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너럴셔먼호 사건과 토마스의 순교 문제 검토*

"기독교의 역사"에서 주로 다룰 주제는 기독교인들이 저질러온 죄악들,
예를들어 십자군, 마녀사냥, 이단사냥, 루터와 칼뱅의 망언 사례, 인디언과 인디오 학살 등을 역사적 자료를 통해 조명하고,
기독교가 로마에 의해 공인된 과정, 유대인들의 역사 등 다채로운 주제를 포함하게 될 것입니다.

제너럴셔먼호 사건과 토마스의 순교 문제 검토*

오디세이 0 3,714 2002.09.27 17:21

조선 후기 이 땅에 들어왔던 천주교 신부들이 처형된 이유는 확실히 그들의 선교활동때문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죽음은 분명한 순교이다. 만약 토마스도 조선에서 선교활동을 벌였다는 이유때문에 죽었다면 그 역시 분명한 순교자가 된다. 그러나 그는 조선의 주권을 무시하고 저지른 침략적 행위때문에 죽은 것이다.

결론부에 나옵니다.,,
기독교단에서 왜곡한 역사적 사실이 어디 이뿐이겠습니까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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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너럴셔먼호 사건과 토마스의 순교 문제 검토*


한규무(광주대 교수, 본 연구소 연구위원)

 


1. 머리말 - 뿌리 없는 미담으로 열매 맺는 감동

정직의 화신 조지 워싱턴의 그 유명한 일화가 아무 근거 없는 것이라는 신문기사를 읽고 마음 속에 간직된 미담 하나가 사라지는 아쉬움을 느꼈다. 하긴 악법도 법이다라는 소크라테스의 명언도 그가 말했다는 증거가 전혀 없다든가, 네덜란드를 구한 소년 이야기를 네덜란드에서는 모른다든가, 분명히 병사(病死)한 이준 열사가 장렬히 할복했다든가 하는 등의 사례가 어디 한 둘이겠는가. 출처 모를 미담들이 한국사 곳곳에 널려 있고, 특히 기독교사에서는 그 정도가 더하다. 그러다 보니 필자는 감동적인 미담이면 일단 의심부터 하는 나쁜 버릇마저 생겼다. 진부한 비유지만 성경을 읽기 위해 촛불을 훔친 것이 잘못이라면, 꾸며낸 미담으로 후세에 교훈을 남기려는 그 어떤 시도도 옳지 못하다.
이와 관련하여 한국 기독교사에서 주목되는 것이, 이 땅에서 순교한 첫 개신교 선교사로서 널리 알려져 있는 토마스(Robert Jermain Thomas, 1840∼1866) 목사의 행적이다. 한국 기독교사에 관한 여러 논저에 거의 빠짐없이 그에 대한 언급이 되어 있다. 그리고 그가 타고 온 제너럴셔먼(General Sherman)호 소각 및 선원 몰살은 미국이 조선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고 이어 1871년 신미양요(辛未洋擾)의 원인이 된, 한국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 유명한 사건이다. 심지어 북한에서는 김일성의 증조부 김응우가 평양 군민(軍民)을 지휘하여 제너럴셔먼호를 격침시켰다고 꾸며 김일성 일가의 정통성을 내세우는 근거로 삼기도 했다.
그러나 일반 한국사에서 이 사건은 더 이상 관심을 받지 못한다. 사건의 전모와 성격이 어느 정도 소상히 밝혀져 있기 때문이다. 또한 토마스의 행적도 한국사 연구자들의 관심사가 아니다.
하지만 기독교사에서는 사정이 다르다. 그의 활동이 선교사(宣敎史)에서 큰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복음 전파를 위해 목숨을 걸고 낯선 땅을 찾아 온 불굴의 의지로 가득 찬 한 선교사(宣敎師)의 최후가 우리에게 적지 않은 교훈을 주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의 최후에 대한 자료를 살펴보면, 그 내용이 기록에 따라 조금씩 다르다. 이들 자료를 몇 개의 주제로 나누어 비교하면서 이 사건과 토마스의 순교 과정을 다시 검토하려는 것이 이 논문의 목적이다. 다만 그가 조선에 오게 된 경위와 제너럴셔먼호 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 그의 행적은 이미 상세히 밝혀져 있기 때문에 여기서 다시 언급하지는 않겠다.
이 주제에 대한 사료는 비교적 많다. 그러나 사료 비판이 매우 어렵다. 기록으로 남아 있는 것들은 대부분 조선측의 입장이 반영되어 있다. 반면 제너럴셔먼호측의 입장을 담은 기록은 전혀 없다. 생존자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그 대신 당시 상황을 목격한 조선인들, 그 가운데서도 주로 기독교인들의 증언이 제법 남아 있어 도움을 준다.
그러나 이들 기록과 증언 사이에는 서로 어긋하는 부분이 너무 많아 어느 쪽이 옳은지 판단하기 어렵다. 기록을 따르면 조선측이 정당하고, 증언을 모으면 제너럴셔먼호측이 유리하다. 특히 증언만 갖고 본다면 토마스는 명실상부한 순교자가 된다. 그런데도 기존의 연구에서는 서로 상반된 내용의 자료들을 비교·대조하지 않은 채 이용하여 왔다.
제너럴셔먼호 사건과 토마스의 최후는 캐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의문 투성이다. 도대체 어떤 자료를 어느 정도 믿고 따라야 할 지 종잡을 수 없다. 필자로선 자료의 정오(正誤)의 취사(取捨) 여부를 따지기가 벅차다.
그러나 자료들을 비교·검토하는 가운데 갖게 된 생각은, 토마스 목사의 순교는 확실히 다시 따져 볼 여지가 있으며, 특히 그의 최후 모습은 아무래도 후대에 꾸며진 인상을 지우기 어렵다는 것이다. 만약 토마스의 순교 미담을 듣고 얻은 감동이 과연 뿌리 없이 맺어진 열매라면, 이는 분명히 고쳐져야 한다. 행여 필자의 이같은 생각이 잘못으로 드러날지라도, 한국 기독교사 연구의 진척을 위해 이 작업은 나름대로 필요한 시도라 여겨진다.


