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보안티들에게 엄청난 날개를 달아 줄 창조과학회 허접사기자료에 대한 반박게시판입니다 |
기독교가 과학에 얼마나 많은 피해를 끼쳤는지를 보여주는 책이 있다길래 인용 소개합니다. iiai님의 블로그에서 펌. 과학과 종교의 투쟁 / 앤드루 딕슨 화이트 | BOOKS |
2005/07/22 14:07 |
http://blog.naver.com/iiai/15305351 | |
과학과 종교의 투쟁 / 앤드류 딕슨 화이트
저자는 미시건대학 역사학과 영문학교수였고, 코넬대학 창립에 참가, 코넬대학 초대학장, 독일대사 등을 지낸 학자, 교육자, 정치가였다. 이 책은 그의 저서 두 권을 통합 정리해서 번역됐다. 그 자신이 독실한 기독교신자였지만 중세와 근대 역사를 통해 기독교라는 이름으로 과학을 탄압, 비난한 사건들이 얼마나 많았고 또 그것들이 기독교와 과학 모두에 얼마나 많은 피해를 입혔는지 광범위한 조사를 바탕으로 정리한 내용이다.
상당히 오래된 책으로 많이 인용되지만 실제 책을 읽을 수 있게 될 줄은 몰랐다. 스티븐 제이 굴드는 '건초더미 속의 공룡'에서 이 책을 언급하면서 과학과 종교의 대립이 너무 과장되게 알려진 계기가 된 것처럼 언급했었다. 하지만 실제 책을 읽어본 느낌으론 굴드가 언급한, 콜롬부스 이외엔 지구가 둥글다는 걸 믿지 않았다는 식의 과장은 없었다고 본다. 아무튼 예상했던 것보다 더 처참한(?) 내용에 좀 당혹스럽기도 했지만 지금도 진화론을 포함한 현대과학을 부정하며 창조론을 숭상하는 근본주의 사상이 존재하는 걸 본다면 놀랄 일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성서를 바탕으로 삼아, 다시 한 번 성서의 기본문장에 충실하게, 조금 더 근본에 되돌아간 자세로 성서를 받아들이고 그것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어긋나는 것들을 비판한다는 생각 자체는 틀린 게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해 본 결과, 얼마나 참혹하고 어두웠던 중세의 암흑시대가 이어졌었는지를 이해한다면 그건 아니라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즉 우리의 얄팍한 지식으로 정립한 성서의 이해방식은 전혀 (좋은 의미에서의) 진정한 근본주의가 아닌 착각에 불과했다.
저자가 참가한 코넬대학 설립에 기독교를 앞세워 쏟아지던 비난에 이런 것도 있었다. ‘대학교수는 전원 성직자여야 한다, 왜냐하면 마태복음 28장 19,20절에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서…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그들에게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라고 씌어 있으며 이건 가르치는 권리가 교회에만 주어졌다.’는 식이었다. 코넬대학에서 어느 종교와 종파에도 속하지 않는 공정하고 객관적인 학문을 발전시키려던 모든 노력에 대해 ‘무신론’, ‘무신앙’ 등의 비난이 쏟아졌다. 저자는 순수한 신앙심에서 대개는 성실한 기독교인들이 성서를 바탕으로 과학을 공격하던 사건들이 사실은 종파나 교리에 얽매인 틀린 신앙이었다는 사실, 그리고 그러한 싸움에서 그들의 종교라는 것이 늘 패했던 사실, 결국 그러한 과학에 대한 투쟁과 싸움은 과학과 종교 양쪽에 피해만 입혔지 전혀 아무런 소득을 거둘 수 없었던 역사의 사실들을 우리에게 소개한다.
== 지리학
락탄티우스(Lactantius, 3세기말 신학자)는 둥근 지구의 반대편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8세기 초 독일의 성 보니파티우스(Bonifatius, 672경-754)는 수석대사교로서 지구 반대편에 인간이 있다는 설을 이단이라며 반대하는 성명을 냈다. 응원요청을 받은 교황 자카리아는 인류는 지구 한 편에만 산다는 설을 확정시켰다. 14세기 이탈리아교회는 1327년 보로니야대학 천문학자 체코 다스코리(Cecco d’Ascoli, ?-1327)가 지구 반대편의 인간존재설 사상을 가졌다는 이유 등으로 교수직에서 쫓아내고 피렌체에서 화형 시켰다. 14세기 화가 오르카냐(Orcagna)는 피사(Pisa)의 칸포 산토(Campo Santo) 벽화에 그가 지옥 불에 휩싸인 모습을 그려 죽은 후에도 형벌을 가했다. 스페인의 저명한 신학자 토스타투스(Tostatus)는 이미 콜롬부스가 등장하는 시대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공격했다.
