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서론
Ⅱ.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기독교
1.친일행위의 개요
2.기독교 선교사들의 한국인식
Ⅲ.기독교의 친일행위
1.신사참배 강요문제와 기독교
a.기독교내의 갈등
b.기독교 신사참배의 실태
2.황국신민화 정책과 기독교
a.기독교의 황국사상의 고취
b.한국교회의 일본교단에의 예속화
3.전쟁동원과 기독교
a.징병, 징용에서의 역화
b.국방헌금, 군수품 헌납
Ⅶ.결언
●참고문헌
卒業論文
일제말기 기독교의 친일행위
2000年 12月 12日
圓 光 大 學 校
史學科 93305003
곽 형 일
Ⅰ서론
일제 말기 한국 개신교를 오늘 이 시점에서 볼 때, 우리가 자랑스럽게 여길 수 있는 전통과 유산, 그리고 부끄러워해야 할 오점은 무엇인가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 그것은 자랑스러운 것은 앞으로 계속 살려가야 할 것이고 부끄러운 것은 그것을 거울로 삼아 다시는 그러한 일을 저지르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각에서 본 연구는 일제의 식민통치 말기 한국교회의 친일적 행위를 규명하기 위한 작업의 일환이다. 따라서 일제의 한국교회에 대한 통치의 실체와 한국교회의 친일적 행위를 구체적으로 실증하는 데 목적이 있다.
일제 말 한국교회의 행태에 관한 현재까지의 연구는 대략 세 가지 방향에서 진행되어 왔는바, 그것은 이 시기를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그들의 침략전쟁을 수행하기 위하여 한국교회에 대하여 신사참배 등을 강요함으로써 '참담한 수난' 이 되었다는 관점에서 일제의 박해와 한국교회의 순교정신을 부각시키고자 한 연구이다.
다른 하나는 한국교회 지도자들의 개별적 친일 행위에 주목하면서 이 시기 한국교회의 친일적 성향이 일제의 강압에 의한 외적 요인과 함께 교회구조 자체에 내재하는 모순에 있었음을 규명하고자 한 연구이다.
또 다른 하나는 "역사는 충실한 사실을 제공하는데 힘써야 하며 진실해야 한다." 는 관점으로 이 시기의 '영광과 치욕'을 사실 그대로 기술하고자 한 실증주의적 연구이다.
이상에서 보듯 기존의 연구들은 훌륭한 연구 실적이지만 두 가지의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첫째로 '오욕의 역사' 이기에 건드리고 싶지 않다는 은폐론적 사고로써 다른 시기 연구보다도 소략한 연구상태에 머물고 있다고 할 수 있으며, 둘째는 이 시기의 부일 연구가 신사참배 문제에 편중되어 있어 부일의 전체적인 연구 실적은 거의 없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본 연구는 이 점에서 유념하여 연구하였다.
연구자료로써는 일본말기 친일행위를 소상하게 담고 있는 <기독교신문, 각 교단에서 발행한 신문, 신앙지>, <각 교단의 총회록> 등을 이용하고자 하며, 기타 관련 논문을 이용하고자 한다.
본 연구에서는 이상의 자료와 기존의 연구를 주의로 하여
Ⅱ장에서는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기독교라는 제목과 함께 친일행위의 개념과 구한말 일제시기 초기에 건너온 선교사들의 한국의식을 알아보겠다.
Ⅲ장에서는 기독교의 친일행위라는 주제 아래에서 황국신민화의 첫 걸음으로써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로 인한 한국교회의 갈등, 그리고 이 정책에 협조한 한국교회의 신사참배 실태를 살폈고, 일부 친일적 지도자들이 한국교회에게 어떠한 방법으로 황국신민화 사상을 고취를 거쳐 이루어졌는가를 밝혀보고자 하며, 한국교회가 종전 이전 침략 전쟁을 위해 인적, 물적 자원의 공급으로 징병과 징용에서 어떤 역할을 하였는가, 그리고 이 침략전쟁을 지원하기 위한 헌금, 출정 군인과 가족들을 위한 위문 행위, 군수품 헌납등의 규모에 관하여 기술하려 한다.
끝으로 일제 말 한국교회의 이러한 친일적 행태를 실증적 작업을 통하여 검토하려 한다. 따라서 본 연구는 "비판이 없는 역사는 환상으로 그 자체를 잃어버릴 것" 이라는 시각으로 한국 현대사의 중요한 일부분을 차지하는 기독교사 연구에 한 사례를 제공하고자 하며, 기독교를 긍정적인 측면보다는 더 많은 부분을 부정적인 측면으로 볼 것을 미리 이야기한다.
Ⅱ.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기독교
1. 친일행위의 개념
우리 민족사에서, 일제 말엽의 친일행위는 학문으로든 감정으로든 제대로 정리된 것이 없다. 최근에는 많은 서적이 나왔지만 그들의 친일행위를 나타낸 것이지 '친일파란 어떤 것이다'라고 명확하게 나타나 있는 것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항간의 막연한 반응으로 나타난 친일행위에 대한 내용들을 몇 가지를 알아보면,
첫째, 오욕의 역사니까 건드리고 싶지 않다는 은폐론이다. 그러나 영광의 기록만이 역사는 아니다. 또한 오욕으로 말하면 임란·호란 국치와 분단이 전부가 오욕이다. 계절에 사계가 있듯이, 민족사에도 영욕의 소장은 있는 것이다. 3·1 운동이 여름의 무정한 기록이라면, 친일은 참담한 동면이다. 동면기를 모르고 건국이라는 맹아기를 말할 수 없기 때문에 친일은 결코 은폐의 대상일 수 없을 것이다.
둘째, 당자나 가족의 체면을 위해서 덮어두었으면 하는 인정론도 있다. 그러나 사를 위해서 민족사를 파묻어 버릴 수 는 없다.
셋째, 친일행위를 인식공격의 자료로 삼으려는 경향이다.
그럼 친일행위란 무엇이고 친일파는 무엇인가? 건국후 우리 나라에서도 프랑스가 독일에 점령을 당한 후 독일에 접근하여 도움을 준 사람들에 대한 처벌을 완벽하게 처리를 하고 나라를 정립했던 것 같은 움직임이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반민특위이다. 이 반민특위는 당시 소장파 의원들에 의해서 일어나게 되어 초기에 활발히 움직이다가 이승만의 집요한 술책에 의해 결국 국회프락치 사건으로 인하여 흐지부지하게 되었다. 이때 이들이 친일파로 규정한 내용이 나오는데,
① 일본 정부와 통모하여 한일합방을 위해 적극적으로 통모한자. ② 한국의 국권을 침해하는 조약 또는 문서에 조인한 자와 이를 모의한 자. ③ 일제로부터 작위를 받은 자. ④ 일본 국회의 의원이 된 자. ⑤ 독립운동자나 그 가족을 살상한 자. ⑥ 중추원 부의장과 고문 또는 참의가 된 자. ⑦ 칙임관 이상의 관리가 된 자 ⑧ 밀정행위로 독립운동을 방해한 자. ⑨ 독립운동을 방해하는 일제기관의 중앙간부를 지낸 자. ⑩ 군경으로 악질행위를 한 자. ⑪ 국내에서 비행기 또는 탄약공장을 경영한 자. ⑫관리들 중에서 적극적으로 일제에 협력한 자. ⑬일본국적의 취득을 위한 각 단체의 간부 중 악질 행위를 한 자. ⑭ 종교·문화·사회·경제의 각 방면에 걸쳐 반민족 행위를 자행한 자. ⑮ 반민 언론 또는 저술을 통해 일제에 협력한 자 및 특별히 개인적으로 일제에 협력한 자
로 규정을 하였다.
