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가 인도주의적 민중종교로 거듭나는 것이 가능한가?

사람 0 390 2014.08.28 19:47
기독교가 인도주의적 민중종교로 거듭나는 것이 가능한가?
글쓴이 : 거울 날짜 : 2007-05-13 (일) 01:52 조회 : 1,336 btn_singo2_CXZipZLlmnU5.gif btn_print_DGR9ZLQ6rH9VaY.gif
기독교를 개혁하거나, 기독교 스스로 변혁되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수많은 교파나 이단을 보면 단순한 변형이야 왜 불가능하겠습니까? 그래서 제목을 바
꾸었습니다. 긍정적인 방향으로의 개혁이 가능한가? 가 문제입니다.)
민중의 종교로서의 기독교가 지배계급의 종교로 전환되면서 예수 당시의 인도주의적 성격
을 잃어버리고 권위주의적 종교로 변신했다는 주장이 있어왔고 이 때문에 기독교 내부에서
나 기독교를 반대하는 안티 중에서도 인도주의적 종교로의 개혁을 강조하는 입장이 있는 것
이 현실이다. 

민중 종교로부터 지배계급의 종교로의 전환이 예수가 누구인가 하는 이해에 있어 "인간"으
로부터 "신"으로의 본질적인 변화를 가져온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예수를 인간으로 보는 
신앙의 특성을 인도주의적 종교의 특성과 동일시할 수 있는가 하는 점에는 여전히 문제가 
있다. 예수는 과연 인도주의적 종교를 말했는가?

기독교가 인도주의적 민중종교로 탈바꿈하거나 거듭날 수 있는가하는 문제를 검토해보고
자 한다
.

A. 예수 당시의 민중종교를 인도주의적 종교라 할 수 있는가?
1. 예수 당시의 민중이 처한 상황
당시 로마의 지배하에 있었던 예루살렘의 민중들은 로마 시민권을 갖지 못한 하층 계급
으로서 황제가 배분해주는 식량이나 오락의 혜택을 전혀 받을 수 없어 주린 배를 채우거
나 마음의 위안을 받을 길이 없는 비참한 상황에 있었다. 이 계층의 위에는 수는 적었으
나 영주, 제사장, 부유한 귀족들로서 로마에 충성하는 이른바 다분히 반민족적 매국노의
성격을 가진 상류층이 있었다.
당시 민중의 열망은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났으니, 로마 제국의 압제와 반민족적인 매국
적 상위계급에 항거하여 해방을 얻으려는 정치적 기도와 종교적 구원을 희구하는 메시아
운동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정치적 기도는 거의 통산 2000여명의 혁명분자들이 십자가 형틀에 처형
되었고, 메시아 운동은 수 많은 거짓 메시아들이 출몰함으로써 결과적으로 민중의 소망
은 실로 완전한 좌절을 경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들의 현실적인 소망이 완전히 무너지게 된 것은, 열심당의 급진파인 시카리(Sicarii:
단도를 가진자)라는 비밀 결사 조직이 일으켰던 대규모 민중 폭동이 실패로 끝나면서 로
마와 유대인 지배 계급의 완전한 승리와 저항 민중 세력의 완벽한 와해라는, 이제는 더
이상 어찌 해 볼 수 없는비참한 상황으로 결말이 났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민중의 절망에 일말의 희망의 불을 당긴 자가 '세례 요한'이었고, 그
불길에 새로운 구원의 소망이라는 생명을 불어넣은 자가 '예수'였다.
2. 예수 가르침의 본질
- 예수의 가르침은 인도주의적인 것이었는가? -
ⓐ 예수의 메시지가 갖는 의미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이 선포의 가장 큰
매력은 민중이 겪고 있는 이 절망적 상황이 이제 곧 끝날 것이라는 선포였다.이 저주스
러운 세상은 이제 곧 있을 하나님의 심판으로 끝장이 날 것이다. 이 세상은 결코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치 않다. 따라서 심판의 날에는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을 것이다.
예수의 메시지는 결코 민중이 이 세상에서 승리한다는 것이 아니다. 이 세상에서의 정
치적 해방이나, 경제 사회적 개혁이 아니라 이 저주스러운 세상 자체가 끝장이 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종말론적인 기대야말로 현실적으로 자포자기한 민중들에게 먹혀들 수
있는 유일한 소망이었다.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이 세상은 그 자체가 멸망하지 않고서
는 해결책이 있을 수 없는 것이었다.
그 심판의 날이 언제 오는가, 아버지 하나님 외에는 아무도 모르지만 예수의 말을 듣는
자들이 살아있을 때이다. "너희가 살아서 이 모든 것을 보리라!" 예수는 종말의 때가 아
주 촉박한 것으로 선포하였다.
예수가 죽은 후 그를 따르던 무리들은 자기의 재산을 팔아 함께 먹으며, 모여서 기도하
면서 심판의 마지막 날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더이상 현실을 위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