1519년 마젤란(Magellan, 1480경-1521)의 세계일주에 의해 비로소 과학이 승리했다. 지구는 둥글었고 승무원들은 지구 반대편의 인간들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이후로도 200년에 걸쳐 신앙심이 깊은 사람들은 성서를 증거로 이러한 사실들에 반대했다.
추기경 피엘 다이(Pierre d'Ailly)는 지구가 구형이라는 사실은 굳게 믿었지만 에즈라서(종교개혁 전 동방교회와 서방교회에서 권위를 인정받던 외경)를 바탕으로 지구의 크기를 추정했다. 에즈라서 6장의 천지창조에서는 신이 물을 대지의 1/7 인 곳에 모이게 하고 나머지 6/7을 말려서 땅으로 했다는 설명이 나온다. 여기에 맞춰 해석하면 유럽 서해안과 아시아 동해안 사이의 바다란 그다지 크지 않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는 그렇다면 지구는 일반적으로 생각되는 것보다 훨씬 작다고 저서 ‘우주론’에서 강조했다. 이 책은 콜롬부스가 서쪽으로의 항해를 엄밀하게 연구하던 시기에 나왔고 크게 영향을 끼쳤다. 콜롬부스가 본 이 책의 사본이 세빌리아(Seville) 도서관 귀중서가에 있는데 그는 마르코 폴로가 도달한 아시아의 지팡그(일본)까지는 서쪽으로 가는 게 훨씬 빠를 거란 확신을 가진다. 하늘의 계시로 여겨진 성구에 바탕을 둔 이 콜롬부스의 잘못된 믿음이 엉뚱하게도 성서에 근본을 두었던 여러 가지 잘못된 지리학설들을 완전히 무너뜨렸던 것이다.
== 천문학 천문학에 대해서는 갈릴레오에 대한 탄압은 잘 알려져 있지만 갈릴레오가 결국 옳다는 게 밝혀진 후의 전혀 종교인답지 못 했던 변명과 거짓말들이 쏟아진 것은 별로 알려져 있지 않은 듯 하다. 이 내용은 '사이비과학 탐험'에 따로 정리했다.
== 화학과 물리학
1243년 도미니크스 교단은 단원 전체에게 의학과 자연과학 연구를 금지시켰고 1287년에는 화학연구도 금지시켰다. 프란체스코 교단은 1278년에 파리에서 집회를 열어 베이컨의 학설을 죄악으로 정식 지정했다. 아랍인들이 과학분야에서 귀중한 발견들을 이뤄냈다는 것도 전술에 이용해 베이컨을 마호멧 교도라고 비난했다.
베이컨은 14년간 감옥에 갇히고 80살에 풀려났다. 그리고 2년 후 죽었다. 베이컨과 동료들에 대한 이런 터무니없는 종교적 비난이 없었다면 많은 과학의 발견, 발명이 인류역사에서 조금씩 더 빨리 이루어졌음에 틀림없다. 그렇다면 수천의 귀중한 생명과 수만의 인간이 불쾌함, 부자유, 병, 빈곤, 무지로 괴로워하는 걸 덜 수 있었다. 1868년과 1869년에 잉글랜드와 웨일즈에서는 6만 명의 유아들이 성홍열로 사망했다. 미국에서도 거의 같은 정도의 희생자들이 나왔다. 만일 베이컨의 생각을 그렇게 무지막지하게 비난하지 않았다면 이 희생을 얼마든지 줄일 수 있었을 것이다. 베이컨을 박해하고 그가 목숨을 걸고 개척한 길을 폐쇄한 편협한 종교가들이야말로 이 세상에 나타났던 모든 무신론자들의 노력을 합친 것 이상으로 기독교와 이 세상에 손해를 끼쳤다.
1657년 제1회 학회를 열었던 치멘토 아카데미는 과학연구를 개시해 그 성과들을 세상에 내놨다. 과학의 초석이던 이 학회는 10여 년에 걸친 비종교적이란 포위공격을 받고 중요 인물들은 무일푼이 되거나 절망해서 자살함으로써 무너졌다. 성서를 문자그대로 해석한다는 기독교의 논리는 이러했다.
신학이 지배력을 가졌던 세계 주요 대학(옥스포드, 캠브리지, 하버드, 예일대학)에서 과학방면 학생들은 문과 학생들과 차별된 수업을 받고 다른 교사에 배정되고 다른 조건과 의식으로 칭호를 받아야 한다고 여겨졌다. 이러한 차별을 처음으로 없앤 곳은 신학부가 없는, 또 신학부에 지배받은 적이 없는 미국의 미시건 주립대학이었다.