허나 이러한 친일파들도 다르게 생각해보면 또 하나의 시대적 피해자이다. 군대와 결탁한 총독부의 무한대한 권력 밑에서, 황도조선을 외치지 않는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살기 위해서라는 변명으로 민족앞에 죄인이 되어 버린 소위 친일파들은 일제 통치의 참담한 제물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개중에는 살기 위해서 어쩔수 없었다는 변명이 통할 수 없는 경우도 있었다. 조선어 전폐를 주장한 자, '일한합병 공로자 감사위령제'를 지낸 자, 창씨를 적극적으로 한 자, 선거법위반까지 해가면서 도회·부회 혹은 중의원에 출마한 사람도 있었는데 이들이 정녕 살기 위해 부일을 한 자들인가?
황민화를 위한 탄압은 남녀노소와 유명 무명의 구별이 없이 누구나가 똑같이 당하던 악몽이었다. 해방은 되었고 사람들은 황민화의 탄압에서 벗어났고 새로운 나라도 탄생하였다. 하지만 아직도 친일파들이 끼친 해악은 아직도 우리에게 남아있다.
고로 연구자는 친일행위라는 개념을 폭 넓게 보고 싶지는 않다. 위에서 서술한 바와 같이 그 시대에 살았다는 이유 자체가 친일이라는 개념을 벗어날 수는 없는 것이다. 간단한 예로 김성수 같은 인물은 한편으로 문화재 보호자의 일인자로, 또 다른 면으로는 적극적 친일행위자로 규정한다. 친일행위, 친일파의 개념은 정말 어렵다. 하지만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의 조그마한 삶을 지키는 수단이 아니라 자신의 부귀영화를 위한 행위, 자신의 영달의 위해 자기민족을 죽음으로 내몬 극단적 행위를 친일행위라기보다 반민족행위라고 말할 수 있겠다. 그리고 그러한 예는 형사, 총독부 관리 등 적극적 부일자들이 해당 된다. 이들은 삶을 위한 행위가 아닌 반민족행위로 동포를 팔아먹은 자들이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폭 넓은 개념을 사용한 친일행위를 사용하지 않겠다. 자신들의 영달의 위해 자신의 종교와 민족을 팔아먹은 이들의 행위를 친일행위 즉 반민족행위를 친일행위로 보고 서술해 나아가겠다.
2. 기독교 선교사들의 한국인식
일제말 개신교의 부일 행위를 알기 위해서는 한말과 일제초기 개신교 선교사들에 대한 인식이 필요하다. 특히 초기에는 우리 나라 사람보다 외국에서 들어온 선교사들이 교단을 좌지우지하였다. 그러한 사람들이 당시 우리 나라의 상황을 어떻게 보았는가에 따라서 그 교단에 속해있던 우리 나라 사람들의 행동이 결정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사람들이 이후에 교단을 이끌어 가는 주역들이 되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그들의 평가는 현재 대체적으로 우호적이다. 근대적인 학문을 들여왔으며 그러한 학문을 배울 수 있는 학교를 만들었고, 병원도 만들었으며 서양과 접할 수 있는 통로를 개척했다는 긍정적인 반응이 나온다. 맞다. 그들이 했던 행동들은 분명 그 당시 우리에게는 절실하게 필요로 했던 그리고 배워야만했던 내용들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러한 행동들은 맹목적으로 받아들이면 안된다. 한번 뒤집어서 다시 생각을 해보아야 한다.
그리하여 한말과 일제초기 개신교 선교사들에 대한 인식을 살펴보면 아쉽게도 좋은 결과가 나오지 않는다. 당시 많은 미국인 선교사를 가지고 있던 개신교는 미국의 외교정책과 선교정책으로부터 지대한 영향을 받고 있었으며, 대부분의 개신교인들이 친선교사 정신을 지니고 있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또한 미국은 일본과의 밀약을 통해서 한국에서는 대체적으로 정치적인 행동을 수습하는 단계였다. 따라서 우리는 한국의 개신교인들이 대군주 폐하 탄일 경축회등의 민족적 행사등 정치적인 사안 등은 자발적으로 거행하였다기보다는 포교를 우선시한 선교사들의 의도대로 거행하였을 것이라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또한 선교사들이 들어와서 행한 업적 중 하나로 꼽는 것이 근대화 운동이다. 하지만 개신교의 근대화 운동은 그것 자체가 목적이었다기보다는 선교수단이었다.
학교를 세우고 병원을 세우는 등의 행동을 그들이 우리 민족의 역량을 키우기 위해서 세웠다기 보다는 대체로 백인 우월주의에 빠져서 가난하고 못난 동양의 한 소국을 교화하는 차원의 형태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예를 들어서 한글로 번역된 성서를 배포하여 민족언어인 한글을 보급하고 그로 인해 민족의식 형성에 기여하였다는 주장은 개신교의 모든 선교지역에 해당된다. 개신교는 항상 선교지역에서 맨 처음 성서의 자국어 번역을 시도하는 것이 상례이기 때문에, 이 경우에 개신교가 세계 모든 지역에 산재해 있는 민족들의 민족의식 형성에 기여하였다는 주장이 가능해진다. 따라서 성서의 자국어 번역을 각 민족의 민족의식 형성에 기여했다기보다는 복음을 폭넓고 확실히 전파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
또한 학교의 운영에서도 그들의 행동은 민족교육에서 멀어진다. 사실 각 선교회는 개신교계 학교에 무엇보다도 종교적 교화의 기능을 부여했음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은 입신 출세와 학문습득을 위해 영어를 포함한 일반교과의 교육을 기대하였다. 즉 학생들이 일차적으로 희망하였던 것은 기독교 자체라기보다는 오히려 개인 또는 국가와 결부된 근대적 학문이고 근대 교육이며 근대 문명이었다. 하지만 교회측에서는 영어를 정규과목에서 빼는 것을 골자로 한 개편을 시도하자 학생들이 반발하였고, 이에 배재학당은, 교사진의 대부분이 미국인 선교사이고 학생들에게 고등지식이 받아들일 수 있는 예비지식이 결여되어 있다는 점, 교재와 교과서가 부족하다는 점 그리고 교육제도 및 사회의식이 낮은 수준에 머물러 있다는 점 등을 이유로 근대 학교에 어울리는 고등교육 활동을 전개하지 않았다.
즉 개신교계 학교는 일본의 침략에 대항할 수 있는 민족적 역량을 창출해내는 기능을 일부 맡았음에도 불구하고 동시에 친미적 요소를 강하게 지니고 있었다. 따라서 개신교 교육의 반일적 측면을 곧바로 민족적 주체성의 확립으로 연결시키는 것은 무리가 있다. 왜냐하면 실학 이전의 숭명배청론이 지니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개신교 교육의 반일·친미적 성격도 이와 마찬가지로 한계를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개신교의 근대화에 대한 기여를 반봉건이라는 측면에서만 살피고 개신교 활동을 전반적으로 민족운동으로 이해하는 것은 무리가 따른다. 오히려 개신교의 반봉건, 즉 근대화운동에 의해 한국문화의 정체성이 상실되었고, 나아가 서구문화에 대한 종속성을 조장해주었다는 이해가 더 설득력이 있다.
일제의 통치가 시작되자 선교사들은 우리의 독립보다는 단지 그들의 선교가 우선이었다. 즉 일제의 정교분리원칙을 그들은 철저히 따르는 자세를 가지는 데, 그리하여 장로교 선교위원회 총무 브라운(A.J.Brown)은 일제에 대한 선교사들의 태도를 표명하였다.
"일본 통치에 대한 선교사들의 태도는 어떠했을까? 거기에는 네 가지의 태도가 있다. 첫째는 적대요, 들째는 무관심이요, 셋째는 협력이며, 넷째는 충성이었다. 넷째의 충성은 내가 믿고 있는 바에 의하면 온당한 입장이라고 생각한다. 이 입장은 그리스도의 예와도 일치된다. 그리스도는 일본보다 더 악한 정부에 자기의 충성을 바쳤고 그의 사도들에게도 충성을 다하라고 촉구하였다. 이것은 바울의 교훈, 로마서 13장의 말씀과도 일치된다. 평양에서의 한국 선교회에서 이 네 가지 입장 중 어느 것을 취할 것인가 충분히 토의를 거듭한 결과 충성의 입장을 만장일치로 가결하였다."