2. 제너럴셔먼호에서 토마스의 역할

토마스가 통역의 자격으로 미국상선 제너럴셔먼호에 타고 중국 산동성 지푸를 떠난 것이 1866년 6월 30일(음력), 이어 평안남도 용강현 다미면 주영포 도착(7월 7일) → 황해도 황주현 삼전방 송산리 도착(7월 8일) → 평양 초리방 사포구 도착(7월 11일) 등의 여정을 거쳤다.
제너럴셔먼호를 찾아간 조선인 관리의 보고에 따르면 토마스는 허리에 권총과 환도를 차고 있었다. 그러나 이는 크게 탓할 일이 못된다. 1895년 춘생문사건이 일어나던 날 고종 곁에 있었던 언더우드(H. G. Underwood)·에비슨(O. R. Avison)·헐버트(H. B. Hulbert) 등 선교사들도 권총을 갖고 있었다. 조선 상황에 어느 정도 익숙해진 이들 선교사도 호신을 위해 때로는 무장을 했는데, 미지의 땅을 찾아나선 토마스가 권총을 갖고 있었다고 해서 크게 이상할 것은 없다.
제너럴셔먼호를 찾아간 조선인 관리의 눈에는 토마스가 중국어는 물론 조선어도 어느 정도 알고 있었으며, 배 안의 일은 모두 그가 주관하고 있는 것으로 비쳐졌다.《고종실록》을 살펴보면 조선측 관리들과의 대화는 대부분 토마스가 맡았음을 곳곳에서 쉽게 알 수 있다.《패강록》과《평양지》에서도 양쪽의 대화 창구는 언제나 토마스였던 것으로 나온다. 그는 단순한 통역이 아니라, 그 때 그 때 상황을 판단해 제너럴셔먼호의 진퇴(進退)를 결정하는 책임적 위치에 있었던 것이다. "최난헌과 조능봉이 우두머리였다"는 기록도 이같은 추측을 거든다.
특히《환재집》을 보면 토마스는 거의 선장이나 다름없는 역할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이 기록을 보면 토마스가 조선인 관리의 말을 들은 척도 않고 방자하게 성을 냈다거나, 교활하고 거만하기가 비길 대 없다거나, 갑자기 다른 나라에 침입해 사단(事端)을 일으켰다거나 하는 등의 부정적인 표현이 종종 나온다.
《패강록》에서는 제너럴셔먼호가 찾아온 목적을 선교·교역·유람 등으로 꼽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교역이었다. 토마스 아닌 일반 선원들이 선교를 위해 위험을 감수할 까닭은 전혀 없었다. 조선측에서도 제너럴셔먼호가 온 목적을 통상으로 보았으며, 오직 교역을 위해 그들은 조선측의 제지가 있더라도 평양 또는 서울까지 올라갈 굳은 각오를 하고 있었다.
물론 일반 선원들의 목적과 토마스의 그것이 같을 수는 없다. 토마스는 분명히 복음 전파를 위해 조선을 찾아왔다. 그는 조선측 관리와의 대담에서 천주교 탄압의 이유를 물으며, 개신교가 인의충효(仁義忠孝)를 모두 갖춘 종교라고 말하는 등 선교에 대한 의지를 결코 꺾지 않았다. 관리가 조선에서는 두 종교 모두 금지되어 있다고 밝혔지만 토마스는 물러서지 않았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토마스의 선교 의지와 일반 선원들의 통상 욕구가 맞물려 이들은 기필코 평양에 가려 한 것이다.
토마스는 단순히 통역만 맡은 것이 아니라 제너럴셔먼호의 진퇴를 좌우할 정도의 역할까지 떠안고 있었다. 따라서 이 배가 조선측의 제지를 무시하고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가다 당한 불행에는 그의 책임이 빠질 수 없다.
한편 당시 제너럴셔먼호를 찾아갔다가 성경을 얻은 조선인들이 적지 않았던 것 같다. 오문환의《도마스목사전》에는 그들의 증언이 몇 건 실려 있다. "당시는 사람이 너무 많이 승선하야 침몰될 형편에까지 이르렀다 하며 포리(浦里)에서만 분급한 성경수가 5백여 권이나 된다"고 한다. 복음 전파를 위한 토마스의 열성을 엿볼 수 있으며, 또한 그가 제너럴셔먼호에서 차지하는 위치도 가늠할 수 있는 대목이다.


