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방후 혼란기속의 교단분열 / 적 그리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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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08.12 15:34
● 해방후 혼란기속의 교단분열 / 적 그리스도
교회 장로였던 이승만 대통령은 깡패들을 파견해 불교를 평정했다.
이승만이 그러한 행위를 했던 진짜 이유가 무엇이던 간에 해방후 불과 200명 남은 비구승들이 7천명이나 되는 대처승들을 장장 17년간의 정화운동 끝에 1969년 마침내 왜색승인 대처승들을 절에서 쫓아내고 대처종단인 태고종단(현재는 여기도 40%는 비구승이다)을 만들어 나가게 하는데 성공했다.
이유야 어찌되었던간에 불교계는 친애하는(?) 이승만 각하께서 깨끗이 청소해주신 셈이다.
그런데, 해방후 기독교는 과연 어떠했는가?
친일목사는 정죄되지 못했고, 고난의 길을 걸었던 목사들과 갈등을 겪으면서 엄청난 교단의 분열을 초래했다.
이른바 장로교에서의 고려파(신사참배거부했던측)분열 사건이 일어나면서, 굴종자들은 "교회를 지켜내지 않았느냐"는 논리로 해명과 회개를 거부했다.
그리고 정죄되지 못한 그들이 지금까지도 교계의 최고 원로로 존경을 받고 있다.
*1945년 8월 17일 신사참배를 거부로 평양 감옥에 감금되었던 교역자들이 출옥하여 평양시내 산정현교회에 모여 2개월간 있으면서 한국교회 재건에 관한 5가지를 1945년 9월 20일에 발표했다. 출옥한 이기선 목사는 5가지 원칙을 지지하는 산정현교회를 중심으로 30여교회를 합쳐 1949년 5월 독노회를 조직하였다.
1945년 11월 14일 평북노회 주최로 선천 월곡동교회에서 평북노회 교역자 퇴수회가 있었다. 강사는 이기선 목사와 박형룡 박사였고 참석한 교역자는 200여명이었다. 여기서 박형룡 박사는 한국교회 재건운동의 5원칙을 발표하였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교회의 지도자들은 모두 신사참배를 했으니 권징의 길을 취하여 통회 자복한 뒤 교역에 나설 것.
② 권징은 자책이나 자숙으로 하되 최소한 2개월간 통회 자복할 것.
③ 목사나 장로가 휴직중에는 집사나 평신도가 예배를 주관할 것.
④ 교회 재건의 기본 원칙을 전국에 전달하여 일제히 시행할 것.
⑤ 교역자 양성을 위한 신학교도 복구 재건 할 것.
이상의 5가지 원칙에 신사참배 결의때 총회장이었던 홍택기 목사등이 강력히 반대하고 나섰다. 홍택기 목사는 "옥중에서 고생한 사람이나 교회를 지키기 위하여 고생한 사람이나 그 고생은 마찬가지였고 교회를 버리고 해외로 도피생활을 했거나 혹은 은퇴생활을 한 사람의 수고보다는 교회를 등에 지고 일제의 강제에 할 수 없이 굴복한 사람의 노고가 더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고 괴변을 토하였다. "신사참배에 대한 회개와 책벌은 하나님과의 직접관계에서 해결될 성질의 것이다."라고 하면서 반대하여 분열되기 시작했다.
*1945년 9월 윤하영과 한경직목사등은 신의주에서 기독교 사회민주당을 조직했고, 1947년 2월 24일 남한에서는 기독교도 민주동맹이 결성되었다. 위원장은 김창준 목사(감리교 신학교 교수. 북한에서 조선인민회 부의장 조국전선 중앙위원회의장 역임), 총무는 박성산 목사,고문으로 신흥우 목사, 강령기초위원으로 갈홍기 목사가 맡았다.
이 단체에서 이승만정권에는 종교의 자유가 없고, 북한에는 종교의 자유가 있다는 궤변을 성명으로 발표했다.
*1946년 김일성 비서인 강량욱 목사의 권유로 기독교도연맹을 조직하고 김익두 목사가 회장이 되자 북한의 교역자가 거의 이 연맹에 가입했다.
