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친일의 역사 / 적 그리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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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08.12 15:34
● 친일의 역사 / 적 그리스도
한국의 기독교는 스스로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항일운동을 전개했다고 주장한다.
그들이 제시하는 근거 또한 아주 틀린 것은 아니다.
신사참배는 기독교의 교리에도 어긋나기 때문에 식민지 초기때에는 강렬히 거부되었다.
여러 기독교계 학교가 신사참배거부로 문을 닫기 까지 했다. 그건 사실이다!
그러나 일제의 강점시기는 36년이라는 점을 알아두길 바란다. 30년이 넘는 기간의 식민통치에 기독교인 상당수가 변절을 하기 시작했고, 일제강점말기에 기독교는 아예 친일로 돌아섰다.
특히 1937년 중·일전쟁을 전후하여 수양동우회 사건(1937)과 흥업구락부사건(1938)사건이 터진뒤 대부분의 기독교계 지도자들은 변절했고, 신사참배는 교단적 차원에서 이루어졌다.
기독교가 제시하는 신사참배거부운동의 시기를 아주 세심하게 살펴보면 대부분이 식민지시기 초기의 사건들임을 눈치챌수가 있다. 식민지 말기에 그들은 어떻게 변절했는가?
아래에서 언급하는 친일 목사들은 '반민족문제연구소 편찬' [청산하지 못한 역사], [친일파 99인]와 이선교 목사의 [다시 써야 할 한국교회사]등을 참조한 것으로, 그들의 직책을 보면 알겠지만 하나같이 모두 거물급 목사들이다.
*장로회의 1937년 기독교보 에 다음과 같은 사설이 실렸다.“기독교인은 여력을 다해 일본 황실을 받들 것이며 황은(皇恩)을 만분의 일이라도 보답할 것이며 국운을 융성하게 하며 총후(銃後) 만전을 도모하여 황운(皇運)을 부익(扶翼)하라!”
또, 1938년 4월 25일에는 감리교 유형기 목사를 비롯하여 각 교단의 대표들이 모여서 신사참배와 총후 보국주간 행사에 모두 참가할 것을 결의하고 “조선기독교는 일본적 기독교에 입각해 황도(皇道) 정신을 발휘하고 선양하자.”는 선언문을 발표했다.
*1938년 2월 9일 평북노회가 "신사참배는 종교가 아니고 국가 의식임을 인정한다"는 결의했다.
*1938년 6월8일 제32회 전북노회 회의에서 신사 참배를 결의했다. 이때 원평교회,신태인교회,화호리교회 등이 다른 노회보다 앞서 신사참배를 결의햇다. 또한 전주 시내 교회들은 다섯 교회가 한꺼번에 전주부 도제직회로 모여 연합적으로 노회 전에 신사참배했다.
한편 ‘신사참배 결행 청원서’를 노회에 제출하여 노회의 부의 안건으로 성립시켰다. 이에 뜻을 맞추어 신태인·화호리 교회도 신사참배 청원서를 제출하여 노회의 회의 안건을 더욱 확실하게 했다. 그 당시 전주부 도제직회 회장은 김세열 목사였고, 화호리교회 당회장은 이우석 목사였다. 전주부 도제직회가 제출한 청원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청원서-전주부 소재 5개 교회 도제직회에서는 당국의 누차 간절한 지도에 의하여 만방 무비한 황국신민 된 지위를 자각하고 검토한 결과 결코 신사는 종교가 아니므로 신앙과 기도가 없고 따라서 참배는 황실의 조선(祖先)과 국가의 공로자에 대하여 충심, 숭경의 정성을 드림으로써 국민의 적성(赤誠)을 피력하는 것임을 깊이 인식하는 동시에 국민의 당연한 의무일 것을 확신하고 이에 전북노회로서 신사참배하기로 결의하기를 청원합니다."
또한 이 노회에서는 신사참배 문제에 대하여 각 소속 교회에 결의내용을 통지하는 한편 상회(총회)에도 보고하여 건의하기로 했다.