3. 제너럴셔먼호측과 조선측의 충돌 원인

제너럴셔먼호 사건에서 양측의 충돌 경위를 따지는 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 이는 제너럴셔먼호 사건의 가해자와 피해자가 누구인가를 가름하는 단서가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누가 먼저 발포했는가를 알아볼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이에 그쳐서는 안 된다. 반드시 발포의 이유까지 살펴보아야 한다. 즉 정당한 발포였다면 발포 자체만으로 비난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에 앞서 확실히 밝혀둘 점이 있다. 조선측에서는 가급적 제너럴셔먼호와의 충돌을 피하려 했다는 점이다. 낯선 이양선(異樣船)이 나타났는데도 조선측에서는 여러 차례 관리를 보내, 온 목적을 묻는 등 신중한 태도를 잃지 않았다. 사실 그 전에 조선을 찾아 왔던 서양 배들 가운데 조선측의 공격을 받은 경우는 한 번도 없었다. 그리고 그들이 식량과 물품을 요구하면 조선측에서는 대체로 그것을 들어주고 조선에서 떠나가도록 타일렀다. 제너럴서면호 사건이 일어나기 직전인 그 해 5월 미국상선 서프라이즈호(The Suprise)가 평안도 철산(鐵山) 선사포(宣沙浦)에 표착(漂着)했을 때 평안감사 박규수가 이들을 구조하여 후대한 뒤 중국까지 무사히 호송했던 점을 보더라도 외국선박에 대한 조선의 태도를 짐작할 수 있다.
제너럴셔먼호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의 요구에 따라 조선측에서는 두 차례에 걸쳐 쌀·고기·계란·채소·땔감 등을 대주었다. 결국 제너럴셔먼호에 대한 조선측의 입장은 다른 이양선의 경우와 같이 부드럽게 타일러 돌려 보내려는[柔遠] 것이었다.
그렇다면 왜 조선측이 방침을 바꾸어 제너럴셔먼호를 공격하게 되었을까. 그것은 제너럴셔먼호측에서 중군(中軍) 이현익(李玄益)을 납치했기 때문이다. 이는 모든 기록에서 일치되는 부분이다. 여기서 다시 궁금해지는 것은 도대체 왜 제너럴셔먼호측에서 그를 납치했는가 하는 점이다. 이 대목은 제너럴셔먼호 사건의 책임 소재를 따지는 데 중요한 관건이 되므로 자세히 살펴보겠다.
《고종실록》에서는 제너럴셔먼호에서 먼저 발포했다고 했으며, "The Fate of the General Sherman"과《패강록》,《평양지》등에서는 조선군이 그랬던 것으로 나와 있다.
그런데 모든 기록에서 일치되는 점이 있다. 중군 이현익이 제너럴셔먼호에 납치된 뒤 발포가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하나 더 따질 부분이 있다. 왜 이현익이 납치되었는가 하는 점이다. 그럴 만한 타당한 이유가 있었다면 납치는 물론 이후의 발포의 책임으로부터 제너럴셔먼호측은 어느 정도 벗어날 수 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하다면 모든 책임은 그 쪽으로 돌려질 것이기 때문이다.
먼저《고종실록》에서는 이현익이 제너럴셔먼호에서 나온 소청선(小靑船)을 감시하며 따라가다가 피랍되었다고 한다.《평양지》에서는 제너럴셔먼호측에서 글을 보내 중군과 상의할 것이 있다고 유인한 뒤 억류했다고 하며, 오문환의《도마스목사전》에서도 이를 인용하고 있다. "The Fate of the General Sherman"에서는 조선군이 무장 태세를 갖추는 것을 보고 경계하던 제너럴셔먼호측에서 최후 통첩을 하기 위해 찾아온 중군을 납치했다고 한다. "The First Protestant Martyr in Korea"에서는 제너럴셔먼호를 찾아온 중군의 신인(信印)을 빼앗은 뒤 이에 항의하는 중군을 억류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 부분에 대해서 주목해야 할 기록이《패강록》이다. 이 책은 이현익의 아들 이흥근이 쓴 것이다. 이에 따르면 문정(聞情)에 나선 진사(進士) 안상흡(安尙洽)이 제너럴셔먼호를 퇴치할 방안을 적은 문서를 든 채 배를 타고 이현익이 탄 배에 앞서 제너럴셔먼호에 접근했다가 제너럴셔먼호에서 띄운 소청선에게 그 문서를 빼앗겼다는 것이다. 그리고 제너럴셔먼호측에서는 그 문서를 통해 조선측에서 선원들을 상륙시킨 뒤 몰살하려는 계획을 알아채고 이현익이 탄 배를 나포했다는 것이다.
요컨대《고종실록》과《패강록》에서는 다른 배에 타고 있던 중군 이현익을 제너럴셔먼호측에서 납치했다는 것이고, 다른 자료들에서는 제너럴셔먼호에 찾아온 그를 억류했다는 것이다. 그리고《패강록》에 나온 것처럼 정말로 조선측에서 몰살 계획을 꾸몄다면 제너럴셔먼호측이 흥분할 만한 이유가 된다. 그러나 그 경우라도 먼저 조선 관리를 납치하고 문서를 빼앗은 것이 제너럴셔먼호측이었음은 분명하다. 즉 먼저 시비를 건 책임을 벗기 어렵다.
제너럴셔먼호에 억류된 이현익이 구출되는 과정도 자료에 따라 조금씩 다르지만 박춘권(朴春權)의 활약이 주요했다는 점에서 모두 일치한다. 이현익이 어떻게 구출되었는가 하는 점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이제 인질을 구출한 조선측으로서는 제너럴셔먼호를 공격할 충분한 명분과 기회를 얻게 된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격렬한 화공(火攻)과 투석(投石)이 시작되어 제너럴셔먼호측을 궁지로 몰아넣었다.