또한 멕켄지(F.A.Mckenzie)는 일본의 침략이 가시화되는 과정 속에서 한국인들에게 아래와 같이 말하였다.
"복종하라. 그리고 여러분 자신들이 더 좋은 사람이 되기를 힘쓰라. 당신들은 지금 무력으로써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당신들의 자녀들을 교육하라... 당신들도 그들(일본인)만큼의 자치력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라."
그리고 피셔(J.E.Fisher)는 아래와 같이 말하였다.
"선교사들은 일반적으로 준법적이요. 수헌적(守憲的)인 사람들이다. 한국인들을 뒤밀어서 일정(日政)에게 항거하거나 불복케 할 사람들이 아니다. 더구나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이다. ..한국인들로 하여금 일본 사람들을 미워하게 한다면 그것은 기독교 근본 교리에 배치되고 따라서 그것은 죄가 된다."
개신교 선교사들은 정교분리 정책이란 이름 아래 이와 같이 일본의 종교정책뿐만 아니라 제국주의 정책을 비호하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초기의 개신교가 부분적으로 '교'를 통한 '민족'의 구원을 바라는 측면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선교사들을 중심으로 정교분리 정책이 확립되면서부터는 전반적으로 민족구원의 신앙형태보다는 비정치적 개인 구원의 신앙형태로 전개되어갔다. 따라서 근대 개신교의 정교분리 정책은 결과적으로 개신교로 하여금 민족의식을 수용하지 못하게 하였고, 또한 민족주의 논리도 만들어내지 못하게 하는 장애요인으로 작용하였던 것이다.
그러면 다음장부터는 이러한 사상을 가졌던 교단이 일제말 어떻게 부일행동을 하는가를 살펴보겠다.
Ⅲ.기독교의 친일행위
1.신사참배 강요문제와 기독교
a.기독교내의 갈등
처음 기독교인들이 신사참배를 처음 거부하였을 때 그들이 내세웠던 논리는 민족적인 저항의 형태의 논리가 아니라 단지 십계명에 위배되는 우상숭배에 걸린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들이 이후 신사참배를 하였던 것을 정교분리의 형태의 종교적인 것으로만 국한시키지 않고 더 나아가 친일의 성격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들이 행했던 행동들을 이렇게 규정하는 이유는 첫째로 신사참배를 '국민의 의례' 라고 강요하고, "신사참배를 우상종교라고 거부하는 것은 불경죄에 가깝다." 고 주장한 대부분의 지도자들이 계속적으로 일제의 앞잡이가 되었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의 목적인 종교적인 변절보다는 친일화로의 유도에 더 주력하여 아세아대륙에서 <신동아건설>을 위한 내선일체, 황민화 정책을 마련하고 그 거점으로 신사참배를 이용하였기 때문이다.
신사란 일제 황실의 조신인 태양신(天照大神)과 나라에 특별한 공헌을 한 인물들인 전열장병에 참배하는 것인바, 일본인들이 신사에 참배하는 것은 종교행위, 국가의식이라기보다는 보양을 하는 즐거운 행각이었다. 따라서 1931년 일제가 만주사변을 일으키기 전(前) 까지만 해도 한인에게 있어서 그다지 심각한 문제는 아니었다. 만주사변은 <군국주의자>들에게 일본정부내에서 자기들의 정치적 세력을 강화하게 하였고, 아세아 침략의 명분을 주었다. 이어 일제는 중일전쟁을 일으키므로 일제에 대한 한인의 충성과 헌신이 긴급한 과제였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한인을 보다 더 충실한 신민으로 만들어야 하기에 한 가지 수단으로써 일제는 모든 한인이 신사에 참배하도록 의무화했다. 그러므로 일제의 신사참배 정책의 목적은 천황을 중심으로 하여 국민정신의 통합을 이루고자 하는 것이었다. 즉, 국민의례로서의 신사참배가 천황 중심의 침략전쟁을 위한 사상 통합이었고, 이것을 군국주의자들이 주체가 되어 대일본제국을 건설하는데 이용하였다.
일본 파시스트의 정신적 상징인 신사가 처음으로 조선에 세워진 것은 1925년 10월 남산에 건립된 조선신궁이다. 일제는 1919년 제국의회에서 조선신궁을 건립할 것을 결의한 후, 이 신사를 약 4년의 기간과 157만원의 돈을 들여 완공하였다. 그후 조선신궁은 총독의 공적 신사로써, 또는 국가행위에 사용하는 목적을 가졌기에 일황에 대한 충성의 장소가 되었다.
그후 1933년까지 신사가 급증하는 현상이 나타나면서 1935년 11월 평안남도 지사(知事) 안무직부(安武直夫)가 기독교 학교들에게 신사참배 할 것을 강요하였다.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한국교회는 대체로 거부하였다. 이때 정면으로 거부한 평안숭실전문학교 교장인 맥퀸은 1936년 1월 20일 교장직에서 해임되고 숭의여학교 교장인 스누크여사는 추방되었다.
이러한 강열한 저항에 부딪친 일제는 1936년 1월 29일 윤치호와 양주삼이 총독부 학무국을 찾아 갔을 때 국장인 도변(渡邊)은 " 신도의식은 종교의식이 아니고 국민으로서의 의식이며 의식에 참여하는 것은 예배행위가 아니라 조상에 대하여 최고의 경의를 표하는 행위다." 라는 설명을 통하여 교회지도자들이 앞장서서 이해시켜 주기를 강요했다.
그러나 신사참배가 계속해서 교인들 사이에 문제화될 때, 감리교 통리사(通理使) 양주삼은 감리교보 제 39호에서 조선총독부 학무국장으로부터 통보받은 내용을 전문 번역하여 실었다.
①신사의 봉사(奉祀)는 종교가 아니다. (신사와 종교의 주관부서가 다르다. 종교는 문부대신이 관장하고 신사는 내무대신이 관장한다.)
②각 개인의 신교는 자유다. (신사참배는 신앙의 자유를 침범하지 않는 것이다.)라는 것인바, 양통리(梁通理)는 신사참배가 신앙의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시사(示唆)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또 다시 중일전쟁을 일으킨 일제는 1937년 그해 10월 모든 학교와 기관의 집회에서 공적으로 신사참배와 <황국신민서사>를 호창 할 것을 명령했다. 따라서 신도의식에 참가시키기 위한 일제의 강요는 한층 더 강화되었다.
이와 같이 고도의 제국주의적 정책인 신사참배가 강요되자 한국교회내에서는 신사참배에 대한 의견의 분열이 심각하게 나타났다. 신사참배가 하나의 국민적 의례로써 정치적 의미만 가지고 있는지, 아니면 한국교회가 인정하듯이 종교적 성질을 동시에 포함하고 있는지, 또 설사 종교적 행위라 할지라도 교회를 폐쇄시키면서까지 참배에 거부 할 까닭이 있는지의 여부가 현안의 초점이 되었다.
이러한 혼란은 신사참배가 애국적인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는 일제의 회유 때문에 한층 더 깊어 갔다. 선교사들의 태도는 세 가지 입장으로 나타나는바, ㄱ.감리교회 선사들은 미온적인 태도 표명 ㄴ.미국 북장로교회 선부 소속 선교사들은 강하게 반대 의사를 표명 ㄷ.언더우드등 일부 선교사들은 "신사참배 결의는 당연한 것이다." 라는 표명을 하였다.