== 해부학과 의학
18세기 초 프랑스에서 브와에가 종두를 제창되자 소르본느대학 프랑스 신학자는 이걸 정식으로 비난했다. 영국에선 에드워드 매시이가 1722년 ‘위험하고 죄 깊은 종두’라는 설교에서 성경의 욥을 인용하면서 병이란 죄를 벌하기 위해 신이 내리는 것인데 그걸 예방하겠다는 건 악마의 일이라고 주장했다. 이 싸움은 30년간 계속됐고 다행히도 몇몇 종교인들의 이성에 바탕을 둔 저항이 있었다. 하지만 1753년에도 캔터베리 교구장은 설교에서 종두를 비난했고 많은 신자들이 거기에 따랐다. 여기서도 역시 요술, 무신론자라는 비난이 사용됐다. 제너의 종두법도 마찬가지 비난을 받아, 1798년엔 반종두 단체가 결성돼 종두법이란 신의 의지에 도전하는 것이라고 비난했고 1803년 캠브리지대학에선 성서를 인용해 종두 반대론이 설교됐다.
1847년 스코틀랜드의 저명한 의사 제임즈 영 심프슨은 분만에 마취제를 사용할 것을 제안했다. 즉시 공격이 시작됐다. 분만에 마취제를 쓴다는 건 신을 모독하는 것이라고 온갖 설교단들에서 비난당했다. 여성이 받아야할 당연한 저주를 제거하는 것이라면서 성경이 인용됐다. 심프슨은 창세기 2장 21절이 최초의 마취를 사용한 외과수술이 창조주에 의해 아담에게 행해졌다는 걸 증명한다고 반격했다. 하지만 근본주의자들은 아담의 깊은 잠이란 이 세상에 아직 고통이 생겨나기 전, 즉 아직 죄를 모르던 상태에서 일어났던 것이니까 다르다고 끝까지 우겼다.
== 지질학
뉴잉글랜드에서 헤브라이학자로 명성 높던 스튜워트교수는 지질학이 위험하다는 것, 또 우주창조에서 육기설(성서의 6일이란 보통의 6일이 아니라 6시기를 뜻한다는 해석)조차 성서를 정면으로 공격하는 것이라고 반발했다. 창세기에 분명히 써 있는 것은 여섯 시기가 아니라 각각 한 저녁과 한 아침으로 된 6일간이었다는 것이었다.
원래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다는 마음에서 시작된 것일 수 있었지만 실제로는 여러 가지 나쁜 경제적, 사회적 결과를 내고 말았다. 대부분의 나라에서 돈을 빌려주는 것 자체가 현세의 오명과 내세의 처벌을 각오해야 하는 것으로 여겨졌고 이는 자본과 대금업 자체를 축소시켜 실제론 막대한 이자율을 만들고 빈부격차가 커졌다. 지극히 합법적인 목적으로 또 타당한 이자만을 주고받더라도 돈을 빌려주는 사람, 빌리는 사람들 모두가 인격적인 추락을 당하는 것이었고, 근대 경제학자, 역사학자였던 스위스의 시스몬디(Sismondi, 1773-1842)에 의하면 이는 유럽대륙에서 사치욕을 조장하고 절약심을 상실하는데 크게 공헌했다. 부가 있는 자들도 하는 일이 없다면, 그 부를 생산적으로 활용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신학가이며 파리대학총장이던 쟝 제르손(Gerson, 본명 Charlier, 1363-1429)은 신학의 속박을 끊고 타당한 이자로 돈을 빌려줘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것은 가난한 자들이 가난 때문에 도둑질을 하거나 동산, 부동산을 헐값에 팔아야만 하는 것보다는 좋다고 주장했다가 교회로부터 대대적인 탄압을 받았다.
18세기 중엽의 로마교회당국도 이제 더 이상 어쩔 수 없다는 걸 깨닫기 시작했다. 베네딕토14세(Benedictus XIV, 재위1740-58)는 일단 이자에는 반대라면서, 애매한 표현으로 원칙에는 예외가 있다는 걸 암시했다. 하지만 지방의 신학자들의 중심으로 또다시 성경을 예로 들면서 강력한 반발이 계속돼 충돌이 일어났고 결국 로마교회가 사이에 끼어들어 1830년 종교재판소에서 이론으로서는 인정하지만 실제문제로 금융업자들이 합법적인 이자를 받는 걸 방해하진 말라고 교황 승인으로 선포했다. 그래도 리용대학 신학교수 도나뷔 등의 반발이 계속됐고 결국 1872년 이단재판소가 이자율 연리 8할까지를 허락하고, 1873년 교황청 허가를 거쳐, 교황의 결정에 절대 따른다는 조건으로 적당한 이자를 허용한다는 서문이 발표됐다. 경제에 응용된 사회과학의 완전한 승리였다.