4. 토마스의 최후에 대한 기록

사실 토마스의 최후 순간은 역사적으로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그가 의연하게 죽었든 비굴하게 죽었든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가 죽게 된 이유와 과정이 중시되어야 한다. 그렇지만 이 부분에 대한 우리의 관심이 매우 높기 때문에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먼저 짚고 넘어갈 점은, 제너럴셔먼호가 소각될 때 토마스가 뱃머리에 나와서 성경을 뭍쪽으로 던졌다는 이야기의 진위 여부이다. 이 내용을 뒷받침하는 자료는 다음의 증언이다.

"용감하게도 홀로 耶蘇라고 고함을 치며 무수한 성경을 船頭에서 뿌려주엇스니 이 壯絶快絶한 극적 광경은 당시 근 20의 청년으로 外城에 거주하면서 江岸城上에서 이 광경을 친히 목격하고 후에 평양부근 장로교회 초대신자가 되야 80고령인 금일에도 충실하게 대동군 대동강면 조왕리교회에 출석하는 黃命大 氏가 증명하고 잇다.……당시 觀景人 중 생존자의 言이 洋船 燒火時에 何許 一洋人이 서적을 擲外하면서 예수라 말하는 것을 聽聞이라 하오며……"

배와 강안(江岸)의 거리나 예수라는 발음 등 조금 미심쩍은 점이 있기는 하지만 이는 목격자들의 진술에 따른 것이므로 달리 부인할 길이 없다. 아마도 토마스가 배에서 탈출하기 직전 가지고 왔던 성경을 던졌으며, 그 뒤 빠져 나왔다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이제 그의 최후에 대한《고종실록》의 기록을 살펴보면, 배가 불타자 토마스와 조능봉이 뱃머리로 빠져 나와 살려달라고 요청했지만 곧 사로잡혀 묶인 채 강가로 끌려 오니 군인과 백성들이 분한 마음으로 일제히 달려들어 때려 죽였고 그 나머지 무리도 모조리 죽여 없앴다고 한다.
《평양지》의 기록은, 앞서 언급한 대로 다른 자료들에 없는 특이한 대목이 있지만 토마스의 최후 모습은《고종실록》과 비슷하다. 즉 제너럴셔먼호측에서 마구 총과 포를 쏘아대자 조선 군인들은 토마스와 조능봉을 묶고 또 땔감을 실은 배 두 척을 제너럴셔먼호에 접근시켜 불을 놓으니 화염에 휩싸여 선원들이 배에서 뛰어내려 도망쳤으나 군인들이 이들을 좇아가서 잡아 죽였으며, 묶인 채 뭍으로 끌려온 사람들은 전투에서 죽거나 다친 사람들의 친지들이 칼로 죽였다는 것이다.
당시 목격자의 증언을 토대로 쓴 게일의 글에서도 비슷한 내용이 나온다.

"그 불쌍한 외국인들은 성난 군중들에 의해 난자당했다. 江岸에 이른 한두 명은 계속 절하면서 백기를 흔들었다. 그러나 그들은 용서받지 못하고 결박되었다가 난자당했다.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은 더욱 난자당했으며, 어떤 부분은 약으로 쓰기 위해 도려내졌고, 나머지 부분들은 모아져 태워졌다."