이러한 혼란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내에서는 주기철 목사를 비롯한 많은 지도자들과 교회들이 신앙의 지조를 지키고 민족의 긍지를 가진 채 적극적인 투쟁을 하였다.
b.기독교 신사참배의 실태
신사참배 거부운동이 거세게 일고 있는 와중에서 <기독교와 시국>이라는 글에서는
「조선기독교도는 황국신민으로 이상 제(諸)행사를 충성스럽게 행하여야 할 것이요 행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황국신민의 의무와 행사를 행하는 것과 종교를 신앙하는 신심과 하등의 틀린 점이 없는 것이다. -생략- 그러므로 황국신민으로 국가의 선조를 숭배하는 신사참배 곧 예배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요 이론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라고 신사참배를 지지하였다.
감리교회는 이미 총리사가 <신사문제에 대한 통첩>에서 "신사의 봉사는 종교가 아니다' 라는 공문으로 신사참배를 묵인하였으므로 이 두 가지 사건은 한국교회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1938년 2월 9일에는 전국에서 교세가 가장 강한 평북노회가 노회장 김일선에 의해 소집되어 선천에서 모였다. 이 회의에서 일제의 강요에 의해 신사참배를 논의한 결과 '신사는 국가의식' 이라 하여 참배를 결의하였으며, 총회에 상정하기로 하였다.
이러한 고무적인 현상에 자신감을 얻은 일제는 가장 강하게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있는 장로교 총회에 대하여 신사참배 수용을 총회에서 결정하도록 방법을 모색하였다. 일제는 <평양기독교친목회> 지도인물 오문환, 이승길, 김응순, 장운경 등을 1938년 5월에 일본에 다녀오게 하는 회유책을 썼으며, 6월에는 일본기독교 의장 도미다(副田滿)을 초청하여 평양시내에 있는 유력한 교회지도자들을 집합시켜 신사참배 강연을 듣게 했다. 그리고 평양 기독교친목회를 통하여 신사참배 결의에 성공할 수 있도록 조종하였다. 또한 주기철, 이기선, 김선두 목사들을 사전에 검속(檢屬)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1938년 9월 9일, 제 27회 총회가 평양 서문외교회에서 열렸다. 회무중(會務中) 평양, 평서, 안주 삼노회 대표 박응율 목사가 "신사참배는 국민의 당연한 의무" 라고 하면서 참배 결의와 성명서를 채택을 제안하자 한국과 함께 살아왔던 장로교가 '신사참배는 기독교 신앙에 위배되지 않는다' 는 결의를 하였다.
「아등은 신사가 종교가 아니고 기독교 교리에 위반하지 않은 본의를 이해하고 신사참배가 애국적 국가의식임을 자각하여 이에 신사참배를 솔선하고 추이 국민정신 총동원에 참가하여 비상시국하에서 통후(統後) 황국신민으로서 적성(赤成)을 다하기로 기함.」
결국 한번 굴복하기 시작한 한국교회는 기관, 지도자 할 것 없이 붕괴되어져 갔다. 1939년 6월 8일 전북노회는 전주 서문외교회에서 외집하여 신사참배를 결의하고 교역자 등 150여명이 전주신사에 참배했다. 동년 9월 27일에도 진주의 27개 교회가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굴복하였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신사참배 결정과 행동에 대해 강한 반발이 일어났는 바, 장로교총회중 크로더스 목사외 25명의 연서로 "총회의 결의는 헌법에 위배된다." 는 항의 등이 거세게 일어나자 이에 당황한 일제는 1940년 7월 신사참배 반대자들을 전국적으로 일제히 검거하여 검거한 수가 2,000여명이나 되었고, 50여명이 순교하고 나머지는 해방후 풀려났다.
감리교회에서는 목사직을 파면, 면직, 정직, 강제로 사임케 된 목사들이 50여명 있었다.
이러한 신사참배 거부운동이 강하게 나타나자 「청년」지 주필인 강백남은 <조상숭배는 우상숭배가 아님> 이라는 글을 발표한 바, 「근래에 국가의식 즉 신사참배로 말미암아 조선교회에 막대한 동요가 있었음은 부인하지 못할 사실」이라고 전제한 후, 「-생략- 기독교인은 그러한 의미에서 참배함은 절대로 아니요, 국가의식에 국민의 의무로서 참배함이 당연할 줄로 각오(覺悟)하고 시인한 즉 양심이 평안하고 충군 애지심국(愛之心國)이 날이 감을 따라 두터워 집니다. 그런 즉 신사참배하는 일을 우상숭배라고 한다면 이는 불경죄에 가깝다고 말하여 둡니다.」라고 신사참배를 지지하였다.
결국 1938년 27회 장로교총회에서의 신사참배 결정과 김종우· 양주삼(감리교대표), 김기찬·홍택기(장로교 대표), 이명직(성결교 대표) 등이 한국교회를 대표하여 일본에 건너가 신사참배 하므로 신사참배 논쟁은 일단락 되고 이후부터의 한국교회는 집회나 행사 때 마다 신사참배를 국가의식의 일환으로 실시하였다.
고로 교회의 최고 상회기관인 총회에서는 신사참배를 매 총회 때마다 시행하여, 중요한 집회에서도 신사참배를 하므로 한국교회는 완전히 일제의 신사참배 정책에 협조해 가는 모순을 낳았다.
이후, 새로운 단계의 신사참배의 형태로 변하는바, 적극적이고도 다양한 방법, 참배자의 수가 대폭적으로 늘어났다.
일제는 1940년 7월 30일 부여신궁을 건설하기 시작하였는 바, 국체명징(國體明徵)과 내선일체의 선전을 목적으로 한 것이다. 총독 미나미(南次郞)은 내선일체의 역사가 멀리 백제시대에 소급한다고 해서 <일선동조동근론>을 주장하여 백제와의 교섭이 깊었다는 응인천황, 제명천황, 천지천황, 신공황후의 영을 모시게 하였다.
이 신궁 건설에 한국 지도자들을 노력 동원케 하는 일제의 의도는 노력 동원으로 작업의 큰 진전을 얻으려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면을 노렸다는 점이다. 1941년 6월 17일 국민총력 조선야소교장노회총회연맹이사장(朝鮮耶蘇校長老會總會聯盟理事長) 이름으로 부여신궁 근로봉사단원 모집에 관한 공문을 각 노회대표 앞으로 보냈고 동년 10월 30일 서울역을 출발하여 다음 날 7시 부여에 도착하여 노동봉사를 하였다. 여기에 참여한 근로봉사대원은 경성노회외 22개 노회에서 대표로 참석한 김형준회 73명 이었다.
감리교 또한 1941년 10월 9일 경기교구를 대표하여 27개 교회가 노동봉사대원 51명을 신궁 건설에 참여케 하였고 1941년 1021일 교단연맹이사회에서는 5개 항목을 결의하여 각 교구와 교회에 하달한 내용 중에서 경기교구외 다른 교구의 목사, 신도대표 각 4, 5인씩을 근로봉사 할 것을 지시하였다.
1943년 3월 3일에는 장노회총회 대표 김종대 등이 일본기독교 제 1회총회에 참석하여 윤세신궁을 참배하였다. 이어 5월 11일 의산노회 소속 교직자들이 중심이 되어 28명이 일본으로 성지참배를 떠나므로 한국교회의 신사참배는 절정에 다다랐다.
이상에서 나타난 신사참배 문제에 관하여 몇 가지 정리를 하면
① 신사참배는 일제의 강압만으로 된 것이 아니고 일제에 의해 회유되고 매수되었던 종교지도자들에 의해 조직적으로 이루어졌다.
② 신사참배는 신앙양심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이 행위가 곧, 일제에 투항, 친일을 하는 행위가 된다. 이러한 이유는 신사참배를 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후 갖가지 친일행위를 거듭했다는 사실을 통해서 인식된다.
