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희도 1. 최연소의 3.1 민족대표
발견
일반
0
2,699
2002.09.17 18:27
By 김 승 태(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
박희도는 황해도 해주 출신으로 해주의 의창학교와 평양의 숭실중학교를 졸업하였다.
그후 감리교계 협성신학교에서 잠시 수학하다가 1914년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들어갔으나 중퇴하였다.
이듬해부터 그는 감리교회의 전도사로 시무하면서 지금의 중앙대학교의 모태가 된 중앙유치원을 설립 운영하였고, 베커(A.L.Bechker) 선교사의 신임을 얻어 협성보통학교 부교장을 맡기도 하였다.
그가 1918년 9월부터 조선기독교청년회(YMCA) 회원부 간사를 맡게 되어 남녀 청년 학생들과 교유하면서 그들에게 상당한 영향력을 미치게 되었다.
그가 학생층과 감리교계의 3·1운동 참여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던 것도 바로 그러한 그의 위치와 활동력 때문이었다.
당시 그의 나이 31세로 자신이 포섭한 동료 전도사 김창준과 함께 가장 어린 나이로 3·1독립선언서의 민족대표로 서명하고 독립선언식에 참석하였다가 피체되었다.
그는 경찰 신문에서 민족대표의 한 사람으로서 선언서를 배포하게 된 동기를 묻는 질문에,
"조선은 예전에는 독립국이었는데, 강제로 일본에 병합을 당하여 우리는 자유를 속박당하고 권리를 박탈당하였으며, 병합당시 일본인과 같이 자유와 교육과 생활을 동등이 한다고 하였으나 오늘날 보면 여러 가지로 불합리한 것이 많으므로 어쨌든지 독립국이 되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하여 선언서를 인쇄 배포하였다."고 답변하였다.
그리고 예심판사의 신문에서도
"피고는 조선독립의 목적을 달할 줄로 생각하였는가 ?"라는 질문에
"나는 독립이 될 중로 생각할 뿐 아니라 언제든지 독립이 될 것이라고 믿고 있다."고 하고,
"피고는 금후에도 조선독립운동을 할 것인가 ?"라는 질문에도
"그렇다."고 확실히 답변하였다.
그는 이 일로 다른 이들보다 형량이 무거운 징역 2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 오디세이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02-09-17 23: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