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의 역사"에서 주로 다룰 주제는 기독교인들이 저질러온 죄악들,
예를들어 십자군, 마녀사냥, 이단사냥, 루터와 칼뱅의 망언 사례, 인디언과 인디오 학살 등을 역사적 자료를 통해 조명하고,
기독교가 로마에 의해 공인된 과정, 유대인들의 역사 등 다채로운 주제를 포함하게 될 것입니다.
1. 시대적 상황 우리는 반만년 역사를 가졌으나 근래에 들어 종교적으로 심한 허탈감을 느낌. (고려조 : 불교, 조선조 :유교) 그러나 기독교가 전래되기 약간 이전은 종교적 공백기 였다. 당시 멕킨지는 당시 서울에는 종교적 행사가 없었다고 보고한다. 1866년 전쟁이 일어나고 1871년 로져스 함대와 전투를 벌이고 운양호를 몰고 온 일본군이 무력시위하여 1876년 한일 강화조약을 맺으며 계속해서 미, 일, 러시아와 수호조약을 맺음으로 당시 조선이 운둔국(세계속에서 알려지지 않 은 나라)으로 알려지기 시작함. * 1884년 갑신 정변을 계기로 해서 망명 생활후 돌아온 일본 수신사 박영효 가 일본 요꼬하마에서 조선 선교사로온 스크렌톤 목사(감리교)를 만남.
박영효는 당시에 우리나라에 선교사가 필요하다고 느꼈다. 선교사들이 와서 교육등 문화적인 필요를 채워달라고 부탁함. 우리 재래 종교는 한물 갔다고 말함.
* 1886년 한블 수호 조약에서 조약문 속에는 교회라는 말이 들어갔다. (나중 이단어 하나 때문에 미국 선교사들이 전도할때 쉬웠다.)
2. 유럽 christian들의 도래 1) 벨트브레와 하멜 일행이 오게됨. 1627년 네델란드 사람 벨트브레 일행 3사람이 동해안에 상륙함으로 시작. 이들은 동양에서 무역하고자 네델란드에서 일본으로 가다가 파선하여 경주 앞 바다에 표류. 이들은 물을 얻기 위해 표류했다가 억류되게 ㄷ고 살아가던 도 중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 났을때 같이 상륙한 2사람은 참전했다가 전사했 고 벨트브레만 남았는데 전공이 인정되어 한부대를 이끄는 지휘관이다. 벨트브레가 표류한지 이십몇년이 지나 1653년에 하멜 일행이 본국을 떠나 일 본으로 오다가 또 표류해 제주도로 오게 ㄷ다. 일행 64명중 36명만이 살아 남 았고 제주도에서 14년가 억류되 살다가 15명이 탈출하여 본국으로 돌아갔다. - 하멜의 기사에서 보면 그들이 프로테스탄트 였음을 알수있다. - 2) 바실홀과 멕스웰의 내한. 1816년 영국 정부가 중국에 파송하는 William이라는 군함이 있었는데 Amhert 사절단이 있었다. 함장은 Maxwell, Bashall 사절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중국에 도착하여 암 홀스트 사절을 내려놓고 본국에서는 한국 서해안을 탐사 하라 는 명령을 받았다. 같은 해에 한국 해안에 와서 해도를 작성했다.
이들이 마량진 앞 갈곳에 들렸을때 문정의 임무를 띤 첨사 (조대복)이 가서 물어 볼때 이 조대복에게 성경을 줌.(King James Version) - 최초로 한국 에 전달된 성경. - 바실홀은 돌아가서 책을씀.-
3) 선교 개척자들의 한국인 접근 (1) 칼 큐츠라프 - 한국을 방문한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 독일의 할례대학에서 졸업. 화란 교회 소속 선교사로서 일하기 시작함. 자바 수마트라(인도네시아)중심으로 중국인 상대로 선교 함. (중국옻, 음식 잘적응) 자바 수마트라에서 - 마카오로 선교지 옮김 - 네델란드 선교회를 떠나 프리렌쓰 미션네리로서 활동함.
1832년에 선교의 방향을 한국의 서해안으로 돌려 7월 17일에 황해도 - 백령도 - 원산도에 도착( 만나는 사람마다 의약품, 병고쳐줌, 전도함)
홍주 목사 이민회를 통해 왕에게 성경과 서적 보냄. 홍주 목사 서생 양씨의 도움을 얻어 최초로 성경을 번역(주기도문을) 참고: 이것은 비공식. 공식 1884년
(2) 토마스 목사(정식적으로 안수 받아 오신 목사)의 내한
큐츠라프 목사가 아산만에 온지 33년만에 온 최초의 개신교 순교자는 스코틀랜드 사람 토마스이다(런던 선교회에서 1863년 중국 상해 선교사로 파 송되어 왔는데 1865년 중국 지프로 옮겼다. 이때 한국 선교를 자청했다. 1866년 제너럴 셔먼호가 한국을 간다는 소리를 듣 고 통역관으로 자청. 관군이 화공을 맞고 대동강에서 죽음) 이때 배가 타던때 한문 성경을 강 언덕에 던졌는데 관군중 1나가 한권을 가지 고 있는데 조카가 숭실학교를 졸업하고 (이영태) 나중 이늘서 박사가 성경번역시 도와 주었다.
토마스 목사를 배에서 끌어내 한강 근처에서 목을쳐 죽임. 목을 친 사람은 박춘곤인데 나중에 회계하여 1899년 세례받아 평양 초대 교인 이됨. 그후 평양은 한국 개신교의 예루살렘이라 일컬어짐.
(3) 로쓰와 멕킨타이어의 고려문 전도(런던 선교회 소속)
중국 만주의 우장과 봉천(심양)에는 한국 교회 설립에 전초 기지 역할을 했다. 특별히 우장은 최초의 한인 수세자를 배출한 곳이다. 봉천은 최초의 한국 성서가 번역된 곳.
로쓰와 멕킨타이어는 처남 매부지간(중국 우장을 거점으로 한국 선교 연구함) 마침 조선의 의주 청년 4사람이 , 한약 약장사를 위장하여 중국을 방문했다. 의주에서 강건너 50킬로미터 떨어진 고려문(중국과 물품교환 하던장소)에 갔 는데(서양 무물을 배울려는 의도로)
마침 1873년 봄 로쓰 목사가 중국인 서기를 대동하고 고려문 방문. (이때는 조선사람이 외국사람 만나는 것도 불법일때) 여기서 의주청년들을 만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