③ 흔히 신사참배 거부는 종교적 동기에서 시작된 항거이라고 하지만 일제의 계속적인 회유로 인하여 부일의 밑거름 이용되었던 것이 사실이다.
④ 하지만 또한 많은 목사들과 신도들이 신사참배에 반대하여 투옥되기도 하여 일면으로 기독교가 신사참배에 관하여 무저항적인 친일행위를 하였다고 보기는 어려운 점이 있다.
2.황국신민화 정책과 기독교
a.기독교의 황국사상의 고취
일반적으로 지배국의 식민지 민족에 대한 사상적 세뇌는 토착민의 민족적, 문화적 독자성을 멸시 내지 말살하는 것이 그 공통점이 되고 있다. 일제는 한민족에 대한 통치정책을 소위 대동아공영권 건설을 위한 전쟁 정책에 중점을 두었으며, 이 일을 위해 철저한 사상통합을 진행하였다.
일제가 의도한 사상통합의 정책을 조직적으로 추진한 사람은 제 7대 총독 미나미(南次郞)이었다. 그는 1936년 8월 총독으로 취임하기 전에는 관동군사령관이었었고 일본정부내 군국주의자 중의 하나였다. 그는 취임하자마자 <내선일체>를 강조하였는 바, 1938년 2월 22일 도지사회의중 말한 내용에서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그는 조선인의 완전한 황국신민화에 의한 내선일체를 조선 지배의 근본으로 하고 그것에 의하여 조선을 대륙병점기지화하여 아세아 침략을 실현하려는 것이었다. 일제가 중일전쟁을 일으킨 후에 그는 더욱 황민화의 실질적 집행을 위하여 광분하였다. 미나미(南次郞) 일명 <조선통치 5대 지침>의 정강을 발표하였는바, 이 지침은 국체명징, 내선일여, 교거진작(敎擧振作), 농공병진(農工倂進), 서정별신(庶政刷新) 등으로 일제에 대한 확고한 충성심을 유도하는 것들이었다. 그리고 실천방법으로 신사참배, 궁성요배(宮城遙拜), 국가국기의 존중, 일본어의 보급 등을 요구하였다.
또한 일제는 1938년 7월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을 조직하여 황국정신의 현양(顯陽), 내선일체의 완성, 전시생활혁신, 전시경제정책에 협력, 근로보국, 생업보국, 군인원호강화 등을 부르짖게 하였다.
이러한 일제의 조직 강요에 1939년 9월 8일 장로회는 신의주 제 2 교회에서 국민정신총동원 장로회연맹 결성식(궁성요배, 국가봉창, 황국신민서사, 황군장병 및 동양평화를 위한 기복)을 갖고 선서를 하였다.
대체적으로 정치와 종교와의 관계는 정부는 종교를 대함에 있어서 정책적 요소를 갖고 있다. 그리하여 ㄱ.종교가 한 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하여 종교로 하여금 기존하는 정부의 기본적 정책을 이론적으로 정당화시킨다. ㄴ.종교를 통해 그 정권의 정책을 지지하게 하려는 기능적 수단으로 종교를 이용한다. 일제는 이러한 종교정책을 통하여 한국의 기독교를 교묘하게 이용하였다.
1)신앙지와 교계신문
「활천」(성결교회 신앙지)은 1939년 12월 <팔굉일우의 대원리>이란 사설에서 「팔굉일우의 대이상은 일본제국의 건설 정신이요, 이상이다.」라고 정의 한 후, 일청, 일로전쟁과 만주사변을 이 사상을 사실하는 것으로 보았다. 또한 미나미 총독이 강조하는 내선일체도 바로 이 정신을 고조하는 것으로서 이 정신이 황도정신이요, 동시에 성경정신이라고까지 극찬하였다.
1940년 2월호 <황기(皇紀)이천육백 기념식년에 당하여>란 사설에서는 「우리는 황기이천육백년을 당하여 황조황가의 성덕을 흠향(歆饗)하며 천황폐하의 성수무강(聖壽無彊)을 봉축하는 동시에 -생략- 더욱 조국 정신을 발양하며 황운부익(皇運扶翼)의 실을 거함으로써 국운무한의 발전에 진할 것을 맹서하자」고 하였다.
「청년」(감리교계통의 신앙지)은 윤치호의 <내선일체에 대한 사견>이란 글을 실었다. 이 내용은 「현재의 내선일체는 정치적, 법률적, 경제적으로는 가히 완성되었다고 볼 수 있으나 정신적인 내선일체는 아직 미흡한 바, 황국신민서사의 2조 "우리들은 합심하여 천황폐하에게 충성을 다한다."를 이루는 것이 시급하며 또 하난 천황폐하의 적자가 된 형제 의식을 갖고 서로 믿는 일이 필요하다.」라고 강조하였다.
「기독신보」(장로회)는 1937년 10월 12일 <기독교인의 국가봉사>라는 사설에서 「기독교인은 여력이 다하도록 황실을 봉재하며 만분의 일 이라도 황은에 봉답하며 국운을 유성하게 함이 의무이다.」라며 황운(皇運)을 부익(附益)하자고 했다.
1942년에 접어들면서 각 교파에서 발행하던 기관지들을 강제 폐간시키고 일제의 정책을 전시하 지시, 전달 하고자 하는 의도로서 <기독교신문>을 창간케 하였다. 동년 4월 18일 경기도 경찰부 고등과 회의실에서 기독교신문협의회 창간 제 1회 이사회가 열렸다. 창간 이사회는 총독부 경무국 이사관, 경기도 경찰부 고등과장, 동과 검열계 주임이 참석한 가운데 장노교에서 3명, 감리교에서 2명, 성결교에서 1명, 구세군(救世軍)에서 1명 등이 참가하여 1942년 4월 29일 창간호를 냈다. 창간된 기독교신문의 강령에서 발행취지와 목적을 열거하고 있는 바, 황민화적 내용으로 분류될 수 있는 내용들은
①반도기독교내 국민총력운동의 강화
②종교의 국민정신진흥과 국민사상 계도
③필승체제의 확립에 관한 계도
④내선일체 완성과 국어생활의 철저 등이다.
2) 예배 및 행사
교회의 예배와 행사에서도 황국신민화적 내용이 포함되어 가는 이질적 현상이 나타난다.
예배에서는 황실융성을 위한 기복, 전승기원예배 등으로 이질적 내용으로, 행사에서는 주로 궁성요배, 황국신민서사 제창, 천황폐하 만세, 그리고 시국강연회가 성황리에 열렸다.
또한 예배와 회의도 단축 또는 간소화 형태로 진행되었는 바,
제 36회 전북로회에서는 구주탄생일은 대정천황제일이므로 24일로 변경하여 간소한 축하예배만 드릴 것이며, 매주 3번의 집회는 단축하여 당분간 1회만 할 것을 소속 교회들에게 제시하였다. 감리교회는 '교단 규칙 제 108조와 114조에 의한 상임위원회는 총회를 대신하고 구성임원회는 교단회의로 하고, 금년 2월 개최하려던 정기교구회 및 금년 4월에 개최할 정기총회는 무기한 연기한다.' 고 발표하였고 예배시간 단축실시에 관한 이유를 「한 시간이라도 노동시간을 늘여 생산에 매진하기 위해서」라고 밝히고 방법론으로 주일 밤에 모이는 예배를 1회로 단축하고 기타 예배는 그 교회의 사정에 따라하고 당국의 요청에 따라 시간을 변경하는 조치를 교회주관자가 알아서 처리하라고 협조를 요청했다.
3)찬송가
1907년 6월 20일에 발행된 「찬미가」는 15곡이 수록된 찬송이었다. 이 찬송 중에는 애국사상을 고취 시킨다는 일제의 생각에 의해 3장의 찬송가가 있었는데, 1장 4절, 10장 2절, 그리고 14장이었다.
