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보안티들에게 엄청난 날개를 달아 줄 창조과학회 허접사기자료에 대한 반박게시판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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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보자가 질문드립니다. 홍수설화에 관하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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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을 하나씩 제가 아는대로 달아보죠.. 1. 이집트 홍수 설화 : 나일강의 연례적인 범람에 의한 홍수가 있었습니다. 이런 현상 말고.. 신화에서 말하는 전세계적인 홍수의 기록은.. http://www2.salesio-g.hs.kr/%7Ebsyang/2000/07/st012709/homepage/d4.htm 에 가서 읽어보시면 됩니다. 이 신화는 바이블 상에서의 홍수와는 많이 틀립니다. 여하간.. 내용이 틀리던.. 홍수 기간이 틀리던.. 또는 바이블보다 더 오래된 기록에 거의 같은 스토리가 나오던지 간에.. 창조론자들이 주목하는 것은 '전세계에 걸쳐 대규모(전지구적) 홍수 설화가 내려온다'는 것이고 이것을 바이블과 연관시키는 것입니다. 심지어 우리나라의 백두산 홍수 설화마저 바이블 상의 홍수와 동일시하더군요. 인간이 자연현상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물을 어느 정도 다스릴 수 없었을 때는 홍수는 굉장한 위협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설화를 자세히 뜯어보면 그 문명권에 국지적인 홍수이거나 강의 범람이지.. 지구라는 개념이 없었을 당시의 '전세계가 덮히는 홍수'는.. 지금 말하는 '전세계적 홍수'와는 그 개념이 많이 틀린 것입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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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제가 알기론.. 실질적인 탐사가 이루어진 적은 거의 없는 것으로 압니다. 다만 위성사진이나.. 몇몇 탐험가가 올라가 보고 '방주 조각이라고 주장되는 나무조각'을 가지고 내려왔을 뿐이죠. 이러한 '나무 조각'들 중 몇몇은 '위조품'으로 밝혀지기도 했습니다. 결국.. 실측이 안된 상태에서.. 억측이 많아지고.. 아직 희망(?)이 남아 있는 것이지.. 대대적인 규모의 실제 관측이 이루어진다면.. 더이상의 '아라랏트 산 정상의 방주 주장'이 나오지 않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물론.. 다른 곳을 지정하던지.. 아니면 땅 밑에 묻혔다던지.. 다른 주장들이 나오겠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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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빙하기의 끝과 인간의 역사의 일치점이 존재하느냐가 문제겠죠. 문제는 빙하기와 인간 역사의 시작은 그 간격이 너무나 멀다는데 있습니다. 결국 '빙하기의 종말과 함께 닥쳐온 홍수'라는 것은 조금은 과학적으로 바이블을 해석하기 위한 한 흐름인데.. 전혀 신빙성이 떨어집니다. 또한 무슨 원인에 의해 '빙하가 녹으면서 발생한 홍수'라는 개념이라면.. '전세계적인 동시 홍수'가 역사적인 기록에 남아야 되는데.. 각 민족 등에 남아있는 홍수설화는 여러 번이며 가장 큰 홍수끼리 그 연도의 합치점을 억지로 찾는다 해도 서로 일치하지 않는 것은 당연합니다. 인간역사가 기록된 이후, 대단히 큰 홍수는 여러 민족, 지역에 모두 공통적으로 내려오기는 하나.. 그 시기나 내용에 있어서 서로 일치하지 않습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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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3의 내용이 사실이 아닙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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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해명하지 못합니다. 노아가 신인류의 조상이 아니기 때문이죠. 흑인종 황인종 백인종 등으로 인종이 갈라진 것에 대해서도 억지만 부릴 뿐입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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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여러 주장이 있습니다만.. (지하수로 들어갔다 거나.. 다시 얼었다거나.. 궁창으로 돌아갔다거나.. 하느님이 치워버렸다거나..) 합리적인 답변은 없습니다. 그런 식으로 전지구(고지대 마저도..)를 덮어 버릴 수 있는 물이라면.. 다시 얼린다 하더라도 북극이나 남극이 아이스크림 콘 처럼 엄청나게 높은 빙하들로 덮여있거나 (사실 이렇게 무게가 쏠리면 지금과는 다른 방식으로 지구가 변형되거나 할겁니다만..), 지구의 용적을 늘리던가, 지구 밖으로 치워버리거나, '뿅'하고 없애버리지 않는 한 처리 불가능입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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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절한 답변에 감사드립니다. 기억상실님. 확실히 막연한 상상과 추측만 가지고는 접근할 수 없는 주제이군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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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이곳에 들어오게 된 계기는 오마이뉴스에서 강의석군 사태때 교목이였던 류상태 목사(전)의 인터뷰를 보고 가슴에 와닿는 구절이 있어서 입니다. <류상태씨는 성서는'객관적 진술'이 아니라 '고백의 언어'라고 말한다. 그런데 보수주의 개신교인들은 그 고백의 언어를 객관적 진술로 읽음으로써 그 지독한 배타성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한다고 지적했다. 가령, 자기 아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라고 생각하는 남편의 사랑 고백을 객관적 진술로 받아들인다면 어떻게 될까.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닌가. 그런데 이 성서를 문자에 갇혀 해석한 객관적 진리에 대한 믿음은 기독교인들을 세뇌시켜 자주적으로 생각할 기회를 박탈하고 있다는 게 류상태씨의 주장.> 이 구절을 읽으니까 예전에 재미있게 보았던 창조론토론이 다시 생각이 나더군요.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