ⓑ 예수의 가르침은 인도주의적이었는가?
예수의 메시지는 당시의 더이상 살아갈 희망을 잃은 민중에게 현세가 아니라 이제 막 
도래할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을 주는 것이며 동시에, 증오의 대상인 불의한 압제자들
이 하나님의 진노하심을 받아 어둠 속에 이를 갈게 될 것이라는 복수에의 기대를 채워주
는 것이었다.
예수가 말한 원수를 대적하지 말라, 원수를 사랑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라, 오른 뺨을
때리면 왼 뺨을 돌려 대라...인도주의적 가르침의 효시로 일컬어지는 이들 가르침이 의
미하는 바는 불의한 압제자들을 사랑하라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에 맡기라는 것이
었다. 이것이 이른바 인도주의적 가르침이라는 것의 정체이다


이것이 오늘날 오해되는 바와 같은 인도주의적인 가르침이었다면 증오에 찬 당시의 민
중등에게 전혀 먹혀들어갈 수가 없는 것이었다. 당시의 민중은 예수의 가르침이 오늘날
의 배부른 인도주의자가 말하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님을 잘 알고 있었다.
예수는 적들을 무어라 불렀는가 - "독사의 자식들아!" 이들에 대한 예수의 수 많은 저
주의 말은 오해되고 있는 바 저 인도주의적인 가르침이라는 것들이 결코 이들 불의한 적
들을 사랑하라는 것이 아니었음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더구나 예수에게는 현대의 인도주의자들이 오해하는 바 "인류애"따위는 애초에 없었다.
예수에 있어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은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주워먹는 개같
은 존재이며, 진주를 내어줄 수 없는 돼지같은 존재일 뿐이다. 자신의 메시지를 땅 끝까
지 전하라는 말은 예수가 한 말이 아니라 훗 날 덧붙여진 것일 뿐이다.
예수의 가르침을 인도주의적인 것으로 해석하는 것은 그의 말만 가지고 멋대로 의미를
부여하는 것으로서 당시 예수를 따르던 무리에게는 전혀 그런 뜻이 아니었으며, 그 말을
통해 예수가 전달하고자 한 바는 전혀 인도주의적인 것이 아니었다.