오문환의〈기독신보〉1926년 12월 8일자 기고에서도 이같은 점을 확인할 수 있다.

"그때에 최난헌은 紅繩으로 결박하엿다 한다. 최난헌·조능봉은 군사의게 出付치 안코 人民의게 주매 전쟁 중 자기의 친족이 죽은 사람들이 칼로  너죽엿다 한다. 이를 위시하야 24일에는 선원 전부를 죽이고 그 시체들은 모하셔 閑似停 아래 버려두엇다가 몃칠 후에야 그것을 강 건너편 蓬萊島上段에 뭇엇다 한다."

이들 자료에서 공통되는 점은, 몸이 묶인 토마스가 백성들에게 죽임을 당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 자료를 좇는다면 토마스는 군인에게 참수된 것이 아니라 몸이 묶인 채 백성들에게 맞거나 찔려 죽은 것이 된다. 따라서 자기를 죽이려는 형리 또는 군인에게 성경을 주었다는 미담은 그 근거를 잃게 된다.
그러면 그 감동적인 미담은 언제 어디서 나온 것일까. 우선 오문환은 앞서 나온〈기독신보〉1926년 12월 22일자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현재 경상남도 통영 부근 교회를 보시는 이재풍 목사의 사촌처남이 되는 이는 洋亂 때 군인으로 나아갓던 사람 중의 1인이다. 그의 말을 드르면 그 때 칼을 가지고 선원을 전부 살해할 시에 其中 1인은 紅布衣의 책을 들고서 其冊을 밧으라고 애걸하엿다 한다. 지금 우리가 이것을 생각하야 보면 其冊을 가지고 작고 밧으라고 하던 이는 물론 도마쓰 목사일 것이다."

당시 현장에 있었던 군인의 증언을 따른 것이니 사료적 가치가 높다. 아마도 성경이었을 홍포의의 책을 주려고 애쓴 사람이 토마스였다면, 미담은 사실이 된다.
또한 해밀턴은 The Korea Mission Field 1927년 9월호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토마스는 그를 죽이려는 군인을 만났다. 토마스는 갖고 나온 성경을 그 에게 주려고 애썼다. 군인은 거절했고, 토마스는 백사장에 무릎을 꿇고 손을 꼭 쥔 채 눈을 감고 하나님께 기도했다. 군인은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토마스의 입술은 계속 움직였다. 눈을 뜬 토마스는 군인을 향해 미소를 지으며 자꾸 성경을 주려 했다. 무릎 꿇은 토마스를 죽여야 한다고 마음먹은 군인은 마침내 칼로 그의 심장을 찔러 죽였다. 그는 자기가 좋은 사람을 죽였다고 느꼈다고 뒤에 가족들에게 말했다. 그는 토마스가 떨어뜨린 성경을 주워 집으로 가져왔다. 토마스를 죽인 그 사람은 작년에 평양신학교를 졸업한 이영태 모친의 삼촌(uncle)이다. 이영태는 지금 레이놀즈(Wm. D. Reynolds) 박사의 서기(secretary)로 있으며, 성서번역위원회 회원으로 성서번역에 힘쓰고 있다."

