님의 "새로운 기독교"가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 1 ]

<정**>님의 "새로운 기독교"가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 1 ]

사람 0 3,115 2014.08.28 19:50
글쓴이 : 거울 날짜 : 2007-05-20 (일) 03:41 조회 : 1,162 btn_singo2_2hXwPohP.gif btn_print_rOuz755aBXtT6.gif
<정**>님의 "새로운 기독교"가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 1 ] - - (종비련에 올린 글)

<정**>님의 "새로운 기독교"가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 1 ]
<정**>의 "새로운 기독교"는 스스로 "기독교"로 자처하고, 그 근거를 현재의 기독교 경전
에 두고 있다.
따라서, 
1. 그것이 기독교인한, 기존의 기독교의 특성을 어느정도나 이해하고 극복했는가?
2. 그것이 현재의 경전을 근거로 하는 한, 그로부터 그가 말하는 "새로운"것이 가능한가?
하는 것을 검토해 보고자 한다.

이것을 다음의 세 가지 주제로 논의해 보고자 하는 바, 이 글은 다음의 첫째 주제에 관한 것
이다.
1 - A. <정**>님의 종교관 비판
2 - B. 기독교 경전을 근거로 한 신앙의 특성 
3 - C. <정**>의 "새로운 기독교"가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
-----------------------------------------------------------------------------
[ <정**>님의 종교관 비판 ]
종교가 무엇인가에 대한 <정강길>님의 이해는 실로 놀라운 것이었다.
아래는 <정강길>님의 종교관이다.
< 종교는 바로 실천이성이 아닌 사변이성과 관련된, 즉 궁극에 관한 가르침을 신앙으로서> 
받아들이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종교(宗敎)는 기술 같은 실용적 가르침이 아니다. 인간의 
근원적 본성과 한계를 자각하고 이를 초극하려는 자세를 그 어떤 진리나 절대자로 표현되
는 상징들을 통해 내 몸에 습득하는 것이 바로 종교인 것이다. 종교(宗敎)는 바로 세계 
안에서 삶을 최고로 탁월하게 변화시키는 의미 있는 가르침이다. >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1. 종교는 사변이성과 관련된, 즉 궁극에 관한 가르침을 신앙으로서 받아들이는 영역. 
종교(宗敎)는 바로 세계 안에서 삶을 최고로 탁월하게 변화시키는 의미 있는 가르침.
2. 인간의 근원적 본성과 한계를 자각하고 이를 초극하려는 자세를 그 어떤 진리나 절대자
로 표현되는 상징들을 통해 내 몸에 습득하는 것이 바로 종교.
검토할 주제는 다음과 같다.

A. <정**>님의 종교관 비판
1. 종교란 무엇인가?
a. 종교가 사변이성에 기초하고 있는가? 
b. 인간의 삶을 변화시키는 의미 있는 가르침의 특성이 과연무엇인가?

2. 종교적 신앙이란 무엇인가?
a. 기독교의 하나님이 "진리나 절대자로 표현되는 상징"인가?
b. 종교적 신앙이란 무엇인가?
3. 결론 : 정리

* * *
A. <정**>님의 종교관 비판

1. 종교란 무엇인가?

a. 종교가 사변이성에 기초하고 있는가?

"실천이성"과 "사변이성"이라는 '칸트'의 용어를 사용하는 한,
사변이성은 인간의 사고와 관계하는 합리적 이성으로서 사실의 세계와 논리학이나 수학과 
같은 정합적 체계에 있어서의 진 위를 가리는 지(智)적인 영역에 속하는 것이다.
한편, 실천이성은 인간의 도덕적 이성으로서 의미와 가치의 세계에 있어서의 선 악을 가리
는 정의(情意)적인 영역에 속하는 것이다. 인간의 행동이 적어도 의미와 가치를 추구하는 것
인한, 인간의 행동은 이 영역에 기반을 두고 있다.
 사변이성이 사실이나 논리적 영역에 관한 것인 한, 사변이성의 판단으로부터 직접 가치판단
로 나아갈 수가 없다. 이것은 오류에 속하는 것이다. 즉, 결론이 무엇이든 인간의 행위와 직
접 연관되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정**>님의 말처럼 "인간의 삶을 변화시키는 의미 있는 가르침"이 종교라면,
사변이성에 의한 결론으로부터는 종교를 도출할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하다.

b. 인간의 삶을 변화시키는 의미 있는 가르침의 특성이 과연무엇인가?