3. 예수에 대한 이해의 변화가 뜻하는 것
ⓐ "인간 예수"가 의미하는 것

예수는 한 인간으로서 신의 택함을 받고 메시야로 들리움을 받아 신의 아들이 된 인간
이다. 하나님이 그를 주요, 그리스도로 만드셨다. 이것은 처음부터 신의 아들인 것이 아
니라 신의 뜻에 따른 특수한 행위를 통해 신의 아들로 인정을 받았다는 것이다.
초기 교인들에 있어서 죽어야 할 인간이 신으로까지 높이 들려올려진다는 환상은 어떤
의미가 있었을까?
예수 추종자들의 기본 성격은 핍박과 고난의 절망적인 사회 경제적 상황에서 필연적으
로 가질 수 밖에 없었던 증오와 소망 - 이 증오는 압제자들이 자기들에게 고통과 압박을
가하도록 허용한 신에 대한 증오를 포함하는 것이었으며, 소망이란 압제자와 불의한 자
의 멸망을 가져올 신의 심판으로서의 종말론적 기대였다.
한 인간이 신까지 격상되어 공동 신과 섭정자가 된 것은, 신이 된 인간과 자신을 동일
시하면서 의식적으로는 감히 증오하지 못할 아버지같은 신에대한 외디푸스(Oedipus)적
인 소망을 충족시키는 것과 함께, 하나님의 인정을 받은 자가 적들이 아니라 민중과 함
께한 목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통해서 현존 지배계급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을 것임
임을 확인하는 심리적 만족을 주는 것이었다.

ⓑ "신 자신인 예수"가 의미하는 것
이제 초기의 그리스도교인의 공동체는 예수의 가르침을 따르는 민중의 무리로 부터 로
마제국의 절대군주 체제를 닮은 교회로 대체되었다. 그리스도교는 민중의 종교로부터 지
배계급의 종교로 탈바꿈함으로써 대중을 복종시키고 이끌어주는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하류 계층으로서는, 당장 도래하리라 믿었던 하나님의 심판은 기약 없는 것이 되어버렸
고, 현실적인 혁명의 기대는 완전히 봉쇄당한 채 어떻게든 현 상황을 버티고 살아가야
하게 되었으므로 기존의 종말론적 기대를 대신할 새로운 신념체계가 필요하였다.
지배계급으로서는 하나님의 택함을 입은 인간이 지배계급이 아니라 목수의 아들이었다
는 것은 용납될 수 없는 것으로서 예수는 애초부터 신 그 자신이 아닐 수 없는 것이었다.