이 대목은 앞서 나온 오문환의 기록보다 자세하지만, 이 글 자체가 오문환의 도움을 받아 쓰여진 것이기 때문에 위의 기록도 사실상 오문환의 것으로 보아야 한다. 여기서는 토마스를 죽인 군인의 신원이 대체적으로나마 밝혀져 있는 것이 흥미롭다. 그가 앞서 나온〈기독신보〉에서 언급된 이재풍 목사의 사촌처남과 같은 사람인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적어도 토마스를 죽인 것이 군인이었다는 점에서는 일치한다. 해밀턴은 그 출처를 밝히지 않았지만, 미루어 짐작컨대 그 군인의 가족들에게 구전된 것이 아닌가 싶다.
이어 오문환은 1928년에 나온《도마스목사전》에서 이 부분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도마스 목사는 두 무릅을 沙場에 꿀고 머리를 숙여 땅에 대인 후 얼마동안 최후의 기도를 올니고 다시 니러나서 군인의게 성경 밧기를 권하엿스나 其 군인은 그의 말을 충분히 이해치 못하엿슬 것도 사실이려니와 환경이 그것을 허락지 안는지라 맛참내 칼을 그 가삼에 대여 하나님의 충복 도마스 목사의 貴여운 생명을 빼앗고 말엇다. 비록 玉石이 俱焚으로 不善한 他 수십의 徒와 함께 閑沙亭 上便沙場에서 피를 흘니고 뼈가 부서지여 마즈막에는 蓬萊島 上端一隅에 매몰되고 말엇스나 이 얼마나 의로운 죽엄이며 이 얼마나 고상한 최후이였는가! 아모리 흉기를 들어 그 가삼을 찌른 군인이라도 그의 떠러쳐준 성경을 집어 가지고 가서 자기 가족 일동의게 내가 서양사람을 죽이는 중에 한 사람 죽인 것은 내가 지금 想覺할사록 이상한 감이 잇다. 내가 그를 찌르려고 할 때에 그는 두 손을 마조잡고 무삼 말을 한 후 紅布衣의 책을 가지고 우스면서 나의게 밧으라고 권하엿다. 그럼으로 내가 죽이기는 하엿스나 이 책을 밧지 안을 수가 없서서 밧아왓노라하엿스며……"

그런데 오문환은 앞서 나온 두 자료들과 달리 군인의 신원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다. 그러면서 이 책의 다른 부분에서 그 군인의 이름을 알고 있다고만 했다. 이 책의 다른 부분에서 그가 증언이나 사료를 비교적 소상히 밝히고 있는 것과 대조적이다. 그럼에도 그 내용은 앞의 증언과 기록보다 더욱 구체적이고 감동적이다. 의문이 아닐 수 없다.
1971년에 나온 김양선의《한국기독교사연구》에도 비슷한 대목이 나온다.
"토마스 목사는 평양감사 박규수 앞에까지 갔으나 형편이 불리함을 아는 그는 어쩔 수 없이 토마스 목사의 생명을 군졸의 손에 맡겼다. 그는 드디어 양각도 옆 쑥섬에서 참수되었다. 토마스 목사는 참수를 당하는 최후 순간까지 복음을 전하는 데 온갖 힘을 기울였다. 칼을 들어 치려는 군졸에게까지 성서를 주었다."

여기서는 다른 자료에서 보이지 않는 새로운 내용이 나온다. 그 하나는 토마스와 박규수의 대면이고, 다른 하나는 토마스의 참수(斬首)이다. 1895년 북경에서 이들이 만났었다는 연구도 있지만 박규수는 이 해에 북경에 간 적이 없었다. 그리고 다른 자료들과 비교해 볼 때 참수 부분은 아무래도 의심스럽다. 이것이《패강록》에서 따온 것인지 김양선이 지은 것인지 가려내기 어렵지만, 인용할 때 신중해야 할 부분이다.
또한 토마스를 처형한 군인이 바로 중군 이현익을 구출했던 박춘권이라는 연구도 있다. 박춘권이 뒷날 평양 장로교회 최초 교인 가운데 한 사람이 된 것은 사실로 보이지만, 그가 토마스를 죽인 장본인이라는 증거는 아무 데도 없다. 그가 정말로 토마스를 죽였다면 오문환의 연구에서 그 부분이 빠지지 않았을 것이다.
이상의 내용을 A집단과 B집단으로 나누어 정리하면 다음 표와 같다.