 인간의 행동이 정의적인 요소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은 감정과 의지가 움직이지 않는 한 지
적인 요소만으로는 행동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일상적 경험에 있어서 누구나 경험
하는 바이다. 아는 것과 행동하는 것은 전혀 별개의 것이다. 아는 것에 대해 그것이 좋다는
감정과 가치있는 것이므로 해야하겠다는 의지가 작용하지 않고서는 행동으로 나아가지 않는
 다.
사변이성에 의한 판단은 사실적인 확인과 정합성의 여부에 따른것으로서 이해와 납득의 대
상이지, 적어도 믿음이라는 의미를 내포한 신앙의 대상이 아니다. 사변이성은 삶에 대한 이
해에는 도움을 줄 지 모르지만 "삶을 변화시키는 의미 있는 가르침"을 줄 수는 없는 것이다.
인간이 삶의 원리로서 받아들이는 종교의 특성은 적어도 그것이 지정의(智精意)를 갖춘 전
인격적 존재인 인간의 궁극적인 요구에 부응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면 안 된다.

2. 종교적 신앙이란 무엇인가?

<정**>님의 종교에 대한 정의는 다음과 같다.
< "인간의 근원적 본성과 한계를 자각하고 이를 초극하려는 자세를 그 어떤 진리나 절대자로>
표현되는 상징들을 통해 내 몸에 습득하는 것>
이 문장의 의미를 분명히 하기 위해 정리하면,
<그 어떤 진리나 절대자로 표현되는 상징들을 통해, 인간의 근원적 본성과 한계를 초극하려>
는 자세를 습득하는 것이 종교이다.>

a. 기독교의 하나님이 "진리나 절대자로 표현되는 상징"인가?

 기독교의 하나님을 단순히 형이상학적 체계의 중심을 이루는 개념으로 이해한다면 그것은
분명 세계의 궁극적 존재를 칭하는 하나의 상징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기독교의 하나님은 형이상학적 체계가 아니라 유대인의 역사 속에서 실제로 작용한
"살아서 역사하시는" 신이다. 이것은 감정과 의지를 가진 인격적인 신이지 결코 형이상학
적 상징이 아니다.
 기독교 경전을 근거로 하는 한, 거기에는 사변이성이 도출한 형이상학적 상징이 아니라
기뻐하거나 분노하고, 승인하거나 거부하며, 상을 주고 벌을 주는 인격적 존재인 신이 있다.

b. 종교적 신앙이란 무엇인가?

 <인간이 자신의 근원적 본성과 한계를 자각하여 이를 초극하려 자세를 습득하는 것이 종교>
라는 <정강길>님의 말은, 정말이지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다.
이 말을 최대한 살려서 종교를 제대로 정의 하자면,
< 자신의 근원적 본성과 한계를 자각하여 이를 초극하고자 하는 자세를 가진 인간에게 그>
욕구를 채워줄 수 있는 가르침이 종교>이다.

 종교는 초극하려는 자세를 습득하는 것이 아니라, 초극하려는 자세를 가진 사람의 욕구를
채워주는 것이다. 한계를 자각하고 초극하려는 자세를 갖지 않은 사람은 종교에 관심이 없
다. 종교를 통해 그러한 자세를 습득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자세가 있어야 종교에 관심을
갖게 된다.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려는 이 욕구는 전인격적 존재인 인간의 궁극적 요구이므로 사변이성
의 결론 만으로는 안 된다.
종교에서 믿음이라는 의미가 포함된 신앙이 중심인 이유는 사실판단으로부터 직접 가치판
단으로 이행할 수 없기 때문에 그 간격을 믿음으로 채우는 것이다. 어떤 것이 좋다거나 옳
다고 할 때는 그에 대한 합리적 근거를 대기에는 언제나 한계가 있다. 그래서 도덕적인 진
술은 요청이나 명령의 형식을 취한다. "네 이웃을 사랑하라!"

 이 세계가 어떤 세계인가에 대한 형이상학적 이해나 해석으로부터는 인간의 전인격적 요구
를 도출해 낼 수 없으므로 세계 이해로부터 삶의 원리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비약이 필요한
데, 이 비약을 위해 믿음이 필요한 것이다.
 이 비약을 위해서는 가르침을 베푸는 존재를 믿을만한 근거가 필요한데, 이것이 "인격적인
만남"이고,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을 기독교에서는 "성령의 역사"라 불러왔다.

3. 결론 : 정리

 유감스럽게도, 형이상학적 상징이 한계를 초극하려는 자세를 갖게 해준다는 따위의 말을하
는 <정**>님은 전혀 종교가 무엇인지 모른다.
 종교적 신앙의 주제는 신앙의 대상, 신앙의 내용, 신앙의 근거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이에 관해 "기존의 기독교"는,
인격적인 하나님,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 인격적인 만남을 말하는 종교이다.

앞으로 검토하겠지만, 우선,
<정**>님의 "새로운 기독교"는,
형이상학적인 상징, 인간의 한계를 초극하려는 자세, 사변이성의 합리적 판단이다.
<정**>님의 "새로운 기독교"가 
"삶을 최고로 탁월하게 변화시키는 의미 있는 가르침"이 될 수 없다는 것은 이번의 논의에
서도 분명히 들어난다. 계속되는 다음의 논의에서 이것을 다시한 번 확인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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