이제는, 인간 예수가 신이 된 것이 아니라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신이 인간의 몸을 입
고 고난과 죽음을 당한 것이다. 이것은 민중의 고통을 허용한 신에 대한 증오를 무력
화시키며, 세상의 온갖 불의를 온전히 인간에게 귀속시킴 으로써 신에 대한 일체의 반발
을 잠재우는 것이다.
다른 한 편, 고난 받고 압제 받는 민중이 십자가의 예수와 자신을 동일시 함으로써 신
자신이 세상의 권위에 복종하여 고난과 죽음을 당한 것처럼, 세상의 고퉁을 당연한 것으
로 기꺼이 감수하고 세상 권위에 능동적으로 복종하게 하는 기능을 다하게 된다.
ⓒ "인간"으로부터 "신"으로의 변화가 의미하는 것
예수의 본성에 관한 이해가 바뀐 것은 지배계급에 의한 것이기는 했지만 신앙의 본질적
인 요소에는 전혀 영향을 주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이에 대한 민중의 저항은 전혀 없
었다.
지금 "본질적인 변화에는 전혀 영향이 없었다."고 말하는 것은 이 변화가 갖는 의미를
축소하고자 하는 것이 전혀 아니다. 이 변화는 실로 본질적인 변화라 할만한 중대한 변
화였다. 단지 그보다 더 근본적인 종말론적 신앙의 차원에서는 지엽적인 것에 불과하다
는 것이다.
예수의 가르침을 따르던 당시의 민중이 예수의 본질적인 변모를 용인할 수 있었던 것
은 지배 계급의 압제에 의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 자신의 부담을 훨씬 줄여주는 것
이었기 때문이다. 예수를 인간으로 본다면 인간은 신의 뜻에 따르기를 예수처럼 해야 한
다는 막중한 부담을 짊어져야 되지만, 예수가 애초부터 신이라고 본다면 그런 짐을 단숨
에 던져버릴 수 있는 것이었다.
예수 가르침의 본질은 억압당하고 착위당하는 비참한 생활 속에서 증오와 무력감에 허
덕이던 민중들에게 이제 곧 하나님의 심판이 이를 것이라는 종말론적 소망을 준 것이었
다. 이 소망이 언제 이루어질 지 알 수 없는 것이 되기는 했지만 가르침의 본질인 종말
론적 기대와 예수의 본성은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이었다. 예수의 인간으로부터 신으로
의 변화는 신앙의 본질적인 차원에서는 지엽적인 문제에 불과한 것이다.
캐톨릭 교회가 예수의 본성을 변화시킴으로써 얻은 성과는 신과 지배자에 대한 증오를
민중 자신이 짊어져야 할 속죄의 과제로 바꾸어놓은 데 있다.
예수가 인간일 때는 이 세상의 불의와 고통이 인간의 죄에도 책임이 있지만, 세상에 불
의를 허락하는 신에게도 일말의 책임이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신 자신이 세상에
서 민중과 같은 고통을 감내하였으므로 인간도 그와 같이 세상의 고난을 감수하며 하나
님 나라가 임하기 까지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한 자녀가 되도록 노력할 책임이 있는 것이
다. 
세상의 악에 빠지지 말아야 하며, 끊임 없이 속죄하고 고통을 당하는 것으로써 죄를 속
량받을 수 있도록 노력하여 신과 그가 보내신 세상의 대리자(지배 계급)로부터 사랑과 
용서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캐톨릭 교회는 신과 지배자에 대한 비난을 민중의 자신에 대한 비난으로 전환시키는 음
모를 통해 두 가지 목적을 달성한 것이다. 
첫째, 비난과 공격의 화살을 민중 자신에게로 방향 전환 시켰고, 둘째, 그들 스스로가 
부과한 죄책감을 사제로 하여금 용서와 은총을 베풀게 함으로써 교회는 고난받는 대중에
게 사랑 많은 아버지의 모습으로 군림하게 된 것이다.
예수의 변모는, 그 가르침의 핵심인 종말론적 메시지 - 이제 곧 심판이 있을 것이니 세
상의 불의에 대적하지 말고 하나님의 심판에 맡기라는 것 - 에 있어서는 아무런 본질적
인 변화를 가져오지 않은 것이었다.
ⓓ 예수는 모든 인간에 내재하는 신성과 같은 것을 말한 일이 있는가?
예수는 아버지 하나님이 내 안에 그리고 내가 너희 안에라는 따위의 말을 한 일이 있
다. 그러나 이것이 곧 모든 인간에게 신성이 깃들어 있다는 것과 같은 의미는 전혀 아니
다. 이것은 서로가 살아있는 존재로서 만나는 내면적인 인격적 관계를 말하고 있는 것이
다.
예수가 적들과 이방인들을 어떻게 대했는가 하는 것을, 정말로 인간에게 신성이 깃들어
있다고 하여 사인여천을 강조하는 천도교가 인간을 어떻게 대하는가 하는 것과 비교해 
볼 일이다.
분명히 할 것은 여기에 모든 인간에게 내재하는 신성과 같은 것은 없다는 것이다. 예수
가 신성을 갖게되는 것은 지배계급의 종교로 전환되어 삼위일체의 교리가 성립한 이후의
일이고, 그리고 이렇게 된 이후에는 예수는 인간과는 질적으로 다른 - 피조물로부터 창
조자의 대열로 옮겨진 것이다.
예수 이후의 이단들 외에는, 예수 당시의 누구도 예수의 말을 모든 인간에게 신성이 깃
들어 있다는 의미로 해석하지 않았다.