이후 1938년 춘기노회 때 가을의 총회를 기다릴 것도 없이 각 노회가 신사참배를 결정하였는데, 4월에는 제주노회가, 계속해서 순천노회, 전남노회가 각기 신사참배를 결의했다.
*1938년 9월 9일 평양 서문밖예배당에서 개최된 장로교 제27차 총회(총회장:홍택기 목사)에서 자발적으로 신사 참배를 결의했다. 본 총회는 각각의 노회가 신사참배를 결의하자 그 영향을 받은 것으로 23개노회 중17개 노회가 참석하여 평양노회장 박응월 목사가 제안하고 평서노회장 박임현 목사의 동의, 안주노회장 길인섭 목사의 재청으로 신사참배가 가결되었다.
총회 서기 곽진근 목사는 다음과 같은 신사참배 결의 성명을 발표했다.
"신사가 종교가 아니요......(중략).....신사참배가 애국적 국가의식임을 자각하며 이에 신사참배를 솔선 여행(勵行)하고 추히 국민정신 동원에 참가하여 비상 시국하에서 총후(銃後) 황국신민으로서 적성(赤誠 )을 다하기로 함"
장로교 총회에서 신사참배안이 가결된후, 장로급 이상의 기독교인들이 모두 일본에 건너가 일본의 신사에 참배를 하고 천황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일을 하고 조선에 돌아와 역대천황을 위한 사당을 세우는 추태를 부렸다.
*이듬해 열린 장로교 제28차 총회에서 '국민정신 총동원 조선 예수교 장로회 연맹'을 조직했다.
이 연맹 이사장으로 윤하영 목사, 총간사로 정인과 목사를 선임하여 '종교보국'이라는 미명하에 적극적인 부일협력에 나섰다. 다음은 1940년 정인과 목사가 총회에 보고한 이 연맹의 사업 내용이다.
"우리 장로교 교우들이 다른 종교단체보다 먼저 시국을 철저하게 인식하고 성의껏 각자의 역량을 다하여 전승, 무운장구 기도, 전사병 위문금, 휼병금, 국방헌금, 전상자 위문, 유족 위문 등을 사적(私的)으로 공동 단체적으로 활동한 성적은 이하에 숫자로 표시되었습니다......(중략).....애국반원들의 활동의 소식을 들을 때...(중략)...'이만하면' 하는 기쁨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조선예수교장로회총회 제29회 회록, 1940, 87∼94면]
장로교에서 조직한 이 단체는 총독부와 동조하여 독립운동을 벌인 운동가들을 고문하고 독립운동가들을 색출하여 고발하던 가장 큰 세력 중의 하나였다.
*이후 성결교,구세군,성공회 등이 신사참배에 결의했다.
*1938년 10월 기독교청년회관에서 개최된 전쟁협력 강도(講道)에도 정춘수, 차재명, 박연서, 이동욱, 홍병선 목사 등이 연사로 참여했다.
*1939년에 전북노회는 임시노회를 열고 '국민정신 총동원 조선예수교장로회-전북노회 연맹'을 본회의에 앞서 결성했다.
1939년 전국적인 연맹사업으로 무운장구(武運長久) 기도회를 무려 3,739회나 개최했다.
이 모임은 일본어로 식순을 작성하여 진행했다.
*1941년 2월 8일 전북노회 제34회 제3차 임시노회는 본회의에 앞서 종전의 이름을 ‘국민총력 조선예수교장로회 전북노회연맹’으로 바꾸고 연맹의 이름도 노회의 교정을 집행할 수 있도록 규정을 삽입했다.
1941년 국민총력연맹 결성식에서는, 찬송,성경,기도까지 빼고 궁성요배, 황국신민서사 제송(齊誦),천황 폐하 만세 봉창 폐회사를 하고 집회가 끝난후 신사참배를 했다.
*1944년 3월 3일 감리교 교단 상임위원회에서 '애국기 헌납 및 교회 병합 실시에 관한 건'을 통과시켜, 교회를 통폐합하여 전쟁물자를 낼 것을 결의했다.