*감리교 역시 부흥파와 재건파(친일파)로 분열되었다.
1947년 1월 11일 연합회의에서 감독을 의장으로 고치고 강태희 목사가 의장이 되었다. 친일파가 감리사로 출세하게 된 것이다.
1947년 2월 3일 홍현설, 변홍규 등 40여 명 목사와 문창모, 박현숙 등 평신도 56명은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내용은 "교권을 잡은 재건파가 교회 장정을 유린하고 불법적 방법으로 연합을 가로막고 친일파를 두호하고 있다. 특히 친일교역자 19명은 감리교에서 추방되어야 한다"고 고발하였다. 고발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성서모독죄: 구약성서와 요한계시록을 배척하였고 복음서를 제외한 신약성경을 거부하려 하였고 김진철 학생이 신학교에서 구약성서를 읽었다고 출교시켰다.
② 신사참배찬양죄: 모든 교회와 신자들의 가정에 가미나다를 설치케하고 상동교회를 신사로 만들고 교역자들을 미소기바라에 참여케하였다.
③ 재산매매비리죄: 감리교 37개의 교회건물과 31개의 목사관을 매각처분하였고 공주 영명학교 농지 18,360평과 은퇴교역자를 위한 땅도 매각처분한 돈 40만원 중 절반은 일본군을 위하여 비행기 헌납금으로 하였고 나머지는 총리원에서 어떻게 사용했는지 알 수 없다. 특히 은퇴교역자 농지매각은 1945년 9월에 하였다. 사용처를 밝혀라.
④ 배신교역자: 친미적인 교역자 40여명을 해직 강등 자격취소를 하였고 그리고 일본 정부당국과 야합하여 그들을 투옥, 고문하게 하였다.
*교단을 해체했던 성결교회는 1945년 11월 9일 10일 교단명칭을 '기독교 대한 성결교회'라고 변경하고 재건총회를 개최했다.
이 총회에서는 징병제를 찬양하고 교단의 해산성명서에 서명한 박현명목사가 총회장으로 추대되었다. 그러나 누구 하나 이의를 제기하거나 항의하거나 친일파를 규탄하는 일이 없어 교단이 분열되지 않았다.
*1945년 9월 18일 출옥성도가 많은 경남노회는 서둘러서 경남 재건노회를 조직하고 신사참배교역자들에게 "목사 전도사 등은 일제히 자숙한 후 일반 교회를 시작할 것. 자숙기간이 종료되면 교회는 교직자에 대한 시무투표를 실행하여 그 진퇴를 결정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1946년 7월 9일 제47회 정기노회에서는 임원진의 총사퇴를 요구하고 출옥성도 주남선 목사가 회장이 되었다.
이에 친일 목사들은 "신사참배는 이미 우리 양심으로 해결할 것이며 지금 해방이 되었다 해서 죄로 운운함은 비양심적이다."라고 되받아 치면서, 1946년 12월 3일 진주에서 열린 제48회 노회에서는 신사참배가 죄냐 아니냐를 가지고 웃지 못할 논쟁이 시작되었다.
*1946년 4월 평양 산정현교회(주기철목사가 담임을 맡았던 교회)에서 담임하고 있던 한상동 목사는 공산주의자들의 위협과 친일목사들과의 갈등으로 견디지 못하고 월남하여 주남선, 박윤선 박사와 만나 고려신학교를 세울 것을 협의하고, 1946년 9월 2일 고려신학교를 설립했다. 그러나 1947년 제48회 경남노회에서는 친일목사들이 주축이 되어 고려신학교 인정을 취소하고, 학생추천 취소 결의를 했다. 이에 경남노회는 한상동 목사 지지파와 친일목사간에 분쟁이 시작되었고 도덕성에 문제가 제기되자 1947년 3월 10일 임시노회를 소집여 노회장 김길창 목사와 임원 전원이 사임했다.
