) 평양, 평서, 안주 삼노회 대표 박응율 목사가 "신사참배는 국민의 당연한 의무" 라고 하면서 참배 결의와 성명서를 채택을 제안하자 한국과 함께 살아왔던 장로교가 '신사참배는 기독교 신앙에 위배되지 않는다' 는 결의를 하였다.

「아등은 신사가 종교가 아니고 기독교 교리에 위반하지 않은 본의를 이해하고 신사참배가 애국적 국가의식임을 자각하여 이에 신사참배를 솔선하고 추이 국민정신 총동원에 참가하여 비상시국하에서 통후(統後) 황국신민으로서 적성(赤成)을 다하기로 기함.」

결국 한번 굴복하기 시작한 한국교회는 기관, 지도자 할 것 없이 붕괴되어져 갔다. 1939년 6월 8일 전북노회는 전주 서문외교회에서 외집하여 신사참배를 결의하고 교역자 등 150여명이 전주신사에 참배했다. 동년 9월 27일에도 진주의 27개 교회가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굴복하였다. "청년"지 주필인 강백남은 <조상숭배는 우상숭배가 아님> 이라는 글을 발표한 바,

「근래에 국가의식 즉 신사참배로 말미암아 조선교회에 막대한 동요가 있었음은 부인하지 못할 사실」이라고 전제한 후,
-생략-
기독교인은 그러한 의미에서 참배함은 절대로 아니요, 국가의식에 국민의 의무로서 참배함이 당연할 줄로 각오(覺悟)하고 시인한 즉 양심이 평안하고 충군 애지심국(愛之心國)이 날이 감을 따라 두터워 집니다. 그런 즉 신사참배하는 일을 우상숭배라고 한다면 이는 불경죄에 가깝다고 말하여 둡니다.」

라고 신사참배를 지지하였다.

결국 1938년 27회 장로교총회에서의 신사참배 결정과 김종우· 양주삼(감리교대표), 김기찬·홍택기(장로교 대표), 이명직(성결교 대표) 등이 한국교회를 대표하여 일본에 건너가 신사참배 하므로 신사참배 논쟁은 일단락 되고 이후부터의 한국교회는 집회나 행사 때 마다 신사참배를 국가의식의 일환으로 실시하였다. 고로 교회의 최고 상회기관인 총회에서는 신사참배를 매 총회 때마다 시행하여, 중요한 집회에서도 신사참배를 하므로 한국교회는 완전히 일제의 신사참배 정책에 협조해 가는 모순을 낳았다. 이후, 새로운 단계의 신사참배의 형태로 변하는바, 적극적이고도 다양한 방법, 참배자의 수가 대폭적으로 늘어났다.

일제는 1940년 7월 30일 부여신궁을 건설하기 시작하였는 바, 국체명징(國體明徵)과 내선일체의 선전을 목적으로 한 것이다. 총독 미나미(南次郞)은 내선일체의 역사가 멀리 백제시대에 소급한다고 해서 <일선동조동근론>을 주장하여 백제와의 교섭이 깊었다는 응인천황, 제명천황, 천지천황, 신공황후의 영을 모시게 하였다. 이 신궁 건설에 한국 지도자들을 노력 동원케 하는 일제의 의도는 노력 동원으로 작업의 큰 진전을 얻으려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면을 노렸다는 점이다.

1941년 6월 17일 국민총력 조선야소교장노회총회연맹이사장(朝鮮耶蘇校長老會總會聯盟理事長) 이름으로 부여신궁 근로봉사단원 모집에 관한 공문을 각 노회대표 앞으로 보냈고 동년 10월 30일 서울역을 출발하여 다음 날 7시 부여에 도착하여 노동봉사를 하였다. 여기에 참여한 근로봉사대원은 경성노회외 22개 노회에서 대표로 참석한 김형준회 73명 이었다. 감리교 또한 1941년 10월 9일 경기교구를 대표하여 27개 교회가 노동봉사대원 51명을 신궁 건설에 참여케 하였고 1941년 1021일 교단연맹이사회에서는 5개 항목을 결의하여 각 교구와 교회에 하달한 내용 중에서 경기교구외 다른 교구의 목사, 신도대표 각 4, 5인씩을 근로봉사 할 것을 지시하였다.

1943년 3월 3일에는 장노회총회 대표 김종대 등이 일본기독교 제 1회총회에 참석하여 윤세신궁을 참배하였다. 이어 5월 11일 의산노회 소속 교직자들이 중심이 되어 28명이 일본으로 성지참배를 떠나므로 한국교회의 신사참배는 절정에 다다랐다.

이상에서 나타난 신사참배 문제에 관하여 몇 가지 정리를 하면

① 신사참배는 일제의 강압만으로 된 것이 아니고 일제에 의해 회유되고 매수되었던 종교지도자들에 의해 조직적으로 이루어졌다.

② 신사참배는 신앙양심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이 행위가 곧, 일제에 투항, 친일을 하는 행위가 된다. 이러한 이유는 신사참배를 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후 갖가지 친일행위를 거듭했다는 사실을 통해서 인식된다.

③ 흔히 신사참배 거부는 종교적 동기에서 시작된 항거이라고 하지만 일제의 계속적인 회유로 인하여 부일의 밑거름 이용되었던 것이 사실이다.

이런 수많은 신사참배행위에도 불구하고 많은수(?)의 기독교인들이 투옥되거나 일부 옥사하였다. 이들은 후에 출감하고도 또다른 피해을 입었다 이들을 바라보는 기존기독교인의 시선이 곱지가 않았던것이다. 이들은 그후에도 수많은 불이익을 당한다 그 피해자중 하나가 주기철목사이다

이제와서 그를 새롭게 조명하는것은 어떤 연유일까? 친일목사들의 많은 수가 죽음을 맞이 했기때문일까? 그가 옥사한지 오십여년만에 그의 이미지가 필요해진것같다. 한경직목사가 템플턴상 시상식에서 신사참배한것을 반성하는 발언을 햇다고 마치 대단한것인냥 떠드는 기독교인을 접할때마다 실소를 금할수없다. 군사정권에 협력한 사실은 함구한체 핍박받았던 기독교인들은 뒤로한체 한평생 권력을 쫏아다닌 목사였을뿐.....

그들의 필요에 따라서 결국 그들은 새로운 얼굴마담을 등장시킬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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