*유형기,윤치호,박희도,차재명 목사등이 1937년 각도 순회시국강 연에 나서서, 황국신민으로 부일협력 할 것을 주장했다.
*감리교 총리사 양주삼목사는 1936년 1월29일 총독부 에서 신사 참배 순응의 뜻을, 6월에는 신사참배에 응할 것이라고 밝혔다.
*YMCA 총무 신흥우 목사는 [동양지광] 1939년 2월호에 "금일의 우리들은 종교인이기 전에, 조선인이기 전에 우선 첫째로 일본인이라는 것을 망각해서는 안된다......(중략)...천황 폐하의 충성스런 적자로 오직 일본을 사랑하라. 이것이 조선기독교도에게 주어진 신의 명령" 이라는 논설을 실었다. 신목사는 해방후에 대통령 후보로까지 나왔다.
*충북 괴산의 남기종 목사는 박규호 장로와 더불어 '기독교 황도선양회'(皇道宣揚會)를 조직하고 황국신민으로서 충성을 맹세했다.
*서울의 감리교 유형기, 갈홍기 목사 등은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時局對應全鮮思想報國聯盟), '황도문화관'(皇道文化館), '황도학회', '임전보국연맹'(臨戰報國聯盟)등을 조직하여 많은 기독교인들을 흡수하고, 그 대표들은 신사참배와 '총후보국강조주간'(銃後報國强調週間) 행사에 모두 참가할 것을 결의하고 “일본적 기독교에 입각하여 황도정신을 발양(發揚)하자”는 선언문을 발표했다.
*장로교와 함께 신사참배를 결의했던 성결교회는 급기야 1943년 12월29일 "중생 신유 성결 재림의 4중 복음교 리가 국민사상을 혼미에 빠뜨리며, 이와같은 불온 포교를 해온 책임을 통감한다. 이를 맹서하여 결정하 황국신민의 자격을 실추치 않을 것을 기한다"며 교단의 해체를 선언했다.
*친일 기독교지도자들은 1943년 11월에 징병과 학병의 출정독려차 조선 각도에 유세를 다니고자 '임전보국단'(臨戰報國團)을 조직하고, '조선전시종교보국회'를 조직하여 감리교의 갈홍기, 장로교의 채필근, 천주교의 김한수 등을 유세에 앞장세웠다.
*1942년 10월 16에 시작된 평양 서문밖교회당에서 모인 조선예수교장로회 제31회 총회에서, 17일 오전 9시 회원 일동이 평양 신사에 참배하고, 국방헌금을 했다.
국민총력예수교장로회 총연맹 이사장 鐵原志化(최지화), 간사장 德川仁果(정인과)의 보고에 따르면, 육·해군에 애국기(전투기)1대를 헌납하고 육전대에 기관총 7정을 헌납할 자금 150,317원 50전,육군환자용 자동차 3대 기금 23,221원 28전, 놋그릇 계2,165점, 교회 종 1,540개(총액 약 119,832원)을 헌납한다는 보고를 했으며, 국어(일본어) 상용운동전개와 일본어로 초등국어 성서강습교본을 출판하기로 하고,징병령 실시를 촉구했다.
*1941년 12월 20일 반도호텔에서 '미.영타도 좌담회'가 박희도 목사의 사회로 윤치영목사(중앙 기독교 청년회 부총무), 백락준목사(조선야소교서회 편집총무), 최태용 목사(복음교회 감독),윤일선 목사(세브란스의전 교수), 전필순 목사(조선장로교회 부총무),정춘수 목사(조선감리교 총감독),양주삼 목사(조선성서회 행정총무 감리교 목사) 15명이 참석하여 7시간 동안 개최되었다.
채필근목사는 "국민 정신 총동원이 필요한 이때 종교인들도 국가에 충성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것이 이단이라고 말하는 자야말로 도리어 이단이다"라고 주장하고 신사참배를 반대하는 사람을 가르켜 가롯유다같은 사람이라고 매도했다.