그후, 1923년에 간행된 「청년찬송」은 일하러 가세(남궁억), 금주가(임배세) 등이 실려 있었다. 1931년에는 각 교단이 찬송가 합동문제를 논의한 결과 장로회, 감리교 두 교단에서 주관하여 「신정찬송가」를 만들기로 하고 편집, 발행하였으나 감리교회에서만 사용하고 다른 교단에서는 기존의 찬송가를 보완하여 사용하였다.
중일전쟁 이후, 황민화 현상이 시급해 진 일제는 찬송가를 변형시키는 일에 착수하여 먼저 '일하러가세'와 '금주가'를 부르는 것을 금지시켰고 신정찬송가도 삭제와 가사를 바꾸게 하였다.
1943년 5월에 조선야소교장노회(朝鮮耶蘇敎長老會) 종교교육부 주관으로 기존의 찬송가를 전체적으로 개편하였는 바, 새로 개편하는 이유와 목적을 「복음이 전파된지 반세기를 넘어 서면서 대동아공영권의 획기적 역사의 새로운 세기를 맞이하게 될 때, 본 성가에 대하여도 국체를 중심으로 한 재 검토의 시기에 이르렀다. -생략- 이러하기에 당국의 지도하에 거의 반년의 세월을 들여 본 성가에 있어도 재삼 검토를 하여 국체에 일치하도록 가사를 수정함은 물론, 특히 권두에 국가(國歌)와 유미유까바, 국경절(國慶節)에 부르는 노래, 국민서사 등을 실어 특수한 집회시마다 국민으로서의 필요한 귀감이 되도록 하였다.」라고 밝혔다. 이러한 현상은 일제의 강요에 의해서만 이루워졌다고는 볼 수 없을 것이다.
4)지도노선
감리교의 황국신민화를 위한 지도노선은 「기독교조선감리회 혁신조항」에 잘 나타난다.
제1. 사상지도
① 신동아 건설과 내선일체의 원리를 철저히 인식케 할 일
② 기독의 일가주의가 팔굉일우에서 구현됨을 철저히 인식케 할 일
③ 충군애국정신을 철저히 인식케 할 일
제2. 교학진작 ①항 국어보급(國語保給)
제3. 사회교육 ②항 황도의양(黃道宜揚)
통리자(通理者) 정춘주가 각 교회주관자 앞으로 보낸 공문에서도
① 매월 8일 대동아 전쟁에 관한 봉재식을 거행할 것
② 예배시간을 노동봉공에 지장을 주지말 것
③ 애국헌금 기타 국민의 의무 수행에 성의를 다할 것 등으로 교단 차원의 일로 협조를 요구했다.
장노회의 지도노선도 「일본기독교조선장노교단 실천요목」에서 잘 나타나는 바,
제1. 국가에 봉공
① 대동아 전쟁의 목적 완달(完達)을 위하여 사상 완벽을 기할 것
② 전시 체제하 국가적 요청에 청헌(請獻)할 것
③ 징병 의무 및 정신을 강조 할 것
④ 통후봉공의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다음과 같이 실시할 것
ㄱ)황군상병장병(皇軍傷病將兵) 및 가족 위문, ㄴ)군사지원사업, ㄷ)국민저축실시, ㄹ)귀금속류 헌납, ㅁ)전시노동봉사 ㅂ)매월 일정액 국방헌금 ㅅ)신사참배 및 필승 기원 등을 실천으로 옮길 것을 지시하였다.
이상과 같이 황국사상을 고취시켰던 일들은 주로 교단의 집행부에서 이루어 졌다고 볼 수 있다.
b. 한국교회의 일본적 기독교
일제는 한일합방 이후, 일본교회중의 하나인 조합교회(組合敎會)를 한국에 상륙시켰다. 1913년 8월 15일 서울에서 제 1회 일본기독교조합교회 한국대회가 개최된 이래 이 교파는 철저한 침략주의에 앞장섰다. 조합교회는 조선총독부와 일본 재벌들의 지원을 받았으며, 이 조합교회가 한국내에서 주로 한 일은 한일합방의 정당성을 인식시키는 동시에 한일동조론을 내세워 일제의 어용적 역할을 충실히 해 나갔다.
1939년 <종교단체법>이 군국주의자들의 강력한 요구에 의해 일본국회에 제출되자마자 통과되었다. 종교단체법의 형식상 내용은 국민정신의 선도에 종교의 역할을 평가하고 종교의 지위를 명확히 하며, 종교를 보호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국가 정책에 교회가 보조를 맞추지 않을 때에는 언제든지 국가의 이름으로 교회를 탄압할 수 있는 법이었다.
일제는 일본 교회를 이용하여 통치의 편의상 한국교회와의 통합을 추진케 하였다. 우선 교회수 50, 신도수 5,000명 이상의 교회만을 문무성에 등록하게 하였다. 이렇게 한 결과 일본의 3대 교파인 일기, 조합교회, 감리교와 일곱 교파만이 문무성에 등록케 되었다. 일제는 이들 교파들에게 한국교회와의 합동을 추진케 하였는 바, 이렇게 한 의도는 한국교회를 일본교회에 예속시켜 침략전쟁에 순응케 하기 위해서였다.
1)일본교회와의 합동문제
1938년 10월 3일 제 3회 조선감리교 총회에서 일본감리교회와의 합동을 결의한 후, 1939년 10월 19일부터 열리는 일본감리교 총회에 참석하기 위하여 양주삼 등 7명이 기차편으로 서울을 출발하였다. 이들은 10월 18일 동경 청산학원안에 있는 해리스館에서와 가마쿠라 목사관에서 모여 합동에 관한 8가지 조상의 결정을 하였다.
결정한 사항을 요약하면 내선일체, 황도의양을 위하여 양측의 교회가 합동은 하되 곧 추진할 것과 양 교회의 친선에 관한 것들이었다.
성결교회는 「활천」1940년 5월호에서 이사장의 일본교회와의 합동문제에 관한 결과 보고에서 「일본성교회와 우리 성결교회 사이에는 역사적으로 보아 형제간이라 할 것인데 지금까지 별반 교통이 없이 지내 왔으나 내선일체가 실현되어 가고 각 교파가 내지와 조선이라는 구별을 잊게 연합 또는 합동문제가 회합 때마다 제출되는 마당에 왔다. 이것은 정치의 의미가 포함되지 않고 오직 신앙의 입장에서 친밀하게 하고자 하는데 있다.」고 전제 한 후, 「동경에 가서 일본성결회와 동일하게 교회명을 변경하는 일, 교역자를 서로 교환하는 일, 년회에 서로 대표를 파송하는 일 등이 체결되었고 제반 문제는 양 교파에서 3인씩 연구위원을 두어 구체적으로 연구중이다.」라고 보고하였다.
2) 조선기독교 연합회
일본교회와의 합동을 통한 예속화와는 별도로 일제 한국교회 안에서의 교파합동을 위에서와 같은 목적으로 추진하였는바, 먼저 1938년 5월 8일 년 후 2시, 서울 부민관에서 총독부 학무국장, 경기도 지사, 경기부윤 등이 참석한 가운데 일본인 목사들과 한국교회 지도자들이 함께 <경기기독교연합회 발회식>을 가졌다. 이 모임에서 임원을 맡은 사람은 정춘주, 김우현, 신재명, 김종우, 원익상, 장홍범이며, 81명의 교회 지도자들이 참여하였다.
이들은 황궁요배, 황국신민서사등의 시순을 진행한 후, 성명서를 발표한 바,
「현하 아국시국의 중대성을 감(鑑)하야 국시(國是)를 체(體)하며 국민정신의 진작을 도(圖)함은 가장 긴급사임을 인하고 자에 조선에 있는 기독교 신도는 단결 협력하야 동포의 정신작흥에 자(資)하고 일층 전도에 정진하야 황국신민으로서 보국의 성(誠)을 치(致)하기를 기(期)함」
경성기연(京城基聯)의 성격이 성명서의 내용에서 나타나며 이 모임으로 인하여 교회일각이 굴복하자 지방의 연합회와 각 교회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고 결국, 1938년 7월 7일에는 <조선기독교회합회>가 기독교의 황민화, 내선일체의 완성을 목표로 하여 조직되었는 바, 김종우, 차재명, 원익상, 이명직, 김우현, 윤치호, 장홍범 등과 경성에서 30명, 지방에서 30명의 목사들이 참여하였다.