 

이 표를 보면 A 사료들과 B 사료들 사이에 적지 않은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결박 여부, 살해 주체, 성서 전달 여부 등이 상반되고 있다. 그리고《평양지》와《패강록》이 쓰여진 시기를 몰라 단언하기 어렵지만, 대략 1926년을 고비로 해서 이같은 차이가 나타나는 것 같다.
그러면 1926년은 어떤 해인가. 바로 토마스가 죽은 지 60년이 지난 새로운 병인년(丙寅年)이다. 이 해를 기리기 위해 오문환은 주로 생존자들의 증언을 모아 토마스가 죽은 음력 7월 24일 소책자를 펴냈으며, 이것은 그 해 열린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에서 큰 반응을 얻었다. 이를 보완한 것이 같은 해 11∼12월 세 차례에 걸쳐〈기독신보〉에 연재한 "평양양난한화"(平壤洋亂閑話)이다. 이 때까지만 해도 오문환은 "그 때 칼을 가지고 선원을 전부 살해할 시에 그 중 1인은 홍포의의 책을 들고서 그책을 밧으라고 애걸하엿다 한다"고 간략히 적는 정도였다.
이 무렵인 11월 14일 경성 승동교회에서는 대영성서공회 설립 30주년기념식과 더불어 토마스 목사 순교 60주년기념식이 열려 그를 추모하는 열기가 높아갔다. 그리고 이 같은 열기는 1927년 5월 28일 토마스 목사 순교기념회의 창립으로 이어졌다. 창립 취지문에서 오문환은 이전보다 확실한 표현으로 토마스의 최후를 장엄하게 그려냈다. 그리고 그 내용은 이어 나온 해밀턴의 "The Protestant Martyr in Korea"(1927년 9월)와 오문환의《도마스목사전》(1928년 9월)에 그대로 옮겨졌다.
그런데 오문환의 연구에서는 김양선이 인용한《패강록》이 나오지 않는다. 그는 아마 이 자료를 보지 못한 것 같다. 그렇다면 오문환이 제시한 그 미담의 구체적 근거는 "그 때 칼을 가지고 선원을 전부 살해할 시에 그 중 1인은 홍포의의 책을 들고서 그 책을 밧으라고 애걸하엿다 한다"는 대목 하나뿐인 셈이다.
이처럼 1926년 토마스 목사 순교 60주년기념식 거행 및 1927년 토마스 목사 순교기념회 창립을 전후해 그에 대한 미담이 이전보다 감동적으로 구체화된 것이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서 이 미담은 역사적 사실로 점차 자리를 굳히며 한국 기독교사의 앞머리를 장식하게 되었다.
이 미담의 진위 여부는 독자들의 판단에 맡긴다. 다만 모든 자료에서 공통된 점은 제너럴셔먼호측에서 먼저 중군 이현익을 납치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조선측의 퇴거 요구에도 불구하고 평양을 향해 올라가다 참변을 당했다는 것이다. 그 지경까지 이르게 된 데는 조선측과의 교섭을 맡았던 토마스의 책임이 결코 가볍지 않다. 적어도 사건 당시 그는 제너럴셔먼호측을 사실상 대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제너럴셔먼호의 소각과 선원들의 몰살은 그들이 자초했다는 인상을 지우기 어렵다. 뒷날 박규수는 이전부터 열강의 개항 요구에 대처할 방법을 놓고 생각해 왔으며, 제너럴셔먼호를 격퇴할 뜻이 없었는데 그쪽에서 스스로 사지에 뛰어들었다고(自就死地) 아쉬워한 것을 보아도 그렇다.