최태용 목사는 "조선을 일본에 넘긴 것은 신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을 섬기듯이 일본국가를 섬겨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라고 발언했다.
백락준(조선야소교서회 편집총무)목사는 미국이 반드시 패배할것이라고 1943년 12월 5일자 매일신보에 기고했다. 백목사는 해방 후 문교부 장관과 연세대 총장까지 했다.
*박희도 감리교 목사 - 3.1 독립선언 민족대표 33인중 1인이었다 변절한자다.
친일잡지 [동양지광]의 사장이 되어 창간사에 쓴 글은 다음과 같다.
"이 때에 반도 2천만 동포의 가슴 속에 일본 정신을 철저히 하고, 황도정신을 앙양하고, 폐하의 적자(赤子)로서, 황국 일본의 공민으로서 예외없이 국체의 존엄을 체득하고 황국 일본의 대사명을 준봉하고 황도의 선포국위의 선양에 정진하고, 그리하여 동양의 평화는 물론 팔굉일우(八紘一宇)의 일대 이상을 펴서 세계 인류의 문화 발달과 그 강영복지 증진에 공헌할 것을 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믿습니다. 생각컨대 이 대의를 이해하고 이 이념을 체득할 때 일본국민으로서의 영광과 긍지를 감득치 않을 자 누가 있겠습니까." [동양지광, 창간호, 1939]
1943년 6월호에서 그는 [진심을 헌납하라]는 글에서는 "그러므로 현시의 반도 총후에서 국민의 헌납운동이 날로 치열화되고 있음은 기쁜 경향이지만 그럼에도 더욱이 중요한 것은 충군애국의 진심이 진정으로 그 헌납품에 들어있는가 하는 문제다......(중략).....하물며 세계에 으뜸인 황군 병사로서 제1선에 참가할 때 죽음 등을 고려할 필요가 어디 있을까? 조국과 동포를 위하여 한 목숨을 헌납할 때 그 죽음은 자기 동포를 영원히 살리기 위한 죽음으로 실로 인간 최고의 영예인 것이다"라고 하여 일제의 침략전쟁을 위하여 젊은이들의 `목숨을 헌납`하도록 촉구하였다.
1944년 3월호에서도 [결전 비상의 때(秋)-궐기하라 반도 청년]이라는 글을 실어 청년들의 전쟁참여를 독려했다. 그는 이러한 문필 활동을 통해서만이 아니라 1937년 9월 6일 학무국 주최 시국강연반에 참여하였고, 1943년 11월 6일부터는 강원도 지역에서 학병독려의 강연 행각을 벌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 자신만 그렇게 할 뿐 아니라 동료들의 이름까지 빌려 자신의 잡지를 통해 친일논설을 펴 일제의 신임을 얻기에 열을 올렸다.
박희도는 이외에도 국민총력조선연맹 참사, 조선임전보국단 평의원, 조선언론보국회 참여 등 수많은 친일단체의 간부로 참여하기도 하였다.
해방 후 그는 반민특위에 체포 되었다가 독재자 이승만에 의하여 구명 도생 했다.
*정춘수 감리교 목사 - 3.1 독립선언 민족대표 33인중 1인이었다 변절한자로 3.1운동으로 체포된뒤, 1938년 9월 4일 매일신보에 사죄의 글을 올리고 2400원을 서대문경찰서에 국방비의 일조로서 자진헌납하고 친일파로 전향했다.(당시 쌀 한가마니의 값이 대략 25~30원)
그는 경성기독교연합회 부위원장, `일선감리교특별위원회` 위원등을 거친후, 1940. 10. 감리교 교권을 장악한 후 [감리교 혁신안] 발표했다. 내용중에 "교도로 하야금 지원병에 다수 참가하게 할것" 까지 규정했다.