그러나 1948년 4월 고려신학교 교장 박형룡 박사는 메첸파 선교사와 신앙노선 갈등으로 고려신학교 교장직을 사임하자, 그 기회를 틈타 친일 교역자들은 1948년 7월 "고려신학교와 소위 신성파에 대하여"라는 성명서를 발표하여 한상동 목사에 대하여 대대적인 공격을 시작했고, 1948년 9월 21일 경남노회 49회 임시노회에서 44대 21로 고려신학교 설립 인정을 취소했다. 1948년 5월 총회에서 정치부장 김관식 목사는 "고려신학교는 우리 총회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라고 했다.
*최문식 목사는 1946년 10월 1일 대구의전 학생들과 시민들을 이끌고 대구경찰서를 습격, 점령하고 시위대들은 총을 들게 되었는데 이것이 대구폭동이었다. 경찰 부상자가 병원에서 치료를 요청했을 때 거절하여 병원에서도 소동이 벌어질 정도였다. 이것은 경찰에 친일파들이 많은데 대한 감정이었다. 10월 3일 최문식 목사, 윤장혁, 김인식 등도 체포되어 5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수감되었으나 인민군의 서울 입성시 출옥하여 기독교와 목사들에게 온갖 박해를 저질렀고 철수시에는 납북인사를 끌고 갔다.
이재복 목사는 14연대 반란사건에 깊숙이 관여하였고 이재복 목사는 남로당 군사부 조직책이었다.
*축자 영감설을 부인하는 김재준 목사의 강의가 문제시되어 1947년 4월 대구에서 제33회 총회시 51명의 연서로 김재준 교수의 강의 내용에 대한 진정서가 제출되었다. 새벽예배 시간에 학생끼리도 서로 싸움하여 수라장이 되었고, 1950년 4월 21일 제36회 총회가 대구 제일교회에서 개최되었을 때 총회가 아수라장이 되어 기마경찰대가 동원되어 해산되었다.
*1950년 인민군이 입성하자, '기독교민주동맹'이 결성. 위원장에 선출된 김창준 목사는 인민군 환영대회를 준비하기로 하고, 고문에 신홍우 목사, 총무에 박성산 목사를 위촉하고 각 교단대표자로 장로교에 최문식, 유호준, 김종대목사, 감리교에 최택, 박만춘, 심명섭 목사, 구세군에 황종율 사관 등이 준비에 나섰다.
7월10일 YMCA에서 3백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김종대 목사가 설교, 임영빈 목사가 환영문을 낭독했다.
*1946년 교회를 버리고 월남한 영락교회 한경직 목사는 "이북에서 양들을 버리고 월남했으니 이제는 참회하는 의미에서도 우리는 양을 지키고 또한 수도를 지킬 순교적 각오를 가져야 한다."고 역설하면서 서울사수를 결의하였으나, 그 후 제일 먼저 도망친 사람은 한경직 목사였다.
*6.25전쟁중인 1951년 5월 24일, 나라의 국운이 흔들거리는 와중에 장로교 36회 총회가 부산 중앙교회에서 개회되었다.
총회에서는 신사참배 반대로 투옥되어 신앙을 지켜온 고려파를 정죄하고 출옥성도가 제외된 가운데 경남노회가 조직되었다.
결국 신사참배를 거부했던 고려파는 1952년 4월 29일 제37회 총회에서 완전히 분리되어 장로교 고신측이 되었다.
*국군의 북진으로 평양을 회복한 1950년 10월 25일 장로교 한경직 목사, 선교사 아담스 목사, 권세열, 윤하영, 전필순 목사 등이 평양에 도착했다. 그리고 오후 2시 서문밖교회에서 3,000여 명의 신도들이 모여 위의 교역자와 함께 감격의 예배를 드렸다.
한경직 목사가 사회를 보았고 황은균 목사가 설교를 하는 가운데 1950년 11월 말경 평양시내 교회는 연합으로 부흥회를 열었다. 부흥회에 참석한 약 5000여 명의 성도들이 모인가운데, 세쨋날이 지나고 네쨋날이 돌아왔을 때 강사와 교역자들이 보이지 않았다.
