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의 <없는 마음, 항상된 마음>

사람 1 475 2014.07.01 00:11
불교의 <없는 마음, 항상된 마음>
 
 불교에서는 "마음이 없다."라고 하면서 동시에 "항상된 마음"을 말한다.
이런 모순된 말로 어떤 뜻을 전하고자 하는 것인지 한 번 쯤 생각해볼 일이다.

1. 있는 것과 없는 것
 
  (   ) 이 있다.고 할 때.
   (   )안에는 지시하는 구체적 대상이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것을 가리키는 명사를 넣어야 한다.
 
    "사과"를 넣을 경우에는 참이 아니다. "사과"는 개별적인 사과들을 통칭하는 것으로서,
   이런 성격의 "사과라는 것"은 현실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하는 것은 개별적인 사과들이다. 따라서 ("이" 사과)가 있다. 고 해야 한다.
   (사과)가 있다고 하면, 우리가 사과라고 부르는 것들이 있다는 것이다.
   사과를 앞에 놓고 (사과)가 있다고 하는 것은 "이"가 생략된 것이다.
        ("이", "그", "저" 등, 구체적인 하나의 대상을 가리키는 지시대명사가 있어야 한다.)

 - 있는 것
   (   ) 이 있다.고 할 때.
   (   ) 안에 대입된 대상은 시간이 흐르더라도 계속해서 같은 대상이라는 동일성을 전제로 한다.
 
   ("이" 사과)가 있다.고 하는 경우.
  "이"로 지칭된 사과는 시간이 흐르더라도 동일한 것으로 보는 것이다.
 
   그러나 미시적관점에서 엄밀하게 말하자면, 대상인 사과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계속 변하고 있는
  것이다. 변하는 것을 사과1, 사과2...등이라 하면, 사과1이 있다고 말하는 동안에 그것은 벌써
  사과2가 되어있다. "있다"라고 말하는 순간에는 이미 있다고 말하는 대상이 없어진 후이다.
  사과1과 사과2는 같은 것이 아니다.
   그런 것을 동일한 대상으로 보는 것은 감각내용의 유사성 때문이지 대상의 동일성 때문이 아니다.
 
   따라서 ("이" 사과)가 있다는 말은, 미시적인 관점에서는 변하고 있는 것을 거시적인 관점에서
  변화가 없는 것으로 간주하여, 그렇다고 인정한 것이다.
 
 - 없는 것
   사정이 이러하면 ("이" 사과)가 있다.고 하는 데, 문제가 생긴다.
   그렇게 말하는 바로 그 순간에 "이"로 가리킨 대상이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보자면, (   )에 무엇을 넣더라도 참일 수가 없다.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구체적 대상
  이라는 것이 변하지 않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이 사과)가 있다."가 참이려면 시간의 흐름에도 불구하고 변함 없이 동일한 사과여야 한다.
   이렇게 고정되어 변하지 않는 (사과라는 것)을 "고정된 실체" 라고 한다.
 
    현실적인 존재들은 변하지 않는 것이 없으므로, "고정된 실체"로서의 (  )는 현실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플라톤은 이런 것을 사과의 Idea라 불렀다. 이 사과라는 이데아에서 개별적인 사과가 나왔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보자면 개별적인 사과로부터 "사과라는 것"의 개념을 만들어낸 것이다.
     이런 "개념으로서의 사과"는 불변하는 것이지만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사과가 아니다.)
 
    현실적인 존재들은 모두가 변하고 있는 것들로서 그 어느것도 "고정된 실체"가 아니다.
    그런 것을 대상으로 "이것"이 있다고 말하면, 그 즉시 이미 다른 것이 되어있으므로
   엄밀한 의미에서 보자면 그 어떤 것을 대상으로 하더라도 그것을 가리켜 "있다"고 말 할 수가 없다.
   실제로는 계속 생겨나고 생겨난 그 순간에 사라지는 것이다. "이것"이라 할 대상으로서의 실체가
   없는 것이다.

2. 없는 마음. 있는마음,
 
  ("이" 마음)이 있다. 고 하는 것은
  "이"로 지칭하는 특정 상태의 마음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이" 사과)와 같은 성격인 경우와
 "마음이라는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사과)와 같은 성격인 경우가 있다.
 
  어느 경우든 앞서 논의한 것처럼 편의상 있다고 하는 것이지, 엄밀한 관점에서는 "있다."고 할 수
 없는 것이다. 있다고 할 변함없는 "고정된 실체로서의 (마음)"이란 없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마음)이 가리키는 대상이 없는 것도 아니요, "변하는 것으로서의 (마음)이
 없는 것도 아니다. 가리키는 대상의 실체는 없지만, 그런 대상을 가리키는 이름은 있다.
 
  실체가 없는 마음이 또한 없다고 할 수 없으니, 있다고 하자면 ("이름 뿐인" 마음)이 있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이 마음은 마음이 아니요 이름 뿐인 마음"이라고 한다.
  "산은 산이 아니요 그 이름이 산이고, 물은 물이 아니요 그 이름이 물"이라는 것이다.
 