3)조선기독교 혁신교단
일제는 1943년 4월, 서울에 있는 친일파 목회자들과 감리교를 주축으로 하여 조선혁신교단을 조직하였다. 이 모임에 장로회의 윤인구, 최석주, 전필순이 참여하였고 전필순이 의장이 되어 교단 헌법을 제정하였다.
그런데 경성노회 김영주 목사는 경성노회에서 혁신교단에 참여하기고 결정한 일이 없다며 전필순 목사의 제명론이 거론되자 의장직을 사임하였다.
혁신교단에서는 일제가 눈에 가시같이 역기는 구약의 출애굽 사상과 신약의 예수의 해방적 교훈과 행동을 제거하려 하였다. 또한 위의 내용뿐만 아니라 사도신경을 빼며 묵시록을 제거하였으며, 복음서에서는 산상중훈만이 경전이라는 결의를 하였다.
그러나 혁신교단의 주축이 된 감리교회와 장로교회내에서 혁신교단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들이 일기 시작했고 결국 혁신교단은 몇몇 친일자의 모임으로 유명무실해졌다.
4)일본기독교 조선감리교단
1942년 12월 기독교조선감리교단 제 2회 정기총회에서 통리자가 된 변홍규 목사는 혁신교단에 적극성을 보이지 않으므로 일제는 공작 끝에 변목사를 사임케 하고 친일적인 교단 간부들이 중심이 되어 <일본기독교 조선감리교단>으로 교단명칭을 바꾸고 교단규칙을 제정, 발표하였다.
규칙 내용에서 「1943년 8월 일본기독교 조선감리교단으로 다시 혁신을 단행하여 명실공이 대 일본의 종교임을 밝히게 되었다.」는 선언을 하였다.
이어 1943년 10월 14일 <교단규칙실시방법 통달의 건>에서 각 교회 명칭을 변경하라고 제시했다.
5)일본기독교 조선장로교단
장로회 역시 혁신교단 문제로 진통을 겪다가 1943년 5월 4일 피어선 성서학원내에 있는 장로회 총회사무실에서 당시 총회장 김응순에 의하여 제 31회 총회에서 선출된 상치위원(上置委員) 및 그리고 헌법개정위원, 교파합동위원들이 모여서 일본기독교 조선교단초안을 심의하는 줄 알았으나 이본기독교조선교단안이 나오자 논란이 심하였다. 그러나 김응순이 규칙초안은 총독부 보안과의 검인을 이미 받은 것이라고 설명하였으나 찬반이 엇갈려 회의를 진행하지 못하였다.
결국 다음 날 제 2차 회의에서 규칙안을 수정없이 통과시켰고, 다만 채필근이 제안한 일본기독교조선장로교단으로 명칭만은 수정하자는 것으로 가결하였다.
1943년 5월 7일 일본기독교 조선장로교단의 총회 임원과 의장이 선출되었는바, 통리(通理)에 채필근, 부통리(副通理)에 김응순, 총무에 김종대 목사가 되었다.
교단 총회 임원에는 의장에 조승제가 선임되었다.
이날 오후에 이들의 취임예배가 시작되면서 일본의 종교정책에 잘 길들여진 교단으로 변절하였다.
1941년 심명섭(감리교 본부위원)은 「교파합동에 기함」이란 감리교보사설에서 「교회내 분파적 항쟁을 자성 회개해야 한다.」고 전제한 후, 「교파마다 특색과 습관이 있겠지만 겸양의 태도로써 노력하면 난(難)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제시했다.
1943년 9월 부전(富田, 일본기독교단 대표)은 조선호텔로 각 교파 간부들을 초대하여 한국교회의 합동을 강조하였는바, 이 모임에 참석한 각 교파대표들은 박연서, 이동욱, 최지화,정인과, 전필순, 이명직 등이었다.
이들의 회동 이후, 장로회단은 1942년 10월 16일부터 평양 서문외교회에서 열린 제 31회 총회에서 <조선내 기독교 교파합동의 건>을 가결하고 그 교섭위원 선정은 중앙상치위원에게 일임한다고 결정했다.
감리교단도 동년 12월 2일에 열린 제 2회 총회에서 교파합동을 가결하였는 바, 합동에 관한 명분을 「그리스도 정신에 기인하여 조선기독교 각파를 합동하여 단일교단을 조직한다.」는 것이었고 이를 위해서 교파합동 전권위원 8인을 선임하여 타 교파와 교섭할 것을 결의했다.
1943년 1월 12일 조선기독교 교파 각파 합동문제를 다루기 위해서 제 1회 모임을 중앙교회에서 가졌는바, 모인 교단은 다섯 교단(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구세군, 일기(日基)조선교구회)으로 김자종대(金子鐘大)의 사회와 국민의례, 기도(이명직 목사)로 시작하였다. 다섯 교파들이 합동키로 하여 다음 사항을 결의하였다.
① 합동의 범위
② 준비위원 비례 : 장로회(9명), 감리교(9명), 성결교(4명), 일기조선교구회(4명), 구세군(4명)
③ 제 1차 준비위원 모임 : 1월 26일, 새문안 예배당
④ 합동 임시군무소 : 정목장로교회 사무실
이 준비 모임에서 결의한 대로 1943년 1월 26일과 3월 16일에 열린 두 번에 걸친 회합을 새문안 교회에서 모였으나, 각 교파마다 역사가 다르고 교리적 배경이나 교회법이 달랐기 때문에 합동문제가 순조롭게 진행되지 못하였다.
이러한 각 교단의 상황속에서도 일제는 재차 교파합동을 요구한 바, 1945년 7월 19일 교파합동 찰핍위원회를 정동교회에서 열어 장로회 대표 27인, 감리교 대표 21인, 구세군 대표 6인이 참석하여 교파합동을 추진한다는 합의가 이루워 졌고, 1945년 8월 1일에 일본 기독교조선교단을 조직하였다. 이때 위임진은 투표에 의해 선출하려 하였으나 총독부가 요구하는 대로 김관식 목사를 통리로 동의하였고, 총독부 정무총감 고오도의 치리(治理)를 받게 되었다.
3.전쟁동원과 기독교
a. 징병, 징용에서의 역할
1) 징병
일제는 중일전쟁 이후부터 전쟁 인력의 부족을 느껴 지원병의 형태로 한국 청년을 전쟁에 이용하기 위하여 육군특별지원병령을 1938년 2월 2일 칙령 제 95호로 공포하고 동년 4월 3일부터 시행했다.
지원병 실시에 윤치호는 지원병제도를 실시히여 조선인들을 믿어 주신데 대하여 크나큰 감격과 감사를 느낀다며 진심으로 감사를 표하면서, 다만 염려되는 것은 당국의 신뢰에 관연 조선 청년들이 만족할 만한 성적을 올릴까 걱정이라면서 청년들에게 분투할 것을 호소하였다.
지원병 모집 내용은 지원병을 전후기 합쳐 400여명을 선발해서 훈련시킨다는 것이었다. 조선총독부 발표에 의하면 1938년 8월까지 약 3,500여명의 지원자가 살도(殺到)해서 6.7 : 1 이란 높은 지원율을 기록했고, 징병령이 실시되기 이전인 1943년까지 약 1만 8천 가량의 한국 청년이 일분군에 지원 입대하였다. 이들 가운데 일시적 흥분으로 철없이 지원한 경우도 있었지만
① 농촌 피폐에 못 견디어 살길을 찾아 지원한 경우
② 일제의 교묘한 술책에 현혹되어 지원한 경우
③ 지원병 제도를 찬양한 이른 바, 지도자들의 강력한 권유로 지원한 경우였다.