"우리 국체의 진정신과 내선일체의 원리를 실현하야 총후국민의 의무를 이행하고 신체제에 순응함은 우리 기독교인의 당연한 급선무이다. 그러므로 기독교 조선감리회 총리원 이사회는 좌기 신안을 솔선결의 실행을 기함" [매일신보 1940년 10월 4일자, "사상선도에 주력 군사원호에 진충, 감리교혁신안 발표"]
그는 `시국대응 신도대회`, `총진회` 회장`, `국민총력조선연맹` 문화위원, `조선임전보국단` 평의원, `선전시종교보국회` 이사등을 역임했고,
1941. 10. 10.에는 교역자와 신도대표 50여명을 이끌고 '부여신궁'조영 근로봉사를 하고 돌아왔다.
1941. 10. 21. '국민총력 기독교 조선감리교단연맹 이사회'를 열고 교회의 철문, 철책 등을 뜯어 헌납하도록 하는 이른바 '종교보국 5개항'을 결의하고, 1942. 2. 13. '황군 위문 및 철물 헌납의 건'을 감리교 각 교구장에게 공문으로 보내 "교회의 종도 헌납하야 성전 완수에 협력 할것" 을 요구했다.
1944년 감리교단을 이끌면서, 상동교회에 '황도문화회관'이라는 간판을 내걸고 교역자들에게 일본정신 주입에 광분, 아마에 일장기 두건을 두르고 교인을 인솔하여 남산의 조선신궁까지 뛰어가 단체로 신사참배 강행했다.
1993년 2월, 고향인 청주 3. 1 공원에 세워졌던 민족반역자 정춘수목사의 동상은 시민단체들에 의하여 쓰러졌다.
*정인과 장로교 목사 - 상해 임시정부 외무차장이었다가 귀국후 변절한자로,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예수교 장로회연맹 총간사(1939년 9월), 국민총력조선연맹 문화위원(1941년), 기독교신문협회 회장(1942년)등을 역임하고, 장로교 중앙상치위원회 총간사로서 부일 협력을 했다.
장로교 총간사로 취임하여 "교도로 하야금 그 직에서 멸사봉공의 성을 봉하야 충량한 제국신민으로서 협심육력 동아질서의건설에 용왕매진" 하자고 선동하면서, "신사참배, 궁성요배, 황국신민서사 제창" 선도했다.
교회의 헌법, 교리, 교법, 의식 등을 순정 일본적 기독교로 할것과, 전 기독교 서적, 출판물을 검토하여 이론 국체에 배치되는 자구 개정을 지시하고,
1941. 9. 4. 매일신보에 다음과 같은 글을 발표했다. "앞으로 일보일보 내선일체의 철저화에 최후적단계에 이르도록 계속 노력하려 하는 바인즉........(하략)"
1942. 4. 29. 발표한 글 중의 일부 "내선일체의 완성과 국어(일본어) 생활의 철저"
해방 후 친일행각 죄상으로 반민특위에 체포 되었다가 독재자 이승만에 의한 반민특위 폭력 해산으로 구명도생했다.
*전필순 혁신교단 목사 - 항일단체 '대동단' 단원이었다가 변절한자로, 중일전쟁시 전국 각지 교회 순회강연시 "정의의 중일전쟁은 반드시 승리한다. 조선인은 전쟁에 협력하라!" 고 선동했다.
그후, 기독교를 총 망라한 혁신교단을 조직하여 그 괴수가 되어 친일 부역하고, 교회 건물 내에 일본 '가미다나'를 설치할 것과 '황도연구회'설립 선동했다.
해방 후 친일행각 죄상으로 반민특위에 붙잡혔으나 역시 구명도생했다.
*김길창 목사 - 조선기독교연합회 회장이자 친일부역한 거물 기독교지도자로 기독교인 황민화운동을 이끈 수뇌 인물이다.
1938년 장로교 제 27회 총회에서 부회장으로 각 노회 대표들을 이끌고 평양신사에 참배하고, 교인의 황민화운동 추진단체의 수뇌 인물로, 황민화운동, 신사참배운동, 민족정신말살운동에 앞장섰고, 신사참배에 반대하는 목사 교인을 일경과 결탁하여 탄압했다.
그는 "3·1 운동을 쓸데없는 딴 장난하다가 실패했다"는 등으로 평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