3. 항상된 마음
 
 앞선 논의에서는 불교의 "마음이 없다."는 말을 중심으로 삼았었다.
 이번에는 불교에서 말하는, "항상된 마음"을 중심으로 삼아본다.
 
 앞에서는 마음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가는 전혀 문제삼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마음이라 하면 감정적 측면을 떠올리지만, 불교에서 마음이라 하면 주로 인식작용인 지혜를
뜻한다. 그래서 마음을 주로 "아는 성품"이라고 한다.
 그러나 마음에는 무언가를 하고자 하는 의지의 작용도 있다.
 그렇다면 마음은 당연히 지(智), 정(情), 의(意)의 정신적 요소를 통합한 것이라 해야 할 것이다.
 정(情), 의(意)를 합친 것을 덕성(德性)이라 한다면 마음은 지혜와 덕이 통합된 것이다.
 
* 불교는 항상된 마음을 오직 "아는 성품"에 한정시키고 있다.
   불교에서는 "아는 성품"이 항상된 것임을 주로 "듣는 성품"으로 설명을 하고. 다른 여러 아는 성품 중
  가장 원만한 것으로 여긴다.
   "성품"이라 했는데, 그런 성품을 가진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므로 "작용"이라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이다. 듣는 작용, 또는 활동이 있는 것이다.
 
   불교의 "성품"으로 논의를 진행한다.
   듣는 성품은 소리가 나자마자 곧 그것을 아는데, 소리가 사라졌다고 해서 듣는 성품이 같이 사라진 것이
  아니므로 다시 소리가 나면 그 즉시 아는 것이다.
   이 듣는 성품 자체는 소리가 나거나 안 나거나 변함 없이 항상된 것이다.
 
   그러나 이역시 들을 때와 아닐 때, 듣더라도 들리는 소리가 다를 때의 작용하는 양상이 같지 않으므로
  변한 것이 아니냐는 반론이 있을 수 있지만, 이 경우에는 앞에 논의한 사과의 경우와는 다르다.
   앞의 ("이" 사과)의 경우에는 변하기 전과 변한 후가 서로 다른 것이어서 그것들의 동일성을 인정할
  수 없었다. 동일성이란 우리의 감각내용이 동일한 것 뿐이었다.

  그러나 듣는 성품은 그 양상이 서로 다른 경우에도 동일한 바로 그 듣는 성품이다.
  서로 다른 양상의 작용을 하므로 "고정된 실체"는 아닌 것이지만, 양상이나 상태가 다르다해서 듣는
 성품 자체가 동일성을 상실하여 다른 것이 되었다고는 할 수 없는 것이므로, 항상된 것으로 보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이" 마음)은 없는 것이지만, ("아는" 마음)은 항상된 마음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항상된 마음"이 있고, "항상된 아는 마음"이 대상을 향해 작용하지 않고 고요하게 있으면
 그런 상태가 "열반(니르바나)"의 상태인 것이다. 열반의 상태는 일체의 생기고 멸하는 변화가 없어진
 자리이다. 
  (마음이 대상을 향해서 작용하지 않으니, 마음 밖에 다른 대상이 없다. 내 마음이 이런 상태가 된다면,
   나와 남도, 다른 일체도 없는, 오직 하나인 이 마음만 뚜렷할 뿐이니, 천상천하에 유아독존인 것이다.
   이에 관해서는 마음 밖에 있는 대상이라고 하는 것이, 일체 유심조라는 것을 밝히는 과정을 거치는
   논의가 필요한데,이는 현재의 주제 범위를 벗어난다. 지금으로서는 이런 식으로 해서 최종 결론이
   거기에 까지 이른다고 보아주면 된다.)
 
* 이것은 불교에 대한 나의 해석이다.
  석가부처 자신이 아니고서야 그 누가 불교 그 자체를 알겠는가?
  이렇게 각자 해석하는 나름의 불교가 있는 것일 테지.
 
  불교에서는 감성과 의지에 대해서는 아무말도 없다. 오히려 마음으로 치지도 않는다.
  그러나 감성과 의성은 마음의 중요한 기능들이다.
  감성의 작용과 의지의 작용에 대해서도, "아는 성품"에서 처럼 그 작용의 동일성을 논증할 수 있다.
  (여기에서는, 개인적인 사정으로 생략한다.)
 
 통합된 마음이
 지성적으로 활동할 때는, 앎의 내용이 변해도 그 자체는 변하지 않는 "아는 작용"이고
 감성적으로 활동할 때는, 감정의 내용이 변해도 그 자체는 변하지 않는 "느끼는 작용"이요
 의지적으로 활동할 때는, 하고자 하는 바 내용이 변해도 그 자체는 변하지 않는 "의지작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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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사람 2014.08.25 22:22
위의 논의는 <불교가 그런 말로 뜻하고자 한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나의 해석이다.
그러한 바 불교의 주장이나 입장에 대한 동의 여부는 별개의 문제이다.
 이것을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우선, 항상된 마음을 "아는 성품에 국한한 것"에 동의하지 않으며, 불교수행의 목적을
열반에 두는 소승의 입장에도 공감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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