성도들은 영문을 모르고 아무리 기다려도 강사와 교역자들은 영영 나타나지를 않았다. 알고보니 미 고위 장성으로부터 중공군이 개입했다는 말을 듣고 강사 이대영 목사와 다른 목사들이 부흥회를 마치지도 않고, 또 성도들에게 이 사실을 알리지도 않고 자기들만 살기 위해서 도망친것이었다.
*1952년 7월 N.A.E.(National Association of Evangelicals)이 결성되어 43회 총회 때는 총회 임원이 이들의 일색이었다. 이 단체 외원들은 박형룡 목사의 3,000만환 사건이 터지자 그를 보호하기 위하여 전력을 다했다.
*1959년 9월 24일 대전 중앙교회에서 개회된 대한 예수교장로회 44회 총회에서 통합측은 친일목사 전필순을 총회장에 추대하고, 성결교회는 친일목사 이명직을 서울신대 학장으로 추대했다.
회의도중 이환수 목사가 경기노회 총대 선출 내용을 가지고 되풀이 발언을 하자 박희몽, 김자경 장로 등이 "독사의 자식들아 에큐메니칼은 용공단체요 신신학이다"라는 폭언과 함께 회의를 방해하였다. 경기노회는 총대를 다시 선출하여 보고하도록 하고 노진현 목사는 정회를 선포했다.
그런데 갑자기 대전중앙교회 교인들이 회의장에 나타나 교회의자를 뒤엎으면서 회원 목사들(통합측)을 고무신짝으로 두들겨 패고, 대전중앙교회 목사요 부총회장인 양화석 목사가 나타나 "더이상 장소를 제공할 수 없으니 회원들은 나가달라"고 하며 강제 추방시켰다.
대전중앙교회에서 쫒겨난 149명 총대들은 1959년 9월 28일 오후 1시 대전 미락식당에 모여 전필순 목사를 회장, 김광현 목사를 서기로 선정하고 총회 속개 준비를 구성하고 29일 오전 10시 서울 연동교회에서 총회를 개최하여 통합측이 되었다.
*합동측은 1962년 11월 19일 박병훈 목사가 주도하는 호헌파로 분열되었고 다시 김치선 목사가 주도하는 성경장로회로 분열하였고, 다시 1963년 9월 17일, 고신측과 합동하였다가, 분열했다.
다시 대한 예수교장로교 합동측은 개혁파, 개혁2파, 개혁3파, 개혁보수, 개혁정통, 근본1, 근본2, 독노회1, 독노회2, 로고스공의회, 보수, 보수개혁, 보수재건, 보수측, 법통, 보수합동, 사당동측, 보수합동, 홍은동측, 성합, 성합측, 순장, 연합측, 장신, 재건, 정립, 정통, 종합, 중립, 중앙, 합동개혁, 합동보수1, 합동보수, 합동장신, 합동정통, 합동중앙, 합동총신, 합동총연, 합동총회, 합동환원, 혁신, 협동, 호헌1, 호헌2, 호헌3, 합동총회측 등으로 분열이 가속되기 시작했다.
*이승만 대통령의 부정에 학생들이 항거해도 목사들은 전혀 관심이 없었고, 성명서 한장없이 침묵했다.
1952년 제2대 대통령 선거 때 한국 개신교는 이승만을 돕기 위하여 선거대책위원회를 조직하고 그를 도왔다. 1960년 2월 18일 반도호텔에서 열린 교계 지도자 초청모임에서 목사들은 이승만 장로를 대대적으로 지지했다.
그후, 4.19 혁명으로 이승만이 하야하자 이승만 정부의 앞잡이 노릇을 한 기독교 목사들에게 연세대학교 학생회에서는 "독재자에게 아부하여 성직을 버렸던 종교인들은 침묵으로 자숙하라."는 성명을 발표하고 회개와 각성을 촉구했다.
미국의 힘을 업고 대통령이 된 이승만은 국내지지기반이 미약해서 자신의 지지기반으로 친일파를 끌어들였다. 반민특위를 강제해산한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마찬가지로 일제강점기에 친일행위를 한 목사들은 이승만에게 충성을 맹세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