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의 역사"에서 주로 다룰 주제는 기독교인들이 저질러온 죄악들,
예를들어 십자군, 마녀사냥, 이단사냥, 루터와 칼뱅의 망언 사례, 인디언과 인디오 학살 등을 역사적 자료를 통해 조명하고,
기독교가 로마에 의해 공인된 과정, 유대인들의 역사 등 다채로운 주제를 포함하게 될 것입니다.
널리 알려져 있는대로 적어도 그는 일제하 민족운동의 최고봉으로 꼽히고 있는 3·1운동의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그 당시 감리교 목사로서 원산 남촌동교회에 시무하고 있었는데, 3·1운동에 참여하게 된 것은 1919년 2월 16일경 서울에 갔다가 박희도(朴熙道)·오화영(吳華英) 등의 권유에 의해서였다. 그리하여 그는 도장을 맡기고 자신이 목회하고 있는 원산으로 돌아와 그 곳에서 이가순·곽명리 등을 포섭하여 서울과 연락하며 운동의 준비를 하였다.
그는 독립선언일자가 3월 1일로 잡힌 것을 알고 그날 열차편으로 서울에 올라왔으나, 이미 선언식은 끝나고 시위가 시작된 후였다. 그는 선언서 서명자들이 모두 체포된 것을 알고 서울에 머물면서 상황을 살피다가 서명자들과 행동을 같이하기 위하여 3월 7일 종로경찰서에 자수하였다. 그는 이 일로 1년 6개월의 징역형을 선고 받고 옥고를 치렀다.
석방된 후 1922년부터 개성북부교회, 개성중앙교회 등을 전임하다가, 1927년 2월에 창립된 신간회(新幹會)의 본부 간사로 선임되기도 하였고, 1934년부터는 서울 수표교교회를 담임하고 감리교 총리원 이사에 피선되어 교회 행정에 깊이 참여하게 되었다.
그는 이 무렵 신흥우가 조직한 흥업구락부와 적극신앙단에 가입하여 활동하다가, 1938년 5월경 일제가 민족주의자들을 박멸·전향시킬 목적으로 검거에 착수한 흥업구락부 사건에 연루되어 서대문 경찰서에 구금되어 수난을 당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흥업구락부는 이미 1935년 이후 내분으로 사실상 활동이 중단된 상태에 있었고, 검거 후 일제의 회유와 위협에 의하여 1938년 9월 3일 관계자 전원의 이름으로 이른바 '전향 성명서'를 발표하여 기소유예 처분을 받고 모두 풀려나 부일협력 활동에 이용당하게 되었다.
이 성명서는
"아등(我等)은 일즉이 민족자결주의의 단체인 동지회의 연장으로서 흥업구락부를 조직 활동하여 오던 바, 지나사변 이래의 급격한 변환에 감하야 종래 포회한 바 주의 주장의 오류를 인정하고, 참다운 황국 일본의 국민인 신념 하에 흥업구락부를 해산함에 당하야 아등의 거취와 동향과를 밝히함과 동시에 아등의 포지한 이상과 주장과를 자에 피력하려 하는 바이다." 로 시작하여, 일제에 철저히 전향·협력할 것을 밝히고, "아등은 그 활동 자금으로서 금일까지 저축한 금 2천 4백원을 서대문경찰서에 의뢰하야 국방비의 일조로서 근(謹)히 헌납하고자 한다."로 끝맺고 있다(<동아일보> 1938.9.4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