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해문서

사해문서

가로수 0 7,720 2007.08.08 08:55
예수보다 1백년 앞선 구세주?

고대 문서에 적혀있는 많은 내용이 해독됐다고 해서 모든 비밀이 밝혀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해독을 정확히 하고 과학적인 조사를 완벽히 했기 때문에 수수께끼가 더욱 깊어진 예가 있다. ‘사해사본’(死海寫本)이 대표적인 사례다.

이 고대 사본은 1947년 이스라엘과 요르단 사이의 사해 근처 쿰란의 동굴에서 발견됐다. 이 사본이 유태교의 한 종파인 에세네파의 고문서라는 점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이 종교의 창시자는 ‘이스라엘의 구세주’ ‘정의의 교사’ ‘이사야의 고뇌에 찬 종’ ‘하나님의 아들’ 등의 이름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는 인간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괴로운 죽음을 맞을 운명에 처했다. 그는 고문을 받았으며 흉악한 제사장들에 의해 십자가에 못박힌다. 그러나 그는 다시 부활해 세계를 구원하고 최후의 심판을 기다린다. 그는 인내와 인간성과 형제애, 자선과 빈곤을 가르치며 새로운 계율과 정의와 세례, 그리고 성찬(聖餐)을 만든다.

동굴에서 발견된 비밀사본


9808008-1.jpg이 사람이 누구냐고 퀴즈에 낸다면 거의 모두 ‘예수’라고 답할 것이다. 그러나 ‘사해사본’에 적혀 있는 이 사람의 이름이 무엇인지 기록돼 있지 않다. 오직 ‘구세주’라고만 표기돼 있으며, 천국을 만들기 위해 최후 심판의 날까지 고민하는 사람을 구원해주는 인물이라고 기록돼 있다.

이 사람을 예수라고 단정한다면 간단한 일이지만 문제는 이 구세주가 예수보다 1백50년 전에 살았다고 추정된다는 점이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크리스찬이 믿는 예수는 오직 단 한사람의 인물이 아닌 셈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예수의 가르침은 이미 그 이전에 다른 사람에 의해 설교된 것을 예수가 되풀이한 것이 아닐까.

사해문서가 발견된 것은 우연이었다. 1947년 5월 염소를 돌보던 무하마드라는 소년이 염소 수를 헤아리다가 한마리가 부족한 것을 알고 염소를 찾아 헤맸다. 그러다 바위틈에 뚫려 있는 동굴에서 고대의 항아리를 발견했다.

동굴은 길이 8.5m, 폭 3m, 그리고 천장이 3m나 되는 꽤 큰 공간이었다. 동굴 안에는 높이가 60cm 정도 되는 큰항아리가 여러개 있었는데, 그 안에 44cm의 폭에 8m나 되는 길다란 두루마리가 엉켜있었다. 소년은 이상한 글자들이 깨알처럼 적힌 8개의 두루마리를 꺼내들고 동굴을 나섰다. ‘구약성서’의 원본인 쿰란의 사해문서가 발견된 순간이었다. 사해문서는 히브리어와 아람어로 쓰여 있었다.

1949년 중동전쟁이 끝나자 사해 지방은 요르단의 땅이 됐다. 예루살렘에 있던 프랑스 신부 브오는 사해문서를 처음 발견한 소년과 함께 벼랑으로 갔다. 신부는 두루마리가 발견된 곳 주위로 에세네교파가 살아있던 자취가 남아 있을 것이며, 그런 엄청난 보물이 단 한군데의 동굴에만 있을 리 없다고 생각했다. 조선시대에도 이조실록을 4부로 만들어 분산해 보관했듯이 귀중한 것일수록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여러 곳에 흩어 놓았으리라는 추측이었다.
브오 신부의 지적은 옳았다. 그는 동굴을 열개나 더 찾아냈고, 그 안에서 수백개의 두루마리를 발견했다.

동굴에서 종교 생활을 하던 에세네파는 바리새파나 사두개파와 마찬가지로 유태교의 한 갈래였다. 이 무리는 구세주 또는 정의의 사도라고 불리는 사람이 이끌었다. 바리새파와 사두개파가 율법과 제사와 같은 형식과 권위에 치우친데 비해, 신비주의와 금욕 생활을 내세워 유대 율법서를 지키고자 했다.

이들은 재산과 예배, 독서와 식사를 모두 함께 했다. 초기 기독교의 형태가 불교에서 스님들이 머리를 깎고 수도에만 정진하던 것과 비슷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에세네파의 생활이 그랬다. 대부분이 남자인 신도들은 결혼도 하지 않고 오로지 세상의 종말에 대비해 하나님을 믿고 기도했으며, 윤리와 종교적 순수성을 중시하는 엄격한 삶을 살았다.

이들은 최후 심판의 날이 오면 빛의 아들들이 어둠의 아들들을 물리치고 하나님의 나라를 세운다고 믿었다. 흰색 복장에서부터 종교의식에 따른 식사에 이르기까지, 기도에서 두루마리의 제작에 이르기까지, 이들의 모든 일상사는 다가올 최후의 결전에 맞추어졌다. 영광스러운 새 시대를 준비하는 차원에서 에세네파 교인들은 2백년 동안 금욕, 기도, 하나님의 말씀 전달과 읽기만을 계속한 것이다.

기원전 수백년에 제작


그러나 이들이 기다리던 세상은 끝내 오지 않았다. 서기 68년이 되자 이들은 ‘어둠의 아들들’이 아닌 로마군과 맞서 싸워야 했다. 사해동굴의 문서들은 이때 로마인들의 약탈을 피해 동굴 속에 감춰진 것이다.

‘사해사본’ 중 완전한 것을 정리하니 6권으로 추려졌다. 사해의 두루마기에는 ‘에스더서’를 뺀 구약성서가 모두 들어있었다. 메시아의 서, 하박국의 주석서(註釋書), 계율의 지도서, 라메크의 묵시록, 빛의 아들과 어둠의 아들과의 전쟁 등도 수록돼 있었다. 이 사본들은 제목만 알려졌고 실물은 사라졌던 것이다.

사본들이 쓰여진 연대가 문제가 되자 여러 고대 문헌을 통해 연대를 추정하는 한편 사본의 재료인 양피지에 대한 화학 분석이 이루어졌다. 그 결과 대략 기원전 400-500년 사이에 책이 제작된 것으로 추정됐다. 그러나 사용된 언어는 기원전 100년에 사용된 것이었다.

여기서 대담한 가설을 제시할 수 있다. 유태교의 한 분파인 에세네교는 원시 그리스도교의 전신으로 기원 전후에 상당히 많은 신자들을 확보하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가 구세주 또는 정의의 사도로 알려진 에세네교의 교주와 거의 같은 방법으로 사망하자 예수 그리스도의 행적과 에세네교의 교리가 접목됐다. 그리스도교가 예수라는 인물 한사람이 십자가에 못 박히기 전 몇년 간 활동으로 성립됐다기 보다 오랜 세월 동안 축적된 에세네교의 교리를 예수 그리스도교가 받아들이면서 급속도로 성장한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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