19세기 초 스코틀랜드에서 곡물을 바람으로 나누는 송풍기 사용이 교회에 의해 비난받았다. 성경에 위배되기 때문이다. (요한복음 3장 8절 바람은 불고 싶은 대로 분다.; 아모스 4장 13절 바람을 창조하시고… 그분의 이름은 주 만군의 하나님이시다.) 송풍기 사용은 스코틀랜드교회에서 파문의 이유가 됐다.
스웨덴과 미국에서 종교인들이 성경을 근거로(민수기 1장47절?) ‘인구조사’를 반대했다. 생명보험, 철도나 전신의 보급에 대해서도 성경이 근거라면서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었으며 경제문제에 성경의 어떤 일부 문장을 적용하는 게 일반적인 경향이었다. 이처럼 무차별적이고 낡은 이론으로 성경을 인용하던 제도들은 경우에 따라선 의도하던 바와는 반대로 가난한 사람들을 구하기는커녕 빈곤화시키는 제도들만 쏟아냈고, 사회과학에서의 과학적인 생각이 오히려 기독교적 박애심의 성장 전체에 새롭고 고귀한 열매를 맺게 했다.
== 맺음말
지금까지의 사실들은 우리들의 성서가 많은 사람들이 억지로 끼워 맞추려는 목적, 즉 역사교과서나 과학교과서가 해야 할 목적을 위해 이 세상에 나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현재 유력한 종교의 세계관도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이번에도 과학에 의해 크게 수정될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므로 세력의 중심에 선 총명한 종교가의 본분은 종교와 과학의 협조가 가능한 한 평화롭게 또한 신속하게 이루어지게끔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들은 과학의 성과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인류가 이 지상에 생겨난 것이 6000년 전인가, 600만년 전인가로 과학이 증명하든 말든 문제가 아니다. 또한 창조주와 피조물 상호간의 놀랄만한 관계에 대해 새로운 개념을 과학이 표명하든 말든 문제가 아니다. 기독교 정신을 묶어버린 족쇄를 과학이 어떻게 파괴하든 문제가 아니다. 왜곡되지 않은 과정의 과학으로 얻게 된 결과라면 과학만이 아니라 종교도 강화해, 종교에도 공헌할 것이다.
기독교가 세상을 위해 할 수 있는 공헌이란, 높은 곳에서 과학의 발전을 성내는 사람들에서가 아니라, 또 공포에 질린 나머지 신성한 동굴로 도망쳐 있는 그대로의 우주를 바라보는 것도 거부하는 사람들에서도 아니고, 예언자의 정의, 시편 작자의 동경, 산상수훈, 예언서와 율법들의 본 뜻이 달린 가장 중요하고 으뜸 가는 계명과 둘째 계명(마태복음 22장 38절), 자기를 지켜서 세속에 물들지 않게 하는 것(야고보서 1장 27절)을 실천하는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질 것이다.
종교와 과학이 적이 아닌 동맹자로 일어나 싸우는 것은 안 되는 것일까? 모든 거짓에 대한 싸움, 모든 진리를 위한 싸움으로 바꾸어야 하지 않을까? 부정에 반대하는 정의를 위해, 착각에 반대하는 진실을 위해, 종파나 교리의 말라버린 가지를 위해서가 아닌 종교의 살아있는 핵심을 위한 투쟁으로 바꾸면 어떨까? |
--> 갈릴레오는 처음부터 탄압받지 않았습니다. 갈릴레오는 그 당시에는 지동설의 증거를 제시하지 못했죠. 그러므로 갈릴레오의 이론은 지금은 '정설'이지만, 당시로는 '논거를 제시할 수 없는 가설'에 불과했습니다. 이에 대하여 교황청의 천문학 관련 수사들은 '(확실한) 증거의 제시'를 요구했고, 그에 응하지 못한 갈릴레오는 결국 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나중에 결과적으로 갈릴레오가 옳았음이 밝혀짐으로써, 갈릴레오의 오만보다는 '가톨릭의 박해'라는 식으로 여론이 조작되었죠. 하지만 갈릴레오 시대에는 증명이 불가능했으며, 나중에 많은 과학자들이 케플러의 자료를 연구한 뒤에야, 서기 17세기 말에 이르러서야 일부 증명이 가능해집니다. 아무튼 증명은 갈릴레오가 죽은 뒤에 이루어지죠. 마지막으로 갈릴레오가 '그래도 지구는 돈다'라는 말은 한 적도 없습니다. 재판장까지 출두하지도 않았으니까요.
꼭 한권 사보던지 도서관에서 빌려봐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