B. 역사적으로 실재했던 기독교의 인도주의적 전통이 사라졌다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지금까지의 논의는 인도주의적인 가르침으로 오해되고 있는 말의 실체가 무엇인지, 예수
의 가르침에는 애초부터 인도주의적인 요소가 없었다는 것과, 민중의 종교란 글자 그대로
민중이 믿고있는 종교일 뿐 오늘날의 민중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기대하는 것과 같은 그 어
떤 것도 없었다는 것에 집중되어 있었다.
여기에서는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예수 당시에 실제로 있었던 민중 중심의 인도주의
적 종교가 역사의 흐름 속에서 사라졌다고 하는 주장을 검토해 보고자 한다.
일반적으로 얘기되는 것과 같은 인도주의적인 기독교가 참으로 생명을 가진 진리로서 당
시에 실제로 있었다면 그 전통이 이렇게 완전히 말살되는 일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 나의
믿음이다. 그런 것은 역사적으로 실재하지 않았다.

역사적으로 기독교인들은 극심한 박해에도 불구하고 목숨을 바쳐 그들의 신앙을 지켜왔다.
이러한 신앙에 대한 그들의 정열을 염두에 둔다면, 예수보다 500년 이상 전의 초기 불교 
신앙의 전통이 그 이후의 온갖 사이비 불교들의 도전에도 불구하고 그대로 남아있음에 비
추어볼 때, 지금은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예수 초기의 인도주의적 기독교가 당시의 민중들
속에 살아있었으리라는 주장을 어떻게 인정할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초기 불교의 전통이 살아있는 것은 경전에 담긴 석가의 초기 가르침에 근거한 것으로서
그 어떤 권위주의적이거나 신비적이거나...하는 등의 일체의 것을 평가하는 기준이 석가의
가르침 자체였다. 

"오직 자신에게 의지하고 내 가르침을 등불 삼아 나아가라! 자기 자신 이외의 아무것도 
섬기지 마라!" - 석가의 가르침이 너무나 분명하기에 여기에 다른 것이 끼어들 여지가 없
다. 이와는 다른 것이 신앙 안에 들어오더라도 그것이 석가 자신의 가르침이 아니라는 것
이 언제나 분명했다.

기독교의 경우는 현재의 기독교 경전을 인정하는 한, 거기에 담겨있는 초기 예수의 가르
침이 2000년 가까이 전해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도주의적 전통이란 역사적으로 그 어디
서도 찾아 볼 길이 없다. 

예수의 가르침이 감추어져 있어서 일반 신도가 접근할 수 없는 것도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런 양상을 보인다는 것은 애초부터 없었던 - 예수의 가르침으로부터는 도출될 수 없는 -
것임을 증명하는 것일 뿐이다.
(현재의 기독교 경전이 가짜이고 진짜는 따로있다고 한다면 - 이것은 논의 자체가 불가능하게
될 뿐 그것으로 아무것도 증명해낼 수 없는 일이다.)

C. 기독교의 개혁이나 변혁이 가능한가?
- 예수로부터 인도주의적 종교나 민중종교를 도출해 내는 것이 가능한가? -
앞서의 논의에서 예수의 변모가 당시의 민중 종교가 지배 계급의 종교로 탈바꿈 한 것에
따른 것이기는 하지만 예수 가르침의 본질적인 요소 자체가 변질 된 것은 아니라는 점을 
밝혔다.
예수의 본성에 대한 이해의 변화는 민중과 신을 포함한 세상 권위에 대한 중대한 이해의
변화를 가져온 것은 사실이지만, 현실을 개혁하기 위한 시도를 버리고 내세에 대한 소망을
굳게 지키라는 종말론적 신앙의 본질에는 전혀 영향을 준 바가 없음을 분명히하였다.
다시 한 번 강조하거니와 예수의 변모는, 기독교로부터 인도주의적 종교를 도출하고자 하
는 자들이 오해하는 것처럼, 인도주의적인 종교가 다른 것으로 변모한 것이 전혀 아니다.
위에서 말했듯이 예수 가르침의 본질은 애초에 인도주의적인 것이 전혀 아니었다. 
예수가 말한 원수를 대적하지 말라, 원수를 사랑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라, 오른 뺨을
때리면 왼 뺨을 돌려 대라...인도주의적 가르침의 효시로 일컬어지는 이들 가르침이 의미
하는 바는 불의한 압제자들을 사랑하라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에 맡기라는 것이었다
.
예수의 변모와 함께 주도 세력은 분명히 민중으로부터 지배계급으로 바뀌었고 불의한 세
상을 허락한 신에 대한 책임 추궁이 인간 자신의 책임(속죄)으로 방향이 바뀌었지만 모든
인간을 사랑하라는 인도주의적인 가르침이 다른 것으로 바뀐 것은 전혀 아니었다. 그런 것
은 애초에 예수의 가르침에는 없었다.
또한 기독교로부터 민중의 종교를 도출하고자 하는 자들이 오해하는 것처럼, 민중혁명의
주도 이념으로서의 민중종교 같은 것이 다른 것으로 변모한 것이 전혀 아니었다. 
예수가 죽은 후 그를 따르던 무리들은 자기의 재산을 팔아 함께 먹으며, 모여서 기도하면
서 심판의 마지막 날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더이상 현실을 위한 아무것도 하
지 않았다
.
 