①의 상황은 농촌 생활의 궁핍으로 노동 이민으로 가는 것보다 차라리 군대에 간다라는 생각을 하여 지원을 하는 사람들로서 증가의 현상이 두드러지고 있었다.
②의 경우는 ㄱ.지원병 축하회등 분위기를 형성하는 작업 ㄴ.신문등을 동원하여 선전케한 바, 지원병에 입대하여 최초로 전사한 이인석에게 훈장을 추서하고 대대적으로 홍보하였다.
③항은 대개 지식인들이 참가했는데, 강연회 개최, 선동적 활동 등을 통해서 지원병 모집에 광분하였다. 이들의 활동은 주로 시국강연반을 구성하여 전국을 돌며 시국의 중요성을 인식시키고 동아안정 세력으로써 일본의 지도적 위치를 인식시켰는 바, 약 1주일 또는10일 정도의 일정으로 강연을 하였다. 이때 주로 강연을 한 자들은 김영섭(감리교 목사), 김우현(장로회 목사), 양주삼(감리교 총리) 등이었다.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은 1940년 1월 이후, <1정(丁)연맹 1명>이라는 목표를 내걸고 강연회, 좌담회등을 통해서 지원병 권유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을 때, 감리교회에서는 1940년 9월에 발표한 <기독교조선감리회 혁신조항>에서 「교도들이 지원병에 다수 참가할 것과 교도들에게 병역의무를 철저히 인식케 할 것」을 각 교회주관자들에게 협조 요청을 하였다.
일제의 진주만 공격으로 미국과 전쟁이 시작되자 선교사들의 영향으로 미국과 관련이 깊은 교회에 대하여 먼저 미국을 증오토록 유도케 한 바, 1941년 12월 20일 반도호텔에서 교계 대표들이 모여 미, 영 타도 좌담회를 개최케 하였다. 이 모임에 참석한 사람은 양주삼외 17명이었으며 좌담회 내용은 미, 영에 대한 비방일색이었다. 미국과 영국에 대한 비방은 일본의 전쟁정책에 의한 협조적 색채가 강하게 난다 할 수 있다. 그리하여 몇 안되는 진실한 선교사들의 사랑과 희생을 오히려 미제국주의자들의 앞잡이로 공격하는 모순도 보이고 있다.
<표1. 미·영 타도 좌담회 참가자 및 화제내용>
<최원규 엮음. 일제말기 파시즘과 한국사회. 서울: 청아출판사, 1988 p291-341>
1941년 12월 10일, 국민총력조선연맹 주최로 부민관 대강당에서 결전보국대강연회가 열렸는 바, 신흥우는 「세계의 교란자는 누구인가」라는 강연 중 「한번 결전하는 이상 제국 행로에 종(腫)으로 있는 적성국가는 분쇄시켜 세계 인류의 참된 평화와 신동아 건설에 매진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라고 전제 한 후, 여기 모인 제군들은 세계의 교란자가 누구인가를깊이 인식하여 그 책임자를 격멸(擊滅)하자고 결론을 지었다.
또 한동년 12월 27일 조선임전보국단 주최로 열린 <부인대회>에서 김활란은 <여성의 무장>이라는 강연을 하였는 바, 「흑노(黑奴) 해방의 싸움을 성전이라 했고 십자군 싸움도 성전이라 했다. 그러나 이제 성전은 정말로 내려진 것이다. -생략- 희생(犧牲)의 투구를 쓰고 적성(赤性)의 갑옷을 입고 긴장과 자각으로써 허리띠를 매고 제 1선 장병과 보조를 같이하여 미·영을 격퇴하여 버리자」고 호소했다.
전쟁이 확산되고 전선에서 전황이 치열해 지자 일제는 결전 비상조치를 취했는 바, 1942년 5월 8일 총독부는 조선동포에 대하여 1944년부터 징집을 할 수 있도록 준비를 진행한다는 결정이 보도되자 친일자들은 일제히 환호를 올렸다. 그리하여 앞을 다투어 자신들의 견해표명, 감사예배, 결의대회, 감사전문 보내기 등을 대규모로, 계속적으로 해 나갔다. 사실 이러한 제도가 생길 때마다 친일자들은 감격해 하였다.
윤치호는 징병제 실시에 대한 축하 메시지에서 「황국신민으로서의 의무와 각오를 가지고 있는 우리로서 얼마나 감격적인 소식입니까 -생략- 오늘 드디어 징병제가 실시되니 오늘부터 우리는 내지의 형제들과 마찬가지로 보조하여 대동아 전선에서 싸우게되는 감격을 새롭게 가지게 되며 온 반도인들은 오직 감격해 사모(思募)칠 것이다.」 라고 축하의 변을 토했다.
1942년 5월 11일 각 교파 연합으로 승동예배당에서 <징병제감사기독교 신도대회>가 1,000여명의 신도들과 창무(創茂) 조선군 보도부장이 참가한 가운데 열렸다. 신도대회 내용은 국민의례, 감격사, 결의(수상 이하 관계당국에 감사전문을 타전), 강연(보도부장 : 징병제를 실시하게 된 경위, 고미(高尾) : 일제의 이상), 성명서 낭독, 성수만세(聖壽萬歲) 등으로 이어졌다.
성명서에서는 「30여년간 조선 시정(施政)중 최대의 업적이며 내선일체 이념에 현실적 요소를 넣은 것이며 황국신민의 대도가 열린 것이다. -생략- 이 감격에 울지 않을 수 있을까」라는 황국신민의 감격을 표했다.
감사전문은 「조선 청년에 대해서 징병제 실행의 결정에 아등은 감사 감격한다. -생략- 황은에 대하여 맹세코 받들어 보답 할 각오이며 일사순국(一事殉國)의 결의를 나타낸다.」는 의지를 전문에 담아 보냈다.1942년 5월 16일 야소교성결회(耶蘇敎聖潔會) 이사장 이명직의 이름으로 각 교회주임교역자에게 보내는 <반도에 징병제도실시 축하의 건>이란 공문에서 「천황폐하의 일시동인(一視同仁) 하시는 성지를 인하여 징병제 실시를 강조하면서 축하회를 개최하되 당국에 문의하여 지도를 받아 형편에 따라 식순을 가질 것, 축하예배 순서는 경계, 국가봉창, 궁성요배, 성명서 낭독, 감사전보, 황국신민서사 제창, 천황폐하 만세」를 넣도록 하였다.
뒤이어 1942년 5월 17일 경성지역 성결교회 연합으로 경성신학교 강당에서 성결교신도대회를 열고 징병제 축하강연회를 갖고 성명서를 채택하였는 바, 요약하면 「반도에서 징병제 실시 방침확립은 내선일체의 구현이며 2천 4백만 동포는 기쁨과 감격에 달했다. 성결교 신도들은 신명을 바쳐 대동아건설에 만전을 기하며 무궁한 황은에 감사하여 봉공하며 진충보국을 결의한다」는 내용이었다.
재경(在京) 구세군단원 연합회에서도 징병제 실시 감사 강연의 밤을 열고 감사 결의문을 채택하였고 각 지역별로도 징병제 실시에 대한 대회들을 개최하였는 바, 진남포 지역에서는 구세군 서선지방 본부 주최로 1942년 5월 17일 중앙회관에서, 동년 6월 8일 해주에서도 강연회와 국방헌금, 그리고 선언문을 낭독하였다. 6월 10일 용강에서는 평서로회 주최로 징병제도 축하식을 거행하였고, 6월 17일 청송군 현동면 도평 장로교회에서도 징병제 실시 감사회를 열었다.
장로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