5. 맺음말 - 토마스의 선교 시도와 최후가 주는 교훈

토마스는 복음을 전파하려다가 아쉽게 뜻을 펴기도 전에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그러나 분명히 해 둘 점은, 조선인들이 그를 죽인 이유는 그가 선교사였기 때문이 아니다. 다시 말해서 토마스는 선교활동때문에 죽은 것이 아니다.
조선 후기 이 땅에 들어왔던 천주교 신부들이 처형된 이유는 확실히 그들의 선교활동때문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죽음은 분명한 순교이다. 만약 토마스도 조선에서 선교활동을 벌였다는 이유때문에 죽었다면 그 역시 분명한 순교자가 된다. 그러나 그는 조선의 주권을 무시하고 저지른 침략적 행위때문에 죽은 것이다.
설령 토마스의 장엄한 최후가 사실이라 할지라도 이같은 필자의 생각은 바뀌지 않는다. 그가 죽은 순간에 형리에게 성경을 주었다 해서 그의 이전 실책이 씻겨지지는 않는다. 적어도 사료상으로는 제너럴셔먼호 사건의 책임자 가운데 하나가 바로 토마스이며, 그는 성경 반포때문에 죽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조선측 기록에 그에 대한 부정적 표현이 나오는 것은 그가 통역이었기 때문이며 그 역할을 맡다 보니 어쩔 수 없었다고 변호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같은 견해는 토마스가 선교사 아닌 전문 통역일 때만 타당하다. 그는 분명 선교사였다. 제너럴셔먼호측의 요구가 부당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것을 충실히 통역하기에만 급급했다면 그는 선교사로서의 자질을 의심받지 않을 수 없다. 통역해야 할 내용이 합당하고 정의롭지 않은 것일 경우 그것을 저지하고 설득해야 할 책임이 그에게 있기 때문이다. 만약 그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해 통역한 것이라면 그 제국주의적인 발상을 통해 우리는 역시 그의 선교사적 양식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어떤 이는 결국 토마스가 그토록 무리하면서까지 평양에 가려 한 이유가 바로 복음 전파를 위해서였으므로, 넓게 보면 그 역시 선교활동때문에 죽은 것이 아닌가 하고 주장할지도 모른다. 일면 타당해 보인다. 결국 순교를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에 따라 사람마다 평가가 달라질 수도 있다.
하지만 필자의 생각은 이렇다. 적절한 비유인지 모르지만, 복음 전파를 위해 어느 지점으로 가는데 난폭운전을 하다가 교통사고로 죽은 선교사가 있다면 그 죽음을 순교로 볼 수는 없다. 순교는 그 직접적 사인이 선교활동때문일 경우에만 해당된다고 본다. 그런 이유에서 필자는 선교를 위해 남부지방으로 가던 도중 병으로 죽은 데이비스(J. H. Davis, 1858∼1890)의 경우도, 목포에서 열리는 회의에 가려다 군산 앞바다에서 빠져 죽은 아펜젤러(H. G. Appenzeller, 1858∼1902)의 경우도, 모두 값지고 안타까운 죽음임에 틀림없지만 순교로는 보지 않는다.
필자는 복음 전파를 위해 목숨을 걸고 청춘을 바쳐 이 땅에 온 선교사들, 특히 토마스의 죽음을 왜 이토록 야박하게 평가하는가. 그것은 그 평가가 토마스 개인에 대한 것으로만 그치지 않고 후세의 우리 기독교인들에게도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토마스의 죽음을 순교로 본다면, 이는 복음 전파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그의 행위에 정당성을 주는 것이 된다. 그리고 세계 곳곳으로 파송되는 선교사들에게 토마스가 불굴의 의지를 가진 모범적 선교사로 비쳐질 수 있고, 자칫하면 제너럴셔먼호 사건과 비슷한 비극을 불러올 수도 있다.
그러면 기독교 선교가 법으로 금지된 곳에서는 선교를 아예 포기해야 하는가? 그럴 리 없다. 기독교사는 박해와 수난, 그리고 그것들을 이겨낸 의지와 투쟁의 역사였다. 처음부터 기독교를 인정하거나 환영한 나라를 찾기는 힘들다. 그리고 지금도 선교가 금지된 나라에서 이런 저런 모양으로 복음을 전파하는 많은 선교사들이 있다.
그러나 문제는, 토마스와 제너럴셔먼호처럼 제국주의 세력과 더불어 이 땅에 찾아와 납치·발포까지 하며 노골적으로 정부에 대항한 경우까지 잘했다고 할 수는 없다는 데 있다. 총칼로써 통상을 하려 한 당시 제국주의 세력은, 비록 그것이 세계적 추세였다 하더라도 분명히 잘못이다. 통상이 아닌 선교를 위해 제너럴셔먼호에 탄 토마스이지만 그 배의 책임자 가운데 하나였던 그도 비난의 대상에서 벗어날 수 없다. 총칼을 통해 얻은 선교의 자유로 사랑과 평화를 외친다면 설득력을 얻지 못할 것이다. 행여 오늘날에도 본국의 우월한 정치력이나 강력한 군사력, 또는 풍부한 경제력을 무기 삼아 그 나라의 주권을 무시하거나 그 국민의 인권을 유린하면서까지 강제적으로 선교의 문을 열려는 시도가 있다면, 제너럴셔먼호 사건의 교훈을 되새겨 볼 일이다.*

 

출처:http://user.chollian.net/~ikch0102/nm8-3.htm

정보제공:안사모의 바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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