주도 세력은 분명히 민중으로부터 지배계급으로 바뀌었지만, 이 세상에서 압제자에게 저
항하여 민중의 권리를 쟁취하는 것과 같은 요소는 애초부터 예수의 가르침에는 없는 것이
었다. 신 자신이 인간으로 와서 세상 권위에 스스로를 맡겼듯이 저 세상에 대한 소망에 의
지하여 이 세상에서 굳세게 참고 버티라는 것이었다.
예수 가르침의 본질은 이 세상에서 핍박받고 고통을 당하는 선한 자는 구원받고, 불의한
악한 자들은 멸망에 이르게 될 하나님의 심판이 임박했으니 원수를 대적하지 말고 내세의
천국에 대한 환상으로 버티고 살라는 것이다. 기독교 신자들은 이러한 예수의 메시지를
분명히 알고 있다. 그러기에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을 외치는 것이다.
사정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이로부터 이 세상에서 불의에 저항할 민중의 종교를 도출할
수 있다거나 "인류애"에 바탕을 둔 인도주의적 종교를 도출해 낼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
들은 도대체 무엇을 근거로 그런 말을 하는 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애초에 거기
에 들어있지 않은 것을 어떻게 그것으로부터 이끌어 낼 수 있단 말인가?
기독교는 역사적으로 고통과 증오로부터 헤어날 수 없었던 유대인들의 종말론적 신앙 - 
하나님의 심판에 의해 이 악에 물든 저주스러운 세상이 멸망하기를 희구하는, 그 외에는
이 세상을 개선할 길이 없다는..파괴적이고 절망적인 신앙을 그 핵심으로 하는 종교이다.
왜 사람들은 이런 종교에 빠져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을 외치는 것일까? 
우리 사회에 아직도 예수의 종말론적 선포가 유일한 소망이 되는 불쌍한 영혼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안티들에게 계속 "대안"을 요구하는 것은 그들은 그 종말론적 소망이 없
이는 세상을 버티고 살 힘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과 세상에 대해 절망한 인간이 있고 예수의 가르침이 비현실적인 환상의 만
족을 주는 것인 한, 기독교는 개혁도 변혁도 불가능할 뿐 하니라 박멸도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이러한 기독교를 앞에 두고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이것은 또 다른 논
의의 주제가 되어야 할 것이지만 중요한 핵심은 간단히 말 할 수 있다.
현실을 올바로 보고, 인간이 가진 한계를 인정하고, 그래서 우리가 악하다고 하는 자들은
사실은 세상을 두려워하는 약한 자이며, 우리 스스로 인간이 가진 진정한 힘과 가능성을
발견해 가는 만큼 더이상 신은 필요 없고, 우리끼리 서로 마음을 열고 보다 나은 세상을 만
들기 위해 힘을 합칠 수 있다는 확신을 전파하는 것 - 이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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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글은 '프롬'의 [사회심리학적 그리스도론]에서 인용부호 없이 그대로 인용한 부분이 
일부 